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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시카고에서의 4년을 돌아보며 (박혜인)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6. 4. 4.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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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에서의 4년을 돌아보며



 

박혜인
(University of Chicago Divinity School, PhD student, Theology)


 


       유학 5년 차에 접어드는 지금, 아직도 무언가를/누군가를 위해 글을 쓴다는 건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왜 항상 마감일 직전까지 골수를 말리고 두뇌가 비도록 나를 짓누르는 두려움과 우울함에 짓눌려 바닥을 맛보기 전까지는 단어 하나조차 두드리지 못하는 걸까요. 추구하는 것은 완전함인데 안타깝게도 제 실존의 전부를 쥐어짜도 여전히 자신의 멍청함과 비루함에 짓눌려, 그저 시간에 떠밀려 의도치 않았던 생각들을 기워나가는 넝마주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형편이 이럴진대 누군가를 위해 글을 쓴다는 건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어떤 인연이든 이 글을 읽게 되는 딱 한 사람의 곁눈질만 상상해도 부담이 밀려옵니다. 이 창피함으로부터 언젠가 자유로울 수 있을지. 눈앞에 수많은 과오들이 스쳐 갑니다. 

       글을 부탁받고 간만에 웹진 제3시대, 우리나라 신문, 잡지 등 갖은 매체를 통해 모국어를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영어라는 우상에 파묻혀 한국말로 편지 한 장 써본 적 없이 4년의 시간을 보냈건만 정작 가슴을 울리고 머리를 잔뜩 긴장시키는 깊은 글들은 내가 그속에 태어나고 자라고 습득해온 언어로 쓰여있습니다. 모국어로 쓰인 글들의 내공 앞에 창피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고, 소통하고 생각하는 법을 되레 잃어버린 건 아닌지, 회의가 밀려오기도 했습니다.  

      해마다 방학 때면 고국으로 돌아가는 선후배들이 묻습니다. 왜 한번도 고향을 방문하지 않았느냐고. 치유되지 않은 열등감, 소통할 수도 구제받을 수도 없는 외로움은 입만 열면 동정을 사고 싶어 발버둥치지만 더 진솔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왜 아직 돌아갈 수 없을까. 차라리 타지에서 특이한 인간으로 사는 게, 23년을 내가 나고 자란 곳에서 존재하지 않는 삶으로 사는 것보다 어쩌면 쉬운 까닭입니다.  


       "시카고로 떠나는 것이 잘된 일일까요?"

       벌써 6년 전이 된 학부 마지막 해 졸업을 앞두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시카고에서 목회학석사 학위 프로그램의 입학허가를 받았을 때 진심으로 제 앞길을 축하해준 분들은, 그닥 많지 않았습니다. 워낙 다원주의적 경향이 강하고, 우리나라 주요 교단과의 연계성도 전무한, 공부하기는 까다롭고 졸업은 더욱 쉽지 않기로 악명높은 시카고에 합격했을 때 붙은 저로서는 그저 기적에 감사하며 넙죽 제게 주어진 숙명을 받아들였지만 저를 무척 아껴주셨던 선배님들의 불안과 의심 가득한 그 마지막 한 마디가 아직까지 잊히질 않습니다. “혜인자매, 나중에 귀국해서 직장을 못 구하는 건 둘째치더라도, 과연 그곳으로 가는 게 하나님 뜻일까요?”

