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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정보 : 관용 이후의 선교 3] 말이 말 같지 않은 시대의 말에 관하여 (홍정호)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6. 3. 21.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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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 이후의 선교 3]



말이 말 같지 않은 시대의 말에 관하여




홍정호

(신반포감리교회 목사)




맹세의 쇠퇴, 거짓말의 전성시대


    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알바생을 대상으로 거짓말에 대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알바생들이 1위로 꼽은 사장님의 거짓말은 “일 잘하면 월급 올려줄게.”(28.1%), 알바생들이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은 “하나도 안 힘들어요, 괜찮아요.”(32.0%)인 것으로 드러났다.[각주:1] 남녀를 대상으로 한 ‘연인 사이 거짓말’도 있다. 국내 한 결혼정보업체가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남자는 “이제 집에 간다.”(44.3%), 여자는 “화 안 났다”(39.2%)는 거짓말을 가장 많이 하는 것으로 조사됐다.[각주:2]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다.


    기꺼이 속아줄 수 있는 거짓말과는 달리 분노와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거짓말도 있다. 타인의 삶을 위기와 파멸로 몰아넣는 거짓말이다. 선거철 공약(公約)은 결국 ‘공약’(空約)에 불과하다는 반복 학습의 결과 정치권의 말은 오늘날 한국인이 가장 신뢰할 수 없는 집단의 말로 인식되고 있다.[각주:3] 또한 비리를 일삼는 이른바 ‘지도층’의 말을 감싸고도는 듯 보이는 형사사법기관들의 행태는 법원과 검찰, 경찰의 말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를 낙제점 수준으로 끌어내렸다.[각주:4] 여기에 종교지도자연 하는 이들의 말은 구태여 보태지 않겠다. 믿을 말이 없다. 바야흐로 거짓말의 전성시대다.  


    아감벤(G. Agamben)은 그의 책『언어의 성사(聖事)』에서 우리시대를 ‘맹세의 쇠퇴기’로 명명한다. 말과 사물(사태)과 행위를 하나로 묶어주던 맹세가 쇠퇴한 이 시대를 아감벤은 “인간성이 어떤 탈구 앞에 처해 있”[각주:5]는 위기의 시대로 진단한다. 맹세가 사라지는 한편에는 벌거벗은 삶으로 축소되는 ‘살아있는 존재자’(the living being)의 들리지 않는 말이, 다른 한편에는 책임을 벗어던진 ‘말하는 존재자’(the speaking being)의 공허한 말이 메아리친다. 자기 말에 ‘목숨’을 걸 필요가 없는, 오직 말하기 위해 존재하는 ‘말하는 존재자’의 시대를 떠도는 말은 ‘그냥 하는 말’, ‘하나마나 한 말’, ‘해야 돼서 하는 말’, 즉 빈말이다.


    신앙(신학)의 문제는 빈말이 지배하는 맹세의 쇠퇴기가 ‘독신의 시대’(the age of blasphemy)라는 데에 있다. 아감벤은 “시원적 형태의 독신은 하느님께 가해진 모욕이 아니라 그의 이름을 부당하게 입에 담는 것”[각주:6], 즉 신의 이름을 허투루 부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늘에 대고 쌍욕을 해대는 사람보다 입에 발린 말로 찬양하는 사람이 ‘시원적 형태의 독신’에 더 가깝다는 지적이다. 생각해 보니 예수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21)


   오늘날 교회 안의 얼마나 많은 말들이 맥락으로부터, 혹은 말의 사태로부터 분리된 채 허투루 불리고 있는가? 말과 사태와 행위를 하나로 묶어주는 충실한 맹세의 말, 그 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는 말이라야 언어는 성사(聖事)가 된다. 그러니 ‘나는 차라리 입을 다물어야겠다.’고 생각하다가도 또 이렇게 손가락을 놀리고 있으니, 딱하다고 해야 하나 용감하다고 해야 하나. “의미화의 연관으로부터 풀려난 신의 이름은 공허하고 의미 없는 말, 곧 독신이 되며, 바로 이렇게 의미로부터 떨어져 나와 부적절하고 사악한 용도로 쓰일 수 있게 되는 것”[각주:7]이라는 아감벤의 일침은 전문가로서의 목사 혹은 직업으로서의 신학자의 불가능성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말함과 피함 사이


    빈말, 특히 남을 해할 목적으로 한 거짓말의 병폐를 보여주는 성서의 대표적인 예는 ‘나봇의 포도원’(「열왕기상」 21:1-19) 이야기 일 것이다. 농민 대중의 몰락을 억제하고 그들의 지위 복원에 정치적 관심을 기울였던 요시야 개혁세력의 관점을 반영하는 문서인 「열왕기상」에 실린 이 이야기는 법을 통한 대중의 주체화(김진호)를 시도하는 데 있어서 ‘언어’의 문제, 특히 ‘말’을 매개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해석적 개입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그동안 스스로를 ‘말’의 주체로 여겨 온 왕과 귀족과 사제세력의 모순과 기만성을 폭로함으로써 대중을 말의 주체이자 통치의 주체로 세우는 것이 그들 개혁세력의 목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패망한 북이스라엘을 배경으로 한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가 요시야 개혁세력의 문헌에 등장하는 이유이다.


