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허구일지도 몰라, 여성혐오[각주:1]



신윤주*



# 나의 이야기


    지난 세월을 돌이켜 헤아리는 일은 시간의 유속을 왜곡하는 셈법이라지만 그래도 그렇지, 8년차 부부라니! 맘이 그렇지 않다 해도 신혼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시기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나버렸다. 낯선 열정이 친숙한 다정함으로 변모하는 동안 동갑내기인 우리 부부는 양가 부모님 네 분의 환갑 기념행사와 동생의 결혼, 그리고 몇 번의 이사를 함께 치렀다. 그리고 서른여덟이 되었다. 서른여덟짜리 여성의 몸은 어떤 것일까. 나는 아이를 가지는 일을 두고 숙고할 때마다 내 몸의 나이를 센다. 그렇게 ‘나 자신’인줄 알았던 몸이 사실은 ‘대상’이었음을 자각한다.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것으로 가정되어 있지만 사실은 통제의 범위를 훌쩍 넘어서는 대상으로서의 육체가 불모를 선언하기라도 할까봐 내심 불안해한다.

    나는 아직 초산을 하지 않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간의 피임은 성공적이었다. 처음부터 아이 없는 삶을 계획한 건 아니었지만 망설임은 유보 혹은 지연으로 귀결되곤 했다. 주위의 사람들은 결혼을 하고 한두 해가 지났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아이 소식을 묻기 시작했다. 양가 부모님 역시 순리처럼 아이를 기다렸다. 엄마는 애를 태우기까지 했다. 혹여 며느리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않아 쌔한 대접을 받지나 않을까 걱정을 하신 것이다. “시부모님이 뭐라고 안 하셔?” 어느 날 엄마는 무심한 척 질문을 던졌다. 나는 ‘물론 기다리기야 하시지만 재촉하진 않으신다’고 대답했다. 실제로 남편이 부모님을 나름 성공적으로 설득해내고 있기도 했다. “지금 저희 벌이로는 아이 못 키워요. 다른 여건도 어렵고요. 저희 아이는 저희가 키울 거예요.”

    결혼 후 첫 해를 채운 후에 나와 남편은 순차적으로 대학원에 입학했다. 결혼할 당시에 진학을 계획했던 건 아니었지만 출산의 시기 때문에 조금 서둘렀다. 아이가 태어나면 아무 것도 못한다는 말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고 우리에겐 더 해야만 하는 공부가 있었으니까. 마치 사명처럼 우리를 추동한 욕망을 따라 남편과 나는 출산도, 커리어를 쌓는 일도 다음으로 미뤘다.

    물론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일과 공부와 육아를 병행할 수도 있었겠지만 결국 한정된 자원의 배분에 관한 문제였다. 육아는 누군가가 무언가를 포기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아이의 부모가 포기하지 않으면 조부모가, 그마저도 어려우면 아이 자신이 포기할 지분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여성으로서의 당위와 기대가 만들어낸 내적 갈등이 한동안 이어졌다. 빨리 아이를 갖지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은 걸까. 자기 몸의 한 자리에 난 방을 작고 여린 생명에게 내어주고, 열 달 즈음 몸 안에서 자라게 하고, 때가 찼을 때 광활한 우주의 어느 공간에 내어놓는 일. 그리고 그가 스스로 자기 몸과 세계를 다룰 수 있을 때까지 여전히 지키고 돌보는 일. 자녀를 만난다는 것은 분명 대단히 특별한 경험이자 엄청난 변화일 것이다. 하지만 한편, 원하지 않는 아이만큼 여성을 괴롭게 하는 것이 또 있을까. 아이와 상황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을지 끝내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남편은 아이를 바라기도 했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아버지가 되는 일의 숭고를, 부모님에게 갚아야 할 생명의 빚이 있음을 생각했지만 경제적인 부분에 관한 현실적 우려를 떨칠 수도 없었다. 아이가 생긴다는 건 진로와 사랑 양쪽을 모두 건 모험을 감행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남편의 관심 분야는 모종의 성취와 돈벌이 사이의 연관성이 뚜렷하지 않았다. 또, 아이가 태어나면 어떤 방향으로든 부부의 관계 양상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들 하는데 우리는 꽤 만족스럽게 잘 지내고 있기도 했다. 남편에게도 아이의 등장으로 인해 자신이 포기해야 할 수도 있는 것들에 대한 입장을 정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몇 해 전 어느 모임에 참석했을 때였다. 정년이 보장된 직장의 간부급 남성 한 분이 걱정이라는 듯 점잖게 말했다. “요즘 젊은 여자들은 이기적이어서 아이를 낳지 않으려 하는 게 큰 문제에요.” 자녀를 위한 희생을 감당하지 않으려한다는 거였다. 일리가 있는 말씀이기는 했다. 하지만 출산 기피 현상을 그런 논리로 설명하는 것은 입체적인 사안을 너무 납작하게 만들어놓는 일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는 그때 ‘아이를 낳는 일도 자녀를 갖고자 하는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을까? 적어도 이기심과 이타심의 이분법 외에 다른 준거들이 존재할 수 있음을 반문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마도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식물처럼 앉아 있었을 것이다.


