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을까?


 

김경래
(GTU 조직신학 박사과정)


 


       지난 글에서 필자는 '자유의지'가 모든 종류의 지성체가 인격체로 인정받기 위해 요구되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함축적인 조건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발언에는 한가지 전제가 필요한데, 그것은 바로 인간에게 (또는 이미 인격체로 인정된 모든 이들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과연 자유의지가 있는가는 철학사와 기독교 교리사에서 그 초기부터 지겨울 만큼 오랫동안 논쟁되어온, 하지만 아직도 첨예하게 대립하여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의견 차이를 좁힐 수 없는, 20세기 후반부터 인지과학, 뇌과학, 신경과학에서의 놀라운 발견들에 의해서 더 혼탁해진, 여전히 매우 민감하고 결론이 나지 않은 문제이다.

       자유의지에 대한 입장은 주로 결정론과 조화될 수 있는지를 어떻게 판단하는지에 따라 구분된다. 우선 가장 이해하기 쉬운, 하지만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입장은 강한 결정론자들이다. 그들은 모든 것이 자연법칙에 따라 결정되며, 그것은 인간의 뇌작용 역시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뇌에 종속된 정신 또는 의식도 마찬가지로 자연법칙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는다. 우리의 정신 작용이란 지각된 외부 정보에 자연법칙에 종속된 뇌신경세포들이 현재 체내 상태를 기반으로 물리법칙을 따른 생화학적 반응을 하고, 그 결과들이 우리의 의식속에 생각이나 느낌, 감정으로 나타나며, 행동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고조차 자연법칙에 따른 기계적 반응일 수 밖에 없으며, 우리 안에서 자유의지란 설 자리가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18세기에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이던 피에르시몽 라플라스(Pierre-Simon Laplace)가 가정했던 것처럼, 우주의 모든 자연법칙과 현재 상황을 아는 (라플라스의 악마(Laplace's demon)와 같은) 초지성체가 있다면, 그는 미래에 일어날 모든 일들과 상태, 우리의 생각까지도 계산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나아가면, 이러한 주장은 사실 우주의 시작에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는 것과 다름 없다. 다시 말해서, 지금 당신이 이 글을 읽는 것 조차, 이미 빅뱅(Big Bang)의 순간에 결정된 것이다. 하지만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의 원리'에 대한 주류 해석인 코펜하겐 해석이 옳다면, 이 세계는 근본적으로 즉 존재론적으로 비결정적이기 때문에, 우주의 시작 순간에 자연법칙에 따라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것은 이제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이 되었다.

      코펜하겐 해석에 기대는 비결정론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갖고 있을 가능성을 열어주는 듯 하지만, 존재론적 비결정론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자유의지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양자역학의 비결정론은 거시세계가 아닌 단지 미시세계를 서술할 뿐이고, 전자(electron)의 물리량(운동량과 위치)이 불확정적이라는 것은 단순히 자연의 우연성만을 보장하는 것으로 판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목적이 없는 무작위적인 우연은 자유의지라고 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을 받아들여 세계의 비결정성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주로 현대의 인지과학, 뇌과학, 신경과학의 연구 결과들에 주목한다. 1980년대 해묵은 자유의지 논쟁에 다시 불을 지폈던 벤자민 리벳(Benjamin Libet)의 유명한 실험이나[각주:1] 뇌 좌우 반구를 잇는 뇌량(corpus callosum)이 끊긴 환자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들을[각주:2] 예로 들며 자유의지는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에게 있어 세계는 결정되어 있지 않고, 그 미래도 예측 불가능하지만, 인간의 의식이란, 이러한 불확정성을 포함하는 자연법칙의 결과이지,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아주 오래전에 미리 결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뇌신경 안에서 일어나는 생화학적 반응들의 결과일 뿐이다. 인간의 의식경험은 이러한 반응들에 수반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유의지는 그저 환상일 뿐이다. 이 관점의 약점은 아무런 영향력을 가질 수 없는 의식경험이 도대체 왜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연구결과들을 결정론적으로 해석하면서도 그것이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조화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양립론자(compatibilist)라 불리는 이들은 어떤 선택에 원인이 있다는 것이 그 선택이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어떤 욕망이나 목적이 있는 선택은 그 선택 주체가 자유롭게 자신의 목적이나 욕망대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것에 충분한 원인이 있다는 점에서 결정론은 옳은 것이고, 선택하는 사람이 다른 어떤 것에 억눌리거나 방해 받지 않고 자신의 가치관 안에서 욕망이나 목적에 따라 선택한다면 그것은 원인이 있는 자유의지의 행사이다.   

