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신학정보] 도킨스의 “또 다른 책”에 관한 상상, 그리고 연대와 비판 (이해청)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6. 7. 4. 20:07

본문

도킨스의 “또 다른 책”에 관한 상상, 그리고 연대와 비판





이해청
(성공회대 박사과정 / 탈식민성서해석학)

 


     제목이 좀 괴기하다. 그 이유는 도킨스의 독자가 만일 종교적 근본주의자였다면 전투적인 무신론자의 책으로 잘 알려진 『만들어진 신』을 이런 식으로 평가할 순 없기 때문이다. 특히, 종교와 관련해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 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라는 로버트 퍼시그의 견해를 도킨스가 수용하고 있기에 기독교인이라면 일단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종교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사실 새롭지 않다. 프로이트 역시 종교를 하나의 강박증상으로 이해했고 그에 따라 설명을 시도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도킨스와 달리 망상보다는 환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종교에 대한 도킨스의 이해를 진화론적 모형에 따라 종교를 이해하고자 노력했던 19세기의 종교기원론의 현대적 버전이라고 해도 상관없는 것처럼 보인다. 흥미롭게도 그 역시 이러한 지적을 잘 받아들이고 있다. 그것도 아주 긍정적으로 말이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어떤 논증을 19세기의 것이라고 칭한다고해서 그것이 어딘가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일부 19세기의 개념들은 대단히 훌륭했으며 다윈의 위험한 생각이 특히 그렇다.” 따라서 다른 이들이 어떻게 판단하든 간에, 이 전투적인 무신론자의 주장이 반드시 해로운 것만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이 책에서 도킨스가 제기한 주장들, 특히 기독교와 관련한 여러 주장들에 대해서는 "이용하기에 좋고 사실처럼 여겨지는 것들을 모아 놓은 것에 불과한 모습을 종종 보여준다. 사실처럼 여겨지는 것들은 최대한의 영향력을 얻기 위해 적절히 과장되고 논증을 이루는 것처럼 여겨지게 하기 위해 느슨하게 배열되어 있다. 증거를 이렇게 매우 선별적으로 사용한 글을 논박하는 것은 너무나 따분해서 결국 그저 까탈스럽고 반동적이기만 한 한심한 책이 될 수도 있다"[각주:1]는 맥그라스의 비판을 피해가기가 어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늘날 근본주의 기독교가 갖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그가 정확하게 짚어주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물음을 고쳐 다시 물어보도록 하자. 과연 그가 기독교의 모든 전통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가? 특히, 기독교의 역사에서 성장하고 발전해 온 신학적 전통들 모두를 무시하고 있는가? 라고 말이다. 사실 그렇게까지 강심장이지는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문고판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각주:2] 


      왜 늘 종교에서 최악의 사례를 공격하고 최선의 사례는 무시하는가. 당신은 틸리히나 본회퍼 같은 뛰어난 신학자들이 아니라 테드 해거드, 제리 팔웰, 팻 로버트슨 같은 조잡하고 어중이떠중이나 몰고 다니는 위험 분자들을 다룬다. 그런 세심하고 미묘한 종교가 주류라면 세계는 확실히 더 나은 곳이 되었을 것이고 나는 다른 책을 썼을 것이다. 우울한 사실은 이런 유형의 절제되고 온건하고 개혁적인 종교가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소수파라는 것이다. 전 세계 신자들의 대다수는 로버트슨, 팔웰, 해거드, 오사마 빈 라덴, 아야톨라 호메이니 같은 지도자들에게서 엿볼 수 있는 것과 너무나도 유사한 종교를 믿는다. 그들은 허수아비가 아니라 모두 대단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고, 현대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그들과 대면해야 한다. 


