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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눈 : '웰빙-우파'와 대형교회 2] 대형교회는 왜 보수주의적인가(김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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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우파'와 대형교회, 두 번째[각주:1]


대형교회는 왜 보수주의적인가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지난 글에서 나는 대형교회들에 관한 학계의 분류법들을 간략히 소개하면서 어느 분류법으로 보든 한국의 대형교회들이 거의 모두 ‘보수주의적’이라고 단언했다. 그리고 이 단언은 이 연재를 꿰뚫는 핵심적 문제제기인 ‘1990년 어간 이후 한국사회에서 웰빙-우파가 형성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장소로서 대형교회를 주목해야 한다는 것’의 기저에 깔린 전제다. 웰빙우파와 대형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먼저 대형교회는 ‘보수주의적’이라는 전제에 대해 좀더 이야기해보자.


서북주의와 보수주의


대형교회들은, 범주를 어떻게 나누든, 거의 예외 없이 보수주의적이다. 그것은 한국개신교의 성장 과정에서 근본주의와 반공주의가 거의 모든 교회들의 신앙의 모태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지난 글에서 ‘대형교회의 보수주의’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썼다. 얼핏 보면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한다. 근본주의와 반공주의는 당연히 보수주의적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한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국개신교의 성장 과정에서”라는 말에 있다. 역사적 과정에서 이러한 조합이 타당성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대형교회와 보수주의


    한국의 개신교 전례과정을 살피면 초기 개신교는 오늘의 한국교회처럼 근본주의 일색은 아니었다. 물론 반공주의도 그리 강한 신앙적 기조가 아니었다. 그런데 20세기 전반기를 거치면서 개신교는 근본주의를 모태로 하는 종교로 빠르게 탈바꿈하기 시작했고, 한국전쟁을 전후로 하는 10여년의 시간을 거치면서 근본주의는 반공주의와 뗄 수 없이 결합되어 한국개신교 신앙의 모태가 되었다. 즉 오늘 우리가 ‘한국교회는 본래부터 당연히 그랬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1940~50년대에 조성된 ‘만들어진 역사’에 다름 아니었다는 얘기다.

   근본주의와 관련해서는 서북지역의 개신교가 그 뿌리라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서북(혹은 관서) 지역이라 함은, 조선시대 지역명칭에 따르면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전역을 포함한다. 한데 1893년 이후 서양의 개신교 선교부들 간에 맺은 수차례에 걸친 ‘한반도 선교지 분할협정’에서 평안도와 황해도가 미국 북장로회의 배타적 선교영역이 되고, 함경도는 간도지역을 할당받은 캐나다 연합교회의 영역에 포함되었다. 이후, 함경도 지역은 간도를 가리키는 명칭이던 동북 혹은 관북 지방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이런 개신교적인 표현이 월남자 지식인들이 대종을 이루던 평안도와 황해도 출신 개신교도들에 의해 일상화되면서 서북지역은 이 두 지방을 한정해서 가리키는 명칭된 것으로 보인다.

   한데 서북지역 개신교도들이 처음부터 근본주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아니 실은 이곳의 개신교도들 가운데는 한반도 전체에서 가장 진취적인 사람들이 많았다. 잘 알다시피 애국계몽운동은 서북지역의 개신교도들이 중심이 된 운동이었다. 특히 이승훈의 오산학교, 안창호의 대성학교 등으로 대표되는 교육운동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반면 서북지역의 미국 북장로회 출신 선교사들은 이와는 매우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한반도는 물론이고 당대 전 세계에서 가장 강성의 근본주의자들이었다. 물론 미국 북장로회가 근본주의 일색의 교파는 아니었다. 단지 한반도의 선교사로 파송된 이들이 그랬다. 

    그런데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은 이들의 서북지역에서의 입지를 크게 강화시켰을 뿐 아니라 한반도 전체를 주도하게 했다. 이 부흥운동의 효과로 북한지역 개신교 신자의 80%에 가까운 이들이 미국 북장로회의 영향권 아래 있는 장로교도가 되었고 한반도 전체 개신교도의 40% 이상이 이들 서북계 장로교도였다. 


