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별화된 불평등과 대상화된 여성




조은채*

 


       남자 지인 중에 페미니즘 강연을 종종 들으러 다니고, 그 주제에 대해 나름 유의미한 대화를 나눈 적도 있었던 사람이 있었다.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지만 대개 친절한 편이었고, 딱히 나쁜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이전에 저질렀던 성폭력이 sns를 통해 폭로되고 고발되었을 때, 나는 놀라기는 했지만 경악하지는 않았다. 나에게 그런 행동을 직접 한 적은 없었지만, 그의 어떤 태도나 말에서 미묘하게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느끼던 의혹을 사소한 것으로, 혹은 괜한 것으로 치부해서 넘겨버렸다. 그가 나에게도, 그리고 대외적으로도 나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니,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오히려 좋은 사람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는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며 투쟁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노동자의 권익, 성 소수자의 인권, 그리고 옳다고 여겨지는 거의 모든 것을 위해 싸웠으면서도, 그에게 여성은 사실 자신과 동등한 주체는 아니었던 것 같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일이라는 소리에 페미니즘에 관심은 가졌지만, 자기 주변의 여성들이 자신과 동등한 인간이라는 당연한 진리는 인식하지 못했던, 흔한 여성혐오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가해 사실이 밝혀졌을 때 내가 엄청나게는 충격받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 이와 비슷한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기 때문이었다. 주위에서 순수하고 착한 사람이라고 통하던 남자 지인은, 같은 무리 여학생들을 ‘부위 별로’ 등급을 매겼다. 여성 인권에 관심이 있다고 누누이 밝히던 동료는 무리 내의 페미니스트를 뒤에서 성적으로 희화화하고 조롱했다. 앞서 언급한 ‘그’에게서 몇 가지 조건을 더하거나 빼고 이름만 바꾸면 똑같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말이 통하는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음에도, 가끔 그 생각이 내 착각이었나 싶은 질문을 던지는 남자 지인들도 많았다. 그리고 그 질문 안에 담겨 있는 여성혐오를 조금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그들의 태도 때문에 더욱 답답해지곤 했다. 다른 문제에서는 대단히 이성적이고 중립적이었던 친구들이 남성 장애인의 성욕 해결을 이유로 들며 성매매 합법화를 역설했다. 하지만 그들의 논지에서 여성 장애인이나 그들의 성욕은 등장조차 하지 않았고, 남성의 성욕은 누군가 반드시 해결해주어야만 하는 불가피하지만 절대적인 것으로 치환되었다. 왜 남성의 성욕에만 애정 없이도 그것을 해소해줄 대상이 필요한가? 왜 그 해소 방법을 여성과의 성관계로 당연하다는 듯이 한정하는가? 그들은 남성 장애인이라는 특수한 경우를 예시로 들며 성매매를 합법화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 주장은 얼마든지 그 적용 범위가 확대될 수 있었다. 기러기 아빠라서, 여자친구는 혼후관계주의자라서. 세상에는 어떤 이유로든 성관계가 불가능한 사람들이 있을 테고, 그들에게는 비슷한 논리로 성매매를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그 논리대로라면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었다. 결국, 그 주장은 여성을 철저하게 타자화시켜, 남성의 성욕을 위해서는 보급되거나 구입될 수도 있는 존재로 만들고 있었다.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성적 대상화된 객체로 인식한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여성은 사회에서 사람임에 앞서 여자로 규정된다. 여성이 등장하는 기사에는 ‘여(女)’ 자가 빠지지를 않는다. 여대생, 여교사, 여배우, 여교수. 며칠 전에 본 기사의 제목은 ‘IS 대원 100명을 사살해서 현상금 11억이 걸린 23살 여대생’이었다. ISIS 무장세력때문에 고통받는 시리아 난민 소식을 접한 뒤, 대학을 그만두고 시리아의 쿠르드족 군대에 자원입대한 여성의 이야기였다. 