#자궁은 누구의 것인가


    모성은 당위가 아니지만 어머니가 되는 일에서 발견 되는 숭고가 있다. 한 생명을 온전히 책임지는 실천은 삶의 깊이를 더하고 외연을 넓히는 결과를 낳곤 한다. 그러나 아이를 원하는 이유가 이타성을 훈련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사명 때문이든, 부부의 모습을 닮은 아이를 보고 싶기 때문이든, 부모님이 기다리시기 때문이든, 엄마가 되는 경험이 주는 긍정적인 기억 때문이든, 첫째 아이를 위한 것이든 출발점은 희생이 아닌 ‘욕망’이다.

    새 생명의 삶은 소중하다. 아니,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 그렇다면 생명을 잉태한 이의 생명도 소중하다. 그리고 두 생명이 맺는 관계의 양상도 소중하다. 축복 속에 시작한 결혼이라도 순탄치만은 않듯, 축복 속에 시작한 삶이라도 쉽지 않은 것이 인생이다. 수많은 필요와 장애를 해결할 의지와 기지를 발휘해야 할 때 누군가에게 욕망되지 않는 삶은 쉽게 좌초된다. 욕망하지 못하는 양육자는 죄책감을 쉬 떨치지 못해 괴로워한다. 그러므로 여기에 사회적·도덕적 당위의 잣대를 가져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임신과 모성을 선택할 혹은 포기할 권리와 책임은 일차적인 책임의 주체인 성인 여성에게 있어야 한다.

   임신 중단은 여성이 자신의 삶에 일어난 낯선 사건을 다루는 하나의 방식으로서 존중받을 필요가 있다. 생명을 잉태하는 것은 그 자체로 완성이라기보다 새로운 관계의 시작에 불과하며, 그 관계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양육자의 돌봄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임신과 출산, 양육의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돌봄은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우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이제 갓 엄마-되기를 시작한 한 여성은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고 새로운 몸의 신호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자라가는 생명과 더불어 호흡한다. 하나의 흔적이 미미한 박동이 되고, 그 박동이 인간 신체의 형상으로 광활한 세계에 떨어지고, 최초의 폐호흡을 시작하면 비로소 진짜 여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한 덩어리의 숨 쉬는 육체가 사회 속에 자리를 만들고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하나의 인간 개체가 되기까지 복수의 양육자와 공동체와 사회와 국가는 돌봄을 제공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회적 지원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단수의 양육자가 아이의 생존을 책임질 길을 상상할 수 없다면 출산하지 않는 선택을 과연 이기적인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 임신 중단으로 인해 가장 큰 상처를 입는 사람은 여성 자신인 경우가 많다.

   지난 해 보건복지부에서는 여성의 자궁을 관리하기 위한 정책들을 내놓았다. 그중 하나로 ‘낙태죄’의 유령을 불러낸 조치로서 여성·사회 운동가들에게 비판을 받은 ‘의료관계 행정처분규칙 일부 개정령안’과, 성경험에 대한 궁극적 책임을 여성에게 귀속하는 접근인 자궁경부암 예방접종사업이 있다.