    서북계 선교사들의 근본주의 신앙은,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문화, 종교적 배타주의에 가까웠다. 한데 해방 이후 북한의 개신교도들이 대거 남하하면서 서북계 개신교도들의 근본주의는 극우 반공주의라는 공격적 정치와 결합되었다. 일종의 정치적 망명자로서 남한으로 이주한 이들 중 다수는 막막한 이민자의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회의 하나를 발견했는데, 반공투쟁을 벌이던 이들에게 고용되는 것이다. 당시 남한의 자산가들과 미군에 고용된 고위층 경찰관리, 그리고 미군 정보당국 등이 그들을 고용한 자들이었다. 이 과정에서 서북계 개신교의 근본주의 신앙과 공격적 극우반공주의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논리처럼 결합되었다. 나는 다른 글에서 이러한 정치화된 극우주의적 신앙을 ‘서북주의’라고 부른 바 있다. 서북주의는 이렇게 해방정국 남한의 월남자들 사이에서 탄생했다.

    그런데 이들이 깊이 개입한 이념갈등은 반공국가로서의 남한 단독정부의 탄생, 그리고 이념과잉의 전면전으로서의 한국전쟁을 야기했다. 이것은 민족에게는 대재앙이었지만 서북주의적 개신교에게는 엄청난 기회였다. 이 개신교 분파는 한국개신교의 주도세력이 되었을 뿐 아니라 한국사회 전체에서 가장 막강한 자원을 가진 세력으로 부상했다. 이렇게 서북주의적 신앙, 곧 근본주의와 극우반공주의가 결합된 신앙은 한국개신교 신앙의 모태가 되었다. 그리고 이상에서 본 것처럼 서북주의 신앙의 생성과 발전 과정은 반공국가로서의 남한정부, 그리고 반공규율체제로서의 남한사회가 구축되는 과정과 밀접히 연관된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한국개신교는 반공주의적 한국사회를 지탱하는 보수주의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성장지상주의와 보수주의


    서북주의의 정치적 헤게모니는 1960년대 이후 약화되고, 새로운 세대가 교회를 주도한다. 한국 최초의 대형교회인 영락교회가 서북주의적 신앙의 주축이었다면, 1960~1990년 사이, 그러니까 개신교 대부흥시대를 이끈 주역은 서북주의와 거의 연관이 없는 조용기와 (여의도)순복음교회를 필두로 하는 성장주의적 개신교 부흥사들이었다. 이때 한국개신교에는 새로운 신앙의 기조가 형성된다. 

    이른바 ‘성장지상주의’다. 디테일하게 이야기하면 성장지상주의와 서북주의는 서로 모순적이다. 전자는 성장을 위해 모든 것을 도구화하는 신앙이라면, 후자는 결코 도구화될 수 없는 이념이라는 근본원리를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 양자는 서로 긴밀히 결합되었다. 

    이는 반공국가로서의 제1공화국과 성장지상주의적 발전국가체제로서의 유신체제 사이의 순접관계와 유사하다. 반공국가가 추구하는 체제는 공산주의라는 적에 대한 ‘증오’를 통해 사회를 통합하는 것이었다. 한데 성장지상주의적 발전국가체제는 그 적에 대한 증오를 ‘성장에 대한 동력’으로 재활용했다. 적을 압도하기 위해서는 적보다 더 발전해야만 하며, 그것을 위해 전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성장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장지상주의적 개신교는 절대적 이단인 공산주의를 무찌르기 위해 복음화가 절대적이라고 주장했다. 그 적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하고, 이 지긋지긋한 가난의 질곡을 만들어 놓았기에, 적과의 싸움은 물리적인 것인 동시에 영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개신교 성장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복음화의 내용이다.

