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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눈] 카나리아의 경고 (김나미)

비평의 눈

by 제3시대 2016. 3. 21.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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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리아의 경고




김나미

(미국 Spelman College 교수, 종교학)




     카나리아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새로 알려져 있다. 예전에 광부들이 광산의 터널에 들어가서 작업을 하기 전에 터널 안으로 먼저 날려 보낸 새도 카나리아이다. 카나리아는 오염이 되었거나 독성이 퍼져있는 공기와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광산의 터널안으로 날려보낸 카나리아가 돌아오면 터널안의 공기가 광부들이 일하기에 안전하다고 한다. 그러나, 만약 카나리아가 일정한 시간이 지나도 되돌아 오지 않는다면 그 광산안에는 독성의 공기가 만연하여 그 독을 제거하기 전까지는 광부들이 일할 수 없는 환경이라고 한다. 요즘엔 광산에서 더 이상 카나리아를 사용하지 않지만, ‘광부의 카나리아’라는 표현은 계속해서 쓰이고 있는데, 여기서 카나리아는 뭔가 위험하고 심각한 상황이 곧 닥칠 것에 대한 ‘경고’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하바드 법과대학 역사상 유색인종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종신교수로 임명된 라니 귀니어 (Lani Guinier) 라는 법학자가 제랄드 토레스 (Gerald Torres)와 공저한 [광부의 카나리아] 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인종(race)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것 처럼 사회 구성원들을 대우하는 정책이나 이론의 문제점들을 지적하면서, 과연 어떤 “힘” (power) 을 갖고 써야 그 사회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묻고 있다.[각주:1] 이 책에서 귀니어와 토레스는 미국 사회의 소수자인 유색인종들을 카나리아에 비유하면서, 미국사회가 과연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인지를 진단하기 위해서는 여러 유색인종들이 자유롭게 호흡하면서 잘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사회의 소수자들인 유색인종들이 자유롭게 제대로 숨을 쉬면서 잘 살아갈 수 있는 사회라면 사람들이 살만한 괜찮은 사회이지만, 만약 유색인종들이 인종차별과 다른 부정의한 구조 때문에 숨막혀 하면서 살아도 사는 것 같이 않게 살고 있다면 그것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사회라는 것이다. 유색인종들이 잘 살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면 그 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 제도에 대해, 특히 민주주의를 재점검하고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내의 인종문제를 제대로 다뤄야 한다는 것을 ‘광부의 카나리아’로 비유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2014년 뉴욕에서 에릭 가너 (Eric Garner)라는 흑인남성이 길거리에서 담배를 팔다가 경찰에 의해 목주위의 호흡기관이 제압되면서 (chokehold) 11번이나 “숨을 쉴 수가 없다” (“I can’t breathe”)라고 호소하면서 죽어간 사건이 있다. 어떤 무기도 소유하지 않은 남성이 그저 담배를 판다고, 경찰의 불법 제압방식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은 미국 내의 인종문제와 경찰 폭력의 심각성을 잘 보여주는 한 예이다.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경찰 폭력에 희생당한 흑인 남녀노소들이 증가하고 있고, 정의를 요구하는 흑인들을 ‘썩어빠진 범죄자’로 취급하거나, 심지어 흑인들이 대다수인 한 도시에서는 납으로 오염된 물이 버젓이 수도꼭지로 흘러 나오는데도 아무도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 대학내에서도 인종차별주의가 만연하여 최근 51개 대학의 학생들이 캠퍼스의 진정한 변화를 위한 다양한 요구를 하고 있다.[각주:2] 미국의 유색인종들, 특별히 흑인들은 국가가 그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의 대선 캠페인에서는 물론이고 미국 공화당의 몇몇 대선 후보자들의 캠페인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 반이민정책과 구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최근 더욱 급속히 증가한 반이민정서에 이민자들도 많이 위축되고 시달림을 받고 있다. 또한 무슬림이라면 마치 모두 ‘이슬라믹 테러’와 관련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들을 범죄시하고 심지어는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상황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 미국내의 유색인종들은 국가의 보호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위협적인 존재들’로 인식되고 취급받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비롯해서 미국의 여러가지 제도와 정책이 재점검되지 않는다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독에 오염된 공기를 마신 카나리아처럼 숨을 쉴 수 없게 되는 상황이 도래할 것이다.  


    미국에서 유색인종들이 카나리아에 비유되고 있다면, 한국의 카나리아는 누구이고, 그들이 살고 있는 한국 사회는 과연 숨을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사회인가? 아니면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독성 가득한 공기로 인해 질식할 것 같은 사회인가? 이미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독에 오염된 공기에 질식되어 되돌아 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독소’ 조항이 가득한 사회 정책과 제도들로 인해 숨을 쉴 수 없는 카나리아와 같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사회라면 어디서 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오염되고 독성이 가득한 공기를 빨리 제거하지 않을 경우에 생길 수 있는 현상은 공상소설에 나오는 디스토피아의 상황과 비슷할 수 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세상은 디스토피아로 보이고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유토피아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인 것처럼 그 반대 개념인 디스토피아도 그러하다. 그렇다면, 카나리아와 같은 사람들이 편하게 숨쉬면서 살 수 있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 갈 수 있을까?  


