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비평의 눈] 우리는 각자의 이름으로_소설<계속해보겠습니다> 리뷰 (갱)

비평의 눈

by 제3시대 2016. 2. 8. 17:54

본문



우리는 각자의 이름으로_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 리뷰

 





(평범한 워킹맘, 페미니스트, 간간이 글쟁이로 변신)


    몇 년 전부터 친족을 상대로 한 범죄 행위가 뉴스에 끊임 없이 등장한다. 물론 이건 현대 사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최근 유행하는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의 이방원만 해도 자신의 형제를 가차없이 죽였던 인물이고, 가족의 비극을 낳는 이러한 왕족의 역사는 어느 나라에서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인류가 이야기를 시작한 이래로 가족은 수 많은 문학, 연극, 영화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한때 한국 문단에서도 신춘문예에 당선되려면 무조건 가족을 소재로 써야 한다는 공식이 있었을 정도다. 


   가족은 진부하고 구태의연하다. 문학 작품의 소재로서 뿐만 아니라 현실의 영역에서도 그 하나하나의 역할들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데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엄마, 아빠, 딸, 아들. 호칭은 그대로 이름이 되고, 우리는 여기에 때때로 이름들을 더하고 빼며 자를 대고 그린 것만 같은 올곧은 직선으로 ‘가족'이라는 형태를 만든다. 그리고 수 세기의 작품들이 단호하게 지시하는 것처럼, 이렇게 만들어진 것을 우리는 사랑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를 파괴할 것이다.


1. 

    이름은 공식적으로 가족만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결혼을 해서 성을 나누거나 출생, 입양 등을 통해 성과 이름을 물려주기도 하고, 우리나라의 경우엔 돌림자로 이름을 짓기도 한다. 그러나 황정은의 장편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에서의 가족은 이름도 비슷하지 않고, 성씨도 나오지 않는다. 부모에게도 엄마, 아빠라고 하지 않고 애자, 금주씨라고 부른다. 엄마인 애자는 소라와 나나의 양육자로서의 엄마라기보다는 금주씨를 끔찍이 사랑했던 연인이고 소라와 나나도 피를 같이 하는 자매라기보다는 서로를 애틋하게 챙겨주는 동거인 관계에 가깝다. 오래 입어 느슨해진 바지 허리춤처럼 이들이 지닌 가족적인 색깔은 엷디 엷다. 소라가 표현하듯, 정형성을 입은 다른 가족이 ‘물감으로 그린 가족'이라면 이들은 ‘간장으로 그린 가족'이다. 


   소라와 나나의 가족이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었다. 애자가 그토록 사랑해마지 않았던 금주씨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이후, 애자는 남은 생을 놓아버린다. 아무것도 안하고 누워있다가, 갑작스럽게 일어나서 음식을 하기도 하고, 또 어딘가를 향해 훌쩍 떠나버렸다가 느닷없이 돌아오기도 한다. 생의 이유를 잃은 애자는 소라와 나나에게도 인생이란 너무나도 허망한 것이라고 가르쳐왔다. 아직 어렸던 소라와 나나를 누구도 돌보지 않았던 건 그때부터였다. 기댈 친척도 없었으니 소라와 나나는 둘이서만 시간을 보냈다. 


   그런 소라와 나나를 대신 돌본 것은 순자였다. 순자는 배가 고파 쉰떡을 데워 먹던 소라와 나나의 손에서 떡을 빼앗아 먹어버리고 떡 대신 따뜻한 밥을 차려주었다. 또한 소라와 나나에게 늘 점심 도시락을 챙겨주고, 때가 되면 같이 만두를 빚곤 했다. 나기와 소라, 나나는 그때부터 늘 함께였다. 나기의 존재는 특별하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옆집 남자아이에서 소라와 나나를 은근히 챙겨 주는 가족이 되기까지 크게 다른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단지 몇 년 동안 밥을 함께 먹었고, 서로의 등굣길을 함께 했을 뿐. 그렇게 조용히 이어져 온 일상은 방치되었던 소라와 나나를,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없어질 뻔한 이 두 삶을 천천히 다시 끌어 올렸다. 소라와 나나가 ‘계속해'볼 수 있었던 것, 그 뒷편에는 아무것도 아닌 듯, 하지만 무엇보다도 커다란 이 일상의 지속이 있었다. 


   소라와 나나의 이름이 의미를 갖게 된 것도 아마 이 때부터였을 것이다. 나기의 이름은 소라와 나나와 합하여져서 ‘소나기'라는 단어를 갖는다. 가족이 나누는 작명법과는 완연히 다르고, ‘소나기'라는 단어가 그렇게 특별히 의미있는 단어도 아니지만 이렇게 만들어 진 새로운 이름은 새로이 구성된 이 관계를 다른 가족들과 사뭇 다르게 품어 낸다. 한 단어를 쪼개어 나누어 가진 이름처럼, 이들의 동행은 서로의 삶에서 ‘따로 또 같이' 다.


2. 

