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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상대성원리 (오종희)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6. 2. 22.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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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성원리




오종희

(본 연구소 회원, 한백교회 교인)




쌍문동


  1988년 겨울 쌍문동 아파트에 입주하여 그 곳 주민이 되고 결혼 후 또 쌍문동서 애 키우고 살던 나로서는 <응답하라 1988>이란 드라마가 시작되고 가히 신드롬이라 할 만한 인기를 얻으면서 드라마 속에서 또 각종 매체에서 ‘쌍문동’이라는 동네 이름이 불려 질 때 마다 마치 내 이름이 공식적으로 불려지고 회자 되는 듯한 어색함을 느끼곤 했다. 

  응팔 여주인공 덕선이가 다니던 쌍문 여고의 모티브 격인 정의여고는 딸아이가 다니던 곳이고 드라마 중간 중간 방학동이니 광산슈퍼 사거리 같은 지명과 감포 면옥, 20-2번 버스 등 골동품 같은 쌍문동 아이템들이 TV속에서 나오니 왜 아니 신기 할까. 쌍문동서 배출한 가장 걸출한 인물이 ‘아기 공룡 둘리’일 뿐인, 언제 주목 한번 받아 보지 못한 서울 북쪽 끝 변두리 일 뿐이었던 곳이었으니 세간의 주목이 어색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응팔의 여주인공 덕선이가 성인이 된 후 결혼한 불알친구 택이와 나누는 대화에서 언제 우리 한번 쌍문동 찾아가 보자는 택이의 제안에 이제 그 동네는 더는 옛날 모습이 아니라며 주상 복합 건물이 들어서고 완전 다른 동네가 됐다는 덕선이의 대답은 정말 어색함을 넘어 무안하기 까지 했다. 이유인 즉 드라마가 재현했던 쌍문동 골목은 그야말로 지금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지금 쌍문동에 있는 아파트나 주상 복합 건물은 덕선이가 살던 그 때도 이미 있었고 다른 말로 하면 그 만큼 오래된 것들이고 다른 뭔가가 더 이상 들어서지도 않았고 그래서 쌍문동은 목동도 분당도 판교도 아닌 그냥 조용한 쌍문동일 뿐이다.  

   드라마 마지막 회에 덕선이네가 쌍문동 지하 셋방을 떠나면서 같은 동네 아파트로 이사 가지 않고 판교로 이사 갔으니 이제 덕선이네는 여보란 듯이 살고 있을 게다. 쌍문동 주민들이 하는 우스갯소리로 쌍문동은 한 번 들어오면 못나가는 곳이라 말하곤 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잘나가는 동네 집값이 천정 높은 줄 모르고 고공행진 하는 동안 쌍문동 집값은 제 자리 걸음만 했으니 서울 주소 딱지 붙이고 시골 땅값 내역으로 사는 곳이기에 쌍문동 집값으론 서울 번듯한 곳 어디에도 이사 갈 곳이 없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키우고 교육에 관심을 갖던 가정에선 으레 아이가 성장하기 시작하면 좀 더 힘 보태서 이사 가는 곳이 큰 학원가가 형성된 중계동이었고 교육에 올인 하겠다고 작정한 가정은 집 팔고 돈 더 보태서 대치동 전세로 가는 것이 90년대 중 후반부터 내가 겪던 쌍문동의 풍경이었다. 지금은 그 마저도 힘들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튼 아이를 키우며 그야말로 쌍문동에 남겨진 사람들은 일종의 패배감을 느꼈고 엄마들끼리의 모임에서도 ‘쌍문동 블랙홀’ 같은 자조 섞인 농담들이 오가 곤 했었다. 남겨진 나 같은 몇몇 극성 엄마들은 자녀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기 무섭게 차로 삼사십 분 걸리는 중계동 학원으로 아이를 내 돌렸지만 대부분의 엄마들은 비교적 조용했다. 그렇게 사는 내내 쌍문동은 대한민국 뜨거운 화두인 ‘강남’의 그림자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덕에 늘 고요함 그 자체였다. 