     따라서 도킨스를 열렬하게 비판하는 사람들과 달리 "다른 책"을 썼을 것이라는 그의 말은 내게 호기심을 발동시킨다. 때문에 정작 나와야 할 책은 이항대립적인 정신성을 가진 전투적인 무신론자가 그 자신과 동일한 정신성을 가진 종교적 근본주의자를 꾸짖는 책이 아니라 "다른 책"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언급한 "다른 책"은 나오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그것은 자신이 지적한 바와 같이 근본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대다수이고 다른 그 어떤 누구보다 아직도 이들이 더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이들에 대한 비판이 가장 시급했고 이러한 상황은 시간이 흘러도 바뀌지 않고 있다고 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사실, 도킨스와 같은 부류인 히친스의 다음과 같은 지적을 또한 참조한다면, 열렬한 비판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반대로 그리 해로와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각주:3] 


      프랜시스 콜린스 박사는 현재 살아있는 가장 위대한 미국인 중 한 명이다. 그는 인간게놈프로젝트를 적은 예산으로 앞서 완성한 인물이며, 현재 국립보건원의 수장을 맡고 있다 …… 이 위대한 인본주의자는 또한 C. S. 루이스의 헌신적인 추종자이며 자신의 저서 <신의 언어>에서 과학과 믿음이 양립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나는 도한 종교에 관한 다양한 공개토론과 사적인 토론을 통해서도 프랜시스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일부러 시간을 내서 찾아와 내게 적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최근에야 겨우 상상할 수 있게 된 온갖 새로운 치료법들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그와의 대화를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그는 내게 기도를 제안하지 않았고, 나는 그 보답으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갖고 그를 놀리지 않았다. 따라서 내가 고통 속에서 죽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사실상 가장 이타적인 기독교인 의사의 노력이 물거품 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콜린스 박사가 뭐라고 신의 계획에 감히 끼어들겠는가? 비슷한 맥락에서 내가 지옥불에 타기를 바라는 사람들 또한 나를 구제불능의 악마로 보지 않는 상냥한 신앙인들을 조롱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도킨스를 비롯한 오늘날의 전투적 무신론자들이 신학의 모든 형태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본 것처럼 때론 그 상대가 보수적인 신앙을 갖고 있다하더라도 말이다. 따라서 과학과 종교 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네 가지 유형, 즉 갈등, 분리, 대화, 통합의 유형에서 이들이 근본주의자들에게는 갈등의 방식을 취하지만 소위 자유주의적인 신학 노선을 걷는 사람들에겐 분리 내지는 대화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흥미롭게도 도킨스는 근본주의 신학적 노선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각주:4] 


      성경을 곧이곧대로 자기 도덕의 근간으로 삼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존 셸비 스퐁 주교가 성서의 죄악들에서 제대로 간파했듯이 그 책을 읽지 않았거나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스퐁 주교는 기독교인이라고 자칭하는 대다수 사람들이 거의 인정할 수 없을 정도로까지 발전된 믿음을 지닌 개방적인 인물이다. 영국에서 그에 상응하는 인물은 최근에 에든버러 주교직에서 퇴임한 리처드 할러웨이다. 할러웨이 주교는 심지어 자신을 개심한 기독교인이라고까지 말한다. 나는 에든버러에서 그와 공개 토론을 한 적이 있는데 그는 내가 만난 인물 중 가장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사람에 속했다. 


     그래서일까. 로완 윌리엄스 대주교와의 대화에서 도킨스는 자신을 전투적인 무신론자에서 불가지론자로 지칭하는 변화를 보여주기도 했다. 물론 이것이 그가 기독교에 대해 전적으로 호의적이라거나 찬성했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그를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이고 심지어 궤멸시키기로 작정한 인간으로만 취급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해야 할 것이다. 19세기 다윈의 진화론이 끼친 긍정적인 영향 못지않게 도킨스는 19세기의 독일의 역사비평학을 훌륭하게 평가하고 있기에 말이다. “신학자들, 특히 독일의 신학자들이 증거에 토대를 둔 역사적 방법을 사용하여 이른바 역사적 사실성에 큰 의문을 제기한 것이 바로 19세기였다.” 또한, 카메룬의 팡족 이야기를 헛된 이야기라고 비판하지만 정작 자신이 믿고 있는 성서의 이야기도 팡족의 이야기만큼이나 황당할 수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케임브리지의 신학자들을 향한 도킨스의 비판은 나름 공평하다. 한번 읽어보도록 하자. 다소 언짢더라도 말이다. 


