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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정보 : 바울신학가이드 17] 지젝과 바울(IV) (한수현)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6. 8. 1.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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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가이드17]



지젝과 바울(IV)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사랑이 뭐길래


    지젝을 다루면서 지금까지 우리는 지젝이 말하는 세계 그리고 그 세계가 안고있는 문제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문제를 잘 꿰뚫어 본 종교인 유대교와 바울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제 지젝이 말하는 그 문제를 해결할 묘수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간단히 말한다면 그 묘수란 그야말로 닳고 닳은 단어인 ‘사랑’이다. 지젝이 바울의 입을 빌어서 말하는 그 사랑이라는 것이 뭐길래, 만병통치의 묘약이 되는 것일까? 

   수많은 소설, 영화, 드라마등에서 자주 쓰이는 말인 ‘진정한 사랑’이란 것을 상상해보자. 그리고 지금 아주 통속적인 장면 하나를 그려보자. 한 부유하고 젊고 아름다운 청년이 말을 타고 (또는 고급 차를 타고) 외딴 길을 지나가고 있다. 그때 한 젊은 처녀를 지나치게 된다. 그 순간 부자 청년을 둘러싼 시간이 천천히 흐르면서 그 청년의 눈길은 그 처녀에게 머무르게 된다. 그 순간에 관객은 또는 독자는 쉽게 알아차리게 된다. 아! 청년이 사랑에 빠졌구나. 너무 로맨스 소설같은 느낌이 들지만 이것이 바로 지젝이 바울을 통해 말하는 묘약, 사랑에 가까운 의미일 것이다. 물론 여기서 주의해야할 것이 있다. 먼저 청년이 사랑에 빠진 조건은 아마도 처녀의 아름다움이었겠지만 이 아름다움을 빼야만 더욱 사랑에 가깝다. 즉,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에 여타의 사회적 조건을 빼어버린 것. 그것이 사랑이다. 여기서 사회적 조건이란 아주 쉽게 표현하면 상징계를 뜻한다. 바로 여기서 사랑이란 인간의 언어와 사회적 질서로 만들어 놓은 모든 상징의 세계를 꿰뚫고 전혀 다른 경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은 절대 위와 같은 감성적인 로맨스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위의 예는 그야말로 쉽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는 이미 부자 청년의 계급과 젊은 처녀와의 관계에 우선된 가부장적, 여성차별적 구조가 선행되어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진정한 사랑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이방인의 지혜, 그리고 기독교


   지젝이 말하는 이방인의 지혜(The very core of pagan Wisdom)[각주:1]는 플라톤이나 여타의 정치제도와 법률을 통해 인간 사회를 만들었던 사상들이나 종교를 뜻하며, 멀게는 인도의 힌두이즘 (카스트 제도를 바탕으로 한 우주론적 계급사회)나 가깝게는 그리이스 철학 (사회적 갈등들을 철학적 담론으로 순화시키는것)을 뜻할 것이다. 지젝은 기독교가 이러한 계급의 질서를 혁파하고 각 개인들이 “보편성 (universality)에 직접적으로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소개하였다고 말한다.[각주:2] 여기서 보편성이란 성령 또는 오늘로 말하면 인권이나 자유와 같은, 누구에게나 허락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개념을 뜻하는데, 바로 이 성령의 보편성을 확증함으로써 기독교는 종래의 사회조직들이 기반하고 있던 상징적 질서를 벗어날 수 있는 (unplugging) 가능성을 열었다는 것이다.[각주:3]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질서의 바깥에서 누군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어떤 목사는 아마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은 가난한 자와 버림받은 자, 병든 자를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도 세리와 창기들의 친구이셨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부자와 건강한 자들에게 더욱 많은 관심과 사랑을 베푸는 사회에 대한 전복적인 효과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가난하기 때문에, 병든 것 때문에, 또는 버림받은 것 때문에 사랑받게 되는 것일까?

    지젝은 만약 사회적 타자라는 것이 사랑받는 조건이 되는 것을 지젝은 ‘휴머니즘’적 생각이라고 말한다.[각주:4] 아마도 누군가는 버림받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야 말로 아무 ‘조건’ 없이 인간을 사랑하는 길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젝에게 이러한 사랑은 현재의 사회구조를 개혁하는데 큰 의미는 없다. 결국 사회의 밑바닥을 위로 역전시키는 구조는 진정한 사회구조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버림받은 자들이 필요한, 또는 버림받은 자들을 그 자리에 머물게 하는 결과만을 낳기 때문이다.[각주:5] 만약에 버림받은 자들이 선택 받아 힘을 가진 자들이 되면 다음에는 이전의 힘을 잃어버렸던 자들을 사랑할 것인가? 지젝은 이러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unplugging’ (상징계로 부터 벗어남)을 ‘uncoupling’(상징계로 부터의 단절)이란 말로 재정의한다. 그리고 이 ‘언커플링’은 바울이 말하는 ‘새로운 피조물’ (고린도 후서 5장 17절)이란 개념에서 명확해진다. 성령의 신자들은 율법에 대해여 죽고, 더이상 인간의 관점으로 서로를 보지 않는다. 바로 새로운 피조물로써 서로를 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현실 사회를 벗어나서는 살 수 없다. 현실 사회와 단절된다면 사회적 개혁할 수도 없고 또한 현대 정치에서 그러한 단절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바울은 한걸음 더 나아간다. 지젝이 바울의 탁월성을 발견하는 곳은 바로 여기이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아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처럼 하고,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하고, 기쁜 사람은 기쁘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무엇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처럼 하도록 하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는 사라집니다. (고린도전서 7장 29-31절, 새번역)


