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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마당] 안식년과 네팔 이야기 1 (조헌정)

목회마당

by 제3시대 2009. 6. 2.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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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년과 네팔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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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정
(향린교회 담임목사)

안식년에 관한 소고

향린교회가 정한 안식년 규정(혜택)에 따라 2009년 2월부터 4월까지 3개월의 기간을 가졌다. 6년 시무 후 주어지는 안식년 기간은 1년인데, 3개월은 재임 기간 중 세계교회협의회 총회 참여하는 일과 기장 총회가 주관한 유럽평화기행 여행으로 이미 썼고, 남은 6개월은 임보라 목사가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오면 내년 가을에 가질 예정이다.

안식년(Sabbatical year)은 제1성서에서 나온 말인데, 하느님께서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나서 7일째 하루를 쉬셨다는 안식일 개념이 년(年)으로 확대된 말이다. 성서는 7년째가 되는 안식년에는 땅을 쉬도록 명하고 있다. 땅이 쉬어야 한다면 노예들과 짐승들도 당연히 쉰다. 그리고 이 안식년이 7번이 지나 50년째가 되는 해를 희년(Jubilee year)이라고 하여 단지 땅을 쉬게 할 뿐만 아니라, 땅을 본래의 주인(지파로 대변되는 집안)에게로 돌려주도록 명하고 있다. 땅뿐만이 아니라 모든 빚을 탕감하고 노예를 해방하도록 명하고 있다. 결국 크게 보면 안식년이란 쉼과 휴식의 의미를 넘어 평등, 자유, 해방이라는 야훼 하느님의 창조의 본래됨을 회복하는 해인 것이다. 

현재 안식년은 대학의 교수들과 일부 목사들에게만 행하여지고 있고, 새로운 학문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기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런데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는 몇 년 전부터 이 안식년 제도를 노동자들에게도 적용하기 시작하였다. 쉽게 말하면 봉급의 7분지 일을 회사 혹은 노조가 적금 형식으로 보관하였다가 안식년 기간에 이를 되돌려 주는 형식이다. 드문 경우이지만 남한에서도 이런 안식년 제도를 시행하는 연구센터가 있다고 들었다. 일부 회사에서 5일 근무 중 하루를 재교육의 배움의 시간으로 활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렇게 하니까 제품의 완성도가 더 높아지고 일의 실적이 더 좋아졌다고 하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하고 생각하겠지만, 생각의 패러다임만 바꾼다면 전연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근 30년 전 뉴욕에 살 때, 가장 흔한 업소인 세탁소나 과일가게의 주인들(당시는 대부분이 서양사람)이 여름 한 달동안 휴가를 갔다고 문에다 붙여놓은 것을 여러 번 보았다. 심지어는 구두 수선을 하는 가게에도 이런 표지가 붙어있는 것을 보았다. 이후 주로 동양 사람들이 이런 가게들을 인수하면서 이런 일들은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다만, 어떤 한국인 부부가 조그마한 과일가게를 운영하는데, 여러 해를 이렇게 한달동안 여름 휴가를 다녀오는 경우를 보았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본다. 많은 경우 한국 사람들은 서양 고객들로부터 ‘너는 여름 휴가도 가지 않느냐?’는 약간은 조롱조의 질문을 받는 경우가 많다. 조그마한 햄버거 가게를 운영하던 우리 집도 이런 질문을 여러 번 받았다. 가진 것은 적고 내야 할 비용은 많고 생존 자체에 허덕이는 동양인 이민자에게 휴가는 실상 그림의 떡이었다. 당시로는 전연 불가능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우리 집은 잘못된 가게 선택으로 인해 파산을 하고 말았다. 그래 몇 년에 걸쳐 온 가족이 밤낮으로 일궈온 모든 재산을 다 잃고 말았다(집과 차는 물론이요 심지어는 오래된 TV까지도). 그럴 줄 알았으면 여름휴가나 열심히 다녔을 텐데, 그 누가 알았으랴!  귀 있는 자는 들으시라. 

