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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김진호 vs 이재원, 바울을 둘러싼 썰전] 바울과 제국, 현대신학의 화두 (김진호, 이재원)

특집

by 제3시대 2016. 1. 6.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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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김진호 vs 이재원, 바울을 둘러싼 썰전]




바울과 제국, 현대신학의 화두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그리고 이재원(미국 시카고 맥코믹 신학대학교 교수 역임 / 현, 한신대학교 초빙교수)



제 1주제_ 전사(前史)와 전향(轉向)


김진호_


    바울이 역사적으로 처음 포착된 시기는 서기 36년 직후로 보이고, 장소는 다마스쿠스다. 그 해는 예루살렘의 리버디논 회당(리베르티논 회당. 예루살렘에 거류하는 헬라계 이주자들의 회당)에서 스데반이 처형되는 등 일단의 헬라계 예수 추종자들이 심각한 탄압을 받고 흩어진 때다. 이들이 흩어져 이방지역에서 새로운 거점으로 삼아 활동을 개시한 곳이 다마스쿠스와 안디옥인데, 나바태아국(Nabatea) 영토였던 다마스쿠스는 동방으로 향하는 선교의 거점이었다면, 로마의 영토였던 북시리아의 안디옥은 지중해로 이어지는 선교의 교두보였다. 

    바울은 그 무렵 다마스쿠스에서 반그리스도파 운동을 주도하다 그리스도파의 일원으로 전향하였다. 당시는 안티파스와 나바태아국의 아레타스 3세 간의 전쟁(34~36년)으로 나바태아국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감이 극에 달했을 때였다. 이때 바울이 다마스쿠스 성을 몰래 빠져나온 것은 이런 시대 분위기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이후 바울은 아마도 나바태아국 여기저기서 그리스도 선교활동을 폈던 듯한데, “14년”(〈갈라디아서〉 2,1)이라고 말한 그의 동방 선교 활동은 실패했고, 그 역사적 흔적도 사라졌다. 

    여기서 논점은 ‘전향’이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용어는 ‘회심’과 ‘개종’인데, 회심은 개인의 내면적 변화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바울의 인생행로의 극적인 전환이 갖는 사회적 의미를 간과하게 하고, 그의 선교활동의 방점이 개인적 차원의 것처럼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개종이라는 표현은 바울이 새로운 종교를 창안했거나 이미 존재한 종교에 새로 가담한 것처럼 보게 한다. 하지만 바울은 생애 내내 이스라엘 신앙 체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나는 앞서 말했듯이 전향이라는 표현을 쓴다. ‘지향의 바뀜’이라는 의미와 사회적 운동의 뉘앙스를 갖는 이 표현은 바울이 가치관과 실천의 지향점이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그는 그가 적대하던 그리스도파 운동가로 전향하여 활동한다.


이재원_


    전통적인 서구신학에 영향을 받아왔던 한국의 제도권 신학과 교회에게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사건 이후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박해하던 활동에서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선 바울의 삶의 전환점을 ‘회심’이나 ‘개종’이라는 말로 지칭해왔다. 그리고 그 의미를 바울의 ‘내면성’ 또는 ‘내적 성찰’의 극적인 변화로 해석해왔고 동시에 바울이 유대교로부터 기독교로 전환했다는 소위 ‘개종’의 의미로 해석해왔다. 따라서 ‘전향’이라는 개념 자체가 상당히 낯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종교개혁 당시 루터의 신학적 영향 속에서 지탱되어 왔던 ‘회심’이나 ‘개종’의 개념에 대하여 지금까지의 역사적, 신학적 전제들에 내재한 문제점들이 비판적으로 지적되었다. 우선, 바울당시 유대교와 분리된 소위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는 하나의 역사적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았기에, 이전 종교에서 새로운 종교로 옮겨간다는 의미에서 바울의 개종을 말하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인 전제이며 의미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라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사회적 공동체와 관련된) 바울의 삶과 실천의 지향점에 있어서 결정적인 전환이라는 의미에서 ‘전향’이라는 개념이 훨씬 더 적절하다고 하는 김진호 목사의 주장은 나와 같은 입장이다.  