    우선 비도덕적 진료행위에 대한 처벌 강화의 내용을 담고 있는 ‘의료관계 행정처분규칙 일부 개정령안’이 문제가 된 것은 근본적으로 비도덕적 진료행위에 임신중절수술 조항을 포함시켰다는 데에 있다. 불법임신중절수술에 관한 처벌 조항이었지만 산부인과의사회는 11월 2일부터 모든 병원에서 임신 중절 수술을 거부하겠다는 선언을 발표했다. 한국 사회에서 임신중절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불법이기 때문이다. 합법인 경우는 모자보건법에서 허용하는 유전성·전염성 질환 등의 보건 의학적 사유나 성폭력에 의한 임신 등의 경우에 제한된다. 또 합법적 사유에 해당되더라도 임신 24주 이내에, 그리고 부득이한 사유가 있지 않는 한 ‘(남성)배우자의 동의’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임신 중단은 형법 제27장 ‘낙태의 죄’라는 조항에 따라 불법이며, ‘낙태’를 한 여성도, 시술한 의료인도 형사 처벌의 대상이다. 

    임신의 ‘과정’에 남성이 개입되고 임신 이후의 모든 기간에 사회적 장치들이 개입되는 만큼, 임신 중단의 결정을 여성 개인의 죄로 처리하는 것은 부당하다. 임신 중단에 대하여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은 여성에게 인구 재생산의 사회적 의무를 부과할 때뿐이다. 여성의 삶을 고려하지 않고 여성의 몸을 단순한 인구정책수단으로 바라보는 것은 여성혐오적 접근으로 해석될 수 있다. 또한 최초의 쾌락과 최초의 수정에 대한 기여도를 감안한다면 준비되지 않은 임신에 대한 도의적 책임과 과오를 모두 여성에게 묻는 것 역시 성평등지수가 낮은 사회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여성혐오적 분위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각종 여성·사회단체의 청원 덕에 임신중절수술에 대한 처벌을 12개월 자격 정지로 강화하려던 개정안의 조항은 현행과 동일한 수준인 1개월 자격 정지로 유지되었고, 복지부는 현행 의료법령에 명시된 ‘비도덕적 진료행위’에 대한 대체 용어를 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여성의 몸에 대한 책임을 여성 자신에게만 귀속하는 시각은 지난 해 6월에 발표된 사업인 ‘건강여성 첫걸음 클리닉’에서도 발견된다. 건강여성 첫걸음 클리닉은 2003~2004년에 태어난 12~13살 여학생이 자궁경부암 예방접종을 하도록 권장하는 사업이다. 보건복지부는 2015년도에 국회로부터 예산을 배정받아 매해 230억원을 이 사업에 배정하여 무료 접종을 시행할 예정이다. 그러나 주사제의 안정성에 대한 우려가 대두되어 접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11월에 질병관리본부에서는 ‘자궁경부암 예방접종 ‘동행’ 캠페인’이라는 것을 내놓기도 했다. 무료 접종 대상을 12, 13세의 여학생으로 제한한 이유로 제시된 것은 HPV 감염이 성 접촉을 통해 전파되므로 성 경험 전 예방을 통해 최적의 효과를 내도록 한다는 것, 9∼15세 연령에서 접종 시 그 이상 연령에서 접종한 경우보다 면역반응이 더 높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는 성별을 특정한 근거로 충분하지 않다.

    사실 이 백신은 정확히 말해 자궁경부암 예방 주사가 아닌 HPV 백신이다. 마치 인플루엔자(flu) 바이러스에 대한 예방주사를 플루 백신이라고 하는 대신 독감 예방 주사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사실상 HPV 예방 주사는 자궁경부암만을 예방하는 주사가 아니다. 이 주사는 항문암에 80%, 자궁경부암에 70%, 여성생식기 계열 암에 60~40%, 그리고 몇몇 구강암에 대한 예방 효과를 기대한다. 또한 성 접촉을 통해 감염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 예방주사를 반드시 ‘여성 청소년’만 맞아야할 이유는 없다. 이미 한국은 캐나다, 호주, 홍콩, 영국, 미국 등과 더불어 남성에게도 이 예방접종을 할 수 있는 승인을 받은 상태이기도 하다.

    하지만 예방접종 대상이 여성으로 제한되기 때문일까. HPV 예방주사 중 하나인 ‘서바릭스’의 홍보물은 학생들 간 대화의 내용으로 인해 여성혐오 논란을 촉발하기도 했다. 


     여학생 A: 우와- 오늘 자궁경부암 백신인가 때문에 병원 간다구? 