나의 본래 3개월 안식년 기간은 일본과 네팔에서의 3주간 여행을 마친 후에는 미국으로 가서 2-3주간의 공동체 경험 그리고 약 한달 동안의 모교인 뉴욕 유니온신학대학과 하바드신학대학에 머물면서 공부를 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가운데, 네팔에서 두 달을 머물렀고, 그중 한 달은 히말라야 트래킹을 하게 되었다.

네팔을 가게 된 동기

중고등학교에서 같은 클럽 활동을 하던 김두현이란 친구가 부모님을 따라 고등학교 2학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어려운 독학의 과정을 거쳐 40년 가까이 동경에서 살며 지금은 이름 있는 화가가 되었다. 물론 아직도 돈하고는 관계가 없지만... 창의적인 필치로 독자적인 그림 세계를 갖고 있고, 일본 기독교단이 발행하는 신앙의 벗이라는 잡지에 20년 동안 교회 건물을 중심으로 한 표지 그림을 담당하여 왔고 이야기가 있는 그림책을 여러 권 내었다. 그 중 말기 암에 걸린 어린이들의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단체와 함께 일을 하여 그림책을 내고 싶어 하는 10살 어린이의 이야기를 함께 그림으로 그리는 과정을 일본 NHK 방송이 취재하여 여러 번 방송에도 나왔다. 불행하게도 이 어린이는 이 책이 발간되기 하루 전에 죽었다. 오히려 이 얘기가 화제가 되어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익금은 전부 이 단체가 갖는다.

그러나 현실의 삶에서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어오고 있다. 몇 년 전 그는 일본인으로 시인이기도 했던 첫 번째 아내를 암으로 잃었다. 매년 연하장을 보내왔는데, 엽서의 표지는 그가 그린 그림으로 뒷면에는 아내가 쓴 일본 시가 실려 있었다. 둘이서 시화전도 여러 번 했다. 죽은 아내는 단순히 인생의 짝이었을 뿐만 아니라 예술의 세계에 있어서도 진정한 반려자였다. 40대 중반에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그 또한 작년에 대장암 수술을 받았다. 다행히 초기에 발견되어 지금은 작품 활동을 계속할 수 있는 건강을 되찾았다. 그리고 지금의 아내 또한 초기 유방암이 발견되어 치료를 받고 있다.

지금의 아내는 죽은 아내의 친구이자 같은 교회를 다녔기에 잘 알고 있는 사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없던 그 딸을 어려서부터 교회학교에서 가르쳐온 선생으로 가끔 인생 상담도 하면서 아버지 노릇을 함께 해 왔다는데 정말 아버지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두 번째 만난 이 아내의 집안은 할아버지, 아버지, 삼촌, 오빠가 모두 기독교 목사이고 일제 시대 때 아버지는 북한 땅 압록강 근처에서 일본인 교회의 목사로 있으면서 일본 군부의 침략을 비판하다 한때 옥고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게다가 패전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은 어린 두 딸을 조선 땅에다 묻고 온 아픔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내 친구가 네팔과 관계를 갖게 된 연유 또한 두 번째 만난 아내의 언니가 여러 해 네팔에서 여성 직업 훈련소의 선생으로 있으면서 옷 만드는 일을 가르쳐주고 또 여기서 만들어진 옷을 일본 교회를 통해 파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가 이곳 네팔에 온 이유는 이 친구가 3년째 진행하고 있는 네팔 오지의 초등학교 두 곳에서 한주동안 진행되는 그림그리기 여행에 참가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여행 참가자를  모으기 위해 교회 잡지를 통해 전국에 광고를 내었다. 이번 참가자의 반은 교회에 다니고 반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 물론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 하더라도 배우자가 교회를 다니는 등 이렇게 저렇게 교회 인연은 있다. 참가비용은 보통 비용보다 두 배 이상이 든다. 왜냐하면 워낙 오직이기에 헬리콥터를 이용해야 하고 그림그리기에 필요한 도구 비용을 담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은 어느 누구도 여기에 선교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런 일이 남한에서 진행된다면 당연히 선교라는 단어를 사용할 것이다.