    나봇의 토지에 대한 강탈은 ‘거짓 증언’을 매개로 교묘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아합이 나봇을 설득하는 데 실패하자 그의 아내 이세벨이 문제해결사로 나서 성읍의 ‘원로들’과 ‘귀족들’에게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냈다. 거기에는 이런 ‘지령’이 담겨 있었다.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게 하시오. 그리고 건달 두 사람을 그와 마주 앉게 하고, 나봇이 하나님과 임금님을 저주하였다고 증언하게 한 뒤에, 그를 끌고 나가서, 돌로 쳐 죽이시오.” ―「열왕기상」 21:9-10


    이세벨의 계략은 성공했고, 나봇은 ‘하나님과 임금님을 저주’한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 바깥으로 끌려 나가 돌에 맞아 죽었다. 아합은 포도원을 거저 얻었다. 무고한 아합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이 일로 ‘이세벨’(Jezebel)이라는 이름은 오늘날까지 서양문화에서 ‘악녀’의 대명사로 여겨지고 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세벨의 악행에 대한 고발은 타종교인, 여성, 외국인에 대한 혐오를 정당화하는 ‘성서적’ 근거로 종종 활용되기도 한다. 그런데 페니키아 출신의 이방 여성인 이세벨에 대한 악마화(demonization)가 이 이야기의 주제는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나봇의 이야기는 말의 주체로 여겨져 온 이들의 기만성을 폭로함으로써 농민대중을 ‘말’과 ‘법’(통치)의 새로운 주체로 호명해 내기 위한 요시야 개혁세력의 정치적 기획의 연속선상에서 놓인 정치적 우화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질문이 생긴다. 이세벨은 ‘그녀의 정의’를 실행한 게 아닌가? 절대 주권자인 왕의 아내이자 종교‧문화적으로 다른 배경에서 성장한 이세벨의 입장에서는 왕의 아내로서의 ‘마땅한’ 권한행사를 포기하면서까지 실익(實益)을 양보해야 할 어떤 명분을 찾을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세벨의 정의는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줄 뿐이다. 그렇다면 다시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세벨이 ‘그녀의 정의’를 실행한 것이라면 나봇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가? 그녀는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를 실행했고, 나봇은 목숨과 재산을 잃었다.


법의 말과 '아마도'의 정의


    빈말, 혹은 거짓말에 둘러싸인 진실을 헤쳐 정의에 이르는 길이 험난한 까닭은 그 ‘말’이 ‘거짓’임을 판단할 수 있는 명확하고 절대적인 기준, 혹은 그런 기준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현대의 고전으로 자리매김 한 『삶으로서의 은유』(Metaphor We Live By)에서 레이코프(G. Lakoff)와 존슨(M. Johnson)은 언어학과 철학에서 주류로 여겨져 온 ‘객관주의’(objectivism)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은유’(metaphor)를 새로운 사고와 행위의 중요한 대안으로 제시한다.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진리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그릇된 것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위험한 것”[각주:8]이었다는 그들의 반성은 참과 거짓의 경계가 분명한 이들에게는 여전히 낯선, 현실의 단면에 대한 어떤 숙고를 요청한다.


    법의 통한 대중의 주체화를 모색한 요시야 개혁세력의 ‘꿈’과는 달리 현실에서 법(의 말)과 정의(의 말)의 관계는 어느 한 편의 손을 온전히 들어줄 수 있을 만큼 그리 단순명쾌하지는 않은 것 같다. 법과 정의의 관계는 모호하다. 적어도 그것이 펼쳐진 삶의 관계성 안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 보기 전에는 그러하다. 법과 정의의 관계를 숙고한 데리다(J. Derrida)는 “법은 정의가 아니”[각주:9]라고 말한다. “계산의 요소”로 구성되는 법과 달리, 정의는 언제나 “계산 불가능한 것”[각주:10]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의에 관해서는 항상 아마도라고 말해야”[각주:11] 한단다. ‘아마도’의 가능성을 벗어난 정의, 법치의 이상과 동일시되는 정의는 결국 통치자의 독단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채 다시금 통치의 도구로 전락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대중을 법의 주체로 호명해내고자 했던 요시야 개혁운동의 실패는 법, 혹은 법의 말을 통한 대중 주체화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성찰의 과제를 우리에게 남긴다.


