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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그 곳이 시다 (김윤동)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6. 7. 18.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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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이 시다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그 곳은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마음 한 켠에 어떤 하나의 장소, ’그 곳’을 두고 산다. 이 문장을 접한 지금 당신이 떠올리는 ‘그 곳’은 행복하고 기뻤던 기억이 있었던 곳이었을 수도 있고, 반대로 아프고 슬픈 기억이 있었을 수도 있다. 또한 시간이라는 축으로 비교해보면 과거의 흔적이 묻어 있는 곳일 수도 있지만, 죽음 이후에 가는 ‘천국, 하늘나라’처럼 있을지 없을지 잘 모르는 그런 장소일 수도 있다.  


       ‘그 곳’하면 떠오르는 그 장소가 좋았던/나빴던 기억이 있는 곳이든 혹은 과거 어느 한 때의 장소이든, 미래에 도달해야 할 그 장소이든 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와 별개로 아주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장소에서 살아간다. 일상적인 터전을 — 자발적으로 혹은 강제로 — 잃은 유민이나 난민의 신세가 아니라면,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눈을 감을 때까지 거의 비슷한 공간을 점유하고 경험하며 살아간다. 매번 같은 교통수단을 타고 출근을 해서 같은 공간에 가서 업무를 보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같은 집 안에서 매번 해 오던 살림을 반복하는 것이 보통의 삶이다. 한데 왜 유독 우리가 떠올리는 ‘그 곳’은 일상적인 공간과 다르게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일까? 우리가 떠올리는 그 곳은 세 가지의 의미에서 ‘시(이)기’ 때문이라 상상해본다.   


1. 그 곳은 시(Ti)다 : '결핍'으로서의 그 곳


      우리가 부르는 노래에는 계이름이 있다. 우리 고유의 오음계도 있지만, 근대 이후 우리에게 익숙한 서양의 음계는 도(Do), 레(Re), 미(Mi), 파(Fa), 솔(Sol), 라(La), 시(Ti). 이렇게 일곱 개로 이루어져 있다. 서양의 7음계에서는 음정을 쌓아 화음을 만드는데, 서로 잘 어울리는 음끼리 쌓으면 ‘협화음’이라 부르고, 그렇지 않으면 ‘불협화음’으로 분류한다. 보통 1, 4, 5, 8도 화음을 협화음 중에서도 가장 잘 어울린다 하여 ‘완전’협화음이라 부르고 나머지는 완전하지 않더라도 어울리는 화음으로 분류한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관심하는 계이름 ‘시(Ti)’는 불협화음 중에서 ‘장7도’이라 불리는 화음을 생산한다. 그나마 ‘장 2, 3, 6도’ 화음은 우리의 귀에 완전협화음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안정감을 주는 반면, 장 7도만큼은 가장 불안정한 화음을 들려준다.

  

        내가 ‘그 곳’을 ‘시(Ti)’라고 표현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시(Ti)’라는 계이름을 통해 불협화음이 발생하듯이 ‘그 곳’은 늘 우리 삶에서 불완전한 화음으로 한 켠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시’가 들어가는 major7 이라는 코드는 결정적으로 첫 번째 음인 ‘도’에서 ‘미’, ‘미’에서 ‘솔’까지 세 음씩 쌓을 때는 아주 안정적이고 조화로운 화음이지만, 거기서 또다시 세 음째인 ‘시’음을 쌓으면 앞에 쌓았던 조화가 모두 무너지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마치 달리기 경주에서 1~3번 주자가 줄곧 선두를 지키다가 앵커 주자가 중간에 넘어져 모든 경주가 어그러지는 기분이다. 절룩거리는 시, 완벽을 깨뜨리는 이 ‘시’는 마치 미운 오리 새끼처럼 눈총을 받기 딱 좋은 녀석인 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완벽성과 그 조화에 일침을 가하며, 조화로움을 깨뜨린다 비난받는 ‘시’는 기죽거나 위축되지 않고 자기 소리를 낸다. 발가벗겨진 채로 적나라하게 자기 자신을 내비치고 내던지는 기분이다. 협화음이 어렵사리 만들어 놓은 철옹성같은 완벽성에 균열을 내기 위해서.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그 곳은 ‘시’음이 만들어내는 ‘major7’ 코드와 같지 않을까? 우리는 늘 완벽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대로 진행되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장밋빛 계획을 늘 세우고, 그렇게 실행해 가지만 그 행복한 삶 속에서 언제나 ‘시’가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이 거기에 끼어들어 절룩거리게 한다. 가난, 폭력, 이기심, 시기, 질투, 질병, 그리고 죽음 등 우리를 늘 괴롭히는 그 고통의 장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과거에 좋았던 기억을 가진 장소나 미래에 다다러야 할 그 장소들은 ‘지금 없기’에 더욱 가슴을 아리게 하고, 나아가서는 우리가 현실에서 만족할 가능성을 지연시킨다.  


