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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마당] 두번째 숨 - 영화 도쿄소나타를 본 뒤 (손성호)

목회마당

by 제3시대 2009. 5. 7.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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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숨
- 영화 도쿄소나타를 본 뒤 -

손성호
(밀알교회 목사)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너희에게 평안이 있으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시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라” (요한복음 20:19-20)

힘든 교우들이 많다. 가장 많은 이유는 물질적인 어려움이고, 그 다음 이유는 직장생활이다. 덧붙이면 자녀걱정인데, 그 또한 물질적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종종 이메일이나 문자메시지를 통해 비밀스레 건네지는 교우들의 고민과 기도제목은 솔직히 ‘노골적(?)’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적어놓는 ‘목회 노트’속 하나님은 풍요의 신이며, 수호신이고, 가끔 두려운 분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설교강단은 한층 더 현실 언저리를 맴돈다. 삶과 신앙을 떼어놓을 수는 없겠지만, 복음이 관념이 되고, 추상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설교자의 고뇌는 더욱 깊어간다. 늘상 ‘생활신앙’을 외치고, ‘생명윤리’ ‘교회일치와 연합을 위한 에큐메니즘’ ‘문화와 과학’ 등 21세기 신학적 화두들을 붙잡고 늘어지지만, 이를 설교와 목회로 추구되는 교회현장에 적용시키고자 할 때엔 더 진지하고, ! 끈기 있는 ‘우려냄’이 요청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설교는 ‘삶과 신앙’을 평행시키는 ‘철로’가 되고, 목사는 점점 더 교인들과 다른 길을 가게 된다. ‘내가 아직 젊기 때문일까...’ 혼자 되묻는다. 물질적인 어려움이나 직장생활의 고충을 토로하는 교인들에게 ‘잘 될꺼다’ ‘기도해보자’ 정도의 대답을 하고나면 찜찜하다. 그러나 마땅히 해줄 수 있는 말도 없다. 한번은 40대 후반 집사님 한 분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그가 요즘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단다. 회사에 정리해고 바람이 불었는데  간부가 아니다보니 언제 정리해고를 알리는 이메일이 날아들지 모른다는 것이다. 문제는 회사에서 느끼는 불안이 고스란히 가정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아내와 아들들도 불안해 한다. 가장으로서의 위치가 흔들리고, 아내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그도 무언가 다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다 했다. 그가 보낸 메시지의 마지막은 ‘기도해주세요’였다. 


요즘 영화를 자주 본다. 대학시절 학보사 문화부기자를 맡으면서 취재를 빌미로 거의 매주 영화를 보는 행운을 누렸다. 장르불문. 닥치는 대로 보았다. 그 덕에, 나는 나만의 아마츄어 영화독법을 가지게 되었다. 그중 하나, ‘감독은 역할의 비중에 상관없이 영화 속 인물 중 한 사람에게 자신을 심는다. 그리고 그 사람의 대사나 행위를 통해 설(說)을 푼다’ 요즘은 영화관련 사이트마다 관객이 적어놓은 ‘극중 명대사’들이 있어 재미가 감소됐지만, 1시간 30분 내내 신경을 곤두세우고 ‘인물’이나 ‘대사’를 긁어내는 ‘숨은그림찾기’는 참으로 재미난 일이었다. 최근에 ‘도쿄소나타’라는 영화를 봤다. 예상대로 개봉관은 없었고, 1시간 가까이 골목을 헤매다 겨우 상영관을 찾았다. 영화포스터는 헐리우드 영화 ‘어거스트 러쉬’를 연상케 한다. 어린 소년이 피아노 앞에 앉아있다. 영화를 수입하고 배급한 회사의 홍보 전략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홈페이지를 통해 본 이 영화의 일본판 포스터는 달랐다.  부모와 두 아들, 네 식구가 식탁에 앉아있다. 하지만 식탁에 앉아있다는 사실 말고, 그들이 가족임을 보여주는 어떤 다른 이미지도 보이지 않았다. 예상대로 감독 ‘구로사와 기요시’는 영화에 대한 설명을 통해 ‘일본가정, 일본사회, 21세기’를 함께 언급한다.
  
“내가 지금 가장 관심 있는 주제는 ‘진정한 21세기는 과연 어떤 시대인가’이다. 21세기는 왜 매우 혼란스럽고 어지러운가? 그것은 왜 우리가 이전 세기에 가졌던 미래의 모습과 크게 다른가? 일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그 대답을 찾는 것은 어렵다. <도쿄 소나타>는 내가 직면한 이 복잡한 문제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나는 그것이 나에게 새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나는 현대 도쿄 어디서든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의 작은 드라마를, 가능한 작은 과장과 함께 묘사하려 노력했다.” (무비위크 2009. 3)