     여학생 B: 아 몰라~!! 지금 우리 나이가 공짜로 놔주는 때라서 엄마가 절호의 찬스래. 


     남학생 C: 너 그거 얌전히 맞는 게 좋을 거야. 신문에서 사춘기 때 맞는 게 좋다고 했어! 

     여학생 B: 이 자식, 네가 뭘 알아? 남자가. 

     남학생 C: 사... 상관있어! 여자가 나중에 내 아를 낳을 수도 있으니까!


# 여성혐오의 정의는 고정되어 있는가


    여성혐오Misogyny에 관한 논의가 어느 때보다 뜨거웠던 지난 한 해였다. 온라인 서점 내 페미니즘 분야의 도서 판매량이 전전해 같은 기간에 비해 급증했다는 내용이 기사화되었고, ‘여성혐오’는 2016년 누리미디어(dbpia) 에서 선정한 사회과학분야 최다 검색 키워드로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깊은 공감과 학습 의욕을 불러일으킨 여혐 논의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대단한 반감의 대상으로 자리하는 일에 그쳤다. 그런데 저마다에게 정의된 ‘여성혐오’는 같은 것일까?

    한국말에서는 Misogyny가 여성혐오라는 번역어로 굳어졌지만, 이 개념어 자체에 대한 정의나 이해는 학자들이나 운동가들 사이에서도 다소간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해석의 여지나 ’혐오‘라는 어휘에 대한 정서적 반응의 문제 때문인지 여성혐오 개념의 적용에 관한 논란은 피할 수 없는 일인 듯하다. 그러던 중 일본의 사회학자인 우에노 치즈코의 저서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의 일본어 제목이 주목을 받기도 했는데, ‘여성혐오’에 해당하는 단어가 원어인 ‘Misogyny'의 음가를 그대로 차용한 ‘미소지니(ミソジニー)’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용어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는 뜻일 것이다.

    2012년 10월, 호주의 국회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통해 여성혐오 개념에 관한 비교적 최근의 논의 중 하나를 확인할 수 있다. 맥쿼리 사전Macquarie Dictionary은 이 일로 여성혐오의 사전적 정의를 개정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호주의 대학에서, 또한 법률가들이 참조하는 사전으로서의 권위가 인정되는 맥쿼리의 개정은 결과적으로 여성혐오에 관한 가장 최신 버전의 정의로서 회자되기도 했다.

    사건에 달린 표제는 여성혐오 연설Misogyny Speech이다. 사건은 2012년도 당시 국회의장이었던 피터 슬리퍼Peter Slipper가 여러 스캔들에 휘말려 사임을 하는 과정에서 촉발된다. 슬리퍼는 2012년 4월 이후로 여러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보좌관에게 노골적인 성희롱 문자 메시지를 보낸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를 고소한 보좌관은 제임스 애쉬비James Ashby로 서른세 살의 동성애자였다. 당시 총리였던 줄리아 길라드Julia Gillard는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섣불리 판단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견지했는데, 야당의 영수인 토니 애보트Tony Abbott는 (슬리퍼와 같은 성차별주의자를 국회의장직에 남겨 두는 것은) 정부의 수치를 또 하루 더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애보트가 길라드 총리에게 자극적인 발설을 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길라드는 슬리퍼가 의장직에서 물러난 다음 날인 10월 10일, 작심이라도 한 듯 15분에 걸친 연설을 통해 애보트를 비판한다. 이 연설을 찍은 동영상을 업로드하며 ABC 뉴스는 다음의 제목을 붙인다. “길라드가 애보트에게 여성혐오자라는 딱지를 붙이다.”

    이 연설에서 길라드는 애보트의 발언을 아주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왜 애보트가 성차별주의sexism나 여성혐오에 관한 문제제기를 할 자격이 없는지, 그리고 어째서 애보트 자신이야 말로 성차별주의자이자 여성혐오자인지에 관해 논증한다. 호주 최초의 여성 총리인 길라드가 취임한 후 애보트는 인터뷰 도중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기도 했다. “만약에 남성이 여성보다 일반적으로 더 많은 권력을 쥔다는 게 사실이라면요, 그게 나쁜 가요?”

