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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눈 : 포스트모더니즘과 주체 3] 라캉 : 주체의 파괴자인가, 해방자인가? (허석헌)

비평의 눈

by 제3시대 2016. 7. 4.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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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과 주체 3]


라캉 : 주체의 파괴자인가, 해방자인가?


 

허석헌

(미국 샌프란시스코 GTU 박사과정, 조직신학)


라캉을 읽는 두가지 시각 


      프로이트를 통해 시작된 정신분석학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을 뿐더러, 여전히 누군가에는 생소할 수도 있는 분야이다. 그래도 프로이트만큼이나 라캉이라는 이름 역시 알만한 사람은 다 알만큼 잘 알려진 대중적인 인물이다. 그가 베스트셀러 작가도 아니었고, 대중적인 연설가와도 거리가 먼 “고집스런”[각주:1] 정신분석학자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이름이 유명세를 탄 데에는 모종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실 라캉이 20세기의 주목받는 사상가로 떠오르는 데에는 라캉의 정신분석이론에서 급진적인 정치담론을 꾀하였던 조력가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바디우나 지젝과 같은 학자들이 바로 그렇다. 그들은 라캉이 말하는 ‘욕망하는 주체’를 반자본주의를 향한 이론적 무기로 활용하는데 앞장 서왔다. 그리고 최대한 라캉을 좌파스럽게 채색하는 작업이 완성에 다다를 즈음에 라캉은 체제 순응적인 인간을 양산하는 자본주의 시대에 저항의 주체를 키워내는 배후 정도로 대중들에게 각인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라캉이 치료중심의 과학이라는 정신분석학의 통념을 깨고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들고 정신분석학계에 새 전환기를 연 혁신적 인물일진 몰라도, 반자본주의 기치를 들고 정치적인 진보성을 뒷받침하는 이론가로 우대되는 상황은 석연찮아 보인다. 여느 흔한 프랑스 철학자들의 이력처럼, 68학생운동에 가담한 전력도 없고 마오주의에 한눈 판 적도 없는, 그저 개인적인 정신분석학자로서의 소명에 충실했던 그의 ‘비정치적인’ 행보안에서 가장 정치적이고 혁명적인 담론을 뽑아낸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충분하다. 바디우나 지젝도 그러한 라캉의 비정치적 노선을 모를리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놓으라는 맑스주의자들이 라캉으로부터 반자본주의적인 정치적 변혁을 꿈꾸며 그로부터 사상적인 자양분을 공급받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실제로 라캉의 주체이론은 그러한 정치변혁적인 힘을 가지고 있기는 하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을 안고 라캉의 주체이론에 접근할 때에, 우리가 참고할 텍스트는 매우 제한적이다. 주체는 기표에 의해 형성되는 것임을 의식했던 탓일까, 그는 글쓰기에 대해 매우 인색한 편이었다. 그의 유명세를 고려한다면 그가 평생에 남기 책 ‘에크리(Ecrits)’[각주:2] 한권은 매우 초라해 보인다. 하지만, 그는 이 책안에 그의 지적유산을 아낌없이 남겨주었고, 그의 사상적 구조를 거의 완결된 짜임새로 소개해 주고 있다. 목차를 언듯 보면 다양한 주제들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그 목차 안에는 나름의 질서가 잡혀있는데, 그 목차들의 배열이 함의하는 바를 친절하게도 색인에서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다.[각주:3] 크게 분류해 본다면, ‘상징질서’, ‘에고와 주체’, ‘욕망의 해석’, ‘임상실험’, ‘인식론과 이데올로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주체를 이해하는 그의 이론전개방식에 따라 핵심개념들을 논증적인 순서대로 배열해 놓은 것이다. 에크리 안에서 소개되고 있는 주요 개념들은 이미 잘 알려진 것들이다. 가령, 주체의 삼단계 형성이론인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와 욕망, 향락, 환상과 같은 주요 개념들은 라캉식의 주체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으로 따라오는 용어들이며, 다양한 활자경로를 통해서 보급되어 왔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용어들을 통해 라캉은 주체를 어떻게 이해하였으며, 근대적인 주체의 해체를 위해 어떤 방법론을 구사하는지를 파악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의 주체이론으로부터 어떠한 실천적인 담론이 도출될 수있는지를 평가해 보기로 한다.


