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비평의 눈 : 근대에 대항하는 도구로서의 이상 단편소설(1)] 1930년대 단편소설의 위상 (신윤주)

비평의 눈

by 제3시대 2016. 12. 19. 22:42

본문


근대에 대항하는 도구로서의 이상 단편소설(1)


: 1930년대 단편소설의 위상  



신윤주*


 

    이상이 세상에 내놓은 첫 작품은 장편소설이었다.[각주:1] 그러나 이상 생애의 마지막 작품 목록을 채운 것은 단편소설이었다. 동경 생활의 어려움으로 건강 상태가 악화되었을 때에도 이상은 단편소설 쓰기에 열의를 보였다. 이상이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 김기림은 이상의 숙소에서 그를 만났다. 김기림은 자신이 본 이상의 마지막 모습을 두고 마치 “골고다의 예수” 같았다고 증언한다. 동경 어느 거리 뒷골목의 골방을 찾아온 김기림을 앞에 두고 “상아보다도 더 창백”하고 아무렇게나 자란 수염이 무성했던 이상은 그간 쌓인 이야기를 풀어놓느라 장장 두 시간을 앉아있었다고 한다.


‘엘만을 찬탄하고 정돈에 빠진 몇몇 벗의 문운(文運)을 걱정하다가 말이 그의 작품에 대한 월평(月評)에 미치자 그는 몹시 흥분해서 속견(俗見)을 꾸짖는다. 재서의 ‘모더니티’를 찬양하고 또 씨의 <날개> 평은 대체로 승인하나 작자로서 다소 이의가 있다고도 말했다. …… 시인이면서 왜 혼자 짓는 것을 그렇게 두려워하느냐, 세상이야 알아주든 말든 값있는 일만 정성껏 하다가 가면 그만이 아니냐 하고 어색하게나마 위로해 보았다.[각주:2] 


    김기림에게 이상은 마지막까지도 ‘시인’[각주:3]이었지만, 오랜만에 김기림을 마주한 이상이 정작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는 단편소설에 관한 것이었다. 단편소설에 관한 이상의 생각들은「지주회시(鼅鼄會豕)」를 발표하기 몇 달 전부터 그가 김기림에게 보내기 시작한 편지들에서도 읽을 수 있다. 편지의 본문에서 이상은 ‘우리의 행복을 신에게 과시하는’ 해괴망칙한 소설을 쓰겠다고 선언하거나, 자신이 지금 “문학 천년이 회신에 돌아갈 지상 최종의 걸작”인 「종생기」를 쓰는 중이라거나, “철저히 소설을 쓸 결심”이라고 밝힌다. 한 번은 『조광』에 실린 「동해」에 관해 언급하면서는 단편소설 작품에 대한 일말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다는 듯 자신은 ‘「동해」를 퇴고하면서 당분간 시간을 보낼 계획이고 그 때문에 아마 새로운 작품은 쓰지 못할 것이며, 「동해」는 작년 6, 7월 경에 쓴 작품이니 “그것을 가지고 지금의 나를 촌탁하지 말기” 바란다’고 당부하기도 한다. 

    이상은 비록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했지만, 동인들 사이에서는 일문 연작시「이상한가역반응」에서 마지막 국문 연작시「위독」에 이르기까지 분명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다양한 시 실험을 했던 시인으로 이해되고 있었다. 보들레르에 버금가는 시를 썼노라[각주:4]고 자부하기까지 했던 이상이 언젠가부터 굳이 단편소설에 매진했다면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상을 그토록 단편소설 쓰기에 몰두하게 만들었을까?   

    이어질 내용을 통해 이상이 소설을 쓰던 시기에 단편소설의 위상은 어떤 것이었으며, 단편소설이라는 양식이 지니고 있는 어떤 특징으로 인해 단편소설이 그의 문제의식을 표현하는 최후의 도구로 채택될 수 있었을지 알아보고자 한다.  


