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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눈 : '웰빙-우파'와 대형교회 3] '주권교인'의 탄생 (김진호)

[연재] '웰빙-우파'와 대형교회 (김진호)

by 제3시대 2016. 9. 20.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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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우파'와 대형교회, 세 번째[각주:1]


'주권교인'의 탄생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카리스마적 리더십


    여의도순복음교회 부설 교회성장연구소 소장이던 홍영기의 책 《한국 초대형 교회와 카리스마 리더십》은 한국의 대형교회에 대한 기념비적 연구서다. 이 책은 한국의 초대형교회(Giga-Church, 일요일 대예배에 출석한 성인교인이 1만 명 이상인 교회) 13개를 분석한 것인데, 이 책의 핵심 논지는 담임목사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교회 성장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데 있다. 저자는 초대형교회로 한정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지난 연재글에서 보았듯이, 나는 한국의 모든 교회들이 대형교회(일요일 대예배에 출석한 성인교인이 2천명 이상인 교회), 나아가 초대형교회로 성장하게 되는 데 있어 이 요소는 매우 중요한 전제조건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다음 글들에서 이야기하겠지만 대형교회로 성장하는 데 있어 카리스마적 리더십만큼이나 중요한 다른 요소를 언급할 수 있다. 그것은 교회 건축과 관련된다.)

    한편, 저자의 호교론적 설명과는 다르지만,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내 식으로 이야기하면, 교회의 가용자원에 대한 독점적 지배능력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것을 성장에 집중 투여함으로써 성공한 교회들이 (초)대형교회들이었다는 얘기다. (물론 지난 글에서 얘기한 것처럼 카리스마적 리더로서 자원의 독점에 성공한 이들은 중・소형 교회에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장기간’ 유지되었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대형교회들에선 담임목사는 20~40년간 교회의 절대적 권력자였고, 그 이후에도 은퇴목사로서 사실상의 지배력을 사망 때까지 유지했다.

    이와 같이 1인의 카리스마적 리더가 성장을 위해 가용자원을 장기간 집중 투여함으로써 성공을 실현해낸다는 것은 교회뿐 아니라 국가, 그리고 기업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특히 1960~1990년 사이에 성장지상주의와 카리스마적 리더십의 결합은 한국사회에서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주권교인'의 탄생


    한데 1990년 어간 이전까지 대형교회의 등장은 개신교 교세의 증가와 더불어 나타났다. 반면 그 어간 이후부터 교세의 증가 추세는 급격히 쇠락하게 되었고, 최근에는 마이너스 성장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바로 이런 시기에도 (초)대형교회로 빠르게 성장하는 교회들이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1990년 어간 이후에는 교인들의 ‘수평이동’이 여러 (초)대형교회를 탄생시키는 주된 요소였다는 사실이다. 즉 다른 교회에서 이동한 이들이 대대적으로 유입됨으로써 (초)대형교회로 성장한 교회들이 많다는 것이다.

   1992년의 《기독교대연감》에는 1991년의 한국개신교 인구가 일천이백만 명이 조금 넘는 것으로 나온다. 또 2013년 한국목회자협의회가 전문기관에 의뢰하여 조사한 바에 따르면 22.5%가 개신교도다. 이는 대략 113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한데 2005년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전수조사된 개신교 인구는 18.3%, 860여만 명에 불과하다. 거의 3~4백만 명이나 되는 통계상의 차이는 주로 중복교적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만큼 수평이동이 많다는 얘기다.

    타종교인 또는 비종교인에서 개신교 신자가 되는 이는 대개 교회를 잘 모르는 자이기 때문에 교회의 훈육 대상이 된다. 하여 이런 신자들이 많던 1990년 어간 이전에는 새신자 양육 프로그램이 많은 교회들로부터 각광을 받았다. 하지만 1990년 어간 이후에는 가정회복 프로그램이나 자기계발 프로그램 같은 가족과 사회생활을 위한 신앙적 주체형성 프로그램이 더 활발하다. (이에 대해서는 이후 게재될 글들에서 더 자세히 이야기할 것이다.) 이것은 새신자보다 수평이동한 교인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교회들이 더 많이 활용한 결과다.