      조상들의 시대에 한 남자가 생물학적 아버지 없이 처녀인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났다. 그 아버지 없는 남자는 나사로라는 친구의 이름을 불렀고 죽은 지 오래되어 악취를 풍기던 나사로는 부활했다. 그 아버지 없는 남자 자신도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했다. 40일 뒤 그 아버지 없는 남자는 언덕 위로 올라가서 육신을 지닌 채 하늘로 사라졌다. 당신이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면 그 아버지 없는 남자와 그의 아버지가 그 생각을 알아차릴 것이고 조치를 취할지 모른다. 그는 동시에 세상 모든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다. 당신이 나쁜 짓이나 좋은 짓을 하면 설령 아무도 모를지라도 그 아버지 없는 남자는 볼 것이다. 당신은 죽은 뒤에라도 그런 행위에 대한 보상이나 처벌을 받을 것이다. 그 아버지 없는 남자의 처녀인 어머니는 죽지 않고 육신을 지닌 채 승천했다. 빵과 포도주는 사제의 축복을 받으면 그 아버지 없는 남자의 피와 살이 된다. 어느 객관적인 인류학자가 이런 믿음에 새롭게 접한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아직은 “다른 책”을 쓴 것처럼 보이지 않기에 종교, 특히 기독교와 관련해 어떤 입장인지 불투명하다는 인상은 지울 수가 없다. 그렇지만 만일 그가 “다른 책”을 썼다면, 그 책은 적어도 이렇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각주:5] 


      전선은 무신론자 대 유신론자가 아니라 극단주의자 대 온건주의자로 그어야 한다. 평화롭고 정의로운 미래 세계에 대한 꿈을 갖고 있고, 합리적인 이성과 판단력을 지닌 온건주의자들은 어떤 분야에 속해 있든지 연대해야 한다. 정치적 종교적 인종적 성차별적 편견에 기반한 극단주의와 근본주의자들의 반인도주의적 행태에 함께 대항하여 보다 선한 사회와 제도를 만들기 위한 온건주의 연대를 꾸려야 한다. …… 이러한 선한 싸움은 결코 종교 대 과학의 싸움이 아니라 진보적 가치와 상생을 추구하는 정치인, 학자, 시민운동가, 과학자, 예술가, 종교인, 기업인, 사업가, 상인, 샐러리맨, 주부, 학생들이 연대하여 벌이는 싸움이다 …… 만사가 그렇듯이 종교도 긍정적인 역할이 있고 부정적인 역할이 있다. 과학도 마찬가지로 이기의 도구일 수도 있고 파괴의 도구일 수도 있다. 그 판단은 역사적인 맥락에서 그것이 인간의 자유와 해방, 진리와 도덕, 그리고 생명의 아름다움을 꽃 피우도록 기여했는지, 아닌지로 판단할 일이다. 거듭 말하자면 모든 종교는 사악하지 않다. 모든 철학과 과학과 사상이 그러하듯이, 좋은 놈이 있는가 하면 나쁜 놈이 있다. 