    그러면 바울의 전향은 무엇을 뜻했는가? 이것은 〈갈라디아서〉 1장에서 바울이 자신의 과거 행적에 관해 알려주는 대목에서 말하는 그리스도파 집단에 대한 박해활동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바울의 박해활동은 1세기 로마제국의 여러 도시지역에 흩어져 거주하던 (다마스쿠스를 포함하여) 유대인 디아스포라 (회당) 공동체의 사회적, 정치적 삶의 현장을 고려할 때 훨씬 더 적절하게 설명될 수 있다. 바울의 박해활동은 전통적 서구 해석이 주장한 것처럼 바울의 바리사이파적인 철저한 율법주의나 유대주의라는 단순한 관념적 도식에 입각해서 설명할 수 없다. 오히려, 로마제국의 지배질서를 교란하고 위협하고 저항하는 정치적 사회적 운동을 진압하고 차단하기 위해 정치반란범에게 가해진 십자가형에 처형된 식민지 유대 땅의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따르는 운동이 다마스쿠스를 비롯한 로마제국 도시 내의 유대인 디아스포라 공동체 주변까지 전해졌고, 또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 운동이 도시 내의 비유대인 (여성과 노예들을 포함한) 민중들의 가슴까지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로마제국이 제국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자신들의 안전과 존속을 보장받고 있었던 유대인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그러한 운동의 집단을 잠재적 혹은 실질적인 위협으로 여겼을 것이다. 이것은 로마제국의 지배 하에서 소수 종족적 공동체의 자기 정체성과 불안한 정치적 위상이라는 상황에서 살고 있었던 유대인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일종의 자기검열의 행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자기검열의 행위는 반드시 항시적이거나 일관된 태도였다기보다는 한편으로 자신들의 모국의 (로마제국과 관련된) 정치적 상황, 다른 한편으로는 제국의 도시 내에서 그들의 특정 지역적, 사회적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던 것이다.

    따라서 나는 바울이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바리사이파적인 종교적 실천이 반로마제국적 그리스도 운동을 배격하려는 활동을 하는 가운데 오히려 정치적으로 로마제국의 울타리 내에서 제국의 질서유지를 도와주는 실천에 해당하는 것이었음을 깨달았을 것이라고 본다. 이 실천의 전환, 곧 십자가에 처형당한 유대인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반로마제국적 실천의 지향점으로 삼게 된 것을 바울의 전향의 주된 의미라고 해석한다. 


제 2주제_ 전향 후 바울 활동의 사상적 매트릭스-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사회


김진호_


    다마스쿠스에서 시작된 초기 선교의 실패 이후 그가 다시 등장한 것은 안디옥이었고, 이후 그의 활동은 지중해 지역에서 전개된다. 우리가 바울의 서신들과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는 그의 활동 이력은 바로 이 시기에 관한 것이다. 

    바울은 주로 지중해 연안의 소아시아와 마케도니아, 아카이아 지역의 대도시들에서 활동했고, 대개는 그 도시들의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형성된 곳에서 활동했다. 당시 로마제국도 이들을 유대인이라고 불렀고 오늘날의 거의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들을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고 명명하지만, 그것은 적절하지 않다. 당시 팔레스티나는 유대주의와 사마리아주의가 강하게 대립하고 있었고, 그 배후가 되는 역사는 거의 1천년에 달한다. 그러므로 수백 년에 걸친 이주의 역사를 지닌 지중해지역으로의 팔레스티나계 이민자들을 유대인으로 소급해서 명명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오류다. 

