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삼 묻는다, 


5월 9일에 그리스도인은 어떤 선택을 할지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그리스도인이 선거에 임하는 자세?


    5월 9일이 다가오고 있다. 헌법 최초 탄핵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촛불을 들었건 들지 않았건 모두가 ‘내가 바라는 다음 세상’에 대해 한 마디씩 거들고 있는 이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선거를 해야 하는가? 나의 소중한 목소리를 내는 소중한 선거란 어떤 것일까? 분명 예년의 투표보다 그 무게가 남다름을 인지하면서도 짧은 선거 기간만큼이나 응축된 생각들을 이어나가고 있는 하루하루다. 필자는 한 명의 신앙인으로서, 삶의 신념과 정체성이 곧 ‘그리스도이신 예수’라 고백하는 1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선거를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 보기로 했다. 필자보다 더 오래되고 노련한 정치 의식-행동과 삶의 경륜에 의해 다져진 선택 방법에 대해 존중을 표하고, 아직 한참 모자라고 설익은 한 마디를 내놓는 것에 대해 미리 양해를 구하면서 말이다.

   먼저는 이 질문의 가능성에 대해 먼저 물어야 할 것 같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이 갖는 특정한 선거의 방법 또는 선거를 대하는 태도와 같은 것들이 있는 것일까? 그리스도인이 과연 누구이기에 선거를 하는 태도가 따로 있다는 것일까? 우리라는 정체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이다. 그럼 예수를 우리의 삶과 이 세계의 주인, 통치자로 고백하는 우리는 예수처럼 선거를 하면 된다는 뜻이 될 수 있다. 예수를 주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선거를 어떻게 해야하는가? 가만, 생각해보자. 예수 당시에는 선거가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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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예수의 선택?


   그렇다. 예수 당시에는 선거가 없었다. 대의 민주주의라는 제도 자체가 없었다. 통치에 관한 한 황제 1인이 다스리는 군주제도였고 지금 우리가 상상하기 조차 어려운 다른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제도가 있었다. 너무 난감하다. 예수의 투표 성향을 분석해서 우리도 그와 같이 투표를 하면 아무 문제가 없겠는데, 예수와 우리 사이에 있는 2천년이라는 시간, 그리고 팔레스타인 지역과 한반도라는 공간 이 두 가지의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다. 이것을 어떻게 조금이라도 좁힐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하기라도 한 걸까? 게다가 한 가지 렌즈가 추가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교는, 팔레스티나의 역사적 체험을 전제로 하지만, 유럽의 역사 과정 속에서 탄생한 종교인 점을 감안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교의 신앙 제도와 해석 체계는 유럽의 경험에 기반을 둔 예수 신앙의 산물이다. 즉,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이 유럽의 문화로 재해석되고, 그것이 다시 우리의 삶의 기반으로 재구성되어온 역사를 인지하고 그것을 다시 우리의 이야기로 재구성하는 이 다중적인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소위 ‘역사적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펼치는 것은 접어두도록 하자. 이미 수많은 텍스트론들이 말하고 있다시피 예수에 대한 재구성은 ‘읽는 이’의 바람과 삶의 경험들에 의해 심하게 교란된다는 것이고, 심지어 실존 인물인 것 자체가 물음표로 던진 이가 적지 않은 상황에서 ‘팔레스티나에 살고 죽었던 하나의 예수’의 구성은 불가능함이 천명되었기 때문에 ‘예수가 5월 9일에 투표한다면 0번에 찍을 것이다.’라고 점찍어 말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다. 오직 말하고 싶은 것은 곧 그리스도인의 선거와 투표, 예수님이 지금 이 시점에 오셔서 투표하신다면? 이런 생각을 하려면 거쳐야 할 관문이 많다는 것이다. 곁가지로 생각해 보자. 우리 논의의 전제가 되는 것, 예수가 우리의 메시아라는 것의 함의, 곧 예수가 우리를 죄에서 건져 주시고 구원해 주신 분, 따라서 우리의 주인이라는 이 틀거리. 이 언어가 민주주의 사회 즉 백성(民) 또는 시민이 주인이라 하는 2017년 대한민국이라는 사회, 그리고 신과 결별하고 ‘생각하는 인간(데카르트)’이 이 세계의 주인인 것, 국가나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이 자신의 운명에 주체라고 이미 천명된 근대 이후의 이 세계 안에서 당신은 정말 뼛속 깊이 이해가 되는가 말이다.

    어찌보면 우리는 역사적 예수로의 접근이 불가능하였듯이 예수와 선거를 연결짓는 일은 너무 깊은 작업이라 포기해야만 할 것도 같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가 불가능하기에 더욱 흥미진진해 보이는 건 나 뿐인가. 비단 정치에 관한 이야기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이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아니었던가 말이다.