      물론, 이런 추측에 대해 누군가는 도킨스를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에게서 과학제국주의적이고, 그렇기에 고대 세계를 혹은 현재의 서구 이외의 여러 문화들을 서구적인 과학적 가치관에 입각하여 평가하려는 경향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도킨스가 말한 바와 같이 구약의 신은 “불쾌한 주인공이자 시기하고 거만한 존재, 좀스럽고 불공평하고 용납을 모르는 지배욕을 지닌 존재, 복수심에 불타고 피에 굶주린 인종청소자, 여성을 혐오하고 동성애자를 증오하고 인종을 차별하고 대량 학살을 자행하고 어린 자식들을 죽이고 전염병을 퍼뜨리고 과대망상증에 가학피학성 변태성욕에 변덕스럽고 심술궂은 난폭자”[각주:6]일 수 있다. 그렇기에 굳이 부인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그의 이러한 지적은 도킨스 그 자신이 살고 있는 문화와 고대의 텍스트인 성서가 갖고 있는 문화 간의 시대적 간격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비판을 면할 순 없다. 또한, 구약만 그럴까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시간의 차이로 인한 문화적 격차를 느낄 수 있게 하는 예를 한 가지 들어보자. 한국의 고대설화가 기록된 삼국유사를 보면 구약성서보다 훨씬 괴기한 사건들로 가득 차 있다. 삼국유사는 출애굽이 텍스트로 기록된 시기와 현재의 중간보다도 훨씬 더 현재에 가까운 시기에 기록된 책이다.”[각주:7]라고 지적할 수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도킨스가 보는 것처럼 구약의 신이 변하지 않고 영원히 동일한 그런 존재로만 이해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흔히 주장되고 있는 것처럼, 구약에서 신의 형상이 폭군인 동시에 해방자로 드러나고 있다면 좀 더 다층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지만 아쉽게도 도킨스는 단 하나의 관점, 즉 근대 이후의 계몽주의적 관점으로, 그것도 계몽주의 이신론자들이 가졌던 종교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마저도 폐기처분해버리는 일종의 과학제국주의적 방식으로 읽어내고 있다. 때문에 텍스트를 읽는 방식이 단선적이고 과격하다는 인상을 면하기란 어렵다.

     때문에 도킨스를 비롯한 현재의 전투적 무신론자들을 향한 암스트롱의 지적은 꽤 의미 있게 다가온다. 종교가 일종의 퇴화된 상태로 계속 남아 있을 뿐이라는 소위 종교에 대한 19세기 진화론적 설명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이는 도킨스에게 종교가 퇴화만이 아니고 과학 못지않게 진화하고 발전해 왔음을 역설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각주:8] 


      한편 무신론자들은 인간에게 굴종만을 요구하는 신으로부터의 해방을 강조하며 기존의 전통적 신 개념을 부정했다. 그들은 인격적 신 이해의 폐해를 잘 인식했다. 인격적 신 이해는 성서에 나타난 모든 신에 대한 묘사를 문자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율법준수만을 강요하는 폭군적 이미지의 신을 낳았다. 이처럼 인간에게 굴종만을 강요하며 협박하는 신은 1989년 공산주의 국가의 붕괴처럼 오늘날 급속히 몰락하고 있다. 율법 수여자이자 통치자로서의 인격적 신은 이제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 신 이해의 부당성을 지적한 무신론자들의 종교 비판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었다. 유대인, 무슬림, 기독교인은 모두 기본적으로 유사한 형태의 절대자 신 개념을 발전시켜 왔다. 비록 그들의 신 개념이 여러 결점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신에 대한 믿음을 통해 삶의 궁극적 의미와 가치를 발견했다. 더구나 그들의 종교적 신앙은 강요된 것이 아니었고 인간 모두에게 잠재된 본원적 종교성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바로 이 점을 무신론자들은 올바로 인식하지 못했다. 