   이러한 수평이동 현상이 더 중요해졌다는 사실은 선교 상황의 변화를 의미한다. 도시의 인구집중이 많지 않고 사람들이 넓은 곳에 산개하여 살고 있으며 교통수단이 덜 발전하여 신속한 이동이 여의치 않은 사회는 교구 개념이 발전하기 마련이다. 이런 사회에서 수평이동 현상은 별 의미가 없다. 하지만 서울처럼 인구가 과잉 집중된 사회, 그리고 교통수단이 대단히 발달한 사회에서 교회는 일종의 종교시장의 상품처럼 선택되고 소비된다. 이때 디지털화된 콘텐츠가 무한 유통되는 정보사회의 매스미디어가 충분히 발달하면 선택될 상품의 가치는 더 다양화되고 더 세밀화되어 전시된다. 그러므로 수평이동 교인들은 교회들에 대해 더 많고 깊은 정보를 가지고 주체적으로 판단하여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주목할 것은 이러한 정보능력은 사회적 지식을 더 많이 활용할 수 있는 능력과 비례한다. 즉 사회적 엘리트일수록 수평교인일 가능성이 많다. 

    이런 교인들을 더 많이 끌어들임으로써 여러 (초)대형교회들이 탄생했다. 물론 이 교회들에서도 1인의 카리스마적 리더가 모든 가용자원을 독점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이의 성장전략이 성공하려면 수동적인 새신자를 훈육하는 데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더 주체적인 신자들을 위한 선택지를 확대하여야 한다. 

    이런 현상은 비단 이 시기에 (초)대형교회로 성장한 교회들만의 현상은 아니다. 교인들의 유출을 막아야 하는 교회들, 그리고 다른 수평이동 교인들을 유치하려는 교회들도 과거와는 다른 방식의 성장전략을 강구해야 했다. 하여 이러한 상황은 교인들의 주권이 한결 강화되는 상황과 겹쳐서 전개된다. 나는 이를 ‘주권교인의 탄생’이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것을 너무 과장해서는 안 된다. 아직 교회제도는 1인의 카리스마적 리더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고, 신학도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더욱이 대형교회들의 경우는 그 1인의 위상이 여전히 훨씬 더 중요하다. 요컨대 ‘주권교인’은 제도에 있어서는 그 맹아적 형태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런 표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주권교인들의 교회에서의 활동 영역은 제도가 보증하고 있지 않음에도 점점 확장되고 있고, 때로는 매우 중요한 위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연재에서 계속 이야기할 ‘웰빙-우파’의 등장은 바로 이 주권교인의 등장과 상당부분 겹친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글들에서 주권교인에 등장의 현상과 의미에 관한 이야기들이 다루어질 것이다.


'주의 종'들의 천민화


    선교 초기부터 개신교는 많은 학교들을 만들었다. 여기선 신분과 성별의 차이가 상대적으로 훨씬 적은 가운데 근대적 교육이 수행되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이후 미국계 장로교의 성공과 더불어 미국 유학생들 가운데 신학교육을 받은 이들의 비중이 대단히 높게 되었다. 1945년 이후 교회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많은 자원을 가진 사회세력이 되었고, 교회의 엘리트가 된다는 것은 그 자원들에 대한 통제능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1950~1980년대, 그러니까 대학생들의 수가 그리 많지 않던 시절에 목사들은 교회뿐 아니라 지역사회의 유력한 엘리트의 하나였다.  

    하지만 1980년대 어간에 개신교 교세가 초고속으로 성장하던 때에 많은 교단들은 편법을 쓰기 시작했다. 국가로부터 학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신학교와 신학생들을 양산했다. 이들은 교단 내에서 심학 차별대우를 받았기에, 성공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 성장을 추구하곤 했다. 그런 이들 중 일부가 중・대형교회를 만들어냈다.