    종교철학자인 코넬 웨스트(Cornel West)는 [포스트모던시대의 예언자적 사상] 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다. 즉, ‘개개인이 피어나는것, 번창하는것’을 위한 수단이다. 만약 누군가가 자기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영적, 물질적인 고통을 없애는 노력에 동참한다면 바로 그 사람이 급진적인 민주주의자 (radical democrat)이다.[각주:3] 


 여기서 코넬 웨스트는 ‘급진적 민주주의자’란 민주당(Democratic Party)을 지칭하는 “D”가 아니라 “small d”임을 강조한다. 즉, 민주당이란 정당의 당원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정당의 소속 여부와 상관없이,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개별인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코넬 웨스트는 급진적 민주주의자가 되는 것이 바로 모든 개별인들을 평등하고 소중하게 받아들이는 기독교인으로서 행해야하는 윤리적 책임이라고 강조한다. 즉, 기독교인의 윤리적 책임은 나사렛의 예수가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가장 많은 관심과 애정을 보여 주었던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 한명 한명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고통을 없애는 노력에 참여하는 것이다. 타인의 영적, 물질적인 고통을 없애는 데 동참한다는 것은 높은자가 낮은 자를 대하거나 가진 자가 없는 자에게 던지는 자선이나 연민의 눈길과 손길을 통해서가 아니라, 나와 타인 한명 한명이 모두 평등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서로의 고통을 줄이면서 개별인들이 “피어날 수”있도록 ‘힘’을 쓰는 것이다.  


    그런데 몇몇의 능력있고 힘있는 사람들만 살아 남고 대우받는 사회가 아니라 카나리아 같은 사회의 가장 약자들도 건강하게 숨쉬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는 사회라고 할때 곧 제기되는 반론과 질문이 있다. 즉, 그렇게 약자로 살아가는 것은 그 사람들의 능력이 부족한 탓이고,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해서이고, 충분한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고, 긍정적으로 사람들을 대하면서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면 언젠가는 다 괜찮아 질 것이라는 만병통치약과도 같은 ‘긍정의 복음’과 개인의 능력여부를 연결짓는다. 그런데 이렇게 개별인의 부족함이나 사회에 적응을 못하는 것을 비난하면서 모든 것을 개인의 문제로 축소하고 비난하고 있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시대의 개인주의적 인간관 아닌가.  


    개인의 잘못과 부족함을 탓하기 전에 과연 그 구성원들 개별인들에게 공정한 기회와 공평한 물적/인적/교육적/제도적 자원이 분배되었는지, 아니면 ‘독소’ 조항이 가득한 정책과 제도로 인해서 숨도 한번 편하게 제대로 못쉬게 내몰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개별인이 “급진적 민주주의자”로서 지닌 “힘”이 무엇이고, 누구와 어떻게 그 “힘”을 써야하는 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물질적이든, 육체적이든, 아니면 정신적이든, 실질적인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자신의 고통을 없애는데 동참하는 개별인들의 힘이 모이면 ‘우리’의 힘이 된다. 힘을 얻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힘을 넓혀나가는 것, 즉, 혼자만 위로 올라가는 위로의 수직적인 팽창이 아니라 옆으로 수평으로 뻗어나가는 그런 힘을 넓히는 것이다. 그런 힘은, 가진자가 없는 자를 누를때 쓰는 힘, 배운자가 덜 배운자들을 누를때 쓰는 힘, 남자가 여자를 누를때 쓰는 힘, 비장애자가 장애자를 누를 때 쓰는 힘, 이성애자가 동성애자를 누를때 쓰는 힘, 권력이 있는 자가 없는 자를 누를 때 쓰는 힘, 연장자가 연소자를 누를 때 쓰는 힘, 내국인이 이주노동자들을 누를 때 쓰는 힘, 그런 억압의 도구로 사용되는 힘이 아니라 같이 나눌 수 있는 힘, 나누면 나눌수록 많아지고 커지는 그런 힘을 말하는 것이다. 남을 ‘위해서’ 쓰는 힘이 결국은 나를 ‘위하는’ 힘도 되는 것이다. 수직적인 힘을 행사하는 대신에 나누는 힘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이 언제 먹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입을 것을 주었고, 따뜻하게 맞았고, 병들었을 때 보살펴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갔는지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들에겐 그런 나눔이 남들을 의식해서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평소에 나와 내 이웃들에게 행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개별인의 나누는 힘과 병행되어져야 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비롯해서 사회의 다양한 제도와 구조가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카나리아가 되돌아 오지 않는 독성이 가득한 죽음의 광산에 대해서는 폐광이 한가지 답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폐광’으로 문제들이 해결 될 수 없는 복잡한 곳이다. 일시적 폐쇄나 폐광이 답이 아니라면, 개별인이 “급진적 민주주의자”가 되어 ‘독소’ 조항이 가득한 정책과 구조를 제거하는 노력에 동참하는 길 밖에 없다. 그런 길에 어떻게 동참할 지는 윤리적 책임을 질 줄 아는 급진적 민주주의자로서의 개별인의 몫이다. 그러나 카나리아가 되돌아 오지 않는 상황을 외면한다면 카나리아뿐 아니라 결국에는 자신을 포함한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곧 “숨을 쉴 수가 없다”를 외치며 쓰러지게 될 것이다. 카나리아의 경고를 외면할 수 없는 이유이다.  


ⓒ 웹진 <제3시대>


  1. Lani Guinier and Gerald Torres, Miner’s Canary: Enlisting Race, Resisting Power, and Transforming Democracy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2003). [본문으로]
  2. “Here Are The Demands From Students Protesting Racism At 51 Colleges.” December 3rd, 2015. http://fivethirtyeight.com/features/here-are-the-demands-from-students-protesting-racism-at-51-colleges/ [본문으로]
  3. Cornel West, Prophetic Thought in Postmodern Times (Monroe, Maine: Common Courage Press, 1993), 63-6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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