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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정보] 전승, 역사 그리고 텍스트 I : 전승 (이해청)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6. 9. 6.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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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 역사 그리고 텍스트 I : 전승



이해청
(성공회대 박사과정 / 탈식민성서해석학)

 


1. 전승 : 집단 대 개인


     신약학에서 흔히 사용되는 전승사 비평이란 “성서 본문의 최종적인 형태가 이루어지기까지 문서와 구전(口傳)자료로 전승되어온 경로 즉, 성서본문이 단계별로 이뤄진 전승과정에 비추어 그 문헌을 분석하는 방법을 가리키는 용어”다. 또한, “역사적 정확성을 추구하는 작업이라기보다는 본문 속에 왜 그런 설화가 기억되었고, 왜 그것이 변화되었으며, 그 변화에 어떤 요인이 반영되었는지를 살피는 데 관심을 갖는다.” 다시 말해, “역사성을 발굴해내는 것이 아니라 전승사에 나타난 다양한 관계를 확인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어떤 이들에겐 맥이 빠질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전승사비평을 통해 전승을 처음 전해준 사람들과 그들이 전해준 전승의 최초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으리라는 일말의 기대를 가졌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전승의 형태, 예를 들어 마가복음서와 같은 최초의 형태가 취해진 것은 예수의 죽음 이후 40여년이 지난 후라는 점을 기억하면 그리 실망할 일도 아니다. 게다가 이 복음서가 전승의 최초의 형태라고 감히 확신할 수도 없다. 이미 불트만은 “마가와 같은 시대 혹은 그 전에 복음서라고 불리워질 만한 작품을 썼지만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작품의 저자가 전혀 없으리라고는 물론 단정할 수 없다.”[각주:1]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전승의 최초의 형태를 넘어 역사적 예수에게로 우리가 다가갈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추가한다면 수많은 난관이 있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해 볼 수 있다. 알다시피, 복음서의 단화들을 추적한 결과 이 단화들 뒤에는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교회가 놓여 있음을 양식비평은 설득력 있게 잘 보여주었다. “전승자료의 수집은 팔레스틴 초대 교회에서 시작되었다. 변호와 논박은 아포프테그마적 부분의 수집과 작성을 유도했다. 교화의 필요성과 교회 안에서의 예언자적 영의 활력에 의해 예언자적, 묵시문학적 주의 말들을 전하는 일과 작성하고 수집하는 일이 생겼다. 주의 말들의 좀 더 계속된 수집은 생활 계율과 교회 규율의 필요성에 의해 생겼다.”[각주:2] 이처럼 이미 단화들은 집단으로서의 익명이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양식비평의 이러한 논제를 깨고 최근 보컴은 '목격자의 증언'이라는 대담한 가설을 들고 나왔다. 그는 양식비평이 전제하고 있는 전승의 익명성이라는 테제를 목격자로 대체하기를 원한다. 이를 위해 그는 복음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개별적인 이름들을 하나하나 추적하고선 서슴지 않고 이들을 목격자라고 부른다. 더욱 놀라운 점은 파피아스가 전한 말이 과장이거나 일종의 변증이라는 학자들의 비판적인 견해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역사적으로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고 판단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파피아스가 말하는 내용이 가장 중요하게 암시하는 것, 곧 예수의 말씀과 행위를 전하는 구전들이 이름이 밝혀진 특정한 목격자들과 단단히 결합해 있었음을 믿을 수 있다.”[각주:3] 결국 이렇게 하고 싶은 것이다.[각주:4] 


내가 이 책을 쓴 의도 중 하나는 복음서가 기록되기까지 예수 전승이 전달되었던 기간 내내 예수전승과 특별한 전승 전달자들 사이의 인간적 연결고리가 그 존재를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역사적으로 확실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적어도 역사적으로 이런 연결 고리가 존재했을 개연성이 아주 높았음을 증명할 증거를 제시하고 싶다. 


