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신학 정보] 예언자적 실패의 상상력 - 엘리야 다시 읽기 (김진호)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09. 5. 7. 13:57

본문

예언자적 실패의 상상력
―엘리야 다시 읽기―

사용자 삽입 이미지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예언, 예언자

1970년대 중반 출간된 두 권의 저술 김정준의 『정의의 예언자』와 서인석의 『하나님의 정의와 분노』는 연구사적으로 한국 제1성서(구약성서) 학계의 기념비적 저작에 속한다. 한데 흥미롭게도 이 두 권이 모두 예언자 아모스를 다루고 있다. 또한 아모스를 읽는 주요 코드를 ‘정의’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양자는 공통적이다. 당시 독재정권의 국민총동원적 개발주의에 대해 그 발전의 어두운 이면을 비판하는 맥락에서 ‘하느님의 정의’라는 모티브가 성서 읽기에 개입한 결과다. 아무튼 이후 한국의 비판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아모스뿐 아니라 ‘예언자 일반’을 ‘(하느님의) 정의의 사도’처럼 이해하는 경향이 생겼다.

물론 이러한 이해는 예언운동에 대한 편협한 시각에 불과하다. 성서에 언급된 예언자들의 면모는 하나의 이념적 지형만으로 포괄하기에는 너무 다양하기 때문이다. 특히 「열왕기상」 22장의 미가야 벤 임라와 시드키야(주전 9세기), 「아모스서」 7장의 아모스와 아마지야(왕실 사제)(주전 8세기), 그리고 「예레미야서」 28장의 예레미야와 하나니야(주전 7세기)의 대립에서 볼 수 있듯이, 지배와 저항이라는 코드에서만 보아도 한 편은 당대 왕실의 비판자인 반면 다른 한 편은 왕실의 입장을 대변하는 존재다.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한 쌍으로 기억되는 존재조차도 실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 이사야나 예레미야는 중앙의 유력한 귀족 가문 출신이고, 복잡한 권력 투쟁과 이념 투쟁의 맥락에서 입지를 형성한 존재였다면, 아모스나 미가 등은 변두리 지역의 농부 혹은 지방 토호 출신이다. 여기에 좀더 다양한 관점을 개입시키면 예언자들의 동질성을 찾아내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편, 성서의 예언서들에서 예언자에 대한 역사적 정보를 읽어내는 일 또한 매우 제한적이다. 왜냐하면 예언자들의 대부분은 북왕국에서 활동한 사람들인데, 현재의 성서에 편찬된 양식은 남왕국 출신 사가들의 창조에 가까운 손길을 거치면서 내용이나 형식, 그리고 분류에서 심하게 변형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많은 정보들이 생략되었을 것이고, 더욱 심하게는 다른 예언자들의 이야기가 혼합되고 심지어 해석에 속하는 새로운 언급들이 마치 원래의 것이라도 되는 양 은근슬쩍 끼어들어오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예언서들에서 원래의 예언자나 예언운동을 재건해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요컨대 학문적으로 예언, 예언자, 예언운동을 정의내리는 일은, 현재의 학문적 동향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상태다.

그럼에도 우리는 성서의 예언들을 귀담아 들으려 한다. 그만큼 신앙에서 예언은 중요한 전통으로 간직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있다. 여기서 다시, 앞서 언급한 한국의 두 성서연구자들의 성서의 예언 읽기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예언서를 선별하고, 그것을 연구자 동시대의 문제의식 특히 위기의식과 연계시키는 방식이다. 그것은 과거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현재와 대화하기 위한 과거의 읽기’라고 규정할 수 있다. 현재의 시선으로 과거를 일방적으로 읽어내는/조작하는 것도 아니고, 과거의 시선으로 현재를 억지 규정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과거에 관한 정보를 통한 역사학적 연구 경향과, 현재의 문제의식 간에는 첨예한 긴장이 필요하다. 여기에 역사학적 상상력과 문학적 상상력은 분리되면서도 분리할 수 없이 서로 얽힌다.
 