    바울 당대에 이들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공동체들은 하나의 잘 조직된 교리적 공동체가 아니었다. 이들의 결속은 지중해 역사권의 형성 과정과 자치결사체로서의 콜레기아(collegia)의 형성 과정을 유념하면서 이해해야 한다. 간략히 말하면 기원전 4세기 이후 지중해가 하나의 역사권이 되면서 이 지역에는 광역 이주민들이 광범위하게 발생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이주자들이 특히 많은 도시들에서 이해집단으로서의 종족적 콜레기아들이 속속 만들어졌고,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는 가장 대표적인 종족적 콜레기아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들을 결속하게 하는 교리적 통일성은 아직 구축되지 않았고, 무수한 종파들이 공존하였으며 때로 치열하게 경합하였다. 바울이 전향하기 전의 자신을 규정했던 바리사이파와 전향 이후 새롭게 그를 규정하는 그리스도파는 바로 이런, 범이스라엘 종교권 내의 소종파 운동들이었다. 

    이때 바울이 말하는 바리사이운동은 강한 유대주의 성향의 종파였다. 공개적 공간구조를 띤 사마리아 성전이 야훼 앞에 모인 이들을 차별 없이 수용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폐쇄적 구조를 지닌 예루살렘 성전의 구조가 시사하듯, 유대주의는 인종적, 성적 배타성을 함축하고 있다. 바리사이는 이러한 유대주의를 좀더 강도 높게 주장하는 이들이었다.  


이재원_


   바울의 실천을 둘러싼 역사적, 사회적 현장을 유대인 디아스포라 공동체들 또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는 역사적으로 분리된, 혹은 신학적으로 대립된 소위 이방인 그리스도교인(Gentile Christians) 혹은 이방인 교회(Gentile Churches)로 간주했던 바울 해석의 지배적인 틀은 최근의 바울연구가들에 의해 심각한 도전을 받았다. 유대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운동에 가담하여 로마제국의 여러 도시와 촌락에서 활동했던 바울의 우선적이고 직접적인 현장은 디아스포라 유대 공동체들이었고, 여기에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비슷한 사회적, 정치적 처지에서 이들의 주변에서 살고 있었던 다른 종족 출신 이주민들 및 식민지하에서 자기정체성이 해체되었던 토착민중들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전향 이후 십여 년 동안(〈갈라디아서〉에 언급된 14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자신의 구체적인 활동에 대해 바울 자신은 직접 알려주고 있지 않지만) 제국의 여러 도시와 지역들을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피지배계층 사람들의 고달픈 삶의 다양한 현실들을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경험했을 것이다. 

    유대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헬레니즘시대에는 특히 지중해 서쪽 지역에서는 주로 폴리튜마(politeuma)라는 이름으로 지칭되고 다소 통합적인 자치체제를 갖추었는가 하면, 1세기 로마제국의 시대에는 주로 회당(synagogue)이라는 이름으로, 김진호 목사가 말하듯이 당시 로마사회에서 형성되고 있었던 다양한 이해단체인 콜리기아(collegia) 등과 유사한 자치결사체(association)의 기능과 역할을 하고 있었다. 회당 중심의 유대인 디아스포라 공동체들은 로마의 도시들에서 통일된, 혹은 통합적인 체계방식을 갖추었다기보다는 특정 지역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띠었을 것이다. 이들 공동체들은 한편으로는 팔레스티나의 예루살렘 성전체제의 통합적, 중심적 구조와는 지리적으로나 종교제의적으로 거리를 취할 수밖에 없었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로마제국의 여러 종교적 제의적 실천과의 긴장관계 속에서도 여전히 이스라엘이라는 역사적, 종교적 정체성을 지향하고 있었다. 로마의 속국인 팔레스티나의 유대 지배층을 비롯한 여러 집단들이 로마제국의 지배에 대한 공조, 타협, 저항 등의 상이한 입장을 취했듯이, 디아스포라 유대 사회에서도 그들의 지리적, 사회적 입지와 지역적인 문화적, 정치적 상황에 따라 로마제국의 지배에 대한 태도도 다양하게 표출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식민지지배와 관련된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맥락을 충분히 고려해본다면,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멀리는 팔레스티나에서의 예수운동과의 관계 속에서, 가깝게는 유대인 디아스포라 공동체들과의 관계 속에서 때로는 연대, 때로는 갈등과 긴장관계 속에서, 소아시아, 에게, 마케도니아 등 여러 도시에서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건설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당시 디아스포라 유대사회의 구성요건의 충족(즉, 남자의 경우 할례행위) 없이 비유대인을 유대적 메시아 공동체 안에 받아들인 바울의 선교활동은 김진호 목사가 주장하는 유대주의의 배타성으로 설명하기보다는 로마제국의 지구적 차원의 지배질서에 맞서는 예수운동의 지구적 공동체화(global localization)라고 나는 본다. 