예수의 정치, 예수의 정치성


    자, 이제 길었던 서문은 제쳐 두고 예수 당시의 정치적 상황, 그리고 예수가 보여주었던 삶의 행적이 어떤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를 살펴야겠다.

    예수의 모든 정치적 상황을 언급하는 것은 이 글에서 모두 다룰 수 없지만, 그의 행위가 최종적으로 다다른 지점 바로 십자가라는 사건, 그리고 부활의 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그의 삶이 보여주는 정치적 함의가 어떤 것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작년(2016)에 진행된 본 연구소 신학아카데미 탈/향 강좌에서 김진호(본 연구소 연구실장)의 ‘예루살렘에서의 7일’이야기 중 일부를 발췌해 보도록 하자.


예수는 십자가형에 처해진다. 이것은 고대의 전형적인 ‘잔혹극’의 한 실례다. 잔혹극이란 ‘희생양’의 배제를 극도의 공포감을 자아내는 형식으로 공개적으로 수행함으로써, 그 사회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권력의 지엄함을 승인하게 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체제는 피압박 대중의 욕망분출 방식을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유도한다. 

하나는 욕망 분출의 기회를 봉쇄하는 극단의 배제집단을 생산하는 것이다. 이런 극단의 배제집단을 천민 계층(마지널 휴먼)이라 하는데, 대중은 이들과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무의식적인 카타르시스를 일상 속에서 경험한다. 이때 극단의 배제집단은 자신의 욕망분출의 계기를 잡지 못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들을 ‘광기’의 사람들, 즉 악령 들린 사람들로 만드는, 그리하여 그들에 대한 배제의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사회적 지배의 기재로 활용된다. 다른 한 유형은 잔혹극을 통한 욕망의 카타르시스다. 대중은 출구를 찾아 정처 모르게 내면을 휘젓고 다니는 무의식적 욕망을 분출할 안전한 대상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바로 잔혹극의 희생양이다. 대중은 억압된 욕망에 분풀이라도 하듯 분노를 한껏 그에게 폭발시킨다. 그리하여 권력은 그 대상을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잔혹하게 처벌한다. 권력이 마치 정의의 심판자이기라도 한 듯이. 요컨대 잔혹극은 대중의 축제이기도 했다. 그 축제를 축제로서 맞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 자신이 역모자의 적극적 추종자임을 자인하는 셈이 된다. 그리하여 십자가형은 처형자를 위해 슬퍼하는 기색을 보인 사람을 재판 없이 함께 처형하는 관례를 동반했던 것이다. 

메시아가 일으킨 변혁을 향한 불, 아니 메시아라는 변혁의 불. 그것을 지르는데 공범이었던 자들이 어느 순간 날카로운 경고음을 발하는 화재경보기에 놀라 무대에서 흩어져버린다. 이제 그들 중 누구도 성전의 억압의 장치들을 불 질러 태워버려야 한다는 ‘불의 호소’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있다. 화재경보기가 울린 뒤, 불을 냉동시켜버릴 듯 거세게 내뿜을 소방차의 잔인한 물줄기가 온 세상을 뒤덮을지도 모른다는 예언이 세상을 향해 찢어질 듯 경고음을 발한 뒤, 그 곳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 오직 ‘불의 호소’만이 허공 속에서 춤판을 벌이며 남은 공연을 실연할 뿐. 

사람들이 욕설을 퍼붓고, 추종자들은 모두 도망치거나 멀찍이서 침묵 속에 관망하는 가운데, 처절하게 찢겨지는 자신을 확인하면서 예수는 죽어간다. 여기서 ‘신은 철저히 침묵하고 있다’. 잔혹극의 가학성, 권력과 대중의 공모 속에 벌어지는 역사의 사디즘(sadism) 속에 신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신은 죽었다. 아니 가학성을 가학성으로 보복하는 신은 죽었다. 

예수는 하느님의 변혁 행위를 꿈꿨으나 하느님은 변혁행위를 통해 예수와 만나지 않았다. 예수사건은 바로 여기서 절정에 이른다. 예수는 모든 이의 침묵 속에 도살당한다. 바로 그 현장, 신마저 침묵하고 있다는 바로 그 현장에서 변혁 행위의 주체인 신도 도살당한다.[각주:1]


    메시아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로 물러나 사람들의 마음 따위를 치유하고 위로하며 피안의 세계를 전파하는 사람이 아니다. 다시 말해 메시아가 도래하여 통치를 벌이는 하나님의 나라 는 죽음 이후인 내세의 삶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개인적 내면의 안정, 안심을 얻는 ’힐링캠프’는 더더욱 아니다. 메시아란 철저히 현실 내의 정치적인 존재였다. 예수는 지극히 현실적인 존재이며, 현실적이라 함은 곧 생활 즉 삶을 이야기하는 예수를 통해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진 상태를 일컫는다. 인간들은 예수를 봄으로써 현실(the Real)을 읽고, 예수를 읽음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다.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하나님과 세상은 적대적인 관계였지만, 하나님과 인간 및 세상이 화해한 ‘하나의 장소(One Place)’가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까지 말했다. 즉, 우리의 현실은 어디인가? 그리스도라는 공간이다. 그리스도라는 공간 안에 채워진 그리스도의 삶이다.