     위에서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도킨스의 공헌은 무시될 수 없다. 전통적인 신 개념이 더 이상 우리 세계와 맞지 않고 심지어 때론 폐를 끼치고 있다는 것을 잘 역설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하지만 도킨스는 종교의 본성을 제대로 이해치는 못하고 있다. 바로 종교란 인간들처럼 일종의 야누스적 얼굴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기에 신도 악이기에 없어져도 괜찮은 것이라면 인간 역시 죽어야 하는 것이다. 종교를 구성하는 근본적 주체들이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급진적인 견해에서 본다면 말이다. 하지만 긍정적 세계관을 취하고 있는 도킨스가 인간의 죽음을 선언하리라곤 상상할 순 없다. 그렇다면 도킨스의 책 곳곳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종교의 죽음을 혹은 신의 폐기를 말할 순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그는 신의 폐기를 과감하게 주문한다. 구시대의 인격신은 죽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 도킨스의 지적처럼 인격신의 폐해가 적지 않기에 죽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즉, 인격신은 그 폐해가 크기에 무조건 폐기되어야 하는 그런 것일까 하는 점 말이다. 다른 점에서 보면, 역사를 통해 인격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이 처한 곤궁한 상황을 뚫고 나가도록 하는 기제가 되었던 건 아닐까?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맑스의 말 속에서 종교가 담긴 긍정적 의미를 애써 끌어내고자 한다면 말이다. 이러한 점에서 암스트롱이 도킨스를 향해 던진 날선 비판은 꽤 흥미롭다.[각주:9] 


      그러나 이 모든 갈등이 전적으로 종교적인 탓만은 아니다. 신 무신론자들은 현대 사회의 경험의 복잡성과 모호성에 관해 놀라우리만치 이해 또는 관심이 부족하다. 그들은 비록 명백한 결점들을 지니기는 했지만 세 유일신교 모두 정의와 공감을 지니고 있음은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종교적 근본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적을 악의 전형인 것처럼 과장하는 이러한 경향은 신 무신론자들을 너무 쉬운 비판에 머물게 한다. 그들은 종교에 관해 자신들과 견해를 달리하며 어떤 근본주의자들보다 주류 전토에 가까웠던 불트만이나 틸리히 같은 신학자들은 절대 거론하지 않는다. 신 무신론자들은 포이어바흐, 마르크스, 프로이트와는 달리 신학적인 이해를 갖추지 못했다. 또한 이들은 윤리적으로도, 지적으로도 보수적이다. 포이어바흐, 마르크스, 잉거솔, 밀과 달리 신 무신론자들은 자신들이 개탄하는 잔혹행위들을 낳은 빈곤, 부당함, 치욕감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열망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소 복잡한 사안을 때론 매우 단순하고 과도하게 환원시켜 버리는 그의 어법은 오늘날 과학과 종교 간에 생겨나고 있는 문제들과 관련해 어떤 진전을 낳기보다는 단절을 몰고 올 여지가 충분해 보인다. 과학적 논법은 무조건 옳고 종교적 논법은 무조건 일단 깨부수고 보자는 논법은 너무 단순하고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흑백논리에 기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더구나 과학의 영역에서는 그렇다 하더라도 문화의 영역에까지 과학을 과도하게 적용시키려는 그의 열정으로 인해 자칫하면 그의 이해는 서구과학에 근거한 문화제국주의 아닌가하는 의심을 받을 여지가 다분하다. 흥미롭게도, 구약에 대한 그의 혐오는 교회사적으로 보면 마르시온과 다소 유사해 보인다. 하지만 마르시온과 달리 그는 신약에도 구약에 대한 비판을 확대해 적용하고 있다. 사실 반윤리적이고 폭력적인 측면이 신약성서에도 존재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러한 측면은 앞서 지적한 것처럼 시간의 격차라는 혹은 문화적 격차라는 점을 고려해서 재해석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서구 과학주의적인 관점으로 고대의 텍스트를 재단해버리는 선입견은 텍스트에 대한 진정한 비판을 가로막는 행위로 전락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학의 문제도 과학에 힘입는 현대의 문화가 고대의 문화를 바라보는 문제도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도킨스는 문화의 문제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물어볼 필요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쉽게도, 서구 백인 남성중심주의 문화가 일으킨 문제를 진지하게 묻는 포스트 모던에 대해서는 강력한 알러지 반응을 보이고 있기에 이런 물음을 물을 가능성이 그에게는 거의 남아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그 역시 과학에 근거한 백인남성중심주의 문화를 나머지 세계에 혹은 고대 세계에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의심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게다가, 도킨스의 지적처럼 종교란 늘 퇴화적이고 퇴행적인 일종의 지적인 불성실성만을 보여주는 그런 영역인지에 대해서도 물음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과연 인격신이 지적인 퇴행과 테러만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관념인지를 말이다.  