    물론 나의 쌍문동 이야기는 어디 까지나 내가 겪었던 좁은 상황 안에서의 이야기 일 뿐이다. 그래도 나는 언제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쌍문동이 좋았다. 내노라 하는 대형마트는 하나 없어도 아기자기한 상권이 없는 거 없이 다 갖춰 있고 도봉산에 우이동에 연산군 묘에 청심천에 솔밭에 집에서 슬리퍼 끌고 나와도 산책할 수 있는 곳이 넘쳐나는 곳이다. 나는 그 곳에 그만 정이 들 때로 들어서 며칠 여행을 갔다가 집에 올 때면 멀 찌기 도봉산이 보이기만 해도 가슴 언저리가 따뜻해 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반면 늘 그 곳을 떠나고도 싶었다. 누가 대놓고 뭐라 한 적은 없었지만 쌍문동에 산다고 말했을 때 거기가 어디냐고 물을 때면 수유리 지나서 의정부 가기 전에 있다고, 서울이란 지역 내에서의 쌍문동 좌표를 적나라하게 말해야 할 때 상대적으로 중심가에서 얼마나 먼가를 고백해야 할 때 나도 모르게 짜증이 밀려들어오곤 했다.  

    드라마 속에서 덕선이 언니 서울대생 보라가 학교 도서실서 깜빡 시간을 잊고 늦게 까지 공부하다가 고딩 남친 기다리는 쌍문동 골목으로 헐레벌떡 뛰어가는 모습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쌍문동서 서울대는 끝에서 끝 그것도 대각선으로 끝에서 끝이다. 족히 두 시간은 걸린다!

     강북 아주 많이 위 쪽 주민들에겐 자기 동네 이름에 스스로 변두리라는 이미지를 얹고 어느 정도의 박탈감을 느끼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1988년 쌍문동 아파트에 입주하던 시절을 떠 올릴 때면 꼭 생각나는 두 가지 그림이 있다. 하나는 우리 집 뒤 베란다서 보면 주변이 온통 아파트 공사판이었던 현장 한가운데 오두막 같은 허름한 집 한 채가 섬처럼 덩그러니 솟아있던 모습과 다른 하나는, 상가 건축현장 포크레인으로 깎아내린 작은 동산에 반쯤은 벼랑 밖으로 드러나고 반쯤은 땅속에 박혀있던 관짝이었다. 공사 중에 예상치 못하게 관을 건드리면서 꽤 오랫동안 작업은 중단되었고 그냥 그대로 시커먼 관짝이 대로변 언덕에 반만 박힌 모습은 정말 그로테스크했다. 

     섬처럼 남아 있던 허름한 집 한 채와 벼랑에 박혀있던 시커먼 관짝은 차라리 그냥 한 모습 같았다. 마치 아주 어렸을 적 아이들이 흙더미를 쌓아 단단하게 두드린 후 꼭대기에 긴 나뭇가지 하나 꽂아 놓고 한 사람 씩 번갈아가며 흙을 최대한 많이 씩 퍼 가다가 나뭇가지를 쓰러트리는 사람이 지는 흙 파기 놀이를 닮았다.

     조금만 더 흙을 퍼내면 쓰러 질 수밖에 없는, 안 쓰러지면 계속 파야 되는 가느다란 나뭇가지의 모습이 연상되었고 최대한 빨리 최대한 많이 집을 짓고 이익을 맛보려는 공급자와 소비자에게 홀로 남은 집 한 채와 관짝은 그저 더 많은 보상을 받으려는 약삭 빠른 땡깡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1988년 쌍문동 봉황당 골목의 따스한 환타지는 적어도 쌍문동 아파트 현장에는 전무했다.


서부이촌동


    어찌어찌해서 지금은 용산구에 산다. 정확히 말하면 이촌2동 즉 서부이촌동에 산다. 한강대교 동쪽에 있는 이촌1동 그러니까 동부이촌동과 한강대교 서쪽 서부이촌동은 행정 명칭 상 같은 동네이지 사실상 같은 동네라 할 수도 없다. 무자비한 도로에 가로 막힌 것도 그렇고 부촌인 동부 이촌동의 편리함에 서부 이촌동을 비교 할 수 없다. 새남터 성지가 말해 주듯 조선시대 사형 터 여서 풍수 지리적으로 뭔가 일이 꼬이는 걸까 재개발도 안 풀리고 이곳은 묘한 분위기가 물씬하다. 변변한 가게나 병원도 없고 생활하기에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하지만 내게는 정말 별천지같은 곳이다. 동네 골목 구석구석 도저히 서울이 아니고 2000년대가 아니다. 불발된 재개발을 증명하는 거인 같은 가림 막들이 몇 킬로미터 씩 둘러 쳐져있고 굉음을 내는 한강철교 밑과 다듬지 않은 한강 변 들판이 내게는 영감을 주는 터전 처럼 느껴진다. 사진기 하나 들고 나서면 서부이촌동을 즐거워하기에 흡족하다. 부디 재개발의 광풍이 더디기를 부디 한강변에 잔디를 깔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하지만 서부이촌동의 주민들도 서울의 중앙에 있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게 있나보다. 서울하고도 한 참이나 북쪽 쌍문동 부근의 주민들처럼 이곳의 주민들도 동네 이름에 스스로 무엇을 얹고야 마는 걸까 어느 택시 기사의 이야기인즉 주말 늦은 시간이나 연말 늦은 시간처럼 택시 잡기 어려울 때에 차창 밖에서 동네 이름을 외치는 손님들 중에 동부 이촌동 사람은 “동부 이촌동!”이라 외치고 서부 이촌동 사람은 “이촌동!”이라 외친다고 한다. 어떻게든 구별하고 싶은 쪽과 어떻게든 묻어가고 싶은 심리를 그 택시 기사는 간파했던 것이다.  