       하나님의 뜻. 하루하루가 구덩이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은 슬픔이었던 학부시절에도 신학을 공부했다지만, 박사과정에 합격한 지금도 저는 저 헤아릴 수 없이 커다란 말 앞에 황망할 뿐 아무런 정립된 개념이 없습니다. 아마도 열번의 성경통독 이후에 왠만한 귀절은 암송하시는 어머니께 여쭈면, 더 시원한 답을 얻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울증 (양극성 장애; bipolar disorder) 진단을 공식적으로 받게 된 2007년 이후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몰지 않은 유일한 까닭은 ‘자살하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엄격한 교리였습니다. 지옥에 갈까봐 두려워하는 유치하지만 너무도 강렬한 그 실재에 대한 믿음 때문에 저는 살았습니다. 대학생활은 참 힘겨웠습니다. 감성좌파 재불작가 목수정씨의 요즘 젊은이들에 대한 일갈— 욕망하는 법을 잊고, 길들여지고, 생존하기 위해 철드는 그 비판의 대상이 오롯이 저자신인 것처럼, 애매한 나의 정체성을 비판하며, 자학하기 일쑤였습니다. 돈도 돈대로 없었지만, 나는 강남좌파도, 감성좌파도 아닌, 그냥 우울한 신학생 1인이었습니다. 자신을 가리켜 당당하게 ‘저는 OO주의자입니다’라고 말할 수도, 할 줄도 몰랐기에 당황스러운 존재감은 곧 진보적인 운동성과 괴리된 삶이었고 노동운동에 헌신했던 아버지의 이름으로 운동권 일선에서 투쟁하고 공부하던 선배들과 통성명은 할 수 있었지만 내 마음과 생각을 제대로 나누지는 못했습니다. “너는 죽고사는 문제를 감당해본 적이 없잖냐,” 이시대 젊은이로 산다는 게 얼마나 힘겹고 치열한 노동인지, 다른 역사를 살아가는 사람끼리 고통을 비교한다는 게 얼마나 역겨운지 볼멘소리로 답하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단한번도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차마. 내 머리, 내 몸뚱이, 나자신의 이성과 감정조차 통제할 수 없다는 선고를 받은 이후 세상은 좌로도 우로도 판가름할 수 없는 기묘하고도 잔인한 무대로 보였습니다.  

       수면제를 먹고 깬 다음날 아침 기계처럼 반복되는 학교의 일상 가운데 내면에 어떤 변화도, 내적 진보를 감지할 수 없어서 서글픈, 이렇게 어디에도 누군가에게도 속하지 못해서 슬픈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정신질환은 하나님보다 피조물을 더 사랑했을 때 필연적으로 인간이 감당해야 할 형벌이라든가, 성경에 근거한 귀신들림, 심지어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암묵적 동의아래 일어나는 악마의 장난질이라는 해석을 끊임없이 교회에서 반복할 때마다 저는 더 비참해졌습니다. 선하고 완벽하신 하나님의 통치에서 나가떨어진 돌쩌귀가 된 기분으로 4년을 채웠고, “너 때문에 제명에 못살겠다” 우시던 아버지를 뒤로하고 저는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시카고는 그렇잖아도 삶이 버거운 제게 편집증, 피해망상, 공황장애, 주의력결핍이라는 덤터기를 씌웠습니다. 전화로 음식을 주문하거나 조금만 당황해도 심장박동이 주체할 수 없을만큼 빨라지며 벌벌 떨기 일쑤였고 이 현상이 세미나 중 발표 때 더 심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지식생산의 최정점에 있는 교수들에게 자신감 없어보이는 외국학생의 말더듬은 당연히 용인해주기 힘든 사안이었고 어떤 수업에서는 곧장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내나라에서는 죽고플 만큼 우울했어도 나름 똑똑한, 통찰력 있는 신학생이었지만 상황이 이쯤되니 미국대학원에서 관계를 쌓아가는 것에 대한 공포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이 힘겨운 공부를 묵묵히 지원해주시는 부모님에 대한 부채감과 죄책감, 한편으로는 자괴감과 열패감에 시달리면서 하릴없이, 끝이 보이지 않는 지난함에 어쩔 수 없이 할 수 있는 공부만 해나가며 터질 듯한 머리를 재웠습니다.  

