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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정보] 근대와 탈근대 사이에서 - 시간과 공간에 관한 아주 짧은 에세이 (이상철)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09. 6. 2.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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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와 탈근대 사이에서
- 시간과 공간에 관한 아주 짧은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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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Ethics Ph.D 과정)

     얼마 전 보도에서 서울대 철학과 백종현 선생이 <판단력 비판> 번역을 끝으로 칸트의 3대 비판서 번역을 완료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80년대 말, 혁명의 기운이 잦아들던 그 시기에 선배들의 손에 이끌려 최재희 선생이 번역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임석진 선생이 번역한 헤겔의 <정신현상학>, 김수행 선생이 번역한 맑스의 <자본론>을 어깨너머로 읽으며 비장하게 (혹은 우울하게) 칸트와 헤겔과 맑스를 접했던 세대로서 칸트가 새롭게 번역되었다는 말을 들으니 어떻게 번역되었는지 궁금해진다.  
     그 당시는 한자로 쓰여져 있었던 책 제목과 번역자들의 이름이 우선 나를 짓눌렀고, 온갖 암호와 같은 불친절한 개념어들이 주는 압박이 나로 하여금 칸트와 헤겔을, 그리고 맑스를 허공에 떠있게 만들었다. 사실 돌이켜보건데 그때는 누군가를 혹은 무엇인가를 무엇인지도 모르고 누구인지도 모른 채 쫓아만 다녔던 시절이기도 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칸트의 비판서들이 새롭게 번역된 것을 계기로 경쾌하고 발랄하게 칸트가 한국의 청년 학도들에게 읽혀지기를 바라고, 아울러 헤겔과 맑스도 새롭게 번역되어 다시 읽혀지기를 바래본다.
    
     임마누엘 칸트는 전근대와 근대, 그리고 탈근대 논의를 접할 때 우리가 제일 먼저 맞닥뜨리는 인물이다. 물론 근대가 무엇인가? 에 대한 많은 규정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인식론적인 맥락에서는 ‘선험적 주체의 탄생’을 근대의 출발점이라 말할 수 있고, 경제학적으로는 ‘자본주의와 그에 반하는 사회주의의 탄생’을 또 다른 근대의 한 축으로 상정하기도 한다. 정치적으로는 ‘민족국가와 제국주의의 등장’, 지리학적으로는 ‘지리상의 발견(노출)에 따른 공간의 확장(수탈)’, 물리학적으로는 ‘뉴우튼의 고전 물리학 이론’등......이렇듯 근대를 규정하는 편차가 다양한 까닭에 근대와 탈근대를 둘러싼 논의들은 상당 경우 사전 논의 과정에서 일정의 조율이 필요하다.
      칸트는 근대적 주체를 정의하면서 ‘선험적 주체’를 이야기 한다. 선험적이라는 말은 ‘경험을 초월한다’는 의미로 영어로는 trancendental이라 쓴다. 인간의 인식은 다분히 경험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칸트는 인간의 인식이 잡다한 경험의 다발이 아니라, 그 경험을 가능케하는 ‘선험적 조건’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면서 <순수이성 비판> 초반부 ‘선험적 감성론’에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근대적 주체의 첫 단추를 열어나간다. 즉 시간과 공간에 대한 설정과 이해와 정복이 근대적 인간의 첫 출발점인 셈이다.
     
