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비평의 눈] 아직도 만들어야 할 길 : 여성목사 안수와 양성평등의 세상을 향하여 (김혜란)

페미&퀴어

by 제3시대 2016. 3. 21. 12:28

본문


아직도 만들어야 할 길 

: 여성목사 안수와 양성평등의 세상을 향하여





 

김혜란
(캐나다 세인트앤드류스 대학, 실천신학 교수)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2016년 3월 8일 한국에서는 어떤 행사들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사는 카나다에서는 이 날만이 아니라 전후1주일 내내 이 날을 기리는 많은 행사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국가 공영 방송인 CBC라디오에서는 매 시간 방영하는 기존 프로그램들이 여성문제를 포커스로 해서 다양한 여성인물과 여성문제들을 다루었고, 여성작가들의 책들과, 여성들이 만든 영화, 음악, 다큐멘터리가 소개되었다. 

       세계 여성의 날은 1908년 미국 열악한 작업장의 환경때문에 발생한 화재로 희생당한 여성노동자들을 기념하는 시위와 궐기로부터 그 기원을 찾는다. 1910년 제 2 인터내셔날 노동 여성회의에서 이 미국화재 사건이 보고되었고 독일의 노동운동가 클라라 체트킨과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매년 한 날을 정해서, 전 세계의 모든 여성들이 자신의 평등권과 노동권을 주장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 안이 통과되면서 1911년 3월 19일 유럽과 북미 전역에서 첫 “세계 여성의 날”이 지켜졌다. 1913년 3월 8일로 날짜가 바뀌었고, 사회주의자들과 페미니스트에 의해 여성의 노동권과 평등권을 주장하는 정치적 행사로 오늘날까지 자리잡게 되었다.[각주:1] 당시 한국에서도 이 날이 “국제부녀절” 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어 1920년부터 자유주의계열과 사회주의 계열 여성지도자들에게 의해 준수되었다. 일본제국주의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1945년 해방까지 공식적인 행사들이 쭉 진행되었다. 오히려 일제강점기간보다 해방이후 국제 부녀절을 지키는 운동은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그 이유는 해방후 반사회주의 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사회주의 경향을 띠었던 세계 여성의 날이 소위 용공그룹으로 정부의 의심을 받게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승만정권부터 박정희, 전두환 독재 정권에 이르기까지 약 40년간 공개적인 행사를 못했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이 일어난 이후에서야 본래의 목적을 회복하면서 세계 여성의 날은 여성의 노동권, 인권을 신장하는 매개체로 자리잡게 된다.[각주:2]  

      내가 사는 카나다로 잠시 돌아가보자. 내가 사는 지역은 대평원지역으로 알려진 싸스카추완주다. 카나다 서쪽에 속한 대평원 주 (마니토바, 싸스카추완, 알버타) 에서 처음으로 여성이 참정권을 행사하도록 법안이 통과된 해가 1916년이다. 100주년을 기념하는 올 해가 그래서 이 지역에서 특별히 더 의미가 있다. 토론토가 있는 온타리오주와 밴쿠버가 있는 브리키시 콜롬비아는 1917년에, 다른 동쪽지역 주들은 1918년 1919년에 법안이 통과되었고, 그 여새를 몰아 전국적으로 연방차원에서 1919년에 여성의 참정권이 통과되었다.[각주:3]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서쪽 대평원주에서 가장 선도적으로 여성의 참정권 문제를 해결했을까? 누구 아니 어떤 지도력이 발휘된 것일까? 여기서 한 기독교 여성을 소개한다: 넬리 맥클렁(Nellie McClung, 1875-1951)은 온타리오에서 태어나 7살때 마니토바주로 이사를 하고 젊은 시절을 보낸다. 독실한 감리교 기독교인—나중에 카나다 연합교회— 이었던 넬리는 의식있는 다른 여성들과 함께 음주로 인해 벌어지는 사회적 문제 (여성 폭력, 실업)를 공론화시킨다. 그러나 여성으로서 이 문제를 정부차원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을 할 수 없다는 현실에 부딪친다. 왜냐하면 여성은 법적으로 인간이 아니기에 (women are not eligible persons), 즉, 참정권이 없다는 이유로, 여성들의 목소리는 번번히 묵살이 되었다. 정치적으로 여성의 입장을 담아낼 법제화 기제가 없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넬리는 여성의 참정권, 인간으로서 양성평등권을 위해 지도력을 행사한다. 마니토바주 수도인 위니펙에서 넬리는 창조적이고 해학적, 풍자적인 방법들 (연극)을 이용해서 대중들을 의식화하고 대중들의 지지를 얻는다. 결국, 대평원주인 마니토바주에서 카나다에서 제일 처음으로 여성 참정권을 획득하게 된다. 같은 해 마니토바 옆 주인 싸스카투완과 알버타주가 이 법안을 통과하게 된다 그 후 넬리는 알버타 주로 이사를 하고, 그 주에서도 역시 여성의 인권, 정치적 권리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한다. 특별히 선거권을 넘어서 여성이 상원의원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운동을 이끌어 1929년 첫 여성 상원의원을 배출해 낸다.[각주:4]  