       때로는 새 아침을 맞이하며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 도서관을 향해 한 걸음을 떼는 것 자체도 저혼자 우주를 감내하듯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했습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는 것— 지식이 최고의 자산인 학계에서 이해하지/받지 못하고 따라서 소통하지 못한다는 저의 현실에 석사 4년은 좌절로 가득했습니다. 절망이라는 감정은 익숙해지면 좀 덜 아픈 동무가 될 줄 알았건만, 매번 쓰린 것이 오랜 시간이 지나도 면역이 되질 않았습니다.  

       그렇게 마음 깊이 새겨진 상처는 아물지 않았지만 서서히 그 상처로 인해, 조울증이라는 의학 진단보다도 중요한 절망의 깊이, 그 자체가 어느덧 제 신학공부의 주제로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조울증을 앓는/(감추지 않아 특이한)아시안/여성’으로 조심스럽게, 아주 느리게, 진득하게 가리지 않고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습니다. 끊임없는 의심과 자기혐오, 학대, 우울은 인종과 성별, 국적을 가리지 않는 질병임을 배웠고 이들과 사랑, 욕망, 가난, 결핍, 좌절, 절망, 젊음의 한계와 덫, 희망, 평안, 용기, 안식, 연대, 위로, 공감에 대해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학교 바깥에서는 침례교 설교자이신 흑인해방신학자 지도교수님 (Dwight N. Hopkins)을 찾아가 저의 진단에 대해 솔직히 말씀드렸고 퇴짜를 맞지 않았습니다 (여태까지는). 목회상담학, 정신의학 관련수업을 자유롭게 수강하면서 내면의 고통을 파고들라치면 사실 뿌리깊은 인종차별, 식민주의 역사, 경제양극화, 가식적인 세월호 인양을 두고 여태 치유되지 못한 피해자 가족들의 상처와 같이 시민을 억압하여 정상인을 병자로 내모는 사회의 부조리, 불의를 함께 따지지 않을 수 없음을 함께 배웠습니다. 내가 자라난, 그치만 떠나온 그 환경에서는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아 던질 수 없던, 뇌리에 깊이 파묻혀 있던 질문들이 머리를 들고 탐구되기를 외치는 것만 같았습니다.  
       미국 지식사회에서는 이미 트라우마, 내적치유나 신경과학을 논함에 있어 불교명상수행과 철학의 깊이와 유용성이 커다란 영역을 차지하고 있어 마음챙김 (mindfulness)에 대해 저또한 선불교 수행자인 친구로부터 아주 조금이나마 배우고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뜻’이나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생각할 때마다 제가 시카고에서 딛는 걸음이 두려움에 떨립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여기서 늦게나마 참 나다운 내가, 아프지만 태어나고 있는 것을 느낀다는 점입니다. 다른 과에 가서 신학을 공부한다고 하니 마치 원시인을 보듯, ‘쟤가 무엇 때문에 여길 왔나’ 의구심이 가득찬 눈빛도 이젠 지겹지 않습니다. 저같은 부류는 종교성의 미신을 타파한 세속화한 근현대로부터 시간을 영성으로 ‘회귀’시키려는 보수적인 종족인 마냥, 과연 수업에 도움이 될런지 쳐다보아도 괜찮습니다. 신학이 세대를 거듭해 인문학과 과학, 문화와 사회 변화에 응답하며 끊임없이 정체성의 진보를 꾀해왔듯이 저도 배움의 도정에 있는 사람으로서 겸손히 걸을 뿐입니다.  
       워낙 관심분야가 다양하고 귀가 얇아 신학 공부도 체계적 조직적으로보다는 폭식과 잡식에 가깝게 해온 터라 지속적으로 충실한 글들을 거둘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를 지금 여기 있게 한 모든 삶의 부분들이, 우리가 차마 위로하고 회복하지 못한 아픔을 보듬으며 진정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더불어 알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신학생으로, 신학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던 이유— 희망, 구원, 사랑이라는 단어가 그립고 더 절실해지는 순간들을 나눌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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