제 3주제_ 전향 후 바울 활동의 사회적 매트릭스 - 로마제국


김진호_


    로마제국은 지중해 역사권을 제패한 처음이자 마지막 제국이다. 물론 이 방대한 제국은 유럽 내륙으로 팽창하였다는 점에서 지중해 역사로 한정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유럽 내륙의 역사는 로마제국의 특징을 규정짓는 데 덜 중요한 변수였다는 점에서, 지중해 제국이라고 가정해도 큰 무리가 없다. 

    나의 첫 번째 테제는 지중해 역사권의 모든 사회는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다는 것이다. 여러 다른 주장들이 있을 수 있지만 이 테제는 이재원 교수와 논점이 되지 않을 것이기에 더 이야기하지 않겠다.  

    둘째 테제는 로마제국이 지중해 사회들을 통치하였지만, ‘그 지배는 촘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로마제국의 통치가 관철되는 것은 주로 무력에 의한 것이었지, 이데올로기적 통합이나 사회적 통합은 거의 이야기할 수 없다는 얘기다. 가령, 수많은 그리스도계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황제숭배이데올로기는 결코 제국 전체를 통합하는 실효성 있는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다. 

    셋째 테제는 로마제국의 제1인자는 로마황제이지만, ‘지배체제로서의 로마제국은 탈중심적 체제였다.’는 것이다. 로마황제의 명령은 제국 구석구석에 효력을 미치지는 못했다. 물론 지방의 갈등이 중앙의 갈등으로 점철되거나 중앙의 법정으로 소환될 경우에는 황제의 결정이 중요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황제의 명령은 지방에까지 닿지 못했다. 가령 많은 비판적 그리스도교 연구자들이 바울의 반로마 활동을 반황제운동으로 초점을 맞추려는 것은 로마체제를 황제체제로 오인한 결과다. 

    이상의 세 테제들에 기초해서 나는 바울의 로마체제에 대한 태도를 재해석한다. 바울의 반로마활동은 반황제론으로 환원시킬 수 없다. 사실 대개 바울의 활동은 로마황제를 염두에 두고 수행되지 못했다. 그는 황제를 알지도 못했고 알 만한 위치의 사람도 아니었다. 또 그의 선교지의 대중에게 황제가 어떤 이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황제에 대한 입장이 시사된 문서는 〈로마서〉인데, 이것은 로마시에서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내의 갈등이 당시 황제인 네로의 정치와 뒤얽혀버린 상황에서 바울이 이 갈등에 끼어들려 한 문서이다. 


