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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마당] 신을 기다리는 시간 (오영애)

목회마당

by 제3시대 2016. 2. 22.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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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기다리는 시간




오영애



    삶은 늘 불투명합니다. 


   불투명함은 밤이며 집 없음이며 들떠 있음이며 열려있음입니다. 이것은 제 자신이 추구하는 삶이면서도 역설적으로 늘 제 자신을 고뇌하게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긴 시간 동안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데에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종교와 사회변혁에 관심이 있던 제게 자비와 정의의 선명함과 대조적으로 우리 안에 있는 신의 불투명함에 대한 분노이며 슬픔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안으로 파고드는 자발적 유폐와 유랑의 시간을 보낸 듯합니다.


    세상 속으로, 다시 서울에 온 지 2년이 지났습니다. 대학원에서 예술심리치료를 공부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은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많이 생각합니다. 작년 일 년 동안 예술치료 임상 겸 자원봉사를 다니면서 고민이 더 깊어진 것 같습니다. 정신병동의 조현병·조울증 환자들, 중도입국 새터민 아동들, 발달지체 성인들... 다양한 분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을 만나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특히, 운명과 신, 그리고 저의 신앙의 내용과 수준에 대해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그들이 현재의 상황이 이르게 된 이유에 대해 집착하고 온갖 이론과 학설을 적용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가습이 답답해짐을 느낍니다. 원인이 너무 복합적이고 불투명하기 때문입니다. 새터민 아이를 만나고 있자면 저 아이의 엄마는 무슨 이유로 탈북했으며, 중국 남자와 만나 결혼하고 왜 헤어졌을까? 한국에 홀로 와서 센터에 아이를 맡기고 막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그녀의 삶은 운명지어진 것인가. 한 아이의 지난 생애와 미래가 힘겨운 서사로 머리속으로 그려지면 마음은 더 불편해집니다. 그러면 운명과 업, 신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환청· 환시로 고생하는 조현병 환자들도 , 발달지체로 1-2세의 인지 기능을 유지하고 있는 성인들과 그 가족의 삶을 생각해도 그냥 원인을 알 수 없는 무력감을 느낍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어찌할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함을 느낍니다. 이제 다시 고민은 그들을 치료하거나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는가 하는 생각으로 바뀝니다. 무엇으로 치료할 수 있는가. 약물과 상담, 예술매체 등의 방법으로 과연 그들이 얼마나 더 편안해지고 행복해지는가 하는 고민이 듭니다. 어쩌면 어떤 이에게는 치료기법보다는 경제적 지원이, 어떤 이에게는 정보와 지식의 제공이, 어떤 이에게는 곁에 함께 있음이 필요한 듯합니다. 


    이렇게 끝없이 고민하다 보면 새벽이 옵니다. 요즈음은 마음이 아픈 사람이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의학기술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상담기법, 예술치료, 명상치료, 기치료, 스포츠치료 등 모든 취미 분야에 치료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하지만 삶처럼 치료도 불투명하고 모호합니다. 조금은 답답해집니다. 


   그러나 이 불투명함에도, 오랜 고민 끝에 오는 작은 깨달음의 빛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누군가를 돕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 자신이 스스로 돕고 있음을 그냥 알아준다는, 이해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더 건강해지고자, 편안해지고자, 두려움과 불안을 떨쳐버리고자 노력한다는 것을 그저 신뢰한다는 것, 기다리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냥 그들은 내게 다가온 인연이고 만남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린 시절, 신의 형상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피부색을 상상해보기도 하고 성별을 궁금해 하기도 했습니다. 커서는 신의 덕목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자유, 평등, 존엄, 자비, 정의...... 


    이제 제가 누군가를 치료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제가 누군가를 도울 수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 자신을 이해하려, 제 자신을 도우려 노력하며 누군가의 곁에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 다음은 신께 맡겨야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육체가 건강할 땐 탐욕이 생기는 경험을 합니다. 지식이 과할 땐 교만과 아집이 드러나는 경험을 합니다. 의식이 풍족하고 마음이 편안할 땐 우둔해지고 권태로워집니다. 그래서 어쩌면 자신의 영혼으로 이러한 상들을 점검하도록 신의 이름이 있는가 봅니다. 


   몸이 조금 아프고 지식이 조금 모자라고 마음이 가끔은 애통한 상태에서 영혼은 제 기능을 합니다. 본향에 다다르기까지 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기를 이 불투명함 속에 이 유랑 속에 늘 열려있기를, 기다림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제게 신의 형상은 ‘기다림’으로 옵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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