     하지만 보컴의 이러한 주장은 별로 신뢰할만하지 않다. 어만이라면 "마가복음에 대한 증언은 서너 다리를 건넌 정보이다. 여기에서도 그가 유난히 강조하는 이야기, 즉 마가의 주된 목적 중 하나가 베드로에게 들은 것을 빠짐없이 기록하는 것이란 주장은 결코 사실이 아니다. 마가복음은 큰 소리로 읽어도 두 시간이면 충분한 양이다. 베드로는 예수와 함께 수개월 어쩌면 수년을 지냈다. 어떻게 마가가 들은 이야기 전부가 두 시간이면 읽어낼 수 있는 양에 불과하겠는가?"[각주:5]라고 비판할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또한, 파피아스의 이야기를 수용하여 전승이 목격담일 수 있는 이유로 음성을 거론하는 그의 논지는 치명적 결함일 수도 있다. “파피아스가 살아서 남아 있는 음성을 이야기할 때 많은 학자들이 추정하는 것과 달리 구전에 대한 은유로서 음성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도리어 이 음성은 문자 그대로 정보 제공자의 음성을 말한다. 실제로 파피아스가 당대의 역사기록관습을 자세히 언급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앞에서 말한 음성의 의미는 그가 말하려는 의미임이 틀림없다.”[각주:6] 분명 데리다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각주:7] 


자연적 문자 언어는 목소리와 숨결에 직접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그것의 본성은 문자학적이지 않고 영기학적이다. 그것은 성직자의 것이고 신앙 고백의 내적인 성스러운 목소리와 아주 가깝고, 우리가 자신 안으로 되돌아가면서 듣는 그 목소리와 아주 가까운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내적 감정에 신의 목소리가 충만되고 진실하게 존재하는 현전이다. 


     그러나 좀 더 날카로운 비판은 롤랑 바르트일 것이다. “그 누구의 목소리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니 천만에! 정확하게는 언제나 그 누군가의 목소리가 문제된다. 나는 찾아낼 수 없다. 문화가 내게 생각나게 하는 단어들과 내 귀에 불현듯 생각나는 그 기묘한 존재(그것이 단지 소리에만 연관될까?)와의 단절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재현에의 노력이 무기력하다는 것은 반드시 다음과 같은 사정에 의한 것이리라. 목소리라고 하는 것은 늘 벌써 죽어 있다. 그리고 우리들은 절망적인 부정을 통하여 겨우 그것을 살아있다고 부르는 것이다.” [각주:8]다시 말해, 어떤 목소리를 들은 이가 그 목소리를 재현하고자 할 때는 필연적으로 일종의 소음인 문화가 개입한다는 점이다. 또한, 그 목소리를 재현하는 언어 자체도 문화의 힘을 입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잘 알다시피, 전해들은 목소리와 그 목소리의 재현 사이에는 그것이 문화이든 무엇이든 간에 일종의 소음이 발생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소음으로 인해 재현된 목소리는 이전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의미와 효과를 산출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보컴은 음성과 언어가 어떠한 관계를 갖는지, 그리고 그 관계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튼, 이쯤에서 어만의 말로 정리해보도록 하자. 조금 길더라도 말이다. 


