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가 허락되지 않은 삶들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진실이 갖는 허무함


    그렇다. 실로 진심으로 우려하던 바가 실제로 밝혀졌다. ‘그’는 머리를 하고 있었다 한다. 7시간 중 90분의 행동이 나왔고 나머지 시간을 캐는 건 의미 없다. 이미 90분 머리한 게 이미 7시간을 대표하고 있다. 나머지 5시간 반은 더 이상 들어볼 것도 없다. 그냥 ‘그’는 머리를 하기 전에 전날 고질적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수면제를 먹었거나 평소 즐겨하던 약물을 맞고 그 기운에 취해서 자고 있었을테다. 그리고 일어나서 머리하고 옷 입고 중대본으로 나갔다. 돌아와서는 평소와 조금 달랐던 일과를 보낸 기념으로 ‘보약’인 밥을 한그릇 뚝딱 해치웠을 것이다. 7시간 동안 취해 있었던 주사가 마늘 주사든 태반 주사든 프로포폴이든 수면제든 마약이든 그건 그리 중요한 게 아닌듯 싶다.

   상황을 정리해보면, 머리하기 전에는 잤고, 머리하고 난 뒤에는 옷 챙기고 메이크업했다. 상의는 정해졌으니 바지 고르고 화장하고 나간 것이다. 부스스하게 머리를 만진 것도 크게 의미 둘 필요 없다. 옆에서 참모들이 너무 평소대로 화려한 “육여사 올림머리” 하고 가면 좀 그래 보이니까 적당한 연출을 하자는 것 뿐이었다. (평소 참모들이 하는 말이 고작 이런 수준의 말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랬다. 그는 청와대의 해명 그대로였다. 한 일이라고는 오로지 보고를 받은 것이었다. 정말 말 그대로 보고를 "받.고.만 "있었다. 보고를 받는 순간의 그의 대사를 예상해보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예, 그런가요. 아이들이 빠졌군요. 하던 대로 조치하세요.” 


<그렇다, 그는 졸려 보인다>


   멍했다. 자다 일어나서 “아이들이 구명 조끼를 입었다는데, 발견하기가 그렇게 힘듭니까?” 라고 말한 걸 번역하자면 ‘나는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나는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의 변형이다. 즉, 사고 전부터 아무 생각이 없었고, 보고 후에도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다.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에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조치를 해야할 순간에 조치를 하지 않았다.


'얌전한' 광기


    사람들은 생각한다. 매우 거대한 음모가 있을 것이라고. 정윤회 문건 수사를 막아야 했고, 부정선거 의혹을 잠재워야 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가 보여온 행태를 보면 매우 치밀하게 음모를 꾸밀 만한 사람이라고. 중대본에 나타나지 않는 와중에는 손가락 물어 뜯으면서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한 ‘광인’의 모습을 상상했을 것이다. 물론, 그 가능성도 배제하지는 않는다. 통영함과 미군 함대의 출동을 막았다는 것은 그런 면에서 수상하기는 하다. 하지만, ‘광기’라는 것이 매우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은 익히 알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의 그러한 ‘얌전한’ 광기와 더불어 참모들도 그의 광기와 그닥 다르지 않았음은 불보듯 뻔하다. 그들로 말할 것 같으면 가장 윗선에서 아무 지시가 없는데 구조한답시고 움직였다가 뭔 불호령을 들을지 모르는 인간들이다. 즉 가만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말을 금과옥조로 받드는 우리 내각과 관료들이 출동을 막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김기춘이 바로 ‘그’ 옆에서 이 모든 정황들을 만들어내는 구심점이다. 박정희, 전두환 등 독재시대의 모진(?) 풍파를 겪으며 단련된 이가 김기춘이다.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부터 생각하고 일을 진행하는 이가 김기춘이다. 자기 죽은 아들을 팔고서도 결코 진실을 입밖에 내지 않는 괴수가 김기춘이다. 그런 이가 ‘그’ 우편에서 호위하고 있는데, 거기다 대고 참모로서 자기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건 불가능하다.  


    실로 그렇게 아무 일은 없었다. 그들은 보고했고, 그는 보고를 받았다. 점심도 먹었고, 저녁도 먹었다. 머리도 했고, 자기 리듬에 따라 출근한다. 급박한 상황은 바닷 속에 갇혀 있는 사람과 갇혀 있는 사람의 가족들 몇몇에게만 급박했지 아무 일도 없는 것이었다. 오직 ‘그’의 심기의 문제 때문에 말이다.

    우리는 또 하나의 장면을 연상해보면 좋겠다. 삼성의 이재용을 비롯한 9명의 재벌 총수들이 12월 6일에 ‘최순실 국정조사 청문회’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는 그 장면 말이다. ‘모르겠다,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송구스럽다, 죄송하다, 더 잘하겠다’를 마치 ‘자동응답기’마냥 되풀이하는 이들을 보고 한편으로 우리는 생각한다. 저렇게 오랜 시간 동안 질책 아닌 질책을 받는데 괴롭지는 않을까, 자기에게 추궁을 저리도 하는데 심란한 마음을 갖지는 않을까 하고 말이다. 아니,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럴 일은 없다. 그들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 그는 그 와중에 건조한 입술에 립밤을 바른다>


