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과 주체 6]


알튀세르와 이데올로기적 주체



 

허석헌

(미국 샌프란시스코 GTU 박사과정, 조직신학)



왜 알튀세르인가


      루이 알튀세르(1918-90)라는 이름이 맑스주의 논쟁의 한복판에서 한 때 큰 영향력을 끼쳤던 적이 있었다. 발리바르가 ‘알튀세르를 위한 조사’[각주:1]에서 말한 것 처럼, 그는 맑스주의와 공산주의라는 테제를 프랑스철학사에 남긴 철학자이며, 맑스주의를 둘러싼 수많은 논쟁에서 프랑스철학이 중심적인 위치를 점유하게 만든 공로자이다. 그로부터 반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에 그의 이름은 거의 잊혀진 듯 보이지만, 오늘에도 그의 철학적 유산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맑스주의가 스탈린식 사회주의 실패 이후 포스트구조주의의 변화 안에서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방황하는 처지가 되었을 때, 맑스주의를 관념론적으로 수용하려는 유혹으로부터 과감히 분리시키고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재구성해내었다는 점에서, 그의 노력은 학문적 완결성을 떠나 오늘날 맑스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모든 시도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굳이 열렬한 알튀세리앵이 아니더라도 우리 시대에 맑스를 말하려면 알튀세르는 한번 쯤은 넘어야할 할 관문같은 것이면서 동시에 관문을 통과시켜주는 열쇠와 같은 존재이다.

    이 글은 알튀세르가 이해하는 맑스주의적 입장에서 ‘주체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 글에서 그의 전체 철학의 내용을 조망할 여유는 주어지지 않는다. 다만, 알튀세르가 맑스주의의 휴머니즘적인 요소를 구별시켜내기 위해, 인간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발전시켰으며, 이를 위해 정신분석학을 통해 이데올로기의 실체를 어떻게 파악했는지를 중점적으로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서 알튀세르는 주체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는지, ‘다양한 해석이 아니라 변혁을 위한 철학’이라는 맑스주의의 궁극적인 목표에 얼마만큼 충실하였는지를 평가해 보려고 한다.


맑스를 위한 자본론 읽기


    알튀세르의 철학적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의 논의는 그의 두 권의 논문집에서 시작해야 하는데, 첫번째는 ‘맑스를 위하여Pour Marx (1965)’이고 두번째는 ‘자본론을 읽는다 Lire le Capital(1965)’이다. 이 두권의 논문집을 통해서 알튀세르라는 이름은 맑스주의 철학자로서 주목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저술들은 무엇보다 책의 제목 자체가 그의 전 생애에 걸친 맑스철학자로서의 정체성을 한마디로 드러내 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이유가있다. 제목 그대로, 그의 철학은 ‘맑스를 위한’ 동기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맑스를 위한’ 그의 실천전략은 다시 ‘자본론을 읽자’는 제안으로 전개된다. ‘맑스를 위한, 자본론 읽기’가 겨냥하는 일차적인 목표는 제일 먼저 맑스주의를 이데올로기화시키려는 모든 시도들로부터 경계짓는 것이다. 스탈린의 시대는 지나갔지만 맑스주의에 대한 스탈린식의 교조적 적용에 대해 돌파구를 찾고 있던 때에, 맑스주의를 옹호하려는 운동의 일환으로 나타난 손쉬운 반응은 맑스주의의 휴머니즘적 해석이었다.[각주:2] 이 휴머니즘적 해석은 맑스의 청년기 저작에 근거하는데, 특히 ‘경제철학수고(1844)’에서 재발견된 ‘소외’의 개념은 그간 무시되었거나 간과되었던 인간의 윤리적 심리적 차원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러한 청년 맑스의 재발견은 그동안 스탈린의 교조주의를 통해서만 맑스주의의 저작을 해석해야 했던 이들에게는 일종의 해방으로 경험되었다. 이 해방감은 다시 ‘자유주의’적이고 윤리적이며 휴머니즘적인 맑스주의를 진보처럼 받아들이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 자유, 소외와 같은 휴머니즘적인 개념들로 맑스주의를 재해석하려는 흐름에 대해 알튀세르는 맑스주의를 이데올로기로 오염시키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대신에, 알튀세르는 맑스주의에 대한 ‘과학적 독해’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가 말하는 과학적 독해라는 것은, 맑스주의를 비판하거나 혹은 옹호하기 위해 맑스의 저작들을 이데올로기적 읽기방법으로 체계화시키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그의 해석방식을 말한다. 말하자면, 맑스를 순수하게 읽어야 하지, 다른 의도를 숨겨둔채 읽지 말것을 주문하는 것이다.[각주:3] 알튀세르가 보기에, 맑스주의의 휴머니즘적 해석은 청년 맑스에서 간헐적으로 보이는 이데올로기적인 요소들을 맑스 전체를 해석하는 틀로 오해한 나머지, 맑스 성숙기의 저술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고 비판한다.[각주:4]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에서, 알튀세르가 내세운 ‘맑스를 위한’ 읽기 방법은 맑스주의 이론을 다른 이데올로기적 해석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맑스를 훗설로, 맑스를 헤겔로, 맑스를 윤리적이거나 휴머니스트적인 청년 맑스로 위장”[각주:5] 시키려는 시도들에 대해 반박하는 것을 과제로 보았다.   

