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의미 없는 나

아주 아카데믹하지 않아서 더욱 아카데믹한 단상 8




 김정원*


Andrew Wyeth, Christina's World, 1948 

   

    고개는 빳빳이, 보폭은 넓게, 표정은 당차게. 나는 지금 런던의 번화가를 걷고 있다. 부는 바람에 보라색 스카프가 흐느적댄다. 스카프가 날아갈까 신경 쓰이지만, 일단은 자연스럽게 걸어야 한다. 이미 몇 번이고 왔던 길이라 헤매지 않을 것이다. 왁자지껄한 사람들 틈바구니를 지나가더라도 주눅들 필요가 없다. 저 모퉁이만 돌면 익숙한 곳이고, 거기에 가면 나도 하하, 호호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좀 전의 그 거리보다 익숙한 곳, 학교의 건물이 보이자 나는 안도하며 3층 교실로 향한다. 계단마다 서 있는 조각상들은 그야말로 유럽풍이다. 현대적 조형물은 간데 없고, 중세풍의 것들만 진열 돼 있다. 게시판엔 공지들이 다닥다닥하다. 손글씨로 써 낸 대자보들은 며칠 째 제목도 읽어낼 수가 없어, 나만 공지를 못 알아먹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스친다. 교실 앞에 다다르자, 잠깐 숨을 고르고 문을 연다.

    먼저 온 이들에게 눈인사를 건네며 자리로 향한다. 교실 안 모든 풍경이 오감을 건드린다. 문을 열면 느껴지는 낯선 그 냄새. 한국에서는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향인데, 섬유 유연제 향과 초콜릿 냄새가 섞인, 달달 하면서도 느끼한 그런 냄새다. 다음으로는 나의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그들의 말소리. 언뜻 들어서는 알아챌 수 없기에, 언어이기 보다는 마치 그네들만이 섭렵한 기호 같다. 교수가 들어오기 전, 모인 이들의 대화가 시작된다. 서로의 에세이 주제를 묻는다. 내 옆의 금발의 파란 눈 학생은 바디우에 관해 연구 중이다. 내 주제와 동일하여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파란 눈을 바라본다. 맞은 편의 금발의 파란 눈 학생은 칸트에 관한 내용을 다룬다고 한다. 나도 얼마 전 칸트를 다시 읽었기에 몸을 돌려 그의 파란 눈을 바라본다. 이제 나도 입을 떼보려 하는 찰나, ‘바흐’를 진실로 사랑하는 금발의 파란 눈 학생이 칸트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빠르게 진행되는 그들의 말소리에, 하려던 이야기를 접고 그냥 경청하기로 한다. 중간중간 고개도 끄덕이고, 눈도 맞추며 ‘굿 리스너’가 따로 없다. 강제된 경청인지 자발적 경청인지 당최 알 수가 없는 경청이 다시 시작됐다. 

    교수가 들어오고, 현상학에 관한 내용이 이어진다. 후설을 지나 하이데거 이야기가 한창이다. 나는 하이데거가 너무 좋아 교수의 말소리에 애를 써가며 귀를 기울이지만, 들리는 건 그가 쓰는 귀족적인 영어 강세(posh English accent)뿐이다. 속으로 그의 악센트를 따라 하다 보니 어느 틈에 쉬는 시간이다. 커피를 사러 줄줄이 나가는 그들을 따라가본다. 아까 길에서 보았던 무리들처럼 왁자지껄하지는 않지만, 고상한 듯 이야기를 나눈다. 이야기는 다시 철학이거나 신학이다. 나는 그네들이 거론하는 모든 유럽 철/신학자들의 이름을 들어보았고, 심지어 그 중 많은 책을 이미 다 ‘읽어제낀’ 상태였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누구도 내게 그에 관한 이야기를 묻지 않았다.

    수업을 마치고 도서관에 들릴까 하다, 오늘은 집에 가기로 한다. 나풀대는 스카프를 목에 칭칭 감자 한결 편하다. 어깨에 들어간 힘도 빼고, 보폭도 줄이고, 표정도 풀고 나니 한 번 더 편해진다. 삼십여 분을 걸으며 그들을 고발한다. 고발자도 나고 듣는 이도 나다. 깊이깊이 속으로- 죄 없는 그들의 죄를 뇌까려댄다. 나 말고는 유색인종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그 학교의 폐쇄적 수용성을 까고, 신학함의 근본이 백인들에게 있다고 믿는 그네들의 결핍된 식견을 까고, 세계랭킹을 들먹이면서 유럽의 전시물만 죄 갖다 놓은 그들의 오만함을 깐다. 헤겔을 헤젤로, 아이스토텔레스를 아리스토틀이라 주저 없이 발음하는 영어 중심의 사고를 까고, 워킹 클라스와 구분 짓기 위한 포쉬 영어를 끝내 구사하는 그들의 교만함을 깠다. 아는 것이라고는 고작 유럽철학뿐인 그들의 무식함을 까고, 마지막으로 유로센트리즘, 그러니까 서구를 본질로 생각하는 대학가의 망상가들을 힘주어 깐다.