소설 독자층의 형성


    벤야민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꾼의 이야기와 소설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소설이 “근본적으로 책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하며, 소설의 보급과 인쇄술의 발명을 연관짓는다.[각주:5] 한국 근대문학사에서도 소설의 보급과 인쇄술의 발달은 중요한 관계가 있는데, 신활자본 서적의 유통으로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서사를 향유하는 독자층이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한국 근대문학사에 ‘단편소설’ 및 ‘장편소설’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때는 1910년대로 잡지 및 신문에서 최초로 사용했다. 이들 용어가 처음 사용되었을 때에는 각 양식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를 바탕에 두고 있었다기 보다는, 소설 가운데 비교적 길이가 긴 것에 장편소설이라는 이름을,[각주:6] 매체에 한 회 분량으로 실을 수 있는 짧은 소설 혹은 장편소설이 되지 못한 것에 단편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인 매우 단순한 개념[각주:7]이었고 새로운 문학의 흐름을 주도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각주:8]

   한편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했을 당시 주류를 이루고 있던 서사양식은 신소설과 활자본 고소설[각주:9]이었는데 신소설과 활자본 고소설은 독자들의 욕구를 충분히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知德의 양성에 독서의 필요함은 말할 것은 업거니와 只今 우리 청년은 독서력이 缺乏하야 독서의 미를 깨닫지 못하나니 이것이 취미의 비천한 第一因이라 …… 혹 조선문으로 된 서적이 잇다 하더라도 一瞥의 가치가 잇는 것이 업스니 나는 추하고 꼴 되지 아니한 보기부터 천하고 더럽은 소위 신소설이라는 것에 눈을 더럽히기 보다 옥루몽 슈호지 셔유기 삼국지 가튼 고문학을 닑음이 어문의 발달과 취미의 향상에 썩 有助할줄 밋노라[각주:10]


    위의 글에서는 청년 세대의 지성과 인격을 도야해야 할 필요를 따라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책을 읽는 것이 중요하지만 다양한 제약 조건들로 독서 활동을 하기가 수월치 않은 가운데, 특히 신소설은 자아의 성장에 관한 한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보다는 고문학을 읽겠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당시의 문학 환경이 신소설 혹은 활자본 고소설 양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신소설과 활자본 고소설을 유행시킨 것은 신활자본이라는 기술이었는데, 이는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만드는 인쇄술이었다.[각주:11] 서적의 대량생산은 새로운 독자층을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잉태한다. 우리나라의 신활자본 서적 출판의 경우 본격화되기 시작할 무렵에 출판법이 공포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독자층의 형성이 충분히 일어났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 하지만 최소한 “독서인구의 저변을 확대했다”[각주:12]고는 볼 수 있다. 이렇게 서서히 확대되기 시작한 독서인구는 소설의 독자층으로 전환되었을 것이다.

    소설을 읽을 만한 독자층이 예비되어 있음을 시사하는 예로 당시 신문과 잡지에서 실시했던 현상문예가 있다. 이들 현상문예는 무엇보다 구독률을 높이기 위한 자구책이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매일신보의 경우 1912년의 2월을 시작으로 네 차례의 현상 문예가 실시되었다. 매일신보는 전신이었던 대한매일신보를 총독부에서 인수하여 관제신문으로 만든 것인데 관제신문이 된 후로 신문의 구독률이 저조해졌다. 이에 기존에 없던 광고란을 새로 만들어서 소설 연재에 관한 광고를 하고, 1면에 있던 소설연재란을 4면에 삽화까지 넣은 독립적인 소설란으로 바꾸는 등의 자구책을 마련했던 것이다. 매일신보에 실린 단편소설의 절반 이상이 현상 문예에서 당선된 작품들이었다.[각주:13]

   소설의 작자들은 신소설과 고소설의 전근대성을 비판하며 대안적 담론으로서의 소설의 입지를 만들어갔다. 신문은 날마다 소설을 연재함으로써 독자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사로잡고자 했고, 그런 까닭에 장편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잡지는 한 달 혹은 몇 달에 한 번씩 발간되었기 때문에 한 회만에 완결지을 수 있는 단편 양식에 더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신문과 잡지는 소설을 읽을 수 있고, 소설 작품을 내놓을 수 있는 장으로 자리매김해갔다.