기독교는 이런 식으로 전파됐다. 그렇게 수십 년이 지난 후에는 누군가 예수의 이야기를 글로 썼다.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의 입을 통해 건네지고 또 건네진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목격자가 공평무사한 관점에서 증언한 이야기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개종시킬 목적의 프로파간다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이런 이야기가 과연 애초의 이야기와 같았을까? 아이들이 생일날에 전화 연결 놀이를 하는 걸 본 적이 있는가? 동그랗게 둘러앉은 채, 한 아이가 옆에 앉은 아이에게 어떤 말을 하면 그 아이가 다시 옆 아이에게 연결하는 것이다. 그 아이가 전달받은 말은 처음의 말과 사뭇 다르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으면 전화 연결 놀이의 의미가 없다. 똑같은 환경과 학교, 언어, 연령을 가진 동일한 사회 집단에서가 아니라 다른 지역과 환경과 언어를 가진 집단에서 40년 이상 전화 연결 놀이를 했다고 상상해 보자. 그럼 첫 이야기가 어떻게 되겠는가? 엄청나게 달라질 게 뻔하다. 복음서 저자들 역시 이야기를 자신의 관점에 따라 바꿔놓은 게 분명하다. 형장으로 끌려가는 예수에 대한 마가복음의 이야기를 누가복음 저자는 어떻게 바꿔놓았는가. 한 작가에서 다음 작가로 넘어갈 때도 이렇게 바뀌는데 구전될 때는 얼마나 많이 바뀌겠는가! 


     그러므로 예수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한, 다시 말해 독특한 한 주체와의 만남을 통해 얻어진 개인적 체험은 시대와 문화에도 흔들림 없이 변질되지 않고 그대로 재현된다는 신념은 정정될 필요가 있다. 보르헤스의 『픽션들』에 나오는 「돈키호테의 저자 피에르 메나르」라는 단편이라면, 이와 같은 신념은 일종의 망상이라고 비판할 것이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라는 책을 단어 하나하나 줄 하나하나 다르지 않게 베낀다하더라도, 베껴진 이야기는 베끼기 이전의 원래 이야기와 전혀 다른 의미를 산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화자(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의 화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자기 삶의 우연들에 내맡기는 약간 자율적인 인간이고 그의 이야기만이 자율적인 데 반해, 모방하는 작가는 자기 삶을 창조적으로 이용한다. 두 번째 작가는 이야기를 규칙에 따라 구성하며, 그것을 위해서 자기 삶을 투신한다. 그는 자기 삶이 그 이야기에 의해, 적어도 간접적으로, 이끌어지게끔 조직한다. 그것은 조율되고 도구화된 삶이다.”[각주:9] 그렇다면, 진정성의 기준을 인내심을 갖고 적용하다보면 복음서 전승의 거의 모든 부분이 진정한 것이라고 판단하는 블롬버그와 같은 보수주의자들의 말을 설령 받아들인다할지라도, 이미 보았듯이 보존된 목소가 누군가에 의해 재현될 때는 보존된 목소리와 전혀 다른 의미의 궤적을 그린다면, 보존되었다는 점만으로는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셈이다. 양식비평의 관찰, 즉 전승에서 어떠한 말들은 그 맥락을 잃어버려 도무지 무슨 의미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는 주장은 이에 대한 좋은 예일 것이다. 때문에 “복음서 저자가 수집하고 기록한 정보가 상당 부분 사실과 허구, 역사와 전설,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와 상상력을 동원한 각색 등이 복잡하게 섞여 있는 것”[각주:10]이라는 양식비평의 견해를 수용해야 하지 않을까. 

     한데 전승 과정에서 교회 공동체라는 집단이 일정정도 역할을 수행했다는 양식비평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복음서에 묘사된 예수는 하나의 독특한 역사적 개별주체가 아니라 이미 집단적으로 투사된 혹은 치환된 범례적 주체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해가 선뜻 되지 않는다면 엘리아데의 이야기를 일단 들어보도록 하자. [각주:11]