이재원_

    기원전 2세기부터 지중해 지역의 정치경제적 패권경쟁에서 서서히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해가던 로마는 마침내 기원전 63년에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를 정복하게 되고, 뒤이은 악티움 내전(31 BCE)에서 안토니우스에게 승리한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는 명실공이 지중해 지역의 거대한 제국의 황제로 등극한다. 기나긴 피비린내 나는 전투와 군사적 무력으로 평정된 세상에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선포하며, 로마의 승리와 평화는 로마의 신들이 로마에게 부여한 은혜(Benefaction)이자 이러한 은혜는 동시에 정복당한 속국들을 위한 것이라는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선전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무자비한 전쟁과 군사력에 기반을 둔 로마의 제국주의는 다양한 형태의 문화적,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동반하여 제국의 정치적 지배와 경제적 착취를 정당화하고 강화시켰다. 제국의 지배질서에 저항하는 무리에게는 가차 없이 십자가형을 가했는가 하면, 그 질서에 타협하고 순종하는 대중에게는 평화와 안전(peace and security)이라는 기치 아래 때때로 빵과 서커스(bread and circus)라는 당근도 하사했다. 로마의 황제는 제국주의의 정점에서 위치하는 군사적 최고사령관이자 로마신들을 모시는 대제사장이고 로마의 정의와 법의 수호자이자 집행자이며, 최고의 가부장이자 로마제국의 최고의 후견인(patron)이고 두말할 여지없이 최고의 부자였다. 이는 단순히 로마황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더욱이 로마 제국은 속국의 지배권력과 도시의 귀족층 및 관리들로 이어지는 정치적, 경제적 후견인-수혜자(patron-client) 메커니즘의 연쇄망을 통해서 통합적인 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고, 이러한 메커니즘은 하부구조인 사회 전반에 걸쳐 작동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 로마의 황제는 죽어서 혹은 살아서도 신적인 존재, 구원자로, 신의 아들로 승격되었으며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당시 통용되던 동전화폐(coins)나 도시의 광장에 세워진 황제의 상, 신전, 종교적 제의행위 등의 다양한 공적인 공간을 매개로 제국의 군중들의 삶 구석구석에 침투해 있었고, 소위 황제제의(imperial cults)는 로마제국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질서에 순응하고 동화하고자 하는 속국이나 도시의 엘리트층에 의해 행해진 자발적인 제국 친화적 제의행위였다. 

    최근의 이른바 제국비판적 바울연구에서 역설하듯이, 예수와 바울 당시의 로마제국에 관해 말할 때 나는 고전적인 로마역사가들이 로마의 황제 개개인의 치적에 관심했던 그런 의미에서 황제 중심 제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 군사적,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이데올로기 요소를 총체적으로 관통하면서 극소수의 지배층과 대다수의 피지배층으로 나누어진 철저한 정치적 지배와 배제, 그리고 이들 사이에 존재한 엄청난 경제적 양극화를 지탱하고 정당화시키는 포괄적인 지배와 착취와 배제체제로서의 로마제국주의를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제국적 상황은 예수운동과 바울운동의 연구에 있어서 핵심적인 콘텍스트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기에 김진호 목사가 말하는 ‘지배체제로서의 로마제국은 탈중심적 체제였다.’라는 명제를 받아들이기 어렵고, 또한 바울의 메시지와 실천에서 반제국(주의)적 저항의 성격을 보는 입장은 김진호 목사가 우려하듯 바울의 활동과 공동체운동을 단순히 ‘반황제운동’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고 싶다. 


제 4주제_ 바울의 의인론. 그 사회정치적 함의


김진호_


     바울은 지중해의 몇몇 대도시들의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내에서 적대자들과 논쟁하는 과정에서 의인론을 제기했다. 곧 그의 의인론은 김창락의 가설처럼 논쟁의 이론적, 신학적 무기였다. 