잡지와 문단의 형성


   신소설과 고소설의 전근대성에 대한 비판이 독자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것은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소설에 대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세계와 어울리는 새로운 서사 양식을 필요로 했다.[각주:14] 그런데 이 시기의 소설들은 전범이 없는 상태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바꿔 말하면, 새로운 요구가 존재했으되 그것을 어떻게 구현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막연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난제를 돌파하기 위해 당시의 소설 텍스트는 평론가들의 문학 비평문, 독자들이 투고한 독서 감상문과 서로 매개되고 의존하면서 소설이라는 양식의 체계를 만들어 가게 된다.[각주:15]

    소설 양식의 발전에는 문단의 형성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문단 형성 과정의 핵심에는 문예 동인지가 있었다. 1920년대에는『창조』『폐허』『백조』등의 동인지가 민족 개조운동을 구호로 삼은『개벽』지와 『동아일보』등과 같은 시기에 창간된다. 1920년대 동인지의 문인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자비유학생집단”의 일원이었다. 이들의 선배세대는 민족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었고, 동년배들은 식민지 관료, 은행원이나 회사원, 의사, 변호사, 교사, 언론인 등 지식 전문가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중 동인지 문인들의 사회적 지위는 신문기자나 교사였다.[각주:16]

    3.1 운동 이후 지식인들은 “식민지 시기 부르주아 지식인의 당대적 이념이 한번도 대중을, 사회 전체를 장악하지 못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는데, 기왕 하나의 절대적인 이념을 가치로 내세울 수 없게된 상황에서 문인들은 과거의 권위 기준이 상대화되었음을 활용하여 근대적 분화와 전문화의 논리로 “ ‘문학이라는 것’, ‘소설이라는 것’의 전문성을 새로이 권위화”하고자 했다. 이러한 지식인의 세대교체, 부르주아 중간층의 이데올로기적 위상 변화, 지식 정치학의 패러다임 변화라는 정치사회학적 흐름 속에서 문단이 형성된다.[각주:17] 

    동인지 문인들이 근대적 분화로 창출된 지식인 집단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작가 그룹”이었던 만큼, 이들은 “문학적 숙련과 기교에 대해 자의식적으로 집단적인 담론”을 이루고 “동종직업 종사자로서의 울타리를 의식”했다. 또 일의 의도나 목적이 아니라 “그 일의 전문적이고 숙련된 성취 여부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가리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 의해 최초의 “비평논쟁” 이 생겨났다[각주:18]는 사실은 전혀 놀랄만한 일이 아닐 것이다.


단편소설의 양식적 특성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문단의 가장 커다란 관심사는 소설이 현실 제반의 문제를 어떻게 그려내야 하고, 작가는 현실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었다. 창작방법론 논의 및 리얼리즘론, 행동주의 문학론, 휴머니즘론 등으로 이어진 비평의 흐름 역시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의 문제로 집약되었다. 이중 최재서는 소설에 대한 논의를 중심으로 자신의 비평활동을 전개했는데 그의 소설론이 당시 우리 소설이 안고 있었던 과제들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할만하다. 더욱이 그는 소설 양식 자체의 특성을 경유하여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당시 평단에서 그의 이론이 주류는 아니었지만 소설의 당면과제를 돌파하기 위해 단순히 현실의 문제(소설의 대상) 혹은 작가의 문제(소설 쓰는 주체)만을 다룬다면, 소설 자체가 지닌 본질에 다가서는 데에 양식적인 특성을 고려하는 것에 비해 제한이 있다는 것은 자명할 것이다.[각주:19]

    최재서는 당시 문단에서 발표되고 있는 장편소설의 통속화 현상과 단편소설의 관념화 현상을 문제라고 보았다. 그리고 소설의 양식에 관한 고민을 바탕으로 이러한 경향성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는 맨 처음 단편소설과 장편소설이라는 말이 등장할 당시에 장편과 단편을 단순히 텍스트의 길이를 기준으로 가르던 것에서 멀리까지 나간 것이다. 이제 소설쓰기의 주체인 작가는 소설 양식을 선택함에 있어 구성상의 요인을 구체적으로 고려할 수 있게 된다.  

    이어질 내용에서는 소설의 양식적 특성에 관한 최재서의 논의 중 그의 단편소설론을 기초로 당대에 단편소설을 쓴다는 것이 지닐 수 있는 의의가 어떤 것일 수 있는지 확인해보고자 한다.  