    하지만 누구에게 물어봐도 동부에는 없고 서부에는 누릴 수 있는 게 하나 있으니 그건 바로 불꽃 축제다. 강 건너편에 63빌딩이 있는 덕에 불꽃놀이 명당은 서부다. 그런데 지난 가을 기대했던 뻑지근한 불꽃쇼가 벌어지고 어떻게들 명당인줄 알고 모여 드는지 아파트 앞 강변 명당자리에 자리 잡고 텐트 쳤던 벌떼같은 구경꾼들이 빠져나가자 처녀지 같던 들판이 그만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억새 하나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폭격 맞은 벌판 꼴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쓰러진 억새와 비교할 수 없는 비극이 더 있었으니 축제를 위한 시설물들을 강위에 설치하던 조명 설치 업체 직원이 조명 장비를 옮기다가 그만 강에 빠져 익사한 사건이다. 더욱이 그의 시신은 불꽃축제가 끝난 다음 날 63 빌딩 인근 강변에서 발견되었다. 


* 누구의 꽃상여인가

 

    더 먼 곳으로 흘러가지도 않고 그가 빠진 그 곳 근처 그대로 시신은 맴돌았을 것이고 그 곳 위에서 고스란히 행사는 당연한 듯 진행되고 우리는 그의 주검을 물속에 두고서 화려한 불꽃 쑈에 환호하고 즐거워했던 것이다. 

    뉴스를 접하는 순간 말문이 막히고 식은땀이 흘렀다. 도대체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건가. 불꽃 보며 지르던 비명과 웃음은 다 무엇인가. 축제를 준비하다 죽은 주검을 찾기도 전에 그 위에서 열리는 것이 축제라고 할 수 있는가. 유가족에게 그것은 분명히 가슴을 찢고 고막을 찢는 악마의 진혼곡이었을 터 내가 지른 비명이 자꾸만 내 귀에 다시 되 돌아왔다. 


상대성원리


    무엇이 축제를 멈출 수 없게 만드는가. 혹은 무엇이 흙 파기 게임을 멈출 수 없게 만드는가. 기어이 주검 위에서 불꽃을 터뜨리고 보금자리를 지키려는 사람들을 땡깡쟁이로 모는 이 시스템은 무엇인가.

    세상은 온통 상대적 박탈감이란 신 빈곤의 늪에서 허덕인다. 그것은 무시하기도 버거운 무게로 현실적 고통인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 신 빈곤의 피해자들은 축제나 게임을 멈출 생각이 없다. 분노할 생각은 더더욱 없다. 내가 나보다 잘난 상대 때문에 초라하듯 어느 순간 나보다 못난 상대 때문에 내가 빛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가 처한 상대적 자리가 바뀌길 바랄 뿐이지 시스템에 불만 없다. 

    불과 얼마 전 까지만 해도 한국인들은 못 먹어도 고라는 말처럼 순응하지 않고 일단 들이 받는 기질이 있다고, 그런 아웃사이더의 무모함과 패기가 가까운 일본과는 다른 면이라는 말을 제법 했었다. 그런 말들 속에는 고래 힘줄 같은 한국의 에너지를 긍정하는 뜻이 담겨 있었는데 요즘 만들어지는 자기 혐오적 유행어에는 극단적인 무력감만 느껴질 뿐이다. 상대적 하층에 속한 내 위치만 불행할 뿐인 거다. 그런 상대적 피해자 코스프레는 죽음이라는 ‘절대’를 보지 못하게 한다. 

    누가 죽어 나가도 누가 터전을 유린당해도 번쩍이는 불꽃 축제와 흙 파기 게임이 이 세상 전부이자 자연으로 알고 거침없이 진행하는 것이 좋다고 수긍한다. 

    그리고는 응팔의 마지막 회를 넘기며 허망하게 한 마디 남기는 것이다. 


    “덕선이네가 판교로 이사 가듯 나도 그 때 그랬어야 했었는데! 아이고 내 팔자야!”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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