    따라서, 알튀세르에게 일차적으로 맑스 청년기 저술 안에 보여지는 휴머니즘적인 경향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이를 위해서, 알튀세르는 이론적 형성의 특수한 차이를 드러내는 선별 지점을 지시하기위해 자끄 마르땡에게서 ‘문제틀’이라는 개념을, 그리고 과학적 학문의 토대에 대한 이론적 문제들의 변화를 감지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가스통 바슐라르로부터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개념을 차용한다.

    먼저, ‘문제틀’이라는 것은, 개별 저자가 제시하는 “대답들을 주재하는 질문들의 체계”[각주:6]를 말한다. 쉽게 말해서, 질문에 대한 답은 질문과의 연관성/일관성을 벗어나서 답해지지 않고, 반드시 질문의 체계안에서 대답되어진다는 말이다. 모든 이론과 철학은 그 자체가 일관성 있는 연속적 개념들로 구조화되어 있기에 문제와 답은 항상 서로 연관된 틀안에서 상호작용하게 된다. 예를 들어서, 우물가서 숭늉을 찾을 수 없는 것 처럼, 헤겔식의 관념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맑스적인 유물론적 대답에서 찾을 수 없다는 말이다. 질문은 이미 대답이 발견될 범위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틀’이라는 개념은 청년 맑스와 성숙한 맑스의 차이를 분별해 줄 수 있는 방법이론으로 차용되었다. 이 개념을 통해 알튀세르는 청년맑스의 ‘경-철수고’는 포이에르바하의 문제틀이지 맑스적 문제틀이 될 수 없다고 분석하며,청년 맑스와 성숙한 맑스를 분시시켜놓는다.

    ‘인식론적 단절’[각주:7]이라는 개념 역시 사적유물론의 주창자로서 성숙한 맑스를 이데올로기적 관념에서 발견되는 맑스를 분리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된다.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말은 앞선 ‘문제틀’이라는말과 연관되어 있는데, 과학 이전의 사고양식이라는 문제틀에서 과학적 사고양식이라는 문제틀로의 급격한 인식론적 전환을 의미한다. 이 전환은 서로 유착관계에서 일어나는 순리적인 변화가 아니라, 전환점을 기준으로 이전과 이후가 서로 모순되고 단절되며 불연속적인 대립속에서 벌어지는 적대적인 전환을 말한다. 알튀세르는 청년 맑스와 성숙기의 맑스안에서 인식론적 단절이 일어났다고 보는데, 그 기점은 ‘독일이데올로기’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독일이데올로기’[각주:8]에서 비로소 맑스가 목적론적 사고방식, 실증주의적 역사관, 휴머니즘적인 태도와 같은 이데올로기적인 방식과 완전히 결별하고 그의 독창적인 ‘사적유물론’을 전개하기에 이르렀으며, ‘자본론’의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진보하는 길을 열어놓은 것으로 보았다.

    이제, ‘문제틀’과 ‘인식론적 단절’의 개념들을 통해서 맑스주의를 다른 이데올로기적 체계(틀)과 분리시키고, 서구 부즈조아적인 휴머니즘으로부터 성숙한 맑스를 되돌려 놓기위한 알튀세르의 기획은 보다 구체적인 문제로 진입한다. 알튀세르는 이 목적을 보다 현실적으로 가시화시키기 위해 맑스의 초기 저작들 안에서 나타난 사회변혁의 주체로서의 인간 개념을 뒤집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한 알튀세르의 대답은 이데올로기론에서 다뤄진다.