    한참을 까고 나니 속이 후련해진다. 후련해짐과 동시에 아주 또렷하게 나를 덮쳐오는 것 하나, 다름 아닌 ‘나’였다. 다 까고 나니 남는 것은 오롯이 아주 그냥 나 하나였다. 하루 종일 밖을 향해 있던 내 의식의 전반이 이제 나를 향한다. 나를 비추는 의식의 거울 앞에 벌거벗은 자아 하나가 불현듯 모습을 드러냈다. 관계의 경계 밖을 서성대며 낯설어 했던 나. 말소리가 들리지 않아 주눅들던 나. 하하, 호호 웃을 수 없어 외로워 하던 나. 길을 잃을까 두려워하던 나. 소외에 맞서느라 잔뜩 긴장하던 나. 누구도 나의 의미를 물어주지 않아 절망하던 나, 내 지식을 드러내지 못해 억울해하던 나…... . 태생적으로 예민한 탓에 보다 야무지게 생채기가 난 내 가엾은 자아가 내 눈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집에 도착도 못했는데 눈물이 쏟아져 내린다. 마트에 들려 찬거리도 사고, 택배도 찾아가야 하는데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언제나 그렇듯, 나의 거짓 이성이 퇴각하자 진실한 몸이 사건의 진정을 드러낸다. 몸이 놓여 있는 ‘여기’-‘지금’의 진실은 눈물이고 절망이고 불안이었던 것이다. 내 몸에 새겨진 내 언어, 내 분위기, 내 역사를 꾹 누르고서, 흔들리는 눈빛을 감추려 애쓰던 몇 주의 시간이 눈물과 함께 무너져 내린다. 무너졌으니 이제 세울 때가 왔다. 텅 비워냈으니 이는 이제 가능성일 수 밖에 없다. 존재(existence)의 어원이 ‘밖에 나가 서다’라는 것으로부터 온 것이 맞는다면, 숱하게 경계 밖에 있었으니 실로 나는 ‘존재’했다. 나를 밖에 두기도 하고, 안에 들이기도 하며 남루한 나 자신 앞에서 엉엉 울어 봤으니, 나는 제법 실존적이었다. 이제 시불시불을 멈추고, 쫓던 것의 무상함과 그 안에 머물던 나 또한 얼마나 무의미 했는지를 응시하면 된다. 나를 일으킬 명제는 간단하다.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 와 ‘나는 무의미하다’면 충분하겠다. 나는 델포이 신전 앞에나 선 듯 ‘내가 아무 것도 아닌 채로 지금 여기에 있음’을 계속해서 읊조렸다. ‘해야만 한다’를 넘어, ‘하고 싶다’를 넘어 ‘나는 존재한다’로 나아가길 꿈꾸며 기도하듯 입술을 움직였다. 그간 내가 신봉했던 가치와 의미들이 찢겨 나간다. 그럼에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깊이와 충만함이 내 안에 있음을 굳건히 믿어본다. 결핍된 존재인 것을 자각했으니 이제 가능성일 수 밖에 없다. 그 무의미성을 뚫고 들어가 가능성을 건져내 오면 된다. 암만 이 낯선 세계에 내팽개쳐져 있다고 하나, 내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 “나의 외부로 존재를 몰아내고, 순간순간을 쥐어짜며 나를 정화시키고 나를 견고하게 만들어 나갈 수 있는(구토)” 때가 왔다. 정해진 것은 없다. 본질도 없고, 필연도 없고 목적도 없다. 있는 것은 ‘저주 받은 자유’로 들어 찬 몸뚱이 하나. 이 몸뚱이로 낯설고 불안한 생활세계를 단독자로서 기어이 살아내면 된다. 내 몸이 느끼는 낯섦과, 불안, 고독에 그대로 고통스러워 하며, 내 몸의 한계와 유한성을 솔직하게 토해내면 된다. 낯선 세계 속에 단독자로 서게 됐으니 외롭고 불안했던 그 기분에 차라리 감사하다. 이런 나의 마음이 로캉탱의 마음과 같은 것일까.         


“그것은 일종의 기쁨이었다. …… 나는 눈 속을 걸어와 완전히 얼어붙었다가 갑자기 따뜻한 방으로 들어온 사람과 같았다.”(구토)


    이토록 비장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오늘 가까스로 세워 놓은 나의 결단이 한방에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와 파란 눈의 격차가 나를 다시 주눅들게 할 것이고, 나와 낯선 냄새의 격차가 나를 다시 불안하게 할 것이다. 빨간 2층 버스가, 기호 같은 말소리가, 고상한 악센트가 다시 나를 자극하면, 나는 다시 세계 밖으로 밀려 나가지 않으려 머리를 빳빳이 들고 억지로 밝은 웃음을 지을 것이다. 이곳을 떠나 다른 곳에 가게 된다 한들, 부지불식간에 나를 덮치는 격차감으로 나는 다시 발버둥 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 발버둥은 빤히 예고 되어 있다. 세계 속에서 미래로 나를 던져가며 살아가는 한, 내 안의 나를 발견하고- 아프고- 초월하고-의 과정은 계속 될 것이고 그로써 나는 다시 비장해질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위의 고백은 이미 2년 전의 것인데, 그간 나는 무수히 무너지고 다시 비장했었다. 나를 만나고, 나의 외부를 만나고, 다시 밀려나고,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이 과정은 지독한 ‘의미 물음’의 과정일 것이다. 무의미성과 의미성 사이에서의 발버둥. 시인 조은의 성찰이 나의 것이 되기를 간구해본다.


  나는 늘 순도 높은 어둠을 그리워했다 

  어둠을 이기며 스스로 빛나는 것들을 동경했다 

  겹겹의 흙더미를 뚫는 

  새싹 같은 언어를 갈망했다 


  처음이다, 이런 마음은 

  슬픔도 외로움도 아픔도 불빛으로 

  매만지고 얼싸안는 

  저 무리에서 혼자 떨어져 

  몸이 

  옹관처럼 굳어가는 것 같은 몸이 생의 빛살에 관통당한 것 같은 - 조은, 생의 빛살



* 필자소개

   "한신에서 기독교교육을 공부하고,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조직신학으로 석사 과정을 마쳤다. 현재 박사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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