모두 20명이고 우리 부부와 친구를 빼면 일본인은 17명이다. 이중 아주 간단한 영어로나마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은 한두명에 불과했다. 그러니 참가하는 한 주간 대부분은 친구가 통역을 해주지 않는 한 우리는 거의 꿀 먹은 벙어리 신세였다. 나이는 대부분이 70대에 가까운 은퇴자들이고 우리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은 5명뿐이었다. 이런 일을 남한에서 계획한다면 참가자는 대부분이 2, 30대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 일본인 참석자는 반 이상이 60대 이상이다. 그리고 3분지 1은 이미 이 그림그리기 여행을 두 번 혹은 세 번째 참가하고 있다.

수도 카트만두

처음 나리따 공항에서 20명이 만나 방콕에서 하루 밤을 자고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를 도착했다. 공항의 수속은 지루하며 소란스러웠다. 밖으로 나오자 마치 혼란스러운 시골의 장터를 빠져나온 기분이다. 그러나 날씨는 마치 초여름과 같이 약간은 후덥지근했다. 거리는 신호등은 물론 제대로의 차선도 없어 사람의 행렬과 자전거와 인력거와 택시와 버스 트럭 등이 도로에서 혼잡을 이루고 있었고, 때로는 교차로에서 먼저 가려다가 오히려 뒤섞여 엉켜버린 경우도 많았다. 여기에 때로 이곳에서 신으로 인정받고 있는 소가 걸어간다고 생각해 보라. 이곳 카트만두의 대기 오염도는 세계에서 제일 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주 후에 다시 카트만두에 돌아왔을 때에는 이틀 만에 목이 심하게 붓는 편도염이 생겨 마이신을 먹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 후덥지근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 했다. 대기 오염도가 심한 이유는 차들이 너무나 오래되어 매연이 심하고, 도시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되어 있는데다, 건기에는 수개월째 비가 오지 않아 바람만 불어도 모래 먼지가 심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무데나 버린 쓰레기는 곳곳마다 악취를 풍기고 있었고 심한 경우는 작은 언덕을 이루고 있었다. 아파트 앞마당이 그냥 수 년 동안 방치된 쓰레기들로 썩어가고 있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런데 네팔의 현실이 그러하다.

국민소득이 하루 일인당 2불정도로 낮고 빈부의 격차가 워낙 심하고,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가 여전히 살아 있어 대부분의 가난한 문맹인 민중들은 주어진 상황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어찌된 영문인지 1년 내내 높은 산에서 흘러내리는 빙하 물이 곳곳에 넘치고 있지만, 네팔은 전력사정이 좋지 않아 수도라 해도 오전 4시간 오후 4시간씩 하루 여덟 시간만 전력이 공급되고 있고, 수돗물은 더 열악하여 하루 2시간만 주고 있다. 이나마도 없어 식수만 차로 공급하고 있는 지역도 많다. 교회 앞 골목에서 네팔티벳 식당(여주인은 향린교인)을 운영하는 네팔 출신 주인 말에 의하면 네팔 정부는 전력을 인도에 팔고 더 비싼 값에 인도에서 전력을 수입하고 있다고 한다. 무슨 사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인도정부의 영향력이 있다는 것과 네팔 정부 관료들의 부패상을 보여주는 말이 아닐까 한다.

여행자들로부터 한 20불씩 환경비 명목으로 더 받아내어 이를 청소하는 일을 하였으면 어떨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을 갖지만, 자기 몫을 챙기는 일에만 열중하는 관료들이라 이런 일에는 관심이 없다. 첫날 비행장 주차장에서 가방에서 두터운 서류 종이를 꺼내어 읽던 한 여행 가이드가 이를 그냥 찢어서 길에다 버리던 너무나도 자연스런 모습이 떠올랐다.