    물론 높은 학력을 인정받는 신학대학 졸업자들의 경우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성장만을 위해 올인하던 많은 목회자들은 그만큼의 지성을 갖출 여유가 없었다. 한데 교회가 커갈수록 교인들 가운데 높은 학력을 보유한 이들이 많아졌고, 이는 ‘학력위조’에 대한 필요를 증가시켰다. 요컨대 1980년대를 전후로 하는 시기에 많은 목회자들의 성장지상주의적 전략들은 목회자들에 대한 사회적 위상을 격하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하여 1990년대에 이르면 신학교의 위상은 급락한다. 성장이 둔화되면서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교권세력이 신학교에 대한 지원을 과거만큼 크게 확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교육에 대한 통제를 본격화했다. 이것은 신학자들로 하여금 근대적 학문의 공론장에서 스스로를 유폐시키게 했다. 신학생들도, 교회 성장세의 급격한 둔화로 인해 취업시장이 얼어붙게 되자, 성장지상주의적 기능성 신학에 몰두했다. 그것은 인문학으로서의 신학이 외면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여기에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역할이 크게 둔화되면서 기독교의 국제적인 네트워크가 와해되자 신학대학은 근본주의 일색의 교회에 완벽히 포위되어 버렸다.

    교회 사역자들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중・소형교회의 많은 엘리트 교인들이 수평이동하여 몇몇 대형교회로 속속 옮겨가고 있었고, 새로운 신자의 유입은 거의 멈춰버렸다. 또 적잖은 이들이 다른 종교로 옮겨가거나 비종교인이 되었다. 교회성장의 새로운 비법으로 유행하는 각종 프로그램들은 높은 비용을 지불해야 최소한의 효과를 볼 수 있는 것들이어서 중・소형교회들에선 효용성이 매우 낮았다. 하여 매년 1천 개 이상의 교회들이 사라져갔고, 생존하고 있는 교회들도 점점 상황은 악화되거나 현상유지에 급급할 뿐이었다. 더구나 파행화된 신학교육으로 인해 신학적 소양이 매우 낮은 이들이 교회로 유입되었다. 악화된 선교환경을 해석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이들에 의해 운영되는 교회들이 난무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도시교회에서, 특히 서울의 교회들에서 목회자나 신학생은 가장 지적 수준이 낮은 사람에 속한다. 교인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고, 이것은 목사들의 주요사역의 하나인 설교를 경청하지 않게 했다. 이것은 목사에 대한 존경심의 붕괴를 의미했다. 하여 ‘주의 종’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했던 목사들은 실제로 천민적 존재로 추락했다.


'증오의 정치'와 주권교인의 이반


    최근 대외적으로 선교의 위기가 심화되고 대내적으로 존경심의 붕괴로 인한 지도력의 위기에 놓인 많은 목회자들을 결속시키는 교계의 기획들이 등장했다. 그중 하나가 ‘증오의 정치’의 활성화다. 자신들이 겪고 있는 위기를 직시하기보다는 다른 것에 투사하여 그것을 증오하고 공격적 행위를 조직해내고 수행하는 것이다. 공산주의자, 이단, 성소수자 등이 오늘날 교회에 의해 적으로 지목된 주요 표적들이다.

    목사 등, 교회사역자들이 적을 향한 증오를 위해 극우주의 정당을 만들었다. 또 교회의 설교의 자리에서 무수한 증오의 말들을 쏟아내었다. 그런데 그들은 정당을 만들 만한, 그리고 엘리트교인들을 설득할 만한 논리를 갖추지 못했다. 더욱이 약한 논리를 포장할, 존경의 위상도 거의 무너졌다. 하여 엘리트 교인들은 교회를 이탈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가거나 남아 있더라도 목사들의 정치에 동조하기를 그만 두었다. 그리고 차차 독자적인 행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는 진보적 행동주의 단체에 동조하는 활동을 개시한 이들도 있다. 하지만 더 많은 이들은 ‘다른 보수적 행동’을 시작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주간경향>에서 연재하고 있는 '김진호의 웰빙-우파와 대형교회'의 첫번째 글로, [주간경향]에는 <대형교회는 강력한 웰빙 문화공간이다>(1183호. 2016. 07. 05)로 게재되었습니다.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606271603271&code=11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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