아주 드물긴 하지만 하나의 사건이 신화로 변형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도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루마니아의 민속학자인 콘스탄틴 브라일로이우는 마라무레쉬라는 마을에서 아름다운 민요 하나를 채집할 수 있었다. 비극적인 사랑이 그 내용이었다. ……노랫말은 신화적인 암시들로 가득한, 투박하지만 아름다운 제례용 가사이다. 할 수 있는 데까지 노래의 변이형들을 채집하면서 동시에 브라일로이우는 그런 비극이 일어난 때가 언제였는지도 조사하였다. 사람들은 오래 전에 일어난 오랜 옛날의 이야기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조사를 계속해나가면서 그는 사건이 겨우 40년 전의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여주인공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까지 밝혀냈다. …… 핵심증인이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진실성을 완전히 박탈해버리고 사건을 전설적인 이야기로 변형시키는 데에는 불과 몇 년밖에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그 자체는 만족시키지 못했다. 결혼 전날에 죽은 한 남자의 비극적인 죽음은 단순한 사고사 이상의 어떤 것이었다. 그 죽음에는 신화적인 범주 안으로 통합되었을 때에만 드러나는 어떤 비의가 담겨 있었다. …… 진실을 말하는 것은 신화였고, 실제 역사는 이미 거짓에 불과한 것이었다. 


     때문에 그는 "민중의 기억은 한 영웅의 생애에서 역사적이고 개인적인 요소들은 보존하지 않는다는 점, 또한 고차적인 신비경험들 속에서도 인격신은 궁극적으로 초인격적인 신으로 고양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많은 전통 속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영혼은 기억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소위 그들의 역사적 개별성은 상실된다."[각주:12]고 지적할 수 있었다. 흥미롭게도, 노먼 페린 역시 “만일 신화가 역사를 해석한다면, 다른 방식으로 말해 만일 설화가 사건을 해석한다면 우리는 신약성서에서 이야기된 역사는 해석된 역사라는 것을, 그리고 더 나아가 해석된 역사는 필연적으로 사실적인 역사와 신화에 의해서 해석된 역사를 포함하며, 마지막으로 사실적인 것으로서의 역사 그 자체도 신화로 작용하게 된다고 주장할 수 있다.”[각주:13]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진실을 말하는 것은 신화였고 실제 역사는 거짓에 불과하다는 엘리아데의 주장은 “관심을 갖는 시간은 신성한 시간이 되었다. 이야기된 사건들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실재를 보게 했고, 역사 자체는 신화된 것이다.”라는 페린의 말과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잘 알다시피 신성한 이야기들은 대체로 집단의 가치관이나 믿음을 대변하는 존재에 관한 이야기들이 아니던가. 따라서 복음서에 묘사된 예수 역시 일반적인 민담의 주인공들과 마찬가지로 집단을 상징하는 범례적 주체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동시에 이 범례적 주체는 문화에 의해 변용된 상호텍스트적 주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에 관한 논의는 잠시 뒤로 미루도록 하고 역사가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 웹진 <제3시대>




  1. 루돌프 불트만,『共觀福音書傳承史』, 허혁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2, p.456 [본문으로]
  2. 루돌프 불트만, 같은 책, p.455 [본문으로]
  3. 리처드 보컴,『예수와 그 목격자들』, 박규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5, p.52 [본문으로]
  4. 리처드 보컴, 같은 책, p.30 [본문으로]
  5. 바트 어만, 『예수왜곡의 역사』, 강주헌 옮김, 청림출판, 2010, pp.160~161 [본문으로]
  6. 리처드 보컴, 같은 책, p.63 [본문으로]
  7. 자크 데리다,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4, p.39 [본문으로]
  8. 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이상빈 옮김, 강, 2002, p.94 [본문으로]
  9. 군터 게바우어․ 크리스토프 볼프, 『미메시스』, 최성만 옮김, 글항아리, 2015, p.165 [본문으로]
  10. 크레이그 블롬버그, 『복음서의 역사적 신빙성』, 안재형 옮김, 솔로몬, 2007, p.59 [본문으로]
  11. 미르치아 엘리아데,『영원회귀의 신화』, 심재중옮김, 이학사, 2003, pp.57~58 [본문으로]
  12. 미르치아 엘리아데, 앞의 책, p.59 [본문으로]
  13. 노먼 페린, 『새로운 신약성서개론 (상)』, 박익수 옮김, 한국신학연구소, 2004, p.11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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