     근대적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해는 다른 각도에서도 충분히 하나의 맥으로 엮을 수 있다. 뉴우튼의 고전물리학에 등장하는 가속도의 법칙, 힘의 법칙에서 시간은 절대적 위치를 부여받는다. 시간에 대한 절대성이 근대적 패러다임의 핵심으로 등장하고 있는 셈이다. 지리상의 발견에서 비롯된 서구 세계 공간의 확장 (or 서구가 아닌 세계의 공간적 노출)은 결론적으로 치열한 식민지 경쟁(비서구의 착취과정)을 통해 서구 유럽의 막대한 부의 축적을 야기시겼고, 이를 계기로 서구사회는 급속도로 민족국가화, 제국주의화 되어간다. 이는 자본주의의 등장과 발전, 그에 반하는 사회주의와의 대결로 이어지면서 20세기 말까지 지속되게 되는데, 이 모두가 근대적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해와 정복의 신화를 밑바탕으로 하고 있다.   
     “나의 표상이 너희의 진리다.” 히틀러의 말이다. 이 말은 이렇게 바꿔 쓸 수 있다. “나의 공간과 나의 시간이 너희의 절대적 표준이다.” 이런 확신은 비단 히틀러만의 화법은 아닐것이다. 근대적 인간 일반이 지닐 수 있는 미덕(?)이고 특징이다. 임마누엘 레비나스는 이러한 절대성에 대해 Totality (전체성)라 비난하면서 ‘Face of the Other'(타자의 얼굴)을 이야기하고, 데리다는 그러한 서구 인식론의 Deconstruction(해체)를 주장하며, 푸코는 이 가열참을 ’광기의 역사‘라 쏘아붙인다.. (탈근대 사상가들에 대해서는 다음에 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필자가 공부하는 시카고에는 몇몇 특색있는 신학교들이 있다. 특별히 ‘Religion & Science' 분야의 최고 연구기관이자 정기적으로 기관지를 발행하는 ‘Zygon Center for Religion and Science’(줄여서 그냥 Zygon이라 부름)이 시카고 루터란 신학교 내에 있다. Zygon의 운영자이자 미국내 '종교와 과학' 분야의 대부가 바로 Philip Hefner이다. 시카고에서 석사과정 수학하면서  훼프너 교수가 개설하는 'Religion & Science'와 ‘Ethics & Science' 두 과목을 수강한 적이 있다. 천문학자, 물리학자, 분자생물학자, 진화생물학자등 시카고에 있는 과학분야의 교수들을 초빙하여, 이야기를 듣고 신학적 질문과 대답을 듣는 시간이었는데, 사실 내용의 대부분을 이해하지 못했다. 과학 용어와 과학적 상식의 부족이 나로 하여금 수업으로의 몰입과 집중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종강이 얼마 남지 않았던 시간이었는데, 그날 주제가 양자물리학중에서, 뉴우튼의 고전물리학에 타격을 주었던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에 대한 부분이었다. 전자 현미경 상에서 원자의 속도를 재려고 빛을 취하는 순간 빛을 비추는 조작 때문에 원자의 위치가 불안정해진다는 것, 즉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원자의 위치가 사실은 그 위치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빛을 취하는 순간 원자의 속도와 위치에 왜곡이 가해진다는 것이다 (내가 제대로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론적으로 전자현미경 상에서 어떤 원자의 시간(속도)과 공간(위치)을 동시에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정복을 자신했던 근대적 주체에게 ‘불확정의 원리’는 많은 것을 시사하면서, 곧바로 근대적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에 입각한 우리 인식과 삶에 의혹을 제기한다. 
     혹 우리 삶의 속도, 우리 욕망의 속도가 우리가 거하는 물적, 정신적 공간에로의 정확한 안내를 방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레비나스는 이 절대성에 기인한 사고와 행위에 다음과 같은 판정을 내린다: “우리는 단일성으로 통합되지 않는 다원주의의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리고 감행할 수만 있다면 파르메니데스와 결별하고자 한다.” 데리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절대성에 기반한 서구정신을 ‘빛의 폭력’이라 규정하며 다음과 같은 사망선고를 내린다: “우리를 여전히 자신의 법으로 속박하는 그리스 아버지를 죽여야 한다”고 말이다.
   
      어쩌면 ‘선’의 반대말은 ‘악’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악은 우리의 구체적 현실에서 ‘절대’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종교(Religion)적 절대성이든, 이념(Ideology)적 절대성이든, 인종(Race)적 절대성이든, 아니면 요즘 Queer이론에서 문제 삼는 성(Sexuality)에 대한 절대성이든......인류가 저질렀던 모든 학살과 전쟁과 광기는 이런 절대성들의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유전되어 지금도 작동된다. 그렇다면 ‘선’은?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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