단편소설은 …… 인생의 전면이 아니고 일면, 실재성의 전부가 아니고 일부인 이상, 작자는 그 효과를 내기 위한 모든 재료를 이용하는 반면에 그 효과를 방해할만한 재료거나 또는 비교적 간접적인 재료는 용서없이 제거할 것이다. …… 작자의 의장에서 벗어나는 사건을 제거한다는 프로세스가 없이는 단편소설은 성립되지 않는다.[각주:20]  


    위의 내용에서 추출할 수 있는 단편소설 양식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은 ‘배제의 원리’이다. 장편소설이 어떻게 하면 삶의 총체적인 모습을 형상화할 것인가를 모색하는 양식이라면, 단편소설은 삶을 축소하고 배제함으로써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은 ‘배제를 지향하는 작가의 의도’로 확장하여 정리할 수 있다. 작가는 단편을 창작하기 위하여 일차적으로 전체적인 세계의 형상을 배제한다. 인물의 다양성도 배제한다. 단편의 작가는 삶의 다양성보다 ‘통찰의 순간’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자연 배경과 문장, 단어에 이르기까지 배제의 원리를 작동시켜야만 한다. 이로써 작가는 “ ‘효과와 인상의 단일성’을 성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작가는 짧기 때문에 발생하는 다양한 미적 특질을 획득하기 위해 배제를 지향하게 되는 것이다.[각주:21]  

    단편 양식이 짧을 수 있는 것은 “소재 자체가 작기 때문”일 수 있고, 아니면 “소재가 크더라도 작가가 예술적 효과의 극대화를 위해 소재를 삭감”하기 때문이다.[각주:22] 전자는 소설이 다루는 대상에 관한 논의에 연결되므로, 여기서는 양식의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하는 특징인 후자를 다룰 것이다.  

    단편소설의 양식적 특성 중 첫 번째는 단편소설이 삶과 멀어진다는 점이다. 단편소설이 채택하는 ‘배제의 원리’는 하나의 ‘소실점’ 혹은 폭발점과 짝을 이룸으로써 작품의 의도와 효과를 통합적으로 구현할 수 있다. 스프링에 비유하여 이야기하자면 배제의 원리를 잡아당기는 힘에, 튀어오르는 순간을 소실점에 해당하는 것이다. 즉, “배제는 폭발을 위해 행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지점인 소실점은 인물의 전체 혹은 삶의 본질을 포착하고 작품 내 모든 요소의 의미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신중하게 ‘소실점’을 선택한다 해도 순간을 통해 본질을 통찰하는 행위 자체가 동반하는 오인의 가능성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것이 바로 단편이라는 ‘형식적 준거’가 생의 치밀한 논리를 들어 설득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는 사실, 곧 ‘삶과 멀어질 수 밖에 없는 양식’임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단편이 삶으로부터 자신의 제재를 빌려올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을 제시하는 형식은 빌려올 수 없”는 것이다.[각주:23]   

    이것은 다시 두 번째 특징으로 이어지는데, 단편소설은 삶에서 형식을 빌려올 수 없기 때문에 작가가 형식을 창안해내야 한다. 뒤집어 말하면 작가는 단편소설 양식을 통해 삶을 제시하는 형식을 창안할 권리를 부여받는 것이기도 하다[각주:24]. 작가는 단편양식에는 다양한 형식 실험의 가능성을 얻게 된다. 고정된 형식적 준거가 존재하지 않는 단편의 특성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보편적 해석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과 함께 출발한 시대인 근대와 닮아있다. 식민지 시대의 작가들은 이러한 “가변성과 폭과 깊이”를 지닌 단편 양식에서 “근대성의 물질적 흔적”을 보았다. [각주:25] 