고방에서의 첫날

카트만두에서 첫날을 자고 이튿날 경비행기로 한 시간 가량 걸려 포카라로 이동을 하고 나서 바로 비행장에서 헬리콥터로 목적지 고방의 나우리꼿이라는 오지 동네로 이동을 했다. 이곳은 8100미터가 넘는 다울리아기리라는 산이 바로 정면에 보이는 곳이다. 아래 흐르는 강물이 2,100미터이니까 골짜기 깊이가 무려 6천미터에 달하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골짜기가 있는 동네이다. 이곳에 일본인 아내를 둔 한 네팔 호텔업자가 아주 훌륭한 호텔(2층 건물에 방이 8개밖에 안되니까 우리 식의 호텔은 아니지만)을 지어놓았다. 하루 방값이 미화 50불(7만원)이 넘으니까 내가 트레킹을 하면서 머물었던 롯지의 50배가 되는 거액이었다.) 모두가 저녁을 먹고 자기 소개의 시간을 가진 다음날 초등학교에서 진행할 노래를 위한 연습과 몇 반으로 나누어 미술 과제물을 준비했다. 하모니카와 입으로 부는 아코디온과 피리로 반주를 하면서 사운드오브 뮤직의 주제가인 ‘도레미송’과 ‘우리 모두 다함께 손뼉을’ 두곡을 율동을 곁들여 연습하였는데, 얼마나 흥겹게 하는지 말을 알아 듣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다. 더구나 이들 대부분이 60세가 넘었고 몇 명은 70대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손주뻘에 해당하는 네팔 어린이들 앞에서 보여줄 율동과 노래를 준비하였다. 그 다음날 그들은 정말 온 마을 사람들이 둘러싼 가운데(그래봐야 백 명도 안되었지만) 약 50여명의 초등학교 아이들 앞에서 정말 재롱을 떨었다. 나도 미국에 있으면서 여러 번 멕시코 원주민 선교를 다녀보았고 한때는 백 명도 넘는 한국인 그룹을 인도하기도 하였지만, 할아버지 할머님들의 재롱을 보지는 못했다. 아마 앞으로도 보기는 힘들 것이다. 조용하고 예절바르고 엄숙하기만 한 일본 사람들의 다른 면을 보았다.

안식년 서신에도 밝혀 놓았지만, 아내는 첫날 연습을 시작한 당시에는 괜찮았는데, 조금 있다가 머리가 아프다고 먼저 자리에 눕더니 급기야는 새벽에 고산병이 시작되었다. 약을 먹으면서 참고 견디다가 너무 심해져서 오후 늦게 급히 하산을 하여 한 시간 이상 떨어진 작은 병원으로 긴급 수송을 해야 했다.(헬기를 이용하려고 보험회사에 알아보니 했는데, 한번 사용에 수천불이 들기에 보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리고 그날 밤 산소호흡기에 의존해서 밤을 보내고 포카라로 돌아와야 했다. 그래서 나도 일본인들과의 그림 그리기 여행은 여기서 끝나고 말았다. 사실 우리가 머물었던 지역은 2600미터밖에 안 되었지만, 헬리콥터로 갑작스레 이동을 하였기에 고산병이 왔던 것이다.(아내는 얼마 전 의사로부터 초기 고혈압 진단을 받았는데, 이것이 영향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후의 경험에 의하면 고산병은 반드시 체력과 일치하는 것 같지는 않다. 5천미터 롯지에서 만난 한 가냘픈 서양 여성은 아무렇지도 않았고, 건강한 일본인 남성 청년은 내내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고, 어른들은 괜찮은데, 젊은 청년들이 힘들어 하는 경우도 보았다. 물론 남성에 비해 여성들이 더 비율이 높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 네팔에서의 본래 여행 목적을 다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 있었던지라, 혼자서 트레킹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본래는 한 코스만 하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세 코스를 하게 되면서 트레킹의 ‘트’짜도 모르던 사람이 트레킹의 ‘도사’가 되었다. (다음호에 계속..)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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