‘우리 가족은 모두 거짓말쟁이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생 켄지는 엄마가 건네준 급식비 봉투를 들고 피아노교습소를 찾는다. 엄격한 가장인 아빠가 반대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형은 출구 없는 미래를 불안해한다. 그는 결국 아무도 모르게 외국인의 입대를 허용한 미군에 지원한 뒤 ‘신원보증서’를 들고 집으로 온다. 엄마는 가정주부다. 가족들을 위해 도너츠를 만들고, 청소를 하고, 저녁식사를 준비한다. 입대지원서를 들고 온 큰 아들의 질문에 가정주부로 사는 것도 충분히 행복하고 보람 있는 일이라고 말하지만, 실상 그녀는 외롭다. 빈 집, 쇼파에 홀로 누워 두 팔을 허공에 뻗으며 읖조린다. ‘누가 나를 좀 잡아줘’ 한편 제법 큰 의료기 회사의 서무과장이었던 아빠는 고학력 저임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중국인 직원들에 밀려 실직 당한다. 하지만 매일아침 정장을 차려입고 집을 나선 뒤, 동네 공원 무료급식소를 찾아 점심을 해결한다.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백화점 청소용역 노동자가 된 아빠가 엄마와 마주치는 장면이다. 아빠는 엄마를 피해 도망친다. 그리고 엄마는 바다로 간다. 더 이상 길이 없는 모래사장 위에 차를 세운 뒤 망망한 바다를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여기서부터 새로운 길이 생겼으면 좋겠어’ 같은 시간, 지나던 트럭에 치여 길 위에 쓰러진 아빠가 울먹이며 중얼거린다. ‘어떻게...어떻게 하면, 여기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어떻게 하면’

그날 두 시간 여 동안, 나는 아빠가 되고, 엄마가 되고, 큰 아들이 되고, 막내아들이 되었다. 네 사람 모두가 우리의 분신 같았고, 미래 같았다. 권위를 상실해가는 아버지는 불안하다. 무관심에 길들여져 버린 엄마는 외롭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큰 아들은 무기력하다. 막내아들의 눈에 비친 부모와 학교 선생님은 말과 행동이 다르다.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언제나 말하려 든다. 그러나 정작 그들의 말은 그들의 행동과 다르다. 켄지는 고립되어 간다.

결국 영화는 이들을 ‘가족’으로 다시 묶어주고, 이들 각자가 ‘다시 시작’하게 하는 순간으로 엔딩을 선택했다. 그러나 영화 속 주인공들이 찾아낸  ‘새로운 길’과 ‘새로운 시작’은 혁명적이지도, 격변적이지도 않았다. 다만, 그 순간 나는 ‘느리고 긴 호흡’으로 그들에게 다시 찾아온 ‘평화’를 느낄 수 있었다.

뱀은 몸이 자라고, 비늘이 닳게 됨으로 반드시 허물을 벗어야 한다. 새 비늘옷이 낡은 비늘옷 아래에서 형성되고 있는 동안, 뱀은 안전한 곳으로 물러나 숨어 지낸다. 재미있는 사실은 눈꺼풀도 허물을 벗어야 하므로, 이 무렵에는 눈도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새 껍질이 완성되면, 낡은 허물을 장갑 벗듯 벗어버린다. 그제서야 눈도 다시 뜬다. 살아가며 하나의 변화를 겪을 때, 말하자면 낡은 허물을 벗거나, 벗어야 할 때 눈도 함께 흐려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 같다. 바울은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큰 빛을 보았고, 내적변화를 겪었다. 이때 그는 ‘눈은 떴으나 앞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마침내 낡은 허물을 벗어버리던 순간, ‘그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며 다시 보게 되었다’고 하지 않던가. 변화가 필요할 때, 새로움이 간절할 때, 눈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어쩌면 그때야말로 먼 곳이 아닌 가까운 곳에 내 시선을 기다리는 돌파구가 있지 않을까 말이다.

요한복음 20장은, 예수가 처형당한 뒤 제자들이 얼마나 무서운 공포에 휩싸여 있었는지 보여준다. 그들은 한 방에 모여, 문을 걸어 잠구고 있었다. 이어질지도 모를 죽음의 연좌를 피하고 싶은 마음은 스승의 죽음을 애도하고, 회상할 여지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 침묵과 공포의 순간, 이 폐쇄된 공간속으로 예수가 들어온다. 그리고는 두 번이나 ‘평화의 인사’를 건넨다. 공포에 공포가 더해진 상황, 제자들에게 ‘평화(평강)’는 역설 중에 역설이었을 것이다. 그리곤 뜻 모를 행동을 한다. 제자들을 향해 숨을 내쉬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성령을 받아라’.

나는 이것을 ‘두번째 숨’이라 이름 짓고 싶다. 여기서 예수가 말한 성령은 무엇이었을까? 분명 사도행전에 기록된 ‘불의 혀’같이 찾아온 그 성령은 아니었을 것 같다. 굳이 구분하자면, 예수는 제자들에게 호흡을 불어넣었고, 이때 그들 속으로 성령이 들어갔다. 그것은 ‘생명’이었다. 반면 사도행전의 그 영은 ‘능력’이었던 것 같다. ‘생명’과 ‘능력’은 공존한다. 생명이 있어야 능력이 있을 수 있고, 능력이 있음으로 생명은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이 앞선다. 예수는 먼저 생명을 불어넣었다. 흙으로 형상 지어진 사람의 모양에 첫 번째 숨을 불어넣은 야훼처럼, 그도 두려움과 공포로 빚어진, 살아있으나 죽은 것 같은 폐쇄된 자아들을 향해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은 것이다. 그것이 제자들의 환상체험이었든, 부활한 예수의 현현이었든 그것을 밝히는 것은 무의미하다. 다만, 이 무겁고 답답한 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그리고 혹시라도 ‘새로운 시작’을 모색하는 모든 분들께 ‘성서가 이렇게 말하더라’고 조심스레 건네 보는 것이다. 호흡을 불어넣은 뒤 예수는 제자들에게 호언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여 주면 사하여질 것이요, 사하여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요 20:23)

영화가 끝나고 한참동안 평온히 숨을 내쉬며 앉아있었다. 그리고 이메일을 보낸 그 집사님께 문자를 보냈다. ‘집사님 부부 데이트 한번 하시죠. 영화 어떠신가요?’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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