     문제는 그 논쟁의 사회정치적 맥락을 해석하는 데 있다. 의인론이 지지하는 대상은 남자, ‘유대인’, 자유인에 대척점에 있는 존재인 여자, 이방인, 노예다. 과연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1세기경 지중해권의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공동체에는 무수한 타자들이 유입되었다. 이러한 유입은 크게 두 부류, 곧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테오세비우스)과 개종자로 나뉜다. 전자가 후원자이거나 후견인들로, 이스라엘계 이민자들의 신앙에 존경심을 표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이라면, 후자는 대체로 이스라엘계 이민자 공동체의 도움을 바라고 개종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들 후자들 가운데는 적지 않은 ‘방출노예’들이 포함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팍스로마나’ 이후 정복전쟁이 사라지자 주요공급원이 사라진 노예의 가격 상승 현상이 급격하게 나타났고, 이에 노예노동에 기초했던 경제가 빠르게 붕괴하였다. 하여 노예노동에 기초했던 지주들이 노예를 방출하기 시작했고 적지 않은 방출노예들이 살 길을 찾아 대도시로 유입해들어 왔다.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존의 공동체 내부로 들어가고자 애를 썼고, 유력한 자치결사체(콜레기아)인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에도 방출노예들의 유입이 적지 않았다. 

     대도시들에서는 방출노예들에 대한 적대감이 고조되었다. 하급노동시장이 교란된 데다, 불결하고 불경한 자들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은 방출된 노예들에게는 더 불리한 생존여건이 확산되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공동체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계 공동체 내부인들은 저들 ‘더러운’ 개종자에 대한 적대감이 고조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강성 순혈주의를 주장했던 바리사이파의 발언권이 빠르게 강화되었다. 

     한편 바울의 공동체 내에는 이들 방출노예들을 포함해서 하층민들과 여성들이 적지 않았고, 또 그들의 적극적인 활동이 두드러졌다. 바울은 이런 ‘권리 없는 자들’이 차별당하지 않는 평등의 공동체를 주장했다. 한데 순혈주의적이고 노예에 대해 적대적이며 강성 마초주의적 성향을 지닌 바리사이 운동이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공동체 내에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자 바울은 바리사이파에 맞서 싸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때 바울이 발명한 신학적 담론이 의인론이었다. 물론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에드워드 샌더스가 이야기했던 이스라엘인들의 신앙적 기조를 바울이 자기 식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아무튼 바울은 의인론을 통해 유대인, 남성, 자유인 중심의 이스라엘 신앙에 대항하여 여성, 노예, 이방인에게도 차별이 없는 하느님의 공동체를 옹호하였다. 

     마지막으로 바울의 이러한 의인론은 그의 종말론적 비전과 결합되어 있다. 즉 그의 비전은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의 평등주의를 주장한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지구적 평등사회를 향한 것이었다. 〈갈라디아서〉 4,21 이하의 종말론적 텍스트가 의인론에 관한 직전의 논지(바리사이파와의 논쟁에 한정된 논변)를 우주적 변혁의 사건으로 확장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요컨대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회당 안에서 논쟁을 벌일 때는 그 담론의 장에 맞춘 언어로 의인론을 선택한 것처럼, 권리 없는 자들을 옹호하려는 그의 실천은 로마제국 내의 여러 담론의 장에 따른 언어를 발견하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구체적 언어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바울이 다른 언어를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혹은 그것이 후대에 전승되는 과정에서 기억에서 사라졌을 수도 있다. 아무튼 4,21 이하의 종말론적 언술은 그의 선교가 황제의 나라로서의 로마가 아닌, 차별과 배제의 체제를 총괄하는 포괄적인 중심인 로마체제의 종식과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갈망하는 총괄적 언어다. 주지할 것은 이것은 로마체제의 중심부에 있는 자들에게 전달하는 선전포고의 문구가 아니라, 바울의 대중인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권의 대중에게 제시한, 일종의 반제국적 선언문이라는 점이다. 1세기 중반 빌립보 시의 인구는 15,000~20,000명으로 추산된다. 그들에게 이 어마어마한 전투는 어떻게 비추어졌을까? 전투의 희생자는 말할 것도 없지만, 살아남은 자들도 죽은 자 못지않은 혹독함이 뒤따랐다. 한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후 이 도시에서는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절대1인이 되기 위한 정치적 격변이 세 번이나 벌어졌다. 그때마다 지배층의 급격한 변동이 있었고, 그들과 얽힌 서민들의 삶은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이재원_

    김진호의 의인론 해석에 따르면 바울은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회당 공동체 내 ‘유대주의적 배타주의적 성향’을 띤 집단에 의해 배제되고 ‘주권’을 인정받지 못하는 집단의 구성원들의 인권을 옹호하기 위해 의인론을 펼쳤다는 것이다. 

