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아카데믹하지 않아서 더욱 아카데믹한 단상

넷. <외로움과 머리카락>




 김정원*



    다시 또 사랑 이야기이다. 아득함이거나 외로움 같은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머리카락에 관한 이야기임은 분명하겠다.


    나는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반복해서 보는 것을 즐겨 하는데, ‘결혼은 미친 짓이다’가 그 중 하나다. 이만교의 소설이 원작인데, 보통의 경우와 다르게 내겐 소설보다 영화가 더 나았다. ‘연희’역의 엄정화가 예뻤던 탓이다. 영화에서의 연희는 ‘도리에서 벗어나는 삶’을 사는데 망설임이 없는 여자다. 소설의 연희와는 달랐다. 그러니 예쁠 수밖에. 연희는 결혼한 여자지만, 준영의 ‘집’을 드나든다. 준영의 직업은 시간강사다. 연희는 넉넉잖은 준영의 사정을 알고는 그가 ‘집’을 구할 때 자신의 퇴직금을 꿔준다. 그 돈으로 연희와 준영만을 위한 공간이 마련된다. 연희가 불륜의 주체가 된 셈이다. 준영은 학생운동을 했던, 그러니까 결혼에 대해 회의적이면서도 비판적인, 말하자면 ‘의식 있는’ 남자다(지난 글에도 밝혔듯, 진보적이라 일컬어지는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준영 역시 리버럴한 엘리트-독신주의자이자 제도적 관계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즉 내게 그리 새로울 것 없는 인물이다).


    그런 준영이 이제 연희를 기다린다. 그녀의 결혼 생활의 틈새 속에 준영이 놓여 있다. ‘그 집’에서 둘은 먹기도 하고 자기도 하지만, 연희의 ‘틈’이 다하면 준영은 혼자 남는다. ‘리버럴 엘리트-독신주의자’스러운 강의를 한 뒤에도 그는 연희를 기다린다. 이내 연희가 오면 함께 먹기도 하고, 자기도 하지만 밤이 되면 혼자가 된다. 이러한 반복된 생활에 준영은 차차 화가 나기 시작한다. 사실 그가 화가 난 연유는 연희를 기다리는 자기 자신에게로부터 온 것일 게다. ‘관계에서 자유로운’ 강사로서의 시간을 막 마친 뒤, 이제 ‘그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 길에서 연희와의 관계를 묻고 또 묻는 그 마음이 텁지근했을 것이다. ‘결혼한 여자의 삶’으로 내처 돌아가 버리는 연희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닌, 그런 연희를 욕하는 자신에게, 말하자면- 연희와의 결혼을 상상하고 있는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잔뜩 화가 났을 것이다. 결국 수틀린 준영, ‘그 집’에 다시 들어선 연희에게 열을 내다 속을 들키고 만다.


    “넌 그냥 가면 그만이지만, 난 아주 기분 엿같애. 니 쓰레빠 굴러다니지, 베개에 니 머리카락 붙어있지……”


    바로 저 머리카락. 나는 저 머리카락이 참 슬펐다. 연희를 욕망하는 그의 실상이 벌컥하고 쏟아져버려 슬펐고, 소루하게 드러나버린 준영의 진심이 슬펐다. 그러나 베게에 붙어있던 머리카락만치는 아녔다.


    머리카락은 별안간에, 그리고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주 보통의 순간에 말이다. 지금처럼 글을 쓰다가 커피 한 모금 들이킬라 할 때, 머그잔을 타고 주욱-하고 딸려오는 그 사람의 머리카락은 쓰던 행위를 멈추게 하기에 충분하다. 욕실 거울에서 발견한 그 사람의 머리카락은 이를 닦는 것을 멈추게 하고 그 앞에 가만 서게 만든다. 방바닥을 훔치다가도 드러나는 ‘그 사람’의 머리카락은 하던 걸레질을 멈추게 하고,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있게 한다. 그런데 그런 머리카락을 베개에서 발견하다니, 잠은 다 잤다. 손에 잡히고, 만져지던, 그러니까 아주 내 옆에 있던 ‘그 사람’과의 지난 시간이, 곧 ‘그 사람’의 부재가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인 것이다. 왔다가 돌아갈 것이면 흔적일랑은 남기지도 말 것이지, 영역 표시하듯 많이도 자기 존재를 알리고 가셨다. 분명 외롭지 않았던 것 같았는데, 베갯잇에 붙은 그것 때문에 다 틀려버린 것이다. 나는 혼자서도 잠만 잘 자는 여자였는데, 그놈의 머리카락이 굴러다니는 통에 한참을 뒤척이게 된다.