       넬리 맥클렁이 이렇게 양성평등을 주장하고, 여성의 권리를 위해 예언자적 리더쉽을 발휘할 수 있었던 데에는 기독교 신앙과 신학이 깊게 내재했다. 창세기 1장 26-27장에 근거해서, 남자, 여자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그 믿음,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차별하지 않는다는 신학이 넬리의 삶 깊숙히 자리잡고 있었다. 더불어 넬리와 뜻을 함께 한 대다수 지도자 여성들이 함께 교회를 다니면서 신앙 생활을 믿음의 동역자들이 있었기에 넬리는 선도적으로 아무도 걷지 않았고, 상상할 수 없었던 그 길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신학자 캐서린 켈러는 중국 철학자 Lux Xun를 인용하면서 희망을 길과 빗대어 설명한다. “희망은 긍정을 하는 것도 부정을 하는 것도 아니다. 희망은 시골 한 켠에 어느날 나타난 길과 같다. 원래 길은 없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같은 곳을 밟고 걸으면서, 하나의 길이 나타난 것이다.”[각주:5] 희망이란 수많은 이들의 뜻있는 수고과 반복적인 실천, 행위, 운동에 의해서 생겨난다는 귀한 지혜를 말해주고 있다. 즉, 포기하지 않는것, 한번 하고, 그만두는 일시적 행위가 아니라,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과정이 결국 새로운 길, 새 세상을 만든다는 교훈이다.

       2016년은 카나다 연합교회 역사에서 또한 특별한 의미가 있는 해이다. 올해 2016년은 카나다 연합교회 여성 목사 안수 80주년을 기리고 축하하는 해이기 때문이다. 리디아 그루치 (Lydia Gruchy)는 카나다에서 최초로 신학교를 졸업하고 (1923)[각주:6] 카나다연합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여성이다. 리디아 그루치가 여성으로서 목사 안수를 받는 길 역시 험난한 과정이었다. 졸업 후 아무도 가지 않는 교회에서 이미 아주 성공적으로 하고 있었던 목회를 하고 있던 리디아에게 안수를 줄 것을 싸스카추완 연회는 총회에 안건으로 올렸다. 그 1926년 총회는 이 안건으로 발칵 뒤집혔다는 보고가 있을 정도로 반대와 저항은 컸다. 리디아는 휴거노 (프랑스 개신교인) 출신으로 프랑스 가톨릭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피신을 갔다가 싸스카추완주로 이민을 온 가정에서 태어났다. 불어가 모국어지만 영어를 배워야 하는 소수민족의 경험을 경험한 리디아는 자신보다 더 어려운 조건에 있는 피난민들(러시아 출신 기독교인들)을 위해 교육을 했고, 사회적 소수자들을 위해 여러 분야의 목회를 했다. 10년 간의 소위 Xun 철학자가 말하는 희망의 운동을 해서 드디어 안수라는 새로운 길이 만들어졌을 때, 그 길을 처음 딛게 되는 영광을 안은 리디아의 소감은 너무 겸손했다: “나는 안수 달라고 요청한 적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나를 들어 쓰셨고, 교회는 그 하나님께 응답을 했을 뿐이다.”[각주:7] 이 희망의 운동에 애를 쓴 여성들 중에 핵심 지도자는 누굴까? 넬리 맥클렁이다. 그는 교회안에 팽배한 성차별을 이렇게 날카롭게 지적한다. “목회는 너무 어렵다고 그래서 여성은 할 수 없다고, 여성이 목회를 할 경우 교회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남성 설교자가 많은 데 굳이 여자까지 설교를 시킬 필요가 있느냐고, 이런 모든 이유가 성서 (사도바울 서신) 에 있기에 정당하다고 말한다. 여성 상원을 배출하는 이 시대에 금녀의 집이 두곳이 있다. 이는 바로 교회와 술집이다.”[각주:8] 더불어 리디아가 신학교육을 받도록 물심양면 애를 쓴 신학교 총장 에드몬트 올리버 (Edmond Oliver, 나중에 카나다 연합교회 총회장을 역임) 등 남성 지도자들의 역할이 컸다. 