    바울과 율법/유대교의 관계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을 수정한 이른바 ‘바울에 대한 새로운 관점’(New Perspective on Paul)에서 보는 바울의 의인론 해석은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이른바 안디옥사건을 바울의 의인론이 전개된 일차적인 삶의 자리로 간주한다. 그런데 이 관점은 바울의 의인론을 유대인과 비유대인 사이에 차별 없는 평등한 관계를 지향하는 논쟁무기로 보면서도, 동시에 바울의 공동체들 내부의 유대인과 이방인 관계에서 유대적 배타주의를 여전히 일반화시키는 해석으로 치우치고 있다. 다른 한편, 김진호 목사는 소위 그가 말하는 ‘유대주의적 율법론 작동의 메커니즘’의 현장을 로마제국의 도시들에 흩어져 있는 유대/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회당 공동체의 상황과 관련시키면서, 의인론적 평등주의에 입각한 바울의 비판의 중심에 ‘강성 순혈주의를 주장했던’ 바리사이파적인 배타적 유대주의적 성향이 있었다고 다소 자의적인 해석을 하고 있다. 

    나는 김진호 목사가 〈갈라디아서〉 3,28의 세 가지 사회적 관계유형과 연결시켜 “종교적,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주권이 박탈된 하위주체 모두를 은혜의 공간으로 호출하는 선언이다.”라고 주장하는 데 물론 동의한다. 그럼에도 내가 비판적으로 주목하는 것은 김진호 목사가 가정하는 ‘유대주의자’와 그 개념과 결부시키고 있는 배타주의에 대한 문제이다. ‘유대주의자’와 ‘배타주의’라는 개념들을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회당의 집단들에게 어떤 의미로 적절하게 적용할 수 있는지의 문제는 그 논거가 빈약하고 여전히 모호하다. 다시 말하자면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회당의 바리사이파적 성향을 띤 유대주의자들이 디아스포라 회당내의 (‘더러운’) 개종자들을 차별하고 배제하려는 태도를 취했다고 보는 추측은 보다 명확한 개념적, 사회사적 분석이 요구된다. 

    나는 바울의 의인론이 넓은 의미에서 〈갈라디아서〉 3,28의 세례공식문에 선포된 계급적, 여성해방적, 종교문화적 평등지향적 가치의 실천에 접목된다고 본다. 그럼에도 디아스포라 회당과 미묘한 관계를 맺으면서 그리스도를 유대인의 메시아로 선포하고 따르는 집단 내에서 유대인과 비유대인/이방인과의 종교적 사회정치적 평등한 관계문제가 바울 의인론의 일차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자리로 본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로마에 의해 정복당해 그 지배 하에서 그들의 주권을 박탈당한 나라들, 유대인/이스라엘인들에서 시작하여 다른 종족적 민중들/이방인(nations)을 그리스도 공동체 안으로 끌어안으려 했던 바울의 메시지와 실천이 과연 유대주의적 배타주의(Jewish ethnocentrism), 달리 표현하면 유대교의 문화적 제국주의를 겨냥한 것이냐, 아니면 일차적으로 로마제국주의의 당시 민중들을 향한 타자화를 겨냥한 것이냐 하는 것이다. 나는 후자라고 본다. 