    새로운 사회정치구조를 만들라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사회속에서 대안적 공동체를 만드는 방법은 외형적 법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법에 내장되어 있는 외설적 보안재 (obscene supplement), 즉 위반을 통해서 사회와 법체계를 유지하는 방식을 정지(suspend)시키는 것이다.[각주:6] 정리하면, 바울의 방식은 사회와의 단절을 말하지 않으면서도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도착적 가능성을 정지시키는 것이라 할 것이다. 만약에 내가 누군가를 대할때 그의 사회적 지휘와 가치를 마치 없는 것처럼 대할 수 있다면, 나 자신의 모든 소유와 가치를 마치 없는 것처럼 대할 수 있다면,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 가족이나 친구등이 마치 나의 가족이나 친구가 아닌것처럼 대할 수 있다면, 사회라는 상징계의 도착적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바로 이것이 바울이 발견한 대안이란다.


잠깐,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위와 같은 바울에 대한 설명이 그리 낯설지 않을 것이다. 대안의 부분에서 지젝은 마치 대충 유명하고 대충 진보적인 부흥사처럼 보인다. 또한 이러한 지젝의 생각을 설교중에 한다고 해도 보통의 청중들은 그리 어렵다거나 이상하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지젝을 마치고 지젝이 이해한 바울의 유용성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지젝의 아주 발칙한 일면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보려면 아주 중요한 질문 하나를 더 물어야 한다. “정말 그런 완벽한 ‘아닌 척’하는 행동이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젝에게 바울이 대안이 되려면 바울은 아주 완벽하게 신의 전능성을 부정하고 그의 죽음을 확신한 사람이어야 한다. 신의 죽음과 불능성이 선행되지 않으면 지젝에게 바울이 말하는 언커플링은 불가능하다. 이전 장에서 말했듯이 신의 불능성을 깨달은 것은 욥이었지만 그 비밀은 유대교 안에서 숨겨졌다. 이후에 그 비밀은 유대교가 ‘율법’이라는 독특한 체계를 계속적으로 발전시켜서 다른 정치나 사회구조 속으로 편입되는 것을 막았다. 그들은 ‘디아스포라’로써 또는 이방인으로써 다른 국가에 편입되지 않고 생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비밀이 완전히 드러나게 되는데, 바로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죽음’을 통해서이다. 지젝에게 화육 (신의 인간됨, incarnation)은 욥이 발견한 신의 불능이 급진화된 형상이다.[각주:7] 보통의 기독론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성(humanity)과 신성(divinity)의 분리될 수 없는 융합이며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으로 인간의 죄를 해결해주는 존재이지만, 지젝에게 그리스도의 인성은 바로 욥이 발견한 신의 불능의 부산물 (fallout)이다. 바울이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고 선언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죽음은 신의 불능이 죽음으로 클라이맥스에 이르게 되었고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은 바로 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인간이다.[각주:8] 신 (big Other)에게서 벗어난 인간이 되어야 비로소 상징계를 벗어나서 리얼(Real)에 기반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각주:9]  

    지젝에게 현대의 교회는 바울의 혁명성이 사라지고 다시금 ‘도착화’된 곳이다.[각주:10]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에 대한 해결이자 자유를 의미했지만, 이제는 기독교는 정확하게 자신이 해체시키고자 한 이방인의 지혜, 도착적 상징계가 되어 죽었던 신과 그리스도를 살려내고 인간을 신과 그리스도에게 값을 수 없는 빚을 진 존재로 만들었다. 다시금 율법 (신에 대한 의무)과 향유를 기반으로 한 종교가 탄생한 것이다. 바로 ‘도착적 핵심’이 지배하는 종교가 탄생한 것이다. 지젝에게 성령은 오로지 신의 죽음 이후에 탄생하는 것이다. 진정한 성령의 공동체가 되지 못하는 기독교는 그가 분투했던 종교적 구조에 다시금 갇혀버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왜 오로지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은 유물론적 접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지젝이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Slavoj Žižek, The Fragile Absolute, Or, Why Is the Christian Legacy Worth Fighting For? (London; New York: Verso, 2000), 120. [본문으로]
  2. Ibid. [본문으로]
  3. Ibid., 121. [본문으로]
  4. Ibid., 126. [본문으로]
  5. Ibid., 125 [본문으로]
  6. Ibid., 130. [본문으로]
  7. Adam Kotsko, Zizek and Theology, 1 edition (London ; New York: Bloomsbury T&T Clark, 2008), 97. [본문으로]
  8. Ibid. [본문으로]
  9. Ibid., 98. [본문으로]
  10. Ibid.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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