    길다란 내 것과는 생김이 달라, 더욱 눈에 띄는 그것들을 탈탈 털어내려다, 한 가닥을 슬며시 (붙)잡아본다. 몽땅 다 털어내 버리는 게 아쉬워진 것이다. 그런 내가 구차스럽게 느껴져 얼마 못 가 스카치테이프로 말끔히 정리해버린다. 집 밖에 잘 나가지 않는 나에게 커피, 이닦기, 방바닥, 침대… 이런 것들이야말로 내 일상의 본질과도 같은 것들인데, 그 속에 초연하게 자리잡고 있는 그것들을 해치울 필요가 있었다. 역시나 스카치테이프는 제격이었다. 어떤 것들은 고운 결의 생머리였고, 어떤 것은 반곱슬의 얇은 것이었다. 생각을 더듬어 보니 또 다른 ‘그 사람’의 것은 새치였다. 


    이처럼 일상에서 마주하게 되는 머리카락은 강력하다. 애절한 가락의 사랑노래는 비견될 바가 아니다. 왜냐하면 머리카락은 실로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잡담도 사라지고 나니, ‘그 사람’ 머리카락에 대한- 나아가서는 ‘그 사람’에 대한, 결국에는 ‘나’에 관한 - 올바른 이해만이 남게 된다. 다시 말해, 내 일상에 머물렀던 ‘그 사람’을 그리워하는 나, 혼자인 나, 사랑을 나눴던 나, 남겨진 나, 그래도 밥만 잘 먹는 나 등등 결국에는 ‘나’에 대한 ‘이해가 밝아지는 시간’ 속으로 침잠하게 되는 것이다. ‘침묵하는 머리카락’과 – 그 머리카락의 ‘침묵을 듣는 내가’ 일상에서 실존론적으로 개방되는 순간, 바로 그 순간이 하찮기 그지 없는 ‘그 사람’의 머리카락에서 나왔다. ‘그 사람’의 머리카락은 진실로 침묵하고 있지만, 실은 아주 다른 양태로 나에게 말을 걸어 오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 가로되, “침묵은 말의 한 존재양식으로서 어떤 것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특정한 방식으로 자기를 밖으로 말함이다” 라고 하였는데, 그 역시 아렌트의 머리카락을 보고 정리한 구절이려니 한다.


    귀신같이 글 잘 쓰는 남자, 김훈 역시 머리카락에 조예가 깊다.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의 속옷에 가끔씩 여자 머리카락이 붙어 있었다. 여름 속옷에도 붙어 있었고 겨울 속옷에도 붙어 있었다. 여름의 머리카락과 겨울의 머리카락이 같은 모질이었다. 어깨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었다. 염색기가 없는 통통하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이었다. … 겨울 속옷의 섬유 올 틈에 파묻힌 머리카락을 손톱으로 떼어내자 더운 방바닥 위에서 머리카락은 탄력을 받고 꿈틀거렸다. 젊고 건강한 여자의 나신이 환영으로 떠올랐다. 환영 속의 여자는 이름을 가진 어떤 여자라기보다는 여자라는 종족의 먼 조상이거나, 내가 알지 못하는 모든 익명의 여자들이 다 합쳐진, 여자의 군집체처럼 느껴졌다. 화석 속의 여자가 세상으로 뛰쳐나와 내 앞에서 한 올의 머리카락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환영은 이내 지워졌다. 환영이 사그라진 자리에는 분노도 슬픔도 없었고 휑하니 빠져나간 세월의 빈 자리가 허허로웠다. – ‘언니의 폐경’ 중 

         