그러나 ‘정의’라는 시대 비판적 예언 읽기의 코드는 오늘날, 1980년 5공 정권의 등장한 이후,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정의’는 시대 비판적 입지로서만 실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게 오늘 우리의 개념 속에 자리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1987년 이후, 이른바 ‘민주화’ 과정과 지구화 과정에서 ‘개인’과 ‘일상’이 삶의 인식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이후, ‘정의’로 표상되는 해방의 문제의식은 그다지 명료한 해방적 가치가 되지 못한다는 게 입증되었다. 개발주의적 총동원 못지않게, ‘정의론’에 기반한 총동원도 삶의 다양성을 억압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던 것이다. 오히려 다양한 정의, 심지어 정의들 간의 상이한 해방적 가치를 둘러싼 논쟁이 가능한 상황이 오늘 우리의 이해를 지배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예언을 읽는 오늘 우리의 대안적 코드를 찾기 위한 탐색이 필요하다. 나는 ‘예언자로서의 예수’에게서 그 실마리를 찾는다. 그것은 ‘낯설음’이다. ‘육이 된 신’이라는 예수에 관한 신학적 담론은 ‘신에 관한 친숙함’을 ‘낯설음’이라는 문제의식으로 해체한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의 예언자적 독특성은 친숙한 것, 일체의 인습적인 삶의 지혜에 대한 전복적인 도전에 있다. ‘시대를 낯설어함’ 바로 그것이 예수 활동의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나는 단언한다. 바로 이와 같이 성서의 예언들에서 나는 시대를 낯설어하는 이미지를 발견한다.
 
1930년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당시 자본주의의 최첨단의 미학을 자랑하는 파리의 아케이드를 거닐면서 문뜩 자신을 낯선 세계를 방황하는 ‘배회자’로 느낀다. 그 몇 년 뒤 장 뽈 싸르트르는 그의 첫 소설 『구토』에서 어제까지 일상 속에서 무감각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수용되던 것들 하나하나에서 구역질을 하는, 이상한 생리현상을 이야기한다. 불현듯 감지된 세계의 낯섦이 몸을 불편하게 한 것이다. 김수영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 내 몸이 아프다”(「먼 곳에서부터」)고, 1960년 초의 역사의 흐름에 대한 불편함을 자신의 몸에서 기억해낸다. 마찬가지로 민중신학자들은 1970년 11월 13일의 전태일에게서 시대를 불편하게 보는 예수에 대한 이해에 문득 도달했다. 바로 이러한 민중신학의 시선에서 성서의 예언을 읽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갈 게 있다. 성서 전통에서 예언자는 거의 남자들의 전통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여예언자들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출애굽기」 15장 20절의 드보라, 「판관기」 4장 4절과 「열왕기하」 22장 14절, 「역대기하」 34장 22절의 훌다, 「이사야서」 8장 3절의 이사야의 부인이라고 언급된 익명의(가상의?) 예언자, 그리고 「루가복음」 2장 36절의 안나, 「묵시록」 2장 20절의 티아디라 교회의 ‘이세벨’ 등, 여러 명의 여성 예언자들에 관한 정보에 접할 수 있다. 그러나 드보라나 훌다 등 주요 인물조차도 묘사가 극히 제약적이고, 티아디라의 이세벨처럼 종종 부정적으로 다뤄진다. 독자적인 이름의 예언서로 기억된 경우는 전무하며, 무엇보다도 ‘성해방’적인 문제에 대한 담론에 대해 성서가 침묵하고 있는 것처럼, 예언자들의 담론도 거의 전적으로 성적 소수자에 대한 문제의식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언 전통은 오늘 우리에게 비판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측면도 적지 않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성서 전통 속의 엘리야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임을 드러내려는 용의주도한 노력을 기울였다. 광야에서 활동하며, 낙타털옷, 가죽허리띠 같은 의복이나 메뚜기·석청 같은 음식을 먹는 모습은 영락없이 사람들의 기억 속의 엘리야 바로 그였던 것이다. 그것은 「말라기서」의 다음과 같은 구절과 관련이 있다.

너희는 내가 호렙산에서 나의 종 모세를 시켜 온 이스라엘에게 내린 법과 규정과 계명을 되새기도록 하여라. 이 야훼가 나타날 날, 그 무서운 날을 앞두고 내가 틀림없이 예언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엘리야가 어른들의 마음을 자식들에게, 자식들의 마음을 어른들에게 돌려 화목하게 하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세상을 모조리 쳐부수지 아니하리라.
―「말라기서」 3장 22~24절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림] 변화산에서 예수와 엘리야, 모세

여기서 보듯이 엘리야에 관한 대중적 기억은 ‘종말’과 ‘심판’이라는 전통적 인식 코드와 연결된다. 현재에 대한 강력한 부정(否定)이 대중의 열망으로 간직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세례자 요한의 “회개하라.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는 대중의 현 체제에 대한 불만을 증폭시켜 종말에 대한 신앙과 연계시킨다.