이미 대학생이라는 신분을 버린 지 오래이며 최전선에서 저격수로 활동하고 있음에도, 기사 속의 주인공은 군인이기 이전에, ‘어린 여대생’으로 먼저 이미지화되어 있었다. 반면, 남성은 사회 안에서 성별로 규정되기보다는 보편적이고 정규적인 ‘인간’으로 등장한다. 우리는 ‘청년’ 혹은 ‘청소년’, ‘교수’, ‘의사’라는 말에 자연스럽게 남성 주체를 먼저 떠올린다. 신문 기사에서도 굳이 ‘남의사’, ‘남교수’, ‘남기사’라는 단어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남’은 ‘여’와는 달리 불필요한 수식어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청소년’이라는 말에 남성 청소년만 연상하기 때문에 ‘청소녀’라는 괴상한 명칭이 실제로 사용되기까지 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인간의 디폴트 값은 남성인 것이다. 결국 어느 한쪽은 남자이기 이전에 인간이 될 수 있지만, 다른 한쪽은 인간이기 이전에 여자가 되어버린다. 이 연장 선상에서 여성이라는 집단의 이미지는 종종 과잉되게 성애화된다. 그리고 남성 집단이 이 이미지에 기반을 두고 여성을 인식하는 것이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일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뒤에 앉은 남자의 전화 통화를 듣게 된 적이 있다. 그는 꽤 큰 목소리로 이름 모를 형님에게 오늘 ‘연애’를 하러 가자고 설득하고 있었다. 가격도 괜찮고 ‘여배우’ 같은 애들도 널렸다며. 잘 말해두면 시간도 길게 할 수 있다며. 그는 아쉬워하며 전화를 끊었다. 형님이 오늘은 안된다고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또 다른 형님에게 ‘연애’를 하러 가자고, 자기가 오늘 다 알아봐 놓았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번 형님은 된다고 한 것인지 그가 신나서 계획을 읊었다. 절대 당사자 면전에 대고는 할 수 없는 모욕과 조롱이 양념처럼 곁들여졌지만, 그 남자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어 보였다. 통화 내용을 들을수록 그 남자가 말하는 ‘연애’가 성매수를 가리키는, 성매매 산업에서 흔히 쓰이곤 한다는 은어인 ‘연애’라는 것은 점점 명백해졌다.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통화 내용을 들어야만 했던 나는 문득, 그리고 아주 뜬금없이 남자는 만나는 모든 여자를 잠재적 연애대상으로 본다는, 제법 자주 쓰이는 농담이 떠올랐다. 물론 이 농담에서 말하는 연애가 그 남자가 통화로 형님들에게 같이 하자고 조르던 그 ‘연애’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연애’를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할 수 있는 남자가 하는 또 다른 연애는, 과연 그 ‘연애’와 얼마나 다를 것인가? 여성을 구입할 수 있는 성애화된 객체로 여기는데 이미 익숙한 사회에서, 그와 같은 여성혐오자들이 하는 또다른 연애는 ‘연애’가 아닌 연애라고 해서 무고(無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여성을 동등한 주체가 아닌 성적 대상화된 객체로 간주하는 것에 너무나도 익숙하다는 사실이 그가 발화한 말들로 선명하게 입증된 기분이었다. 친구였으면서 단체카톡방에서는 말로 온갖 성추행을 다 하고, 연인이었으면서도 헤어지자는 말에 폭력을 휘두르고, 자기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했으면서 성폭력을 저지르는 남자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도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전화 한 통만으로도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와 혐오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증명되는, 그리고 그 증명이 공공장소에서 버젓이 그리고 별 거리낌 없이 일어나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피부로 와 닿았기 때문이다.


* 필자소개

      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하면서, 조형예술을 기반으로 다양한 문화예술 현상을 감상하고 분석하는 법을 배웠다. 동일 전공으로 석사에 진학하여 공부를 이어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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