이데올로기는 물질이다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를 직접적으로 문제삼는 글은 그의 논문집 ‘레닌과 철학(1969)’에 실린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는 논문에서이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해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논의는 이미 ‘맑스를 위하여’에 수록된 ‘모순과 중층결정’이라는 글에서 먼저 다뤄진바 있다. ‘모순의 중층결정론’이 함의하는 바는, 다양하고 상이한 여러 층위들로 구성되는 사회와 역사는 경제라는 ‘기본모순’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사회는 다양한 사회적 실천들로 구성되는 복합적 총체이고, 각 실천들은 제 각각 특수한 자질들을 갖기 때문에 어느 하나의 실천이 본질적 영역이 될 수 없고, 모순 또한 사회구성체의 다양한 층위와 심급들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회구성체는 서로 보조적이고 역동적인 관계를 맺으며 모순은 원리에 있어서 중층적으로 결정된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이다.[각주:9] 맑스주의에서 하부구조가 상부구조가 결정한다는 것이 불문율처럼 수용되었다면, 알튀세르에게서, 상부와 하부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서로 자리를 맞바꿈 하는 중층관계라는 변칙적인 관계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하부토대를 이루는 자본과 노동의 경제적 모순이 가지는 상부구조에 대한 일방적인 결정구조를 비판하면서, 하부구조에 의해 파악될 수밖에 없는 상부구조라고 믿어왔던 요소들은 동시에 하부구조 안에서 ‘중층결정’[각주:10]의 관계를 구성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를 허위의식으로 보아 왔고 과학적 사고와 대립시켜왔던 기존의 입장에서 벗어나, 현실 세계속에서 이데올로기가 차지하는 실제적인 물리적 성질에 주목한다. 알튀세르는, 대체로 오류나 환상, 왜곡된 의식, 관념적인 현상이라는 받아들여졌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데올로기는 사실 개인들의 실제적 존재 조건들에 대한 그들의 ‘상상적인 관계’를 나타내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실제적 관계의 표현은 아니지만, 실제적 관계처럼 보여지는 개인들의 ‘상상적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이론, 이론적 실천 그리고 이론적 형성(1966)’에서 이데올로기는 역사적인 실제에 관해서 ‘환영illusion’’을 구성함과 동시에, 역사적 실제를 ‘암시’한다고 말한다. 대표적인 예는 기독교에서 발견된다. 크리스챤은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라는 상상적인 관계를 표상한다. 오늘 한국의 현실을 빗대자면, 열혈 친박-수구세력은 자신들을 국가와의 관계에서, 좌파를 청산하는 국가의 수호자라는 ‘상상적인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그 관계는 상상으로만 머물지 않고 실제안에서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려는 속성을 갖는다. 이런 점에서, 상상적인 관계로서 이데올로기는 단지 허위나 왜곡이 아닌 실제로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는 ‘물적존재’가 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데올로기는 상부구조에서 맴도는 허구가 아니라 현실과 관계맺는 물리적 성격을 가진다는 말이다. 따라서, 포이에르바하는 ‘기독교의 본질’에서 종교는 인간 욕망의 투영일 뿐이라면서 종교를 실체없는 허상으로 간주하였지만, 알튀세르식으로 보면 종교라는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토대에 구체적인 행동을 유발하는 물적 형태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상상적인 관계에서 개인이 부여받은 의식은 단순히 관계를 인지하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고, 이 관계에 부합하는 실질적인 실천을 수반한다. 마치, 신의 자녀로 상상적인 관계를 맺는 자는 그에 걸맞는 종교의식, 종교적 규율과 의무를 하게 되는 것 처럼, 또는 친박-수구 단체 회원이 좌파로부터 조국을 수호하려는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상상적인 관계속에 지나치게 몰입하였을 때에, 폭력적이고 비정상적인 집단행동을 보이는 것과 같다. 인간 개인들은 상상적인 관계와 실천의 상호작용 안에서 점차 이데올로기에 예속된 주체로 나타난다.


이데올로기의 호명


    이데올로기에 예속된 주체는 부르조아 국가에서 사회를 작동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는 생산관계의 재생산이라는 매우 중요한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국가가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생산관계가 유지 재생산 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 두가지 수단이 동원된다고 본다. 하나는 정부, 행정, 군대, 경찰, 감옥과 같은 ‘억압적 국가장치’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 교육, 가족, 언론, 문화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이다. 전자가 폭력을 통해 작동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작동하는 차이점을 갖는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확산하고 강화하는 근본적 수단이며, 이데올로기 장치안에서 개인은 이데올로기에 지배력을 장악당하는 주체로 재생산되는 것이다.