제 5주제_ 오늘 우리는 왜 바울을 이야기하는가


김진호_


     신자유주의적 지구화가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시기에 우리는 다시금 바울을 주목한다. 오늘의 시대는 지구적 무기체계와 지구적 자본체계로 인해 무수한 난민과 유민들이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세계의 고통의 질서를 재구축하고 있다. 이들 난민과 유민은 탈계급화된 존재들이고, 탈주체화된 존재들이다. 이들은 ‘언어 붕괴’ 상황에 놓여 있다. 그런데 이런 체제의 질서를 구축하는 제국은 국가 중심적 질서가 지배하던 근대국민국가 시대에 비해 현저히 탈중심적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곧 여러 모로 지금의 시대는 바울의 시대와 닮았다. 

     바울은 그런 시대에 배제된 자들, 권리 없는 자들과 함께 하는 방식으로 하느님나라를 위해 일했다. 그것은 오늘의 시대를 사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바울의 삶과 실천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은, 바울은 로마제국이 붕괴될 것 같지 않는 세계 속에서 그 세계를 넘어서고자 사력을 다하는 데 있어 마치 꺼지지 않는 불꽃같았다는 점이다. 메시아에 대한 그의 갈망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 시간을 예단할 수 없음에도 어느 순간 도래할 그 나라에 대한 갈망을 간직한 신앙양식이다. 하여 신자유주의적 질서의 지배가 무제한의 힘을 발휘하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바울의 신앙을 되새기고 재점검하는 것은 오늘을 견뎌내는 신앙적 내공에 큰 의의가 있을 것이다. 


이재원_

    오늘날 그리스도교를 가능하게 하고, 예수에 대한 신앙을 태동시킨 그 처음에 일어났던 예수운동과 바울운동을 이해함에 있어서 로마제국은 하나의 변수가 아니라 핵심적인 상황이었다. 이미 1970년대 말부터 남미해방신학과 한국민중신학에서 다루기 시작했던 ‘제국(주의)’이라는 주제가 21세기 초부터 북미 성서학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단순히 신학영역의 지각변동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보다 광범위하고도 구체적인 세계정치적, 역사적, 문화적 상황과 맞물려 있다. 

    그럼에도 바울과 (로마)제국이라는 문제는 한국의 교회 상황에는 너무도 낯설기만 하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그러한 문제인식에 도대체 다가가기를 거부하고 있다. 바울이 저항했던 제국적 지배와 불의와 차별은 우리의 교회에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전통적으로 해석된 바울의 의인론에 근거하여 더더욱 배타적인 신앙론과 구원론을 무비판적으로 재생산하고 있다. 

    오늘날 초국적 지구적 자본주의는 바울 당시의 로마제국주의에 맞먹는 엄청난 권력을 행사하며 이에 종속된 국민/국가와 개인들을 총체적인 신자유주의의 자본과 시장의 논리 하에 무자비하게 예속시키고 있다. 이 논리에 포섭되기를 거부하고 저항하는 개인, 국민/국가, 민중, 사회체제는 짓밟고 정복하고 제거해야 하는 ‘타자’(Others)로 규정되고 고통의 현실 가운데로 처절하게 버려지고 있다. 

    오늘날 지구적 제국주의적 자본주의는 총체적 구조적 실체로서 현실적으로 한반도의 평화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는 거대한 힘의 세력이다. 바로 이러한 지배와 권력과 폭력에 대한 저항하여 보편적인 정의와 평등과 자유를 지향하는 실천은 국가내의 대안적 운동과 실천을 바탕으로 한 지구적(세계적) 연대를 절박하게 요청한다. 십자가 사건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정의와 종말론적 저항의 희망에 근거한 바울(공동체들)의 신앙과 실천을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위 글은 지난 해 11월. 30일에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컨벤션홀에서 제3시대그리스도연구소, 한신대 신학대학원 주최로 열린 좌담회의 자료집을 발췌한 것입니다. 아래 youtube 링크를 클릭하시면 음성으로 좌담회 실황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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