데카르트의 <에고>에서 프로이트의 <무의식>으로

  

    라캉이 정신분석학을 통해 세우고자 했던 주체이론의 핵심은 근대계몽주의에 기초한 절대주체 개념을 허물고 주체를 새롭게 규명하고자 한 것에 있다. 이를 위해서, 라캉은, 의심없이 수용되어왔던 절대 주체의 이면에 무의식이라는 공간이 있었음을 발견해낸 프로이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전환점을 근대 서양철학의 중심을 이루는 의식 주체의 절대성의 위상을 흔드는 동력으로 사용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데카르트는 개인의 의식의 우위성을 강조하는 자기동일성의 철학의 시대를 열었고, 사유의 주체(Cogito)가 절대 주체로서의 권위를 행사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결국 데카르트가 개인의 절대주체성의 출발점으로 삼았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는 진리에 대한 판단을 보증함으로서 인식의 객관성을 확보하고 판단주체의 확실성을 판명하기 위해 요구되어진 조건부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근대철학이 인간 스스로가 자신이 존재한다는 의식을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을 판단의 주체로 세우는 물러설 수 없는 최후의 근거가 되었다.  

    라캉이 공략하려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사유주체의 절대성에 근거하는 철학의 치명적인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데카르트적 개념으로 사용되는 ‘에고(Ego)’ 가 형성되는 과정을 ‘거울단계(Mirror Phase, 1936)’에서 설명한다. 거울단계란, 신체를 파편화된 상태로 인식하던 신생아가 거울에 투영된 자신을 경험함으로서 자신을 하나의 통일된 형태로 인식하게 된다는 데에서 붙여진 명칭이다. 거울은 유아에게 형태를 부여하고, 발달을 인도하게 만드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허구적인 자신의 이미지를 통해서 이뤄진다. 유아가 자신을 최초로 통일된 형태로 경험하는 순간은 사실 자신의 내부에 있는 인식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외부에 있다는 것이다. 이로서 인간의 주체가 형성되는 첫 시도는 허구와 소외의 길로 들어서게 된 셈이다. 거울의 투영을 통해 인식된 허구적인 자신의 정체를 라캉은 자아(Ego)라고 부르는데, 이는 진정한 주체로 발전하기 이전의 원초적인 형태의 주체라고 볼 수 있다. 라캉은 거울단계를 통해서, 에고는 애초에 허구적인 이미지에 의해 잘못 인식된 자기동일화의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다는 점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허구적 이미지에 대한 오인,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를 경험하는 에고의 실체를 드러냄으로서, 데카르트의 의심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자기 인식의 동일성으로서의 주체가 실제로는 취약한 근거위에 세워져 있었음을 밝혀내려 한다. 자아에 대한 의식은 거울 속에 비친 이미지에 자신을 스스로 투영하고 동일시함으로서 구성된 거짓된 주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의심할 수 없는 진리라고 믿어왔던 인식의 주체와 판단의 주체 사이의 동일성이 라캉의 입장에서는 고작 유아적인 판단착오, 착시현상일 뿐이다. 데카르트는 의심없는 주체로서 에고를 발견하고 환희에 찼을지 모르지만, 라캉은 사실 그 에고란 걸음마도 떼지 못했으며 여전히 발달과정중에 있는 미성숙한 주체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일축한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거울단계는 허구적인 주체만을 생성하는 부정적인 측면만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주체의 원초적인 형태가 결정되는 단계이므로 거울단계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결코 아무 것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다시말해서, 거울단계를 거칠 때에만 사유의 주체와 사물은 어떠한 식으로든 관계 맺어질 수 있다. 비록 오인과 왜곡에 근거하지만, 현실세계를 인식하는 불가피한 방식을 습득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라캉의 주체는 데카르트의 주체와는 정반대의 명제에 다다른다. 즉,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내가 없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각주:4] 이로써 라캉은 거울단계 이론을 통해 데카르트적인 ‘에고’로서의 절대주체의 권위를 박탈시킨다. 그 대신 라캉은 자아의식이 내준 ‘생각하지 않는’ 공백의 정체는 프로이드적인 ‘무의식의 주체’였음을 보여주려한다.