    우리가 글의 앞에서 ‘그’라고 부르는 정체 모를 생물의 눈빛은 매우 일관되다. 삼성의 전(또는 현) 주인 이건희를 비롯하여 그 일가와 ‘그’의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다. 최순실을 비롯하여 그 일가도 마찬가지다. 대단히 기계적이고 상황에 대한 대처능력이 닮아 있다. 깜빡임도 별로 없고, 사람의 희로애락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어딘지 모르게 멍하다.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아닌지 알 수 없고, 누가 질문을 하면 그 질문에 대한 반응을 하기보다는 일단 ‘죄송하다’고만 선수를 친다. 묘하게도 이 생물들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순진해 보이는 구석이 있다. 증인 장시호에게 안민석 의원이 ‘나 밉죠?’라고 물어보았을 때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네’라고 대답하는 것은 김기춘의 ‘신중한’ “모릅니다.”, “부덕의 소치입니다”와는 대비된다. 그렇다 해서 그들이 어린아이의 순수함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모질게 단련이 되어 있다. 그들은 목숨을 건지는 요령에 도가 텄다. ‘대의’라는 큰 그림에는 절대적으로 소인배처럼 행동하며, 후일을 기약하는 간신 눈빛을 하다가도 바로 그 즉자적인 상황을 모면하는 것에는 도가 트였다. 고(故) 황유미씨의 500만원 이야기에는 꿈쩍 않다가도 자기 상속세 이야기에서는 동공이 지진 나는 게 그런 생물들의 특징이다. 후일에 벌어질 뒷처리를 해주는 사람과 '아버지'를 비롯한 후견인이 있으니 자기는 그 상황만을 넘기면 되는 것이다. ‘아무 사람에게나 한껏 짜증을 내고도 뒤에 있는 엄마를 믿고 사과를 하지 않는다, 오로지 아버지의 눈만 속이고 형제들 몇몇만 제거하면 8조의 재산이 내 통장에 들어와 있다’ 이와 같은 종류의 사고가 그들로 하여금 세상을 쉽고 간편한 ‘e-편한세상’으로 인식하게 한다.


실패를 허락받지 못한 자들의 거대한 실패


    그들은 결코 자신들이 하는 일이 뭔지 모른다.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고, 즉흥적으로 반응하는 동물적인 감각만이 있을 뿐이다. 먹이를 포착하는 맹수와 같은 살기가 있지만, 그 외의 상황 자체에 대처하는 능력이란 눈곱만큼도 없다. 그저 생존과 관련하여 특화된 몇몇 상황에만 기가 막힌 대처능력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멍한 채로 구명조끼를 이야기할 수 있고, 바닷 속에서 아이들이 죽어갈 때 주사를 맞을 수 있고 엄중한 상황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립밤을 바를 수 있다. 

    그들은 한 번도 실패를 허락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의 ‘아버지’는 실제로 거대함 그 자체였을 것이다. 정신분석학과 심리학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누구에게나 아버지는 큰 존재이다. 그래서 심리학에서는 아버지라는 이름을 ‘대타자’라고 명명하지 않던가. 그런데 이들의 아버지는 실로 막강한 권력과 막강한 대통령과 재벌 총수다. 박근혜의 아버지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대통령이었다. 그는 북한체제와 경쟁하여 승리한 남한 사회의 영웅이었고, 말 한 마디면 누구 하나 죽어 나가는 것은 예삿일이었던 것이 아버지 박정희다. 부하의 배신에 스러졌지만, 전쟁의 잿더미에서 국가를 일으킨 불멸의 영웅 아니던가. 이재용의 아버지 이건희는 20세기 말과 21세기 들어 휘몰아친 경제의 흥망성쇠간에 꿋꿋이 살아남은 삼성 재벌가의 알파요, 오메가이며 소위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는' 선의 화신이 아닌가 말이다.   

    자기들 또한 경쟁자들을 뚫고 아버지의 권력과 부의 옷을 입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았던 사람들 아니겠는가. 한 번의 실패는 곧 낭떠러지이며, 죽음이다. 실패를 통한 배움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실패는 죽음과 동의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아니라, 실패는 실패 그 자체다.  수많은 정적들을 제쳐야만 한다. '박근혜 5촌 살인사건'의 전말을 보고 우리는 영화가 현실인지 현실이 영화인지 그 경계마저 혼란스러운 상황에 이르렀다. 보통의 멘탈로는 해낼 수 없는(?) 일들을 해내야 하는 이들이 그들이다. 이재용 또한 지금의 그 자리에 이르기까지 형제자매를 제쳐야 했고, 수많은 외척들과 싸워야만 했다. 빈 틈은 죽음이다. 자기들 나름대로 눈물 흘릴만한 '시련'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결국 그렇게 실패를 허락받지 못했던 그들의 가슴에 종국적으로 붙여진 이름표는 ‘살인마’다. 박근혜 살인마는 304명을 죽이고, 5천만 대한민국 시민들의 얼굴에 침을 뱉었고 인류의 존엄을 모욕했다. 이재용 살인마는 고(故) 황유미씨를 죽이고, 수많은 노동자들의 가정을 짓밟았으며,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돈 귀신을 심었다.


우리 아이들을 실패하게 하라      

 

    우리는 촛불을 오랫동안 들었고, 국회에서 탄핵안은 가결되었다. 앞으로도 먼 길이 남아 있다. 누가 누가 더 나쁜가, 누가 누가 더 실패했는가를 따질 것은 따지되 이제 우리 아이들에게도 작은 실패를 가르쳐줄 때다. 넘어지기를 가르치고, 무너지는 것도 가르쳐야 한다. 스스로 넘어지되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환경, 그렇지만 그것을 아이들이 너무 적나라하게 눈치채지 못하게 세밀한 셋팅이 필요한 시점이다.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너무도 자주 일어나고 있지 않는가!

<넘어져도 괜찮다, 잃을 것은 강냉이 몇 개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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