       내가 3월의 글 주제로 세계 여성의 날로 잡고 글을 쓰면서 넬리 맥클렁과 리디아 그루치 카나다 여성 기독교 지도자를 언급한 데에는 또 한가지 이유가 있다. 2010년 세계개혁교회 연합 (World Communion of Reformed Churches, WCRC)이 첫 총회를 하면서 결단한 안건이 있는데, 이는 소속된 모든 교회들이 바로 여성의 목사 안수 문제와 성평등의 문제를 진지하고 신학적으로 다루자는 내용이었다. WCRC은 약 8천만명의 기독교인들을 묶어주는 에큐메니컬 연합체로서 전세계 약 100여개 나라의 225개 교단들이 함께 하는 개신교 최대 연합조직이다.[각주:9] 이런 안건이 나오게 된 배경은 명백하다: 교회 안에 성차별이 심각하며, 여성에게 목사 안수를 주지 않는 교단들이 현저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그 총회 안건을 받들어 지난해부터 다음 2017년 ( 종교 개혁 500주년 기념의 해)를 준비하면서 여성의 목사 안수 문제와 양성평등의 문제를 신학적이고, 성서적으로 다루는 노력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225개 모든 교단들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안수를 주지 않는 차별의 장벽을 제거하는 그 희망을 꿈꾸고 있다. 과연 내년 2017년 그 희망의 길이 만들어질까? 종교개혁의 참 뜻을 성찰하고 이어가는데, 여성의 목사안수와 성차별이 어떻게 연관되는가?  

       한 지역의 인재가 불러낸 고통의 불씨가 죽지 않고 동기 세대들에 의해 살아났다. 그렇게 세계 여성의 날이100년이 지난 오늘까지 과거의 의미를 되집고 현재를 성찰하는 기회로 자리매김을 한 것은 참 감사한 일이다. 한 지도자의 예언자적 희망과 그 희망의 푯대를 함께 들고 걸어간 수많은 지도자들의 발걸음으로 여성목사 안수의 길이 자리매김이 되었고, 우리는 그 단맛을 누리고 있다. 그를 위해 애쓴 우리 선배들의 노고를 기억하자. 그러나 단맛뒤에 씁쓸함이 공존함을 잊지 말자. 우리에게 아니 우리 다음세대를 위해 우리가 걸어내야 할 몫이 있다.  

       이미 앞서 언급한 것처럼 새로운 길을 만들어내는 일은 엄청나게 많은 이들의 발걸음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만들어진 길이 비뚤어지지 않도록, 아니, 그 길때문에 또 다른 소외와 차별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데는 더 많은 이들의 땀이 흘러야 한다. 1916년부터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여성의 참정권이1919년에 걸쳐 일어났다고 앞서 언급했다. 그러나 해당되는 여성은 오직 백인 여성들이었다. 어찌보면 카나다 여성 참정권 운동은 백인우월주의의 잔재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유색인종 여성들과 원주민 여성들은 제외되었고 이들에게 참정권이 주어지기까지 또 수십년의 피나는 수고를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각주:10] 길은 만들어졌으나 온전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다른 소수들을 배제하는 댓가를 치루고 얻은 길이었다. 우리 신앙의 여정은 그래서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끝내선 안된다.  

       이제 사순절을 보내고 곧 부활절을 맞는다. 이 글을 마치며 안치환의 ‘마른잎이 다시 살아나’ 노래가 떠오른다. 고문익환 목사님은 이 노래를 부활의 노래라고 칭하시고, 평양 봉수교회에서 손수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세계 여성의 날, 여성 목사안수, 양성평등의 불씨를 살려야 할 몫은 이제 우리 세대에게 주어졌다. 마른 잎 다시 살아나 푸르른 하늘을 보는 것처럼, 마른 잎 다시 살아나 이 강산을 푸르게 하는 살리는 일을 위해 부활의 영의 도움을 청하자.  



ⓒ 웹진 <제3시대>

  1. 정유진. '세계 여성의 날'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경향신문. 2015년 3월 8일. [본문으로]
  2. 民族(민족) 民主(민주) 民衆(민중)과 함께하는 女性(여성)운동. 매일경제. 1985년 3월 11일. [본문으로]
  3. http://www.cbc.ca/strombo/news/women-the-right-to-vote-in-canada-an-important-clarification.html [본문으로]
  4. http://www.canadahistoryproject.ca/1914/1914-07-mcclung.html [본문으로]
  5. Catherine Keller, Apocalypse Now and Then (Boston: Beacon, 1996), xiv. [본문으로]
  6. 그 최초 여성 신학생을 배출한 학교가 내가 속한 St. Andrew’s College 이고, 나는 이 신학교에서 리디아 그루치를 기리면서 만들어진 석좌교수자리, 리디아 그루치 실천신학 교수로서 일하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 [본문으로]
  7. Patricia Wotton, “With Love, Lydia: The Story of Canada’s First Woman Ordained Minister,” (Friesens, Manitoba, D & P Wotton, 2012), 114. [본문으로]
  8. Mary Hallett, “Nellie McClung and the Fight for the Ordination of Women in The United Church of Canada,” Atlantis (Spring 1979): 11, 14. [본문으로]
  9. http://new.wcrc.eu.server3.reformiert-info.de/ [본문으로]
  10. http://section15.ca/features/news/1997/05/30/women_take_right_vote/. 유색인종은 1948년, 원주민여성은 1960년에 비로소 선거권을 획득했다. [본문으로]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