    거울단계를 통해 라캉은 데카르트 철학 위에 세워진 절대주체의 개념을 비판함과 동시에, 두가지 중요한 사실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짚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 자신을 인식하는 방식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외부(타자)에 있다는 것이고, 그렇게 외부(타자)를 통해 투영(욕망)된 자신에 대한 인식은 언제나 실재와 다른 허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주체의 원초적인 형성이 이러한 조건위에서 시작되었다면, 인간의 주체성이라는 것은 다음 단계에서도 결국 이 경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즉, 거울단계의 다음 단계로서 기표가 지배하는 상징계의 질서에 주체가 들어가면, 끊임없이 기표 위를 배회하는 욕망은 충족되지 못한 채 결핍의 형태로 무의식이라는 공간에서 남아 욕망하는 주체를 구성하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임을 말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라캉은 데카르트의 인식론을 완전히 뒤짚어 엎으려는 것 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는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를 고스란이 수용하고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의심할 수 없는 것을 찾는 것으로 의심을 절대적인 진리를 찾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을 방법론적 회의라고 볼 때에, 라캉은 반 데카르트적이지 않고 오히려 데카르트의 방법론을 더 철저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데카르트는 의심할 수 없는 근거가 되는 ‘생각하는 주체’가 진실이라는 확신에서 멈춰섰지만, 라캉은 그것이 정말로 의심없는 사실인지 프로이트를 무의식을 끌어와 한번 더 집요하게 묻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거울단계이론은 근대적 주체가 생산되는 진원지에 대한 라캉의 일차적인 반격의 장이 되었고,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이에 대한 유용한 공격의 수단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라캉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이 주체 형성에 결정적인 무대가 된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가 무의식의 본질을 적절히 파헤지지 못한 한계를 동시에 지적한다. 이에, 라캉은 기표가 사물들을 언어의 법칙에 종속시켜 기의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을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에 추가하여, 언어처럼 구조화 되어 있는 무의식이 지배하는 상징계의 질서에 대한 관심으로 이동한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적 주체>에서 헤겔의 <욕망하는 주체>로


    라캉이 주체 개념의 정립을 통해 도달하려는 일차적인 목적지는 데카르트적 주체의 전복이다. 이 전복은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을 통하여 시도되었다. 그러나 라캉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그대로 차용하기보다는 자신의 방식으로 전유하기를 선택한다. 라캉은 언어의 구조를 도입하여 주체가 어떻게 무의식이라는 공간안에서 언어, 즉 기표(significant) 에 의해 지배되는지를 보여주는데, 이것이 프로이트에 대한 라캉의 재해석의 핵심이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언표 안에는, 결핍을 채우기 위해 기표라는 상징계의 질서에 편입되는 순간 무의식은 자신의 결핍을 무수한 기표로 끊임없이 대체하는 순환구조에 빠지게 되는 현상이 함축돼 있는 것이다. 충족되지 않는 욕망이 기표의 자리바꿈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실재(Real)이지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할 수밖에 없는 주체는 실재에 결코 이르지 못한다. 실재는 환상이라는 형태로만 주어질 뿐이다.  

    라캉이 주체를 프로이트의 무의식적 주체에 머물지 않고, 욕망하는 주체로 보는 데에는 헤겔이 인간을 ‘욕망하는 주체’로 이해하는 헤겔의 욕망론에서 발견된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인간을 ‘욕망하는 주체’로 이해하는데, 주체의 욕망은 언제나 타자의 인정을 받아 자신을 확인하려는 욕망이며, 이는 모든 주체들의 욕망이므로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욕망’이라는 것이다. 이 논법은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적 관계를 통해 보여준 방식과 그대로 일치한다. 타자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을 얻으려는 투쟁에서 승리자는 주인이되고 패배자는 종이 된다.투쟁의 결과에 따라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갈려지지만, 자리가 결정된 이 후에 더 이상 노예는 주인으로부터 타자로 인정되지 않기에 주인은 인정받을 수 있는 욕망을 노예로부터 얻지 못하게 되고 마침내 위치의 역전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욕망이 충족되는 순간 인간은 욕망의 대상이 사라지게 됨으로 욕망하는 주체이기를 부정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헤겔의 욕망론이 ‘자기 동일성의 확보’라는 변증법의 최종 목적만을 제외한다면, 욕망의 주체로서 인간을 설명해 내는 적절한 수단을 제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라캉의 근대적인 절대주체를 흔들기 위한 치밀한 전략이 드러난다. 헤겔은 변증법의 마지막 단계인 긍정적인 ‘합(Synthesis)’을 자기 동일적인 주체성을 증명하기 위한 논증 단계로 사용하지만, 역으로 라캉은 변증법적으로 놓인 타자 사이의 욕망 관계가 결국은 충족될 수 없는 부정적인 ‘합’으로 결론지어 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라캉은 헤겔 자신의 변증법을 오히려 인간의 절대주체성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무너뜨리기 위한 수단으로 전용한 것이다. 헤겔의 자신의 칼로 헤겔 자신의 목을 겨누도록 만든 것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라캉은 데카르트의 절대주체 개념을 허물기 위해서, 데카르트가 판단 의식의 주체에 대한 회의와 의심을 끝까지 밀고나간 것을 그대로 자신의 거울단계이론에 적용하여 마침내 인식하는 주체는 내가 아니라 오히려 외부에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었다. 이렇게 볼 때, 헤겔의 절대주체에 대한 비판적 접근은 데카르트의 주체를 공략하는 데에서도 같은 방식이 적용되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의도적이고 주도면밀한 전략적인 방법론의 선택이라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주체의 포기인가, 해방인가?