    셋째, 단편소설은 “저항담론이 ‘이미’ 기존 사회의 부정적 인식에는 도달했으나, 사회 전반에 대한 체계적인 해석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을 때” 작가의 이데올로기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삶을 표현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 이는 사회 전반에 대한 통일된 이데올로기를 갖출 것을 요구하는 장편과 대조적이다. 또한 단편은 정상의 순간에 완결을 선언할 수 있으며[각주:26] 표면적 순간을 통해서도 이면적 진실을 드러낼 수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아이러니적 양식이다. 아이러니는 부정할 수는 있지만 변화시킬 수는 없는 현실을 드러내는 데에 효과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와 식민지를 동시에 경험하는 혼란 속에서 답을 찾아가는 과정으로서의 문학 행위에 새로운 삶의 본질을 추출하는 도구로서 유용했을 것이다. [각주:27]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소설이 새로운 시대의 대안적 서사 문학으로 자리를 잡고 소설 ‘양식’에 관한 고민을 하게 되기까지의 흐름을 살펴보았다. 나아가 단편소설이 지니고 있는 양식적 특성과 그것이 식민지 조선의 현실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에 관하여 확인해보았다. 식민지 조선에서의 단편소설 양식은 글쓰기 주체가 ‘삶을 제시하는 다양한 형식을 실험할 수 있는 장’이자 부정하는 단계에는 이르렀으나 변화시키기에는 역부족인 현실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하기에 적절한 소설의 형태였다. 문학함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소설을 썼던 작가들은 의식적/무의식적 선택을 따라 자신의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가작 적절한 도구로서 단편소설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의식 과잉에 시달리곤 했던 이상이 세계에 대해 가졌던 주제의식과 단편소설 양식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이상의 수필 작품을 통해 이상이 표현하고 싶었던 주제 및 그의 예술관을 구체적으로 고찰해보고, 그것이 단편 양식의 특성과 어떻게 호응하는지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 필자소개  