       그런데 이처럼 양립론자들이 어떤 상황에서 한 선택이 충분한 원인들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주장한다면, 단지 이것이 어떤 다른 외부적 요소에 의해 강요되거나 방해 받지 않은 결정이라고 해서, 이러한 선택을 진정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은 충분한 원인에 의해서 그 상황 속에서는 가능한 미래가 하나뿐이라는 것인데, 어떤 상황에서 "달리 할 수 없었다면" 그것을 진정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자유와 결정론 이 두 개의 모순되어 보이는 개념을 그저 둘 다 옳다고 주장하는 것만으로 그것들이 조화됨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이 자유의지론자(libertarian)들이 양립론자들을 비판하는 지점이다. 자유의지론자들은 이런 결정론을 지지하는 듯한 연구 결과들에도 불구하고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에서 출발한 이 세계의 존재론적 비결정성을 바탕으로 또한 우리의 일상 속에서 선택과 숙고와 결정의 의식 경험을 근거로 여전히 자유의지를 주장한다. 그들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들이나, 무의식에서 올라온 충동이나 욕망을 그대로 따르는 경우엔 그것들이 결정론적으로 보일 수 있음을 인정한다.[각주:3] 하지만 의식 안에서 두가지 이상의 욕망이나 목적이 서로 경쟁하여 그것에 대해 숙고하며 이성적 판단을 하고 무엇을 선택할지 결정하는 경우에는 "달리 할 수 있었던," 즉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던 자유가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들은 이 믿음 안에서 자유의지를 위협하는 현대 과학의 발견들을 설명하려 노력한다. [각주:4]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대전제 아래 과학적 발견들을 해석하는 자유의지론자들의 모습은, 교리를 위협하는 과학적 발견들을 신에 대한 믿음안에서 해석하려 노력하는 신앙인들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 그래서 때로 그들의 설명은 오컴의 면도날(Occam's Razor)에 위배되는 억지스러워 보이는 가정의 탑을 쌓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숙고와 계획, 선택의 의식경험들이 단지 신기루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설득력 있게 설명하지는 못하는 것 보다는, 그 경험들이 환상이 아니라 실재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단순한 것이 아닐까?  