이것은 예수가 요한의 운동을 계승했을 때, 대중의 기억 속에서 다시 부활한다. 즉 요한의 부활한 몸이 예수라는 대중적 인식은 ‘엘리야=요한’이라는 대중의 믿음과 연결되어, 예수에게서 엘리야를 떠올리는 연상작용을 낳았던 것이다(마르8,28).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처절한 고통 속에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라며 절규하는 고성을 지르며 임종하는 장면에서 사람들은 그 소리가 ‘엘리야’를 부르는 소리로 오인했다고 한다(마르15,34~35). 필경 이러한 드라마적 상상력은 예수와 엘리야를 동일시하려는 욕망이 예수의 십자가 처형 장면에 대한 기억에 영향을 미쳐 만들어진 상상력의 산물일 것이다. 그만큼 예수는 동시대에 부활한 엘리야로 인식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에 더욱 깊이 다가갔음이 분명하다. 예수의 실천은 유대 대중의 민중적 상징체계와 맞물림으로써 강력한 대중 전승의 일부를 이루었던 것이다. 여기서 예수 동시대의 대중의 문제인식은 엘리야라는 거의 9세기 전의 인물에 관한 기억과 대화하여, 서로를 해석하는 시선이 된다. 엘리야와 예수, 예수와 엘리야. 그리고 민중신학에서 이것은 ‘예수-전태일’의 해석학적 상호작용으로 이해되었다.

한편, 제2성서(신약성서) 시대의 유대교 주류 담론들, 특히 라삐적 바리사이즘은 이러한 엘리야를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그것은 대중 담론에 대한 그들의 불신과 관련된다. 그런 점에서 예수운동과 유대교 주류 담론간의 갈등의 이면에는 바로 이러한, 대중적 희망과 엘리트주의적 희망 간의 계급적인 상이한 전망이 깔려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그럼에도 주로 묵시적인 유대교의 문서 텍스트 속에 엘리야가 들어올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그리스도교 문서들 속에 예수와 엘리야가 내적인 연계를 갖도록 내용이 구성된 것은 지식 계층 사이에도 대중적 희망의 체계가 일정하게 스며들 수 있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아마도 이와 비슷한 이유로, 이슬람교 문헌에서도 엘리야가 ‘의인’의 반열에 들어가게 되었을 것이다.

역사의 엘리야

그렇다면 역사의 엘리야(historical Elijah)는 어떤 존재였을까? 그는 정말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을 만한 이였을까? 아니면 실존의 그와는 전혀 엉뚱한 모습으로 변형되어(transfigurated) 기억된 것은 아닌가? 역사의 다윗은 매우 억압적인 시대를 연 장본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그는 후대의 야훼 신앙사에서 해방의 상징으로 변형되어 대중에게 기억되었다. 반면 모세는 억압당하는 히브리의 해방을 상징하는 존재로서 야훼 신앙사 속에 도입된 상징이었음에도, 특히 바울의 텍스트 속에서는 억압을 상징하는 존재로서 재현되었다. 이렇게 이미지의 재현은 변화무쌍한 양상을 띤다. 그렇다면 과연 엘리야는 어떤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위 도표를 클릭하면 큰 화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오므리 왕조, 특히 아합 왕 시대에 활동한 예언자다. 오므리와 아합 왕의 시대는 아마도 팔레스티나 역사에서 이스라엘이 가장 막강한 국력을 자랑하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토만 보더라도, 요르단 동편의 암몬, 그 남부의 모압, 그리고 에돔과 유다 왕국을 속국으로 지배했던 것으로 보이고, 북으로 갈릴래아 북부 지역 끝의 ‘단’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다마스커스 왕국과의 국경인 시리아 남부 지역까지 차지하였다. 상부 갈릴래아의 북단의 단과 하솔, 하부 갈릴래아의 므기또와 이즈르엘, 그리고 사마리아 지역 등에서 오므리-아합 대에 건조된 거대한 왕궁 및 요새가 발굴되었는데, 그 규모나 세련미가 당대뿐 아니라 상당한 후대에까지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특출나다. 특히 이 도시들에서 발굴된 지하수로나 마구간의 규모는 이 왕조가 얼마가 강력한 위용을 가진 나라인지를 시사한다.