    여기에 하나 더 이야기하면, 이렇게 서북주의와 성장지상주의가 신앙을 물리적이고 영적인 전쟁으로 해석하였기에, 그러한 전쟁의 신앙을 구현하는 신앙제도는 ‘비상한 체제’여야 했다. 그것은 바로 절대적 1인의 카리스마적 지배를 통한 교회제도로 나타났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한국개신교회에서 대형교회는 예외 없이 1인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관철되었다는 사실이다. 반면 중소형교회는 카리스마적 1인의 지배가 구현된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문제는 거의 모든 한국의 개신교회들을 지배하는 신앙담론은 1인의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의한 교회적 권위주의를 지지하고 있다는 데 있다. 즉 권위주의를 구현하지 못한 교회는 스스로를 실패한 혹은 아직 성공하지 못한 교회로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1공화국에서 민주화 이전까지 한국사회의 지배적 체제 논리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한국개신교, 특히 대형교회적 신앙은 이런 권위주의 체제를 향한 보수주의와 친화적이다.


탈성장시대의 대형교회와 보수주의


    여기서 다시 앞의 글에서 대형교회에 관한 대목을 상기해보자. 나는 대형교회를 두 범주로 나누었다. 국가와 교회가 공히 성장일로에 있던 시기인 1980년대까지 대형교회로 부상한 교회들(A)과 저성장 혹은 역성장 시기인 1990년 어간 이후의 교회들(B)이 그것이다. 한데 서북주의적 신앙이나 성장지상주의적 신앙은 A 범주의 대형교회들에서 거의 예외 없이 나타난다.

    1990년대, 특히 2천 년대에 오면 대형교회를 이룩했던 카리스마적 1인은 은퇴하거나 사망하는 일이 잦아졌다. 세대교체국면이 된 것이다. 문제는 시대가 달라졌다는 데 있다. 1990년 어간에는 알다시피 한국사회에서 권위주의가 점차 쇠락하게 되었다. 하여 그 속도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본격화되었다. 대개 제도는 좀더 느린 데 반해, 대중의 인식은 좀 더 빠른 변화를 추구한다. 세대교체국면에 진입한 대형교회들도 예외가 아니다.

    A 범주의 교회들은 권위주의 시대에 성공을 이룩한 교회이니 만큼 제도나 인식에서 더 권위주의적이다. 하지만 이 범주의 많은 교회들에서 거의 모든 가용자원을 독점한 카리스마적 1인은 실재하지 않는다. 창립자는 사망했거나 은퇴목사가 되었다. 하여 이 범주의 교회들은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는 능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심지어는 시대착오적인 행보들로 사회의 따가운 시선의 대상으로 전락하곤 한다.

    B 범주의 경우는 좀더 복잡하다. 세대교체가 성장지상주의로 회귀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도 있다.(사랑의교회) 그런 경우 교회는 더 권력화되면서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성장 잠재력이 소진되어 버린다. 또 세대교체가 개혁을 둘러싼 극심한 갈등을 야기하게 될 수도 있다.(소망교회) 하지만 권위주의의 후퇴로 인한 갈등을 덜 경험하면서 퇴행성을 덜 드러내기도 한다.(온누리교회) 한편 이 범주의 교회들에는 아직 은퇴하지 않은 이들이 많은데, 그들 중에는 권위주의적 제도에도 불구하고 강한 독재자이기보다는 부드러운 독재를 통해 계몽적 리더십을 구현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는 강한 시대적응력과 함께 성장 잠재력을 유지한다.

    하지만 B 범주의 교회들도 기본적으로 제도나 담론에서 권위주의적 성격이 강하다. 계몽군주인지 독재자인지, 부드러운 독재인지 완고한 독재인지만 다를 뿐이다. 수천 혹은 수만의 교인들을 결속시키는 장치는 빈약한데, 대개의 교회들이 그런 것처럼 높은 수준의 통합을 유지하려면 권위주의가 제일 적합하다. 한데 그러려면 담임목사나 소수 특권적 장로 외에는 권리가 극도로 제약되어야 한다. 즉 대형교회의 신앙제도는 교인들의 주권의식을 제약함으로써만 존립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적 개혁은 근원적으로 어렵고, 보수주의적 제도와 담론이 재생산될 수밖에 없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주간경향>에서 연재하고 있는 '김진호의 웰빙-우파와 대형교회'의 첫번째 글로, [주간경향]에는 <대형교회는 강력한 웰빙 문화공간이다>(1183호. 2016. 07. 05)로 게재되었습니다.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606271603271&code=11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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