       만약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그리고 의식경험은 그저 환상이며 우리는 단지 유전자의 생존기계에 불과하다면, 이 가정들은 곧 우리를 "인간에게 과연 영혼은 있는가?"라는 종교적 질문으로 이끈다. 모든 것이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결정론에서는, 우리는 단지 짜인 각본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일 뿐이며, 우리 안에 영혼의 자리는 없기 때문이다. 아니 혹시 우리에게 영혼이 있다해도, 그것은 유기물로 이루어진 기계에 갇힌, 육체에 대한 아무런 영향력없이 뇌가 만들어내는 환상을 그저 수동적으로 경험하는 비참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존재는 하나님과 참된 관계를 맺을 수 없을 것이다. 자유의지가 없는 기계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한다고 해도 그것은 꼭두각시놀음일 뿐 진정한 순종, 진정한 사랑일 수 없다. 그래서 자유의지론은 기독교 신학 안에서도 오랜 기간 첨예한 논쟁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기독교 교리의 역사 안에서의 자유의지 논쟁은, 결정론과 자유의지론의 대립이라는 점에서는 지금까지 살펴 본 내용들과 분명 깊숙하게 관련되어 있지만, 그 관심의 방향은 조금 다르다. 일반적인 자유의지 논쟁에서 결정론의 원인이 자연법칙이라면, 신학에서는 그것 말고도 하나님이라는 무엇보다 더 중요한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1) 하나님의 전지(omniscience)가 미래에 대한 지식을 포함하는가? 2) 하나님의 전능(omnipotence)이 인간의 생각도 조작 가능한가? 3) 가능하다면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의 방식이 개입적인가? 그렇다면 어느 정도까지 개입하시는가? 4) 하나님은 구원 받을 사람을 미리 예정(predestination) 하시는가? 그러면 구원 받을 사람과 유기(reprobation)될 사람은 만세전에 결정되어 있는가? 5)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Sola Gratia)라고 할 때,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에 자유롭게 응답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조금이라도 인간에게 공로를 돌리는 일인가? 등의 질문들을 만들어 낸다. 앞으로의 글에서는 시대별 논쟁에서 이러한 질문들이 어떻게 다루어졌는지를 알아볼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통칭 리벳 실험이라고 불리는 이 실험은 벤자민 리벳이 1983년에 실행한 실험이다. 리벳은 실험 참가자들에게 시계를 보다가 원하는 순간에 손가락을 움직이되 그 마음을 먹은 순간을 표시하도록 부탁했다. EEG(Electroencephalography 뇌전도) 스캐너로 피험자들의 두뇌를 확인한 결과 참가자들이 실제로 보고한 시각보다 운동을 유발하는 두뇌의 신호(Readiness Potential 준비전위)가 나타나는 시각이 평균 0.3초정도 앞섰다. 이 실험 결과는 인간이 자유의지로 무엇인가를 선택했다는 것이 환상일 수 있다는 강력한 증거로 보였고, 철학, 심리학, 과학, 그리고 신학까지 자유의지에 관련된 수 많은 학문 분야의 자유의지 논쟁에서 중요하게 다루어 졌다. [본문으로]
  2. 미국의 심리학자 마이클 가자니가(Michael Gazzaniga)는 좌뇌와 우뇌가 정보를 교환하는 뇌량이 끊어진 분할뇌환자들에게서 구술언어를 담당하는 좌뇌가 우뇌의 선택과 결정의 이유를 알지 못하면서도 그 결과를 자신의 자유의지의 결과로 어떻게든 설명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예를 들면, 분할뇌환자에게 우뇌가 담당하는 왼쪽 시야에는 눈이 내리는 그림을 보여주고 좌뇌가 담당하는 오른쪽 시야에는 닭발 그림을 보여주면서 어울리는 그림을 고르라고 했을 때, 우뇌가 담당하는 왼쪽 손은 삽 그림을, 좌뇌가 담당하는 오른 손은 닭 그림을 선택하였다. 환자에게 왜 그런 선택을 했냐는 질문을 던지자 환자는 왼손의 삽을 보고서 닭장을 치우려면 삽이 필요하다는 대답을 했다. 분명 그 환자의 우뇌는 쌓인 눈을 치우기 위해 삽을 선택했을 텐데, 그 정보가 좌뇌에 전해지지 않자, 좌뇌는 우뇌의 선택을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합리화 하기 위해 이야기를 꾸며낸 것이다. [본문으로]
  3. 자유의지론자들에게 있어, 우리의 선택이 결정되어 있다면 발생하는 중요한 문제 중에 하나는, “우리의 선택과 행동에 대한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 진다”는 것이다. 이미 주어진 원인들에 의해 선택이 결정되어 있다면 “달리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의지론자 로버트 케인(Robert Hilary Kane)의 개념을 빌리면, 무의식적 충동이나 욕망에 의한 선택이기 때문에 결정론적으로 보일 수 있는 표면적 자유(surface freedom)에서의 선택의 경우에도 역시 우리에게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그러한 충동이나 욕망이 발생하는 현재의 성향은 선행된 자기형성행동(SFA: Self Forming Action)들의 결과이기 때문, 즉 과거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들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4. 아니라 시계를 보는 행위가 뇌 상태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 2) 판단이 시작되고 결정을 내리기까지 0.3초가 걸렸을 가능성 3) 판단을 내리기 위해 뇌가 준비되어야 하는 상태에 대한 신호가 포착되었을 가능성 등을 제시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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