실제로 아시리아의 샬마네셀 3세(Shalmaneser III, 859 BCE~824 BCE 재위)의 비문에는 아시리아의 서방원정군에 맞서는 시리아-팔레스티나 연합군의 주축이 이스라엘의 아합 왕이며, 파견된 이스라엘의 군사력이 마전차 2천 승과 보병 1만 명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숫자가 어느 정도 정확한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상당한 규모라는 점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필경 아합의 군대는 평지전투에 관한 한 아시리아의 팽창주의를 막아내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므리 왕조에 이르러서 팔레스티나 거의 전역을 통제할만한 강력한 왕조가 비로소 탄생한 것이다. 흔히 다윗-솔로몬 대의 왕국을 팔레스티나에서 성립한 최초의 고대국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러한 이해의 근거는 단지 성서의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인 묘사에서만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솔로몬이 건립했다는 도성의 보잘 것 없는 흔적을 비롯한 고고학적 증거도 그것을 입증해주지 않고, 외국의 비문에는 전혀 언급조차 얻을 수 없을 정도다. 반면 ‘오므리의 집안’은 외부의 시선에서 남북의 왕조를 통틀어 이스라엘 족속들의 나라를 대표하는 존재로서 오랫동안(이 왕조가 몰락한 이후에까지도) 기억되었다.

왕궁의 고고학적 흔적에서 드러나듯 아마도 비교적 잘 짜인 관료제도가 성립되었던 듯하다. 왕실에서 대규모의 예언자와 사제 집단을 양성했다는 성서의 묘사를 염두에 둔다면, 관료조직은 군사조직만이 아닌, 많은 이데올로그들의 양성 시스템도 포함하고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것은 국가의 발전에 관한 신학적인 체계화 및 대중화가 상당히 활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페니키아의 왕녀인 이세벨이 아합의 부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전승에는 아세벨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하다. 그만큼 이세벨의 상징적 이미지는 아합의 정책에서 중요하다. 성서는 그것을 바알과 아세라 신앙과 관련시킨다. 이 텍스트들에서는 이 왕실신앙을 혼합주의로 다루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선 오므리 왕조의 제국적 발전은 다종족 연합체를 통해 구현되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고대의 국가들이 영역 내의 종족을 어느 정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는지를 과장해서 이해하는 것은 금물이다. 이 시대 국가들은 군사적으로 영토를 통제 관장할 수 있을지언정, 백성의 경험과 기억을 통제할 수단과 능력을 갖추지는 못하였다. 또 군사적 통합조차도 지방에 왕 직속의 관료제도를 구축함으로써 실현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제국 요소요소에 설치된 몇몇 군사요새 정도가 왕의 직속 부대가 배치된 곳이었고, 각 지방의 구체적인 행정 및 일상은 지방 토호 세력들에 의해 통제되었다. 그러니 지방 권력과 중앙 권력 간의 비대칭적 동맹의 결과가 고대의 국가들의 실상이라고 하는 게 적합하다.

물론 오므리 왕조도 예외가 이니었다. 오므리 왕조의 수도가 둘이라는 점은 이런 관점에서 중요한 사실을 시사적으로 보여준다. 성서는 사마리아 지방의 성읍인 사마리아를 오므리가 돈으로 사들여서 수도로 삼았다고 한다. 반면 이즈르엘 성읍은, 나봇의 이야기에서 보듯, 토착민의 땅을 강탈하여 수도로 삼았다. 그것은 사마리아 건설이 족속간의 계약 전통에 의해 왕권이 행사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면, 이즈르엘은 왕권에 의한 일방적인 강탈 점유를 통해 구축된 도시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최근의 고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두 성도가 한 편은 보다 이스라엘적인 반면, 다른 한 편은 보다 비이스라엘적이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요컨대 오므리 왕조는 이중수도를 통해 두 유형의 통치를 시행했다는 것이다. 하나는 야훼신앙의 계약 군주적 전통이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제군주적 전통이다.