   빈말, 혹은 거짓말의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아마도’의 정의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드러난 사실은 드러나지 않은 더 많은 진실에 둘러싸여 있다. 면(面) 위에 찍힌 점 하나가 공허(空虛)에 둘러싸여 있듯 겉으로 드러난 한 점의 사실은 드러나지 않은, 혹은 드러낼 수 없는 막막한 진실의 표면에 아른거리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시대의 ‘나봇’, 즉 억울한 죽음을 향해 내몰린 이들에 대한 편파적 옹호는 신학의 마땅한 지향점이다. 여기에는 논란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거짓말의 화신인 저 ‘이세벨’의 말을 향해서도 ‘아마도’의 정의를 철회해서는 안 된다. 이미 형성된 ‘올바름’의 잣대로 참과 거짓의 여부를 판단한 채 무책임한 도덕적 비난을 쏟아 부을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비난과 옹호 사이로 난 작은 틈을 헤집고 들어가 거기에서 ‘올바름’의 내용을 구성하는 지난한 길에 나서야 한다. 정의는 법치의 철폐도, 그것의 실현과도 동일시 될 수 없는 ‘아마도’의 가능성에 머문다. 그래서 정의는 오직 목숨을 건 ‘맹세’가 아니고서는 말해질 수 없는 무엇으로 남을 뿐이다. 맹세의 쇠퇴기에 정의에 대해 ‘말’하는 것이 그토록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다.


    김기석은 ‘거짓 증언하지 말라’는 제9계명의 의미를 ‘참된 말을 하라’는 적극적 의미로 재해석한다.[각주:12]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진실에 이르는 참말을 하는 것이다. 참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법의 말’로 환원되지 않는 말, ‘아마도’의 가능성을 철회하지 않는 말, 그래서 이웃을 살리는 희망의 말이다. ‘법의 말’을 통해 대중을 변혁의 주체로 호명해 내고자 했던 요시야 개혁운동의 이상은 우리 시대에 완수되어야 한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들, 할 말을 잃어버린 이들이 저마다의 이야기의 등장인물이 되어 제 할 말을 하는 세상을 꿈꿔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입장과 처지가 다른 이들을 함부로 비난하지 않는 신중함과 어리석게 옹호하지 않는 지혜가 모두 필요하다. ‘법의 말’을 넘어 참말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기보호를 위해 세워둔 확실성의 옹벽을 철거하고, 타자의 말(증언)이 놓인 맥락 속으로 용기 있게 걸어 들어가야 한다. ‘법의 말’을 넘어서 참말이 도달해야 할 곳은 나와 타자의 삶이 놓인 바로 그곳, 우리가 함께 서 있는 자리이다.


* 필자소개

    연세대학교 학부대학 강사,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객원연구원


** 이 글은 『지금 여기로 걸어 나온 십계』(가제)에 실린 원고의 일부를 수정한 것입니다. 


ⓒ 웹진 <제3시대>

  1. 경향신문, 「사장님 거짓말 2위 “가족 같은 분위기” 1위는?」, 2015. 4. 1. [본문으로]
  2. 한국일보, 「미혼남녀 10명 중 9명, 연인에게 거짓말 경험」, 2015. 12. 9. [본문으로]
  3. 한국일보, 「특임장관실 국민 여론조사 65%가 “사회 지도층 불신한다”」, 2011. 5. 5. [본문으로]
  4. 법률신문, 「법원·검찰에 대한 국민 신뢰도 경찰보다 낮다」, 2016. 3. 7. [본문으로]
  5. 조르조 아감벤, 『언어의 성사: 맹세의 고고학』, 정문영 옮김, 새물결, 2012, 145쪽. [본문으로]
  6. 앞의 책, 89쪽. [본문으로]
  7. 앞의 책, 93쪽. [본문으로]
  8. G. 레이코프 ‧ M. 존슨, 『삶으로서의 은유』(수정판), 노양진 ‧ 나익주 옮김, 박이정, 2006, 270쪽. [본문으로]
  9. 자크 데리다, 『법의 힘』, 진태원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4, 37쪽. [본문으로]
  10. 앞의 책, 37쪽. [본문으로]
  11. 앞의 책, 59쪽. [본문으로]
  12. 김기석, 『광야에서 길을 묻다』, 꽃자리, 2015, 253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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