    연설이 이어지는 동안 때때로 의사당 내부의 웅성대는 소리가 거세지고, 의장이 저지하다 못해 고개를 가로젓기도 하지만 길라드는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취임 이후로 애보트로부터 들은 모욕적인 언사들, 애보트가 여성의 역할에 대해 구시대적 선입견을 가지고 한 발언들, 한때 가까운 동료였던 슬리퍼와 그의 스캔들에 접근하는 애보트의 이중 잣대, 그리고 의결 과정에 대한 절차적 존중을 성차별 담론으로 퇴색시킨 것에 대한 분노를 꿋꿋이 발화한다.

    이 연설로 길라드 총리는 여성혐오라는 용어 사용의 부적절성과 및 야당 총수에 대한 태도에 관하여 호주 내 언론인들로부터 비판을 받는다. 하지만 SNS상에서 그리고 페미니스트들로부터는 주목을 받는다. 나아가 연설 장면을 담은 동영상의 조회 수는 수백만에 이르게 된다. 이에 맥쿼리 사전은 표제어 ‘여성혐오’에 관한 정의에 새로운 흐름을 반영하여, 기존의 정의였던 “여성에 대한 미움/반감”이라는 의미에 “여성에 대한 확고한 편견들”이라는 의미를 더한다. 여성혐오에 관한 기존의 정의로 담아낼 수 없는 새로운 현상을 수용하고 사전적 정의를 확장한 것이다. 이 용어의 정의에 관한 한 맥쿼리 사전은 옥스퍼드 사전보다 비교 우위에서 논의되었다.

    같은 달 17일, 가디언 지에서는 “성차별주의와 여성혐오: 무엇이 다른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다뤘다. 여섯 명의 페미니스트는 각자의 견해를 내놓았는데 그 중 나오미 울프는 “반유대주의가 유대인을 싫어하는 것이듯 성차별주의란 여성을 싫어하는 것”으로서 줄리아 길라드의 용례는 매우 정확했다고 말한다. 울프는 길라드의 연설 내용 중 토니 애보트가 ‘낙태’를 두고 책임을 회피하는 쉬운 길로 묘사한 것, 선거 운동 중 야당 지지자들에게 마녀를 쫓아내자는 구호를 인용한 것이 있었던 것에서 근거를 찾는다. 한편 줄리 빈델은 성차별주의자가 늘 여성혐오자는 아니라고 말한다. 예컨대 여성은 천성적으로 모성이 있다거나, 기본적으로 운전을 못 한다거나 하는 주장을 한다면 그는 성차별주의자이지만, 이에 덧붙여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거나, 자신의 남편과 아이들에게 봉사하는 존재로 제한한다면 그는 여성혐오자라는 것이다. “여성혐오자들은 반드시 성차별주의자이지만, 성차별주의자들이 항상 여성혐오자인 것은 아니다.” 라일라 굽타는 “성차별주의란 여성혐오를 꽃피우는 우물인데, 물이 하도 탁해서 우리는 가끔 그게 얼마나 실하게 자라고 있는지 볼 수 없을 정도”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성차별주의는 남자들이 당신을 새치기해서 줄에 설 수 있도록 끼워주고 붐비는 버스에 먼저 탈 수 있도록 도와주고는 싫든 좋든, 아 가엾지만, 그들의 손이 “우연히” 당신의 가슴을 감싸며 여성혐오의 광기로 당신을 짓밟는 일이라는 것이다.


#여성혐오라는 허구


    여성혐오의 정의는 언어 표상의 운명을 따라 통시성과 공시성을 지닌다. 개념이 속한 시대와 지역의 특성이 의미를 구성하는 사건들에 차이를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옥스퍼드 사전에서 정의하는 여성혐오의 의미(“여성에 대한 증오, 미움, 편견”) 및 용례들이 19세기의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렇다면 2017년 현재 한국 사회에서 여성혐오는 어떻게 정의되는가?

    2012년 호주에서의 여성혐오 논쟁을 촉발한 사건이 길라드 총리의 연설이었다면 한국의 경우는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이다.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여성혐오를 둘러싼 페미니즘 이슈는 급격히 일상의 언어 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여성혐오 논의에 의해 계몽된 주체는 ‘여혐’하는 남성보다 ‘여혐’하던 여성이었다. 상품으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아 물질성을 얻은 도서가 다수 출간되었을 뿐 아니라, SNS상의 페이지 혹은 그룹과 페미위키 등을 통한 아카이빙 작업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호주의 사례와는 달리 권위 있는 사전에서 새로운 정의를 내놓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의미가 고정된 기표의 부재는 다성성polyphony을 띠는 운동력의 원천인지도 모른다.