앞의 ‘표’에서 보듯 이스라엘의 선후대 왕조들은 예언자들의 지지에 힘입어서 왕위를 획득한다. 그것은 대중과의 계약이 왕권 형성에 중요한 기반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필경 오므리 왕조도 그러한 예언자적 지원을 기대했을 성 싶다. 그러나 바아사, 지므리 등으로 이어지는 계속되는 군사쿠데타의 상황에서 예언자의 지지는 그다지 정당성을 갖지 못하였을 것이다. 아마도 오므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직후 티브니를 주축으로 한 세력과의 내란 상황에 빠진 것은 이러한 예언자적 지지의 약한 정당성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란을 극복한 뒤, 이러한 약한 정당성은 오므리 왕조의 강점이 될 수 있었다. 그것은 예언자적인 계약 전통에 덜 의존적인 정권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 이 왕조는 보다 자유롭게 강한 전제군주적 모델을 구축하기 위한 모색을 할 수 있었다. 오므리가 아들 아합을 페니키아의 왕녀 이세벨과 결혼시킨 것은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가능했다. 그러므로 아합은 보다 적극적으로 이즈르엘에 왕궁을 건립하고, 그곳을 전제군주적 통치의 기초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합의 혼합주의’ 정책은 종족 연합에 기초한 고대의 국가로서는 불가피한 상황이었고, 오므리 왕조는 그런 점에서 이러한 이질성을 효과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한편, 혼합주의 문제는 좀더 복잡하게 사유할 필요가 있다. 우선 ‘혼합주의’라는 표현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다. 왜냐면, 혼합주의의 문제는 한참 후대인 주전 5세기 이후 페르시아에서 귀환한 유대공동체가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몇 세기 간의 내적 투쟁에서 만들어진 신학적이고 종족적인 이데올로기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순수함’을 원리주의적으로 추구한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공동체의 이데올로기가 성서 편찬에 개입한 결과, 과거의 역사를 ‘혼합’과 ‘순수’라는 틀로 억지로 짜맞춘 데서 성서의 혼합주의에 관한 논의들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수함’이란 특정한 시기의 역사적 발견물에 다름 아니다. 즉 혼합적인 것은 ‘순수한 것’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 개념인데, 실제로 순수한 것은 후대의 발견물이고, 그 시선에서 과거의 역사를 혼합주의적이라고 재해석했다는 얘기다. 다만 수만은 이질성들이 서로 경합하고 때로는 조합되고 혼재하기도 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삶과 의식은 구성되었다. 그런 점에서 바알 신앙은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의 다양한 이질성들이 만나 절충하고 혼재한 요소의 핵심에 있다. 아세라 신앙도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야훼 신앙은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이러한 대전승의 주류에서 약간 벗어난 소수 전통이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야훼 신앙이 대전통과 단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단의 사람들은 대전통에 의존하면서도, 새롭게 등장한 소수 전통에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게 적합하다.

여기서 오므리 왕조가 페니키아의 바알 신학을 도입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왜냐면, 오래전부터 지중해 무역 시장 형성에 뛰어든 페니키아의 문화전통은 보다 사적인 소유 개념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그것은 능력이 있으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자유방임주의적 관점과 어느 면에서 맥을 같이 한다.

오므리 왕조에 의한 ‘국가의 성공’은 이러한 신학적 발전의 중요한 단서가 되었을 것이다. 대대적인 건조물은 모든 백성에게 그 위용을 드러냄으로써 국가주의적 성공의 미학을 홍보한다. 또 국가적인 지원에 힘입은 대규모 제의는 그 화려한 전례 행사를 통해 성공주의를 찬양한다. 반면 이러한 국가주의적 신학에 도전하는 자들은 국가의 공공연한 억압을 받았다. 많은 이들이 지하로 숨어들었고, 그들의 담론 또한 침묵의 늪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이제 전 사회는 왕조의 찬란한 성공 신화에 온통 사로잡힌 듯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문화 속에서 태어났고, 자랐으며, 그 속에서 문법화된 성공 게임에 몰두해 있었다.

이때 엘리야가 활동한다. 왕조의 이러한 성공의 미학이 한참 활기를 띠던 바로 그 때다. 어느 나라를 점령했다는 전령의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연일 들렸고, 그 나라에서 보내온 공납물의 행렬이 계속되는 도로 한복판을 거닐면서, 그는 그 화려한 성공에 문뜩 ‘불편함’을 느낀다.