       이러한 ‘결핍’으로서의 그 곳, ‘시(Ti)’로서의 그 곳을 최근의 철학에서 많이 회자되고 있는 용어, ‘타자(他者)’라고 바꾸어 부를 수도 있을까? 우리는 결핍들인 ‘타자’를 끝없이 사랑하고 성취하고자 하지만, 동시에 미워하고 어서 그것들이 사라지도록 바라기도 한다. 인간은 언제나 결핍으로서의 ‘타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살아가며 그것이 곧 삶의 주된 동력이라고까지 부를 수도 있을만큼 강력하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깡은 오히려 그러한 욕망이 사라지면 우리가 살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무의식에서는 그 욕망의 성취를 우리가 자발적으로 지연시키기까지 한다고 말한 바 있지 않았던가!   


2. 그 곳은 시다(Sour) : 몸이 먼저 반응하는 '새콤한' 그 곳


       그 곳은 신 맛이다. 그 곳을 맛 중의 하나로 표현할 수 있다면 아마 ‘신 맛’과 가장 가까울 것이다. 비유의 언어일 따름이지만, 만약 그 맛이 짜거나 달콤하거나 맵다면 우리 기억에 강렬하게 ‘그 곳’으로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신 맛은 매우 묘한 매력을 가진 맛이다. 신맛하면 무엇부터 떠오르는가? 노오란 색의 레몬 또는 집 안에 있는 식초가 떠오를 것이다. 이런 음식들은 생각만 해도 벌써 침부터 고이고, 미간이 찌푸려지곤 한다. ‘여우의 신 포도’라는 우화에서 나오듯이 인간에게 신 맛은 고대로부터 부정적인 맛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동시에 신 맛은 인간에게 사랑받는 맛이기도 하다. 인간은 생명이 뱃속에 잉태했을 때, ‘신 맛’을 찾기도 하고, 뭔가 깔끔하게 뒷맛을 잡아주거나 잡내를 제거하는 데에 신 맛을 이용한다. 심지어 가학적이라고까지 여겨지는 그 애증의 맛. 그 맛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 곳’의 맛과 연결 지어볼 수 있다. 한 블로거가 표현한 ‘신 맛’에 대한 말을 인용하면서, 그 신 맛이 가지고 있는 묘한 매력을 떠올려보도록 하자.


       사실, 신 맛이 그렇게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호사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선호하는 달콤함의 옆에 어느새 능청스럽게도 자신의 성격을 죽이며 새콤함으로 다가가 달콤함을 보조해 주기도 하고, 온통 지치기 쉬운 미각을 흔들어 깨우며 식도락의 기쁨을 되새김질 하도록 격려해온 결과이다. 심지어 가끔은 단 맛에게 자신의 공적마저 양보하며 자취를 완전히 감추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 신 맛은 악착같다. 때로는 자신의 고개를 숙이기도, 때로는 쉽지만은 않은 일을 도맡아 오며 각고의 노력을 들여 악착 같게도 신 맛은 인정받고 있다.[각주:1]  


       우리가 기억하는 ‘그 곳’이 주는 맛도 레몬처럼 시큼하다. ‘그 곳’에 대한 기억과 향수는 언제나 우리 안에 잠복하고 있지만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곳’과 관련된 자극이 주어지면 불현듯 나타나 우리의 뇌와 몸을 쏘고 도망간다. 그 자극은 나쁜 것인지, 좋은 것인지 이성의 판단을 받을 틈을 주지 않고 빠르고 순간적으로 지나간다. 이성이 중지되고 몸이 먼저 반응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일상이 무료하기 짝이 없을 때마다 ‘그 곳’은 자연스럽게 아무 일 없는듯이 흘러가는 일상을 중지시키고 우리가 누구이고, 어디로부터 왔는지 다시 질문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곳’은 그렇게 우리 안에 알게 모르게 숨어 있으면서도 불현듯 나타나 우리의 존재를 건드리는 ‘신 맛’과도 같다.  