메모광. 학부에서 국제어문학을, 석사과정으로 비교문학을 공부했으며, 향후 프로이트 라깡주의 정신분석학을 중심으로 연구를 지속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1. ‘이상(李箱)’이라는 필명으로 1930년 2월부터 12월까지 잡지『조선(朝鮮)』의 국문판에 연재한 처녀작,『12월 12일』은 이상의 처음이자 마지막 장편소설이었다. [본문으로]
  2. 김기림, 「고 이상의 추억」, 『조광』, 1937.6. [본문으로]
  3. 김기림에게 이상이 시인이었던 것처럼 변동림에게도 이상은 시인이었다. “이상은 시인이다. 소설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상의 시 <오감도>는 세계적 수준에 이른 탁월한 시라고 하는 믿음은, 그때나 이제나 변함이 없다. 그러나 이상의 잡문들은 고매한 시 정신에서 대단히 멀어져 있음을 느낀다.” (김향안, 「이상에서 창조된 이상」, 『문학사상』, 1986.8.) [본문으로]
  4. 조용만, 「이상 시대, 젊은 예술가들의 초상」, 『문학사상』(1987.5) [본문으로]
  5. 발터 벤야민, 「얘기꾼과 소설가」, 『발터벤야민의 문예이론』, 반성완 편역, 170-171쪽 [본문으로]
  6. 김영민, 「근대 개념어의 출현과 의미 변화의 계보-식민지 시기 ‘장편소설’의 경우」, 11~13쪽 [본문으로]
  7. 이희정, 「1910년대 매체를 통해서 본 단편소설의 정착과정 연구」, 326쪽 [본문으로]
  8. 무엇이 단편소설과 장편소설 나아가 중편소설을 규정하는가에 관한 논의는 1920년대에 좀더 심도있게 일어나다가 1930년대에 들어선 후에야 소설의 ‘양식’ 자체에 관한 본격적인 비평이 등장한다. 이 부분은 뒤에 좀 더 자세히 다루게 될 것이다. [본문으로]
  9. 이희정, 앞의 글, 322쪽; 박헌호, 「한국 근대소설사에서 단편양식의 주류성 문제」, 『식민지 근대성과 소설의 양식』, 소명출판, 2004, 71쪽 [본문으로]
  10. 작자미상(1915), 「고상한 쾌락」, 『청춘』6호, 1915.2, 54-55쪽 [본문으로]
  11. 당시에 신소설과 활자본 고소설이 유행하게 된 데에는 출판 환경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출판 시장이 사립학교 수 증가에 따라 교과서 수요가 늘어난 상황에 맞추어 급격히 성장했던 것이다. 개화기부터 공유된 보통교육의 필요는, 1905년의 제2차 한일협약 이후 대항적으로 일어난 교육운동과 함께 전국 각지의 사립학교 설립으로 이어졌다. 학교의 수가 갑작스럽게 늘어나면서 교과서 부족 현상이 심해졌고, 이에 민간단체, 학교, 개화선각자들이 서적 편찬에 뛰어들어 교과서 제작에 힘을 모았다. 1907~1908년 사이에는 집중적으로 신활자본 서적이 출판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만성적인 교과서 부족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지만, 1908년에 일제는 학부령 16호로 ‘敎科用圖書檢定規程(교과용도서검정규정)’을 제정하면서 교과용 도서의 질적 향상을 명목으로 애국적이고 계몽적인 교과서의 사용을 막기 시작한다. 나아가 1909년에는 <출판법>을 제정하여 도서 출판에 앞서 원고를 제출하여 허가 받도록 규정하였고, 법 제정 이전에 발행된 서적일지라도 다시 허가를 받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전국의 사립학교에는 학부 검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교과서, 곧 우리의 출판사들이 발행한 교과서는 거의 사용할 수 없게 되고, 이에 따라 대부분의 영세성을 면치 못했던 우리의 출판사는 더 이상 서적을 발행할 수 없게 된다. 이때 출판 시장의 유일한 대안이었던 것이 1907년부터 간행되기 시작했던 신소설이었다. 신소설은 처음에는 강한 계몽성을 띠고 있었지만 출판법으로 인한 검열의 강화로 인해 1910년대에 들어서는 1900년대 후반에 비해 훨씬 통속성이 강화되고, 현실비판적인 면모가 약화된다. 더 이상 현실비판적이고, 애국계몽적인 내용은 발간 자체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더불어 1912년부터는 신활자본으로 고전소설을 대거 간행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출판물이 도서의 대부분을 이루게 된 것이다. (류준경, 독서층의 새로운 지평, 방각본과 신활자본, 290-294) [본문으로]
  12. 류준경, 앞의 글, 295-297쪽 [본문으로]
  13. 이희정, 앞의 글, 323쪽 [본문으로]
  14. 근대문학에 관한 선행 논의를 집대성하는 이광수의 <문학이란 하오>를 통해 간단히 살펴보자면 당시 문학을 둘러싼 고민으로는 “신구 문학개념의 차이, 지, 정, 의에 대한 인식에 바탕한 문하그이 정의, 예술이 삶과 동떨어진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라는 논의와 연관시킬 수 있는 문학재료의 일상성, 학문과 도덕과 구분되어야 한다는 문학의 독립성, 그 지향은 미(정의 만족)의 추구에 있어야 한다는 자율성, 문학자(작자, 비평가)에게 요구되는 전문성, 조선문학은 과거는 없고 장래만 있을 뿐이라는 근대문학으로서의 선언적 특성” 등을 꼽을 수 있다. (이은주, 「한국 근대 단편소설의 양식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4, 46쪽) [본문으로]
  15. 이은주, 앞의 글, 98-103쪽 [본문으로]
  16. 차혜영, 「1920년대 초반 동인지 문단 형성과정-한국 근대 부르주아 지식인의 분화와 자기정체성 형성과 관련하여」, 121쪽 [본문으로]
  17. 차혜영, 앞의 글, 124-125쪽 [본문으로]
  18. 차혜영, 앞의 글, 132쪽 [본문으로]
  19. 권영민, 「최재서의 소설론 비판」, 150-159쪽 [본문으로]
  20. 최재서, 앞의 글, 338쪽 [본문으로]
  21. 박헌호, 「한국 근대소설사에서 단편양식의 주류성 문제」, 『식민지 근대성과 소설의 양식』, 74-75쪽 [본문으로]
  22. 박헌호, 앞의 글, 76쪽 [본문으로]
  23. 앞의 글, 76-79쪽 [본문으로]
  24. 앞의 글, 79쪽 [본문으로]
  25. 앞의 글, 83쪽 [본문으로]
  26. 박헌호는「B사감과 러브레터」를 예로 들며 “단편은 정상(頂上)에서 멈추는 것이 정상(正常)”임을 제시한다. 뒷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야말로 작품을 죽이는 실수라는 것이다. 그것은 “종종 반전을 수반하고, 독자의 허를 찌르며, 축적돼왔던 정서의 폭발로 종결”되는데 만일「B사감과 러브레터」를 읽은 독자가 그 후에 B사감이 어떻게 살았을까에 관해 질문한다면 그것은 순진한 독자의 자연스러운 호기심일지언정, 작품의 미학적 질감의 측면에서 본다면 불필요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앞의 글, 86쪽) [본문으로]
  27. 앞의 글, 88-89쪽 [본문으로]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