그에 관한 성서의 묘사는 문학 양식상 ‘전설’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마치 예수에 관한 담론처럼, 서기관적 저술가들의 지적인 매체를 통해 기억된 것이 아니라, 민간전승을 통해 입에서 입으로 오랫동안 간직되어 온  이야기인 것이다. 그만큼 이 이야기는 대중의 분노와 희망의 언어로 가득하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역사의 엘리야’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한다.

「열왕기상」 17장의 시돈 지방의 사렙다의 과부 이야기를 보자. 여기에는 왜 그가 대중적 분노와 꿈의 이야기, 그러한 기억의 대상이 되었는지에 관한 근거가 슬며시 들어가 있다. 여기서 그가 베푼 기적은 작은이들의 매우 일상적인 고통과 관계하고 있다. 다른 예언자들이나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의 기적 같은 것이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인 큰 메시지를 담고 있는 데 반해, 엘리야의 활동은 이념에 채색되지 않은,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생생한 역경과 그것의 극복 과정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특히 과부와 어린아이가 그의 기적의 수혜자로 나온다는 점은 대중적 고통의 극한에 더욱 가까운 곳에서 그에 관한 애틋한 기억이 잉태하여 자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요컨대 엘리야는 아합 왕조가 추진하던 강력한 전제군주제 정책이 대중의 희생을 동반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불편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권력을 동원하여 왕이나 귀족들이 소농들의 토지를 몰수하는 일이 숱하게 일어났고, 하루가 멀다 하고 전쟁이나 부역에 동원되어야 했던 대중으로선 땅을 지키는 일이 너무나 버거웠다. 이런 사회에서 과부나 고아는 무수히 양산되기 마련이고, 그들의 생존권은 전혀 보장될 수 없다. 이런 부의 극심한 편중 현상이 국가주의의 발전과 관련되어 있고, 페니키아식 바알 종교에 의해 미학화되고 있다는 사실은, 아마도 엘리야를 통해 대중에게 속속들이 들춰졌을 것이다. 그의 활동이 얼마나 성공적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성공한 정도만큼은 그것이 들춰졌다고 하는 것은 이론의 여지없다.

가르멜 산은 페니키아와 이스라엘 접경지대에 있는 산이다. 또한 이즈르엘 성읍에서 그리 멀지 않은 중요한 요새성읍이었다. 그러므로 이곳은 양국의 상이한 종교 전통간의 대립이 빈번한 지역이기도 했고, 이 점에서 이 지역의 상징성은 단순한 장소의 점유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넘어선다. 아합과 이세벨은 아마도 이곳에 바알신앙을 기리는 신전을 세웠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야훼신앙이 그 하위에 포섭되어 있었을 것이고, 사람들에게 전혀 불편하지 않은 것으로 기억되게 하는 장치를 포함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대규모의 승려들이 국가제의를 수행하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림] 가르멜 산 사건 이후 엘리야는 도망자가 된다

그런데 엘리야는 대중을 선동하여 이들을 몰살한다. 성서가 묘사하듯 천 명에 이르는 대대적인 학살극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실상은 훨씬 소소한 사건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는 이 거사가 혁명으로 발전하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세벨의 공권력에 그는 추격당하는 신세가 되었고, 유다 남부 네겝 지역인 브엘세바로까지 도주해야 했다.

먼 길을 달음질하느라 온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하지만 더욱 그를 좌절시킨 것은, 그토록 열망해마지 않던 새 세상에의 희망이 좌절된 것이리라. 차라리 죽여 달라고 절규하는 모습은, 아마도 엘리야보다 더욱 절망했던 대중의 심정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대중은 엘리야를 기억하면서 가르멜에서의 실패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실패의 기억은 엘리야에 관한 전승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가 천사에 이끌려 호렙으로 간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혁명적 거사 실패와 그에 따른 절망에 사로잡힌 상황을 극복하는 대중의 자존적 지혜를 담고 있다. 본문에 따르면 호렙 산에 이른 엘리야는 야훼의 계시를 받고자 했다. 새로운 희망의 근거를 갈망하는 자의 몸부림으로 말이다.