    ‘남편’이 만난 ‘그 사람’이 탄력 있게 꿈틀거리는 젊은 육체를 가졌을 수도 있고, 통통하고 윤기가 흐르는 여자일 수도 있겠다. 그런 여자들의 전부가 ‘남편’의 여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기에 폐경기의 자신에게는 없는 촉촉하고도 축축한 젊음에 대고 지청구를 읊조렸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이러한 여자의 머리카락에 관한 주시가 추상적이든 구체적이든, 상상이든 현실이든, 몸이든 마음이든 간에 이는 남편의 외입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남자의 이야기가 아니다. 머리카락을 통한 여자의 헛헛함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는 것이 차라리 맞을 것이다. 남편 속옷서 발견 된 머리카락은 남편 외도의 단서가 되고, 나아가 남편의 전날의 밤을 말해주고 있지만, 결국에는 분조차 일지 않는 그녀의 깡마른 정신을 들여다 본 일상의 통찰 또는 여자의 존재론적 사건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머리카락의 강력한 영향력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내가 ‘그 사람’의 집에 드나들 적에는 말끔하게 머리카락을 치워놓고 나오곤 했다. 말 없는 나의 그것이 행여나 그 사람에게 다른 양태로 말을 걸어올 것을 염려해서였다. 더 없는 배려다. 그런데 무념한 ‘그 사람’이 ‘머리카락의 말 걸어옴’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작자들은 아니었던 것 같다. 퍽이나 그랬을까 싶다. ‘그 사람’들이 나만큼 예민하지도, 나만큼 경청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고 난 뒤부터는 뒤처리를 달리했던 것 같다. 흩뿌리는 것까지는 아녔어도, 방바닥이건 침대건 간에 그 긴 것들을 그냥 내버려두고 나온 적이 꽤나 있었던 것 같다. 내 몸의 일부인 나의 머리칼을 ‘그 사람’의 일상에서 발견하고서는 곰곰이 되새김질 해보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즉, 나의 존재부터 나의 부재까지를 자못 느꼈으면 했던 것이다. 준영과 같이 관계에 대해 자유롭기를 원했던 사람일수록 더욱 그리했던 것 같다. 나의 머리칼이 ‘그 사람’의 신념을 파고들어 좀먹어 주길 바라는 마음에 말이다. 나의 자극이 없는 곳에서도 나를 경험하기를 소망하며 약간의 너저분함을 자처했던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그 사람’ 역시도 나를 향한 자신의 마음의 꼴을 살펴보기를, 그리하여 그리움일수도 헛헛함일 수도, 아님 또 다른 것일 수도 있는 자기 자신의 ‘뫔’을 이해할 수 있는 형편이 되길 갈망했던 것이다. 출발은 나의 욕망이었지만, 끝은 ‘그 사람’이 존재물음에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일타 쌍피 전략였던 것이다.


    “은폐” 되어 있는 ‘나’를 고요하고 은밀하게 만나는 시간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만이 제대로 된 사랑도 연애도 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주장인데, ‘머리카락’은 이에 따른 가장 영향력 있는 증거이자 그것의 질료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것이 됐든 좋으니, 나의 머리칼을 통해 특정 “기분”- “권태”, “불안”, 과장, 허위, 고독, 등등- 을 ‘그 사람’이 느낄 수 있기를 바랐다(쓰고 보니 죄다 부정적인 기분들만 늘어놨다. 분명 누군가는 충만, 행복, 기쁨 같은 기분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내가 아직까지 저 단어들과 친밀하지 못 하다). 뭐가 됐든지 간에 갑자기 들이닥친 그 “기분”을 묻고, 음미하며 ‘본래적 자기’를 발견 할 수 있는 남자, 나는 그런 남자를 찾고 있었나 보다. 그러니까, 내가 나의 머리칼을 ‘그 집’에 그대로 두었던 더 깊은 이유는, 그가 헛헛함이나 공허함 속으로 가라 앉을 수 있는, 바로 ‘고독한(또는 고독 할 수 있는)남자’가 되길 바라는 주술적 행위였던 것이다. 나의 길다란 ‘머리카락의 말 걸어옴’을 들을 수 있고, 불현듯 만나게 되는 머리카락의 “순간” 혹은 “시간” 안에서 충실하게 외로울 수 있는 그런 남자를 향한 욕망이 그것의 바탕이었다.


    떨궈진 ‘머리카락’에게 가만히 귀 기울이고, 고유한 자기, 즉 존재의 깊은 곳으로 자작자작 걸어 들어가는 ‘그 사람’을 소망하는 이야기 즉, 내 이상형에 대한 비망록 하나를 정리한 듯 하다. 사랑은 듣는 것이라더니, 미상불 그 말이 참말로 맞다. 지금 ‘그 집’에서 ‘그 사람’의 머리칼 하나 눈에 들어 왔다면, 이제 그것의 이야기를 들어 주기를, 그리고 한 번쯤은 그것으로 인해 많이 외로워하다가 고독해지기를 간소하게나마 요청하는 바이다.


* 필자소개

         "한신에서 기독교교육을 공부하고,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조직신학으로 석사 과정을 마쳤다. 현재 박사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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