    라캉은 거울단계(상상계)와 상징계를 통해 자아 의식의 절대주체의 탄생을 직접 주도하였고 이를 되돌릴 없게 못박아 두었던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와 헤겔의 변증법을 그들의 무기로 하나씩 제압해 나가는 독창적인 싸움의 기술을 선보였다. 마치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제갈량의 빈 배로 쏜 엄청난 수의 화살을 그대로 회수하여 이를 반격의 기회로 삼은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보면, 라캉은 근대적인 주체의 개념을 정면으로 돌파하기보다, 오히려 데카르트와 헤겔을 경유하여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포스트모던적인 주체를 새롭게 구성하려 했던 것으로 볼 수있다. 다시 말해, 라캉은 반 근대적인 급진적 해체주의라기 보다 근대를 적절히 후기근대의 발판으로 사용할 줄아는 안목을 가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비록 라캉은 근대적 주체로 구성된 세계관을 탈중심화하는 데 기여하였지만, 그에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라캉이 주체를 기표의 결과물내지 대타자의 효과에 불과한 것으로 보는 시각은 극단적인 해체론자들에게서 발견되는 편견중의 하나이다. 주체를 공중분해시키고 상징질서의 파생물로 전락시킨다면 주체를 역동적인 해방역량으로 수용될 수있는 가능성은 애초에 차단되고 말것이다. 또한, 라캉이 말하는 오이디푸스적인 권위에 복종하는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욕망하는 주체를 기정사실화 하게 될 때에는 국가나 지배권력과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진 주체를 숙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회의주의로 흐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들뢰즈가 라캉을 비판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들뢰즈의 비판의 잣대로 보자면, 라캉은 인간의 저항적인 주체성을 말살시키고 주어진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자본주의 노예로 길들이는 반동분자에 다름없을 것이다.  

    라캉의 주체이론의 이러한 양면성 때문에 그를 섣불리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이것은 또한 욕망이 가지는 이중적인 성격때문이다. 라캉의 주체이론에서, 기표에 의해 연기되는 무의식이라는 구조에 갇혀있는 욕망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을 핵심으로 파악한다면 라캉은 반동이되지만, 도달할 수 없는 욕망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달려듦으로서 상징화되는 주체에 대해 물러서지 않고 저항하는 인간을 라캉의 매력으로 볼 수있다면 라캉은 반대로 급진주의적인 혁명이론가로 재탄생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라캉을 볼지는 결국 해석자에게 달려있는 문제이다.  



ⓒ 웹진 <제3시대>

  1. 라캉은 죽기전에, “고집스러웠던 저는 이제 갑니다”라는 유명한 말로 생애를 마친다. 68혁명의 고조된 분위기에도 아랑곳 않고 초연한 채 주체의 결핍을 응시하는 태도만이 변혁의 진정한 출발점임을 ‘고집스러운’ 태도로 일관해온 그의 인생을 한마디로 요약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본문으로]
  2. Jacques Lacan, Ecrits: The First Complete Edition in English, tans. Bruce Fink (W.W. Norton: New York &London, 2006) 라캉의 저작에는 ‘에크리’ 이외에 ‘세미나(The Seminar)’ 시리즈도 있지만 녹취된 강의를 재구성하였다는 점에서 ‘에크리’만큼의 정교함은 덜하다고 평가한다. [본문으로]
  3. J. Lacan, Ecrits, 851 특이한 점은 색인이 알파벳 순서로 배열되어 있지 않고 주제를 기준으로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라캉이 에크리를 그의 사상을 한 장의 도면에 완전히 그려내려는 의도에서 공들여 집필구성되었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 [본문으로]
  4. Ecrits, 430. 라캉은 이를 다른 방식으로 다시 표현한다. “나는 나의 생각이라는 장난감( plaything, 데카르트의 ‘사유’를 격하시켜 표현: 필자 주)이 있는 곳에 없고, 내가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곳에 내가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할 뿐이다.” Ibid.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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