그때 엄청난 바람이 휩쓸고 지난다. 모세 전설에서나 나올 법한..., 과연 야훼의 임재를 체험할 만한 기세다. 그러나 야훼는 거기에 없었다. 이윽고 온 땅을 뒤흔드는 지진이 일었다. 이 세상의 최고 지배자이신 야훼의 발소리에 놀란 땅의 요동이기라도 한 양. 하지만 여전히 야훼는 나타나질 않는다. 도대체 어떤 어마어마한 일이 더 일어나야 한단 말인가.

갑자기 불길이 치솟는다. 그래, 이제야 말로, 야훼가 나타나시나보다. .........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야훼는커녕 송사리 귀신도 보이질 않는다. 이를 어쩐단 말인가? 야훼는 바알에게 졌단 말인가? 바알이 더 강한 신이란 말인가? 세상은 악이 지배할 수밖에 없단 말인가? 그렇다면 민중의 해방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말인가! .........

그때였다. 솔바람이 스치듯이, 세미한 소리가 그의 귓가를 슬쩍 건드리고 지나간다. ‘엘리야, 네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느냐?’ ‘광풍에도, 지진에도, 천길 불꽃 속에서도 없던 신이..., 아 이런, 그렇구나.’ 엘리야는 야훼의 임재가 이렇게 오는 듯 마는 듯 다가오는 것임을 비로소 발견한다. 천지를 진동시킨 혁명적 대사건에서가 아니라, 미세한 일상 속에서 감각 세포들을 살며시 건드리며 다가오는 것, 밖에서 오는 것인지 안에서 발아하는 것이지도 모르도록 다가오는 것. 천지와 자아가 합류하는 곳, 바깥에서 흘러오는 물과 안에서 솟아오른 물이 어우러져 뒤섞이는 곳, 나와 신이 아와 타로 구분되지 않고 하나로 합체되는 곳, 그곳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도래하는 것이라고.

대중은 엘리야 이야기를 통해 국가주의적 성공의 미학을 불편해하는 예언자적 감수성에 공감한다. 동시에 그의 이야기에는 혁명적 이념의 이데올로기가 담고 있는 또 다른 성공주의에 대한 불편함이 스며 있다. 바로 여기에 가르멜 실패의 기억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간직하는 대중의 니힐리즘적 지혜가 되살아난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세월이 흐르면 누구나 죽기 마련이다. 하지만 대중은 이런 시간의 법칙에도 굴복하지 않는 엘리야를 기억하고자 한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불말이 끄는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날아갔다고. 이러한 믿음은 그가 언젠가 바로 그런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리라는 소망의 다른 표현이다. 그리고 이런 대중의 믿음은 시간이 지나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증폭됐다. 후대의 역사에서 그는 메시아 왕국 도래의 상징으로 기억됐다. 그리고 예수는 그러한 메시아 왕국이 또 다시 저항의 성공주의에도 물들지 않는 전통으로 부활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림] 사람들은 그가 죽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가 불수레 승천 이야기이다.

영웅적 예언자는 없다. 오직 그것을 부정하는 예언자적 성찰이 있을 뿐이다

엘리야, 그는 칼을 든 예언자다. 그는 혁명가다. 그러나 성공한 혁명가가 아니다. 그는 실패했다. 그리고 좌절하는 모습을 보여줄 틈도 없이 역사의 무대에서 긴급히 사라져야 했다. 하지만 대중은 바로 그 실패 때문에 괄호 쳐진 후속의 이야기를 채워 넣어야 했다. 성서는 엘리야의 미완성 교향곡을 완성시킨 대중의 기억술의 단초를 보여준다. 그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실패로 말미암아, 대중에게 실패는 곧 더욱 온전한 성공의 흔적임을 알려주었다. 대중은 엘리야로 말미암는 온전한 성공의 담론을 창조하는 주역으로, 곧 ‘민중’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사건을, 그 속에서 영웅이 탄생하고 그의 뒤를 추종함으로써 거대한 변화가 이루어지는 사건을 통해 단박에 확보되는 그런 성공의 파노라마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약간의 성공과 약간의 실패가 끝없이 교차되는 가운데 되는 듯 마는 듯 만들어지고, 끝없이 지양되면서 펼쳐지는 일상적 사건의 연쇄이다.

영웅은 없다. 메시아도 없다. 그러한 성공의 화신으로서의 ‘영웅/메이사/신의 죽음’에 관한 예언자적 성찰이 있을 뿐이다. ⓒ 웹진 <제3시대>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