3. 그 곳은 시다(Poem) : '극단적'인 것으로서의 그 곳


        ‘그 곳’은 우리 삶의 ‘시(poem)’로서 존재한다. 그 ‘시’라는 것이 무엇일까? 무엇인지 딱 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우리가 공감하고 있는 ‘시적인 무엇’이란 것이 있다고 우리는 공감하고 있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문학비평가 황현산 선생은 『우물에서 하늘보기』(2015. 삼인)에서 ‘시적인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시에는 한 편 한 편마다 무언지 모를 극단적인 것이 있다.(…)

시를 쓰거나 읽는 사람들에게 “무언지 모를 극단적인 것”이란 말은 빈말로 들리지 않는다. 시는 늘 우리에게 이 세상의 시간이 아닌 것 같은 다른 시간을 경험하게 한다. (…) 사람들은 저마다 제 심정이 한 자락 노래를 타고 날아오르듯 약동하고, 삶의 어떤 매듭이 물결처럼 밀려드는 몽환에 휩쓸리고, 정신이 문득 소스라치면서 도 하나의 새로운 각성에 이르던 순간들을 기억할 것이다. 내가 ‘시적인 무엇’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그 순간의 동력과 연결된 모든 것들을 말한다. 그 동력은 정신이 집중된 시간에도 나타나고 심신이 풀려 자유로워진 시간에도 솟아올라 내 존재가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것은 아님을 알려주곤 한다."[각주:2]


        ‘그 곳’은 그렇게 극단적인 무엇이다. 우리가 삶에서 있는 힘껏 치닫다가도 애써 발을 땅에 끄을며, 멈추어야 하는 거기에서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 바로 ‘그 곳’이다. 가고는 싶고 어디인지도 알고 있지만, 갈 수 없는 곳. 그래서 더욱 갈망하게 되는 곳이 ‘그 곳’이다. 그래서 ‘그 곳’은 시가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곳이다. 너무나 원하지만, 갖가지 현실의 제약으로 갈 수 없는 곳, 그럼에도 ‘시’라는 극단적인 언어를 통해서만 갈 수 있는 거기가 ‘그 곳’이다.

       마치 신명기 34장에서 묘사되고 있는 모압평지에 선 모세의 느낌이라고 하면 어떨까. 분명히 자기 자신의 발로서는 넘어설 수 있지만, 하나님의 준엄한 소리가 계속해서 가로막는다. ‘너는 거기에 건너가지 못할 것이다.’(신 34:4)라고 말하기에 오히려 더욱 미치도록 건너가고 싶은 그 곳! 모세에게는 삶의 이유였고, 광야 여정의 최종 목적인 그 곳! ‘여기까지 그 많은 사람들은 데려온 게 나인데, 그깟 잘못 하나 때문에 이 선을 넘어가지 못하는가!’라고 울부짖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그 곳, 거기가 ‘그 곳’이다.


그 곳은 없다, 하지만...



        ‘시다’라는 말로 정리해 본 ‘그 곳. 과연 우리가 떠올리는 ‘그 곳’은 있는 것일까? 있다면 어디일까?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것 같은 ‘그 곳’이라 말하는 게 가장 정확한 언술이겠지만, 나는 그럼에도 ‘그 곳’이란 ‘없음’으로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떠올리는 그 곳, 그리고 거기서 함께했던 그 ‘시간’, 그 ‘사람’ 그리고 ‘수많은 무언가들’은 이제 없기에 존재한다. 그 곳이 없기에 고통스럽고, 그 곳이 없기에 이성과 의식이 아닌 무의식과 몸으로만, 언어를 초월한 언어로만 갈 수 있다. 그래서 꿈에서나마 그려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 곳’은 가려고 해도 결코 갈 수 없는, 어떤 극단적인 무언가로 남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삶을 움직이는 힘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훗날 우리가 미래의 그 순간에 기억할 ‘그 곳’은 언젠가 과거에 우리가 지나온 ‘현재적 공간’이었다. 없음으로 그리워하고 추억하기 이전에, 우리가 ‘그 곳’으로 만들어지기 이전 찰나와 같은 그 순간에 별과 같이 반짝이는 ‘그 곳’을 소중하게 만들려 몸부림친다면 시린 가슴으로 ‘그 곳’을 그리워하지는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있을 것 같다고.


ⓒ 웹진 <제3시대>

  1. http://berkeleyopinion.com/440 [본문으로]
  2. 황현산, 『우물에서 하늘보기』 (2015. 삼인), 8~9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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