    각자가 이해하는 여성혐오가 동일한 의미를 담아내지 않는 것은 불편한 일일 수 있으나 어쩌면 우리는 조금 불편해져야 하는지도 모른다. 명사의 의미에 대한 하나의 약속 위에서 소통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특정한 맥락 속에서 그 어휘가 소통될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여성혐오적 상황에 대한 각자의 고백은 자신의 목소리를 찾고 만드는 첫 번째 과정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나는 이러한 다성적 실천이야말로 무엇보다 여성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정신분석학자 자끄 라깡이 보편적 명사로서의 여성은 ‘없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오히려 서로 다른 개별자로서의 여성에 대한 긍정이었다. 일반화된 여성 이미지는 어쩌면 불가해한 여성 혹은 부재하는 집합 명사를 견디는 대안적 허구다. 그렇다면 여성혐오도 허구일지 모른다. 고유한 삶의 역사를 지닌 개별적 인간들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일반화한 여성에 관한 담론으로서의 허구 말이다.

    나와 남편은 전형적인 역할의 틀에 맞추기보다 둘 사이에서 실현되기에 적합한 관계의 양상이 무엇인지를 찾고자 했다. 좀 더 까다로운 필요를 갖고 있거나 이미 유능한 일을 중심으로 역할을 분담하다보니 일반적인 성역할이 분배되는 방식과는 조금 차이가 생겼다. 남편은 언제부턴가 요리 파트를 맡고 있다. 남편이 요리를 잘하게 된 후로는 사람들에게 요리를 해주면서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어가는 요령을 익힌 것 같다. 장을 보는 단계에서부터 식재료는 남편이 고른다. 나는 공산품 담당이다. 상품 패키지에 적혀 있는 원재료를 읽거나 가격을 비교한다. 대신에 나는 처음부터 남자가 돈을 벌어오는 방식으로 가정에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소득이 많진 않았지만 결혼 시기 중 대부분의 기간에 가계 소득 기여도는 내 쪽이 더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남편의 건강 상태나 감정을 살펴서 챙기거나,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고민이 생겼을 때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듣는 나의 태도는 좀더 여성적인 역할일 것이다. 관습적인 성역할을 기준으로 볼 때 현실적인 수행의 부분은 일관되지 않았다. 그런 부분들에 대해 죄책감에 시달린 것은 나였다. 여성적 수행으로 고정된 일들에 대한 죄책이 가부장제의 질서 하에서 형성된 여성혐오적 기준과 무관하지 않음을 깨달은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이제는 나의 역할과 신체를 도구화하는 일을 좀더 비판적으로 인식한다.

    최근에 개정하여 출간된 어느 책의 제목처럼 페미니즘은 사실상 ‘모두를 위한’ 것이다. 페미니즘의 시선을 통해 질문하는 일보다 페미니즘의 시선에 대하여 질문하는 일이 더 익숙한 것은 무엇이 이데올로기인지를 반증한다. 이상적으로 제시된 여성 일반의 특성도, 삼가야할 것으로 제시된 특성도 모두 하나의 통념이다. 통념은 안전하지만 우리를 우물 안의 세상에 가두는 것이기도 하다. 반면 변화는 불편하게 겪어낼 수밖에 없지만 어떤 변화들은 우리가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계기로 기능한다.

    우리는 어떻게 환경으로서의 여성혐오를 넘어설 수 있을까. 우선은 여성 각자가 성차를 둘러싼 고정관념에 복무하려 애쓰는 대신 자기 자신을 발화하고 욕망을 찾아가는 일을 통해 균열의 지점들을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성혐오적 틀의 편리함 대신, 남성들과 여성들이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개별적 여성에 대하여 질문하며 그들 각자와 고유한 관계성을 구성해가기 위해 얼마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통념은 강하다. 하지만 불멸하는 것 또한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 필자소개  

메모광. 학부에서 국제어문학을, 석사과정으로 비교문학을 공부했으며, 향후 프로이트 라깡주의 정신분석학을 중심으로 연구를 지속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1. <가톨릭평론> 2017년 5·6월호에 송고한 원글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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