   이처럼, 이데올로기가 주체를 구성하는 관련성을 정리하자면, 개별자가 가지는 믿음, 신념의 존재는 관념에 머물지 않고 물화된 형태로 주어지는데, 왜냐면 개인의 주어진 관념은 물질적 실천들 속에 삽입되어 있는 물질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 물질적 실천은 물질적 의식에 지배되며, 그 물질적 의식은 물질적 이데올로기 장치에 의해 정의되고, 그 물질적 이데올로기 장치로부터 주체 관념은 파생된다. 여기서, 우리는 주체와 이데올로기의 역전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있다. 이데올로기는 주체의 산물이 아니다. 반대로 주체는 이데올로기의 산물이 되는 것이다. 유사하게,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개별자들에 선행한다. 신념이 있기에 이데올로기적 장치를 주체적으로 구축하는 것이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장치가 있음으로 해서 개별자들은 신념을 가지게 된다. 말하자면, 알튀세르에게 주체는 이데올로기의 결과이다.

    이를 다르게 표현한 개념이 ‘호명interpellate’이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마지막에서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주체로 호출/호명 한다’고 규정하는데, 이 말로서 알튀세르는 인간의 주체성의 본질을 가장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이데올로기의 기본 기능은 개인들을 생산관계에 적합한 주체를 생산해 내는 것인데, 이는 호명을 통해 이뤄진다는 것이다. 즉, ‘이봐 거기 당신’이라는 작은 말 하나만으로도 상상될 수 있는 매우 세밀한 상상적 관계의 조작을 통해 모든 개인들을 주체로 구성하거나 변형시키는 방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지젝은 ‘까다로운 주체’에서 호명과 관련된 슬로보니아의 농담을 적절한 예로 든다. 극장에 늦게 들어온 한 부자가 있었는데, 그가 연극을 방해한 죄책감에 싸여 있을 때에, 때 마침 배우가 내 뱉은 ‘누가 내 침묵을 방해하는가?’라는 대사를 부자 자신을 향한 말로 오인하였고, 결국 그는 극장 안에서 큰 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대답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가 말해주는 것은, 배우의 호명이 부자관객으로 하여금 큰 소리로 대답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배우에 의해 주체로 호명되는 사건은 이처럼 뚜렷한 인과관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호명은 상상적 관계를 불러일으키고 행동을 유발하는 데 이 모든 과정은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오인’된 호출에서 이뤄진다는 것을 시사한다.

    알튀세르에게서 ‘호명’이 이데올로기와 주체간의 관계에 대한 열쇠로 되는 이유는 개인을 주체로 되게하는 과정이 사실은 이데올로기의 환영/오인과 자기 암시에 의한 것임을 말해주기 위함일 것이다. 또한 환영으로 존재하는 상상적 관계일지라도 그것이 자신을 호명한 것으로 오인했다면, 그것은 개별자를 주체로 불러내는 것이며, 복종의 강요와 억압이 아닌 순주히 자신의 자발적인 선택과 행동에 의한 것으로 착각하도록 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이 스스로 주체가 되었다는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국가장치에 의해 호출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자발적으로 존재한다는 환상에 도취되어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인간을 파악하는 알튀세르의 입장이 드러난다. ‘인간’은 부르조아 이데올로기의 구성물이다.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사회가 요구하는 주체로 구성하기 때문에 주체는 이데올로기 없이 불가능하며, 이데올로기 없이 사회는 존재할 수없다고 본다. 사회적 재생산은 자신을 인식하는 자발적인 주체에 의해 수행되기보다 인간의 배후에 있는 장치구조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다. 인간 자신이 선택한 목적을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행위는 없으며, 모순의 중증결정 구조에서 경제적인 최종심급으로 규정되는 행위들과 효과만이 나타날 뿐이다.