    그런 상상을 해보았다. 한 사람과 연애를 하고, 나의 뱃속에서 열 달을 길러 아기를 낳아 만든 나의 가족. 이 사람들이 아닌 다른 사람을 내가 우리 집으로 불러들여 가족으로 삼을 수 있을까. 기꺼이 손 내밀고 싶은 사람은 너무나 많지만 계약으로도 혹은 혈연으로도 맺어지지 않은 완연한 타인을 내가 지금의 가족처럼 사랑하고 보살필 자신은 없었다. 그러나 사랑의 방법을 찾고 싶었고, 그 생각 끝에서는 이런 물음이 들었다. 어쩌면 사랑을 넓힐 수 있는 방식은 기존의 가족을 그대로 유지하는 한에서 확장시키는 것이라기보다는, ‘가족'이라는 미명 아래 부둥켜 묶어 놓은 매듭을 한 겹 풀어내는 데에서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아기를 낳고 기르면서도 나는 종종 그런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건 불공평한 게 아닌가. 사람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고, 누군가가 와주기를 바라며 울고 있는 수만의 아기들이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내가 단지 내가 낳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아기만을 사랑해 준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설픈 박애주의자가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답이 없는 이 생각 속에 도착한 사실은, 우리네의 가족이 너무나도 편협하다는 것이다. 이 편협함은 가족을 둘러싼 안팎으로 나타난다. 가내 집기가 날아다니는 대형 폭력이 발생해도 경찰들은 부부싸움이라고 하면 끼어들지 않는다. 그와 동일선상에서 ‘데이트 폭력'이라는 단어 자체도 수면 위로 떠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가족의 일이니까 제 삼자는 신경을 꺼야 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가족의 일이기 때문에 가족의 구성원들은 무엇에든 강제된다. 그래서 이 가족 내에 있는 사람들은 어디에도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못하고 반복되는 폭력의 굴레 속에 사로잡혀 버리고, 바깥 쪽의 사람들은 이 완고한 경계선 안으로 결코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순자 역시 가족의 틀에 그대로 사로 잡혀 있던 사람이었다면, 소라와 나나는 지금처럼 살아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담벼락 안으로 불쑥 들어 온 순자의 손은 이들에게 수치심을 주지도 않으면서 이 두 소녀에게 자신의 아들과 같은 자리를 기꺼이 내주었다. 게다가 여전히 이들 사이에 놓여진 낮고 얇은 이 담벼락 하나는 이들의 관계를 확장된 가족이라기보다는 ‘따로, 또 같이'하는 새로운 관계임을 암시한다. <계속해보겠습니다>는 서로를 아끼고 보살피는 데에 있어 가족이라는 단어 외의 것으로도, 그러니까 서로에게 정해진 역할과 의무의 굴레를 씌우지 않더라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분명 ‘계속’될 수 있음을 조용히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는 이름을 나눠 갖기로 하자. 

   아주 공평하게. 


   지금까지의 시간은 

   너무 이기적이고 외로웠어. 


   우리는 두 개의 눈과 

   두 개의 귀와 

   수많은 머리칼이 있지만 

   나의 몫은 

   그런 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 신해욱, <따로 또 같이> 중  


   가족의 몫은 언제나 분할된다. 가사일은 엄마의 역할, 직장은 아빠의 역할, 애교는 딸의 의무이고 가족의 미래는 아들의 것. 그러나 <계속해보겠습니다>에는 엄마도, 아빠도, 딸도, 아들도 없다. 그곳에는 마음이 따뜻한 순자와 열정적으로 금주를 사랑했던 애자, 나나를 애틋하게 생각하는 소라, 자신의 의견이 분명한 나나, 차분한 나기가 어울려 산다. 서로의 역할을 강제하지도 않고, 따라서 의무도 책임도 없다. 딸도, 아들도 아닌 이들은 그저 떨어져 나온 한 명, 한 명의 하찮은 개인이지만 이들은 그 안에서 새로운 공존의 방식을 모색한다. 


   나나가 임신한 아기는 그야말로 이 이야기의 정점이다. 기꺼이 아기 아빠와의 결혼을 거부했으니 나나의 아기는 이제 나나와 소라, 나기의 아기로서 자라게 될 것이다. 단순히 형태가 다른 가족인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가족이라는 단단하고 견고한 벽이 일견 허물어 진 공동체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 이 공동체에는 ‘가족'과 같은 끈끈함은 없다. 언제든 툭, 끊어져버릴 것 같지만 이들은 서로를 먼 발치에서 늘상 바라보고 있다.


   나기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소라 너는 ‘소라'라는 부족, 나나는 ‘나나'라는 부족, 나기는 ‘나기'라는 부족. 이 세상엔 한 명 뿐인 부족도 있는거야.’ 이들의 동행은 이렇다. 서로를 같은 부족으로 섣불리 에두르지 않고, 한 명 한 명을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 세워 준다. 이들의 이름은 쪼개지지도 겹쳐지지 않는다. 단지 나란히 서로에게 어깨를 기댄 채 그렇게 서 있다. 계속해서 말이다.  



ⓒ 웹진 <제3시대>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