      아무튼, 이제 정리하도록 하자. 일단 인격신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도킨스의 비판은 유효하다고 말이다. 그렇기에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의 신이 갖는 부정적인 측면을 과감하게 폭로한 도킨스는 일종의 파르마콘적 처방을 내렸다고 할 수 있다. 약을 처방하되 아주 센, 극약 처방을 한 셈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해서라도 세상을 좀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게 만들려 했다는 점에선 분명 옳다. 하지만 "인간이 위로를 필요로 한다는 주장으로 돌아가서, 물론 그 말은 옳다. 하지만 우주가 당연히 우리를 위로할 책임을 지고 있다는 믿음은 다소 유치하지 않은가"[각주:10]라고 그의 답변은 대단히 실망스러운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러한 단순한 답변은 "종교가 다시 돌아왔다. 종교는 이제 한 세대 전만 하더라도 종교의 소멸이 그런 확신을 가지고 예고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색할 정도로 오늘날의 세계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는 맥그라스의 지적에 대해 제대로 대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치하고 마치 허수아비 같은 존재가 종교라면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분명 도킨스는 적절한 대답을 제시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기껏해야 "인간이 종교를 필요로 한다는 같잖은 신화"[각주:11]라는 말 이외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점에서, 도킨스의 인격신 비판은 한편으론 상당히 긍정적인 측면을 지니지만, 다른 한편으론 교육받은 백인중상층의 가치관, 그것도 다소 지나치게 과학주의적으로 경도되어 있어서 그 진단이 너무나 소박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종교관은 19세기의 진화론적 종교 이해를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때문에 "도킨스가 한 마디도 허투루 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 그 점에서 이 책은 우리의 의식을 일깨우는 역할을 할 법하다."[각주:12]는 『만들어진 신』의 번역자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셈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행여나 그가 "다른 책"을 출판한다면, 앞서 본 것처럼 신학적 전통 모두를 그가 부정하고 있진 않기에, 또한 암스트롱과 김기석이 지적한 바와 같은 문제를 정직하게 다룬다면, 종교를 대하는 그의 진면모를 엿볼 수 있지 않을까. 비록 이런 그를 기대하는 일이 현재로선 다소 어렵다하더라도 말이다.  


ⓒ 웹진 <제3시대>



  1. 알리스터 맥그라스,『도킨스의 망상』, 전성민 옮김, 살림, 2007, p.22 [본문으로]
  2. 리처드 도킨스,『만들어진 신』, 이한음 옮김, 김영사, 2007, pp.579~580 [본문으로]
  3. 크리스토퍼 히친스,『신 없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 김승욱 옮김, 알마, 2012, pp.41~42 [본문으로]
  4. 리처드 도킨스, 앞의 책, p.357 [본문으로]
  5. 김기석,『종의 기원 신의 기원』, 동연, 2009, pp.99~102 [본문으로]
  6. 리처드 도킨스, 앞의 책, p.50 [본문으로]
  7. 김기석, 앞의 책, p.82 [본문으로]
  8. 카렌 암스트롱, 『신의 역사Ⅱ』, 배국원․ 유지황 옮김, 동연, 1999, p.673 [본문으로]
  9. 카렌 암스트롱, 『신을 위한 변론』, 정준형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10, pp.466~467 [본문으로]
  10. 리처드 도킨스, 앞의 책, p.586 [본문으로]
  11. 리처드 도킨스, 앞의 책, p.588 [본문으로]
  12. 리처드 도킨스, 같은 책, p.593 [본문으로]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