    이렇게 인간에게서 어떤 본질적인 행위의 근거를 제거하는 것이 알튀세르가 맑스를 위해 자본론을 다시 읽기를 제안했던 의도이다. 알튀세르는, 자본론을 소외된 주체의 복권과정으로 읽어내는 주체 중심적인 독법을 신화적인 것으로 비판하고, 대신 ‘주체없는 과정’이라는 역사 개념을 등장시킨다. 역사는 주체가 없는 과정이다. “역사속에서 작동하는 변증법은 그것이 절대자이든 인간이든 그 어떤 주체의 활동도 아니며, 역사의 기원은 언제나 이미 역사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고 따라서 역사에는 철학적 기원도 철학적 주체도 없다”[각주:11]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인간을 보는 알튀세르의 입장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인간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신화일 뿐이다. 때문에 맑스주의는 인간의 주체로부터 출발할 수없다. 때문에, 계급투쟁도 역시 자유로운 인간주체들의 인식과 실천행위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사회의 생산관계를 구성하는 관계들 차이들, 대립들로 이루어진 체계와 구조의 반영물일 뿐이다. 이렇게 알튀세르는 맑스에게서 인간의 제거하고 과학만을 남겨놓았다.  


알튀세르가 남긴 것들


    맑스의 관점에서 모든 계급적 모순과 대립, 그리고 계급투쟁은 경제적인 동기에서 발생하여 경제적인 목적으로 회귀한다. 이러한 맑스주의 경제적 환원주의는 정치적 변혁과 계급투쟁의 개념들을 지극히 좁은 영역으로 제한하며 정치적 주체성이 발현되는 공간의 가능성을 애초부터 차단하고 만다. 이러한 맑스주의의 당면한 한계에 스탈린적인 교조주의로 응답해온 맑스주의 진영에 대해 알튀세르는 새로운 맑스주의 독법을 제시한다. 알튀세르가 주목하는 것은, 모순은 경제적 토대에서 결정되기보다 상부구조의 존재와 본질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계급적 모순은 경제라는 단선적인 층위로만 제기되지 않고,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의 국가장치들이라는 복잡하고 중층적인 계기를 통해 발생하게 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이로써, 맑스적인 계급투쟁의 협소한 개념은 알튀세르에 의해 넓은 외연으로 확장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계급적 모순의 문제는 정치 이데올로기적인 구조의 문제들에 대한 정치적 실천의 차원에서 변화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다. 이와 같이 알튀세르는, 맑스주의에 대한 교조주의를 반대하면서도 이데올로기적인 해석 또한 분리시켜내어, 맑스주의를 오늘의 자리에서 진지하게 사고하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알튀세르의 반휴머니즘으로 드러난 이데올로기의 실체와 그로 인해 구성되는 인간은 역사에 대한 인간의 무능함을 넘어 회의감마저 들게 만든다. 인간은 역사를 구성하는 주체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구성되는 주체라는 점은 인간의 주체에 덧붙여진 환상과 오인을 제거할 수 있게 해 주었지만, 한편으로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할 수 없는 한계 같은 것이 이미 설정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알튀세르의 반휴머니즘은 모순에 대한 인간의 승리를 전망해 주기보다 인간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구조의 승리를 인정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만든다. 마치 푸코가 지식과 담론이 구성하는 권력구조에 대한 탁월한 분석을 내놓았으나, ‘그러면 인간의 해방의 길이 어디에 있느냐’는 물음 앞에서는 정작 궁색해지는 것처럼, 알튀세르 역시 이 점으로부터 인간주체에 대한 회의주의적 물음을 어떻게 처리할 지가 또다시 문제로 제기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제기 조차도 인간주체에 대한 불확실성을 견딜 수 없어하는 조급함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진정한 변혁은 현상을 현상대로 직시하는 자리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에 익숙해지기 전까지 이러한 물음은 계속될지도 모른다. 알튀세르 자신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알튀세르는 말년에 정신병을 앓던 중 아내를 살해한 비극적인 인생의 결말을 맞이한다. 이보다 더 큰 비극은 그가 평생을 붙들고 온 철학자로서의 걸어온 길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는 철학자로서의 삶을 정리하며 자신은 인생 전반에 영향을 미친 맑스와 프로이트를 결코 완독하지 못했고 따라서 둘을 결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기꾼이라고 털어놓는다. 그가 맑스와 프로이트를 완독하지 못했다는 말이 그들의 책을 섭렵하지 못했다는 뜻은 물론 아닐 것이다. ‘맑스를 위하여, 맑스를 다시 읽기’를 ‘해석이 아닌 변혁을 위한’ 철학자로서의 절대 사명으로 여겼던 그에게도 ‘맑스적인 주체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여전히 미완으로 남겨진 풀지 못한 숙제였다는 자기 고백이 아니었을까.



ⓒ 웹진 <제3시대>

  1. 에티엔 발리바르, 루이알튀세르 1918~1990 (민맥신서, 1991), 33. [본문으로]
  2. 가장 잘 알려진 휴머니즘적 맑스 해석으로서, 가톨릭 철학자 Jean Yves Calves와 Pierre Bigo, 알튀세르의 옛스승인 Jean lacroix, 실존주의자 Jean Paul Sartre, 현상학자 maurice Merleau-Ponty와 같은 철학자들은 맑스의 철학이 본질상 인간 삶의 질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자신들의 철학으로 포함시켰다. 이들은 맑스주의를 자본주의의 비인간적인 상태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사유체계로 규정한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이런 종류의 휴머니즘은 도리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간교한 계략이며, 이는 맑스주의와 관련없는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루크 페레터, 루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앨피, 2006), 55. 참조. [본문으로]
  3. 알튀세르는 ‘맑스를 위하여’ 다시 ‘자본론을 읽자’고 제안한다. 맑스를 그 어떤 이데올로기와 연관지어 해석하려는 모든 시도들을 접어두고 순수의 자리에서 다시 맑스를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알튀세르는 ‘맑스를 위하여’ 불어판 서문에서 그의 학문적 지향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우리는 뒤로 물러서서 반쯤은 방향 감각을 잃은 상태로 기초부터 다시 시작했어야 했다. 나는 나 자신으로서 그리고 우리의 과거로부터 오직 우리의 현재를 밝혀주고 우리의 미래를 비추어줄 그 무엇인가를 찾는 공산주의자로서 이 글을 쓰고있다.” [본문으로]
  4. 알튀세르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우리는 맑스의 청년기 저작들에 나타나는 이데올로기적 불꽃 속에서 우리들 자신의 불타는 정열을 찾기에 급급한 나머지 흥에 겨워 맑스의 성숙기 저술들의 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맑스를 위하여, 24) 여기서 맑스의 청년기 저작은 ‘유대인의 문제’, ‘경제 철학 수고’, ‘신성가족’ 등을 말하며, 정확히는 ‘독일이데올로기(1845-46)’ 이전의 맑스철학과 저술들을 의미한다. 알튀세르는 맑스의 청년기와 성숙기의 분기점을 ‘독일이데올로기’로 구분한다. [본문으로]
  5. 맑스를 위하여, 서문 [본문으로]
  6. 맑스를 위하여, 67. [본문으로]
  7. 이 개념은 가스통 바슐라르(1884-1962)에 의해 사용되었는데 그에 따르면, 과학의 역사는 일련의 지속적 단절을 통해서 진보하는데, 이 단절을 통해 기존 과학은 폐기되고 새로운 이론 체계가 그것을 대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콩트의 실증주의 역사관과 유사한듯 보이지만, 전혀 반대되는 개념이다. 콩트에게 역사는 진보의 과정으로서 연속성을 가지지만, 바슐라르에게는 역사는 불연속성이라는 단절에 의한 것으로 파악된다.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의 전환 Paradigm shift’과 같은 의미라고 보아도 무방할 듯 하다. [본문으로]
  8. ‘독일이데올로기(1845-46)’가 ‘인식론적 단절’의 전환점이 되었던 배경은 다음과 같다. 맑스와 엥겔스가 ‘독일이데올로기’를 집필하는 당시까지만 해도 맑스주의는 사회주의의 많은 집단과 경향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이는 맑스주의의 당면 과제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맑스주의를 자유주의 부르조아 이데올로기와 쁘디 부르주아 사회주의와 대비시키는 것임을 함축한다. 한편으로, 과학적 공산주의만이 노동자계급의 사회적 해방을 위한 현실적인 길이고, 자본주의의 모순에 의해 노동계급이 자발적으로 선택되어지는 영도이념으로 확신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본문으로]
  9. 맑스를 위하여, 116. [본문으로]
  10. 알튀세르는 ‘중층결정 Surdetermination’이라는 용어를 다른 영역에서 빌어온 것이라고만 말하지만, 사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적 용어에서 유래되었다고 본다. 알튀세르가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헤겔적 모순에 대한 비판적 의도를 담고있는데,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의 경험들과 절대지의 도래에서 경험되는 모순들은 단순하지 않고 오히려 복잡성을 보여준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본문으로]
  11. 알튀세르, 레닌과 철학, 13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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