    메시아이신 예수는 현실 속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던지며 살았다/죽었다. 예수는 불을 지르는 사람인 동시에 아버지인 신을 도살하는 주체였다. 매일이 반복되는 이 지루한 일상의 세계가 변할 수 있음을 알렸고, 이전부터 약속된 바로 그 ‘야훼의 날’이 오늘 여기에 다가왔다고 선언하며 모든 죄와 아픔을 치료하는 실천적 존재였으며 ‘아버지’로 표상되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모든 상(像)을 파탄내는 무뢰배였다. 방금 살펴본 ‘예루살렘에서 7일’간의 행적은 모든 메시아로서의 삶을 축약하고 종합하고 결론짓는 일이었다. 즉, 십자가를 포함한 예수의 삶 전체는 아픈 사람들의 병을 ‘지금 그 자리에서’ 고치고 사회 속에서 ‘죄’라고 여겨졌던 고정된 편견과 맞서서 싸워 논쟁을 일으키고 불화를 일으키는 삶이었다. 예수는 누가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49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러 왔다.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바랄 것이 무엇이 더 있겠느냐? 50 그러나 나는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그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괴로움을 당할는지 모른다. 51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렇지 않다. 도리어,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 한 집안에서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서, 셋이 둘에게 맞서고, 둘이 셋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맞서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맞서고, 어머니가 딸에게 맞서고, 딸이 어머니에게 맞서고,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맞서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서, 서로 갈라질 것이다.” (누가복음 12:49~53)


    제도정치를 주관하여 이 지루하고 억압된 일상을 마비시킴으로 유지시키고 유지시킴으로 마비시키는 제도의 권력들과 싸웠다. 제도의 권력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대리 통치’라고 주장했지만, 예수는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하였고,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생각이 마비된 사람들이라면 질문으로 일깨우고, 사회적 시선으로 일상이 불가능한 이들에게 새로운 숨을 불어넣었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예수는 탄생부터 살아 있는 동안 내내, 그리고 죽는 순간과 다시 부활하는 그 순간까지 모두 그 한 걸음 걸음이 사람들에게 불을 던지고 일깨우는 정치적 존재였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연극의 희생양으로 죽임 당했지만, 메시아 예수를 죽인 그 손들은 예수의 부활과 함께 다시 살아나 예수의 손과 발이 되어 이 세상의 곳곳을 치료하며 불의한 세상에 균열을 내고 불을 던지는 사람들로 변화해 갔다.

    결론적으로, 예수의 정치, 예수의 정치성이란 무엇인가? 예수는 특정한 신의 특정한 뜻, 특정 계파의 이익을 대변하러 온 사자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바랐고, 그 하나님의 통치란 다름 아닌 사람이 어느 하나 배제되거나 차별받지 않는 세상이었다. 그 사람이 어떤 사회적 조건과 환경을 가지고 태어났든지 간에 하나님에게 소중하지 않은 생명은 없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고, 공중에 나는 새와 들에 피는 꽃까지 모두 일일이 살리고 돌보시는 그 원리에 의해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한다고 믿었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 그가 민의(民意)의 화육(化肉), 더 나아가서는 인간과 피조물을 모두 포함하는 모든 ‘있음/없음들의 몸’ 그 자체임을 의미한다. 이는 비단 정치인들이 떠받드는 - 동시에 떠받들지 않는 - 민심의 지엄함 뿐만 아니라 동시에 민심의 부끄러운 민낯 또한 만천하에 드러내신 분이기도 하다. 훈련되지 않고 오로지 짐승 같은 대중의 에너지가 어떻게 권력자들에게 악용될 수 있는지 또한 자신의 몸으로 똑똑히 대면시켜 주신 분이기도 하다. 어쩌면, 불을 던져 놓고 그 불이 자기에게로 향하게 되었을 때 만감이 교차했을 것 같다. 자신에게 들이대는 불길이 두렵기도 했겠지만, 후일에 자신의 죽음 이후에 벌어질 아주 작은 희망의 불씨들도 상상하면서 말이다.


민주주의와 선거와 예수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예수와 민주주의는 사실 애당초에 불가능한 만남을 전제하고 있다. 우리는 그 불가능한 시도를 하고 있음을 끊임없이 기억하면서, 우리가 어떤 투표를 해야하는지 어렴풋하게 실마리를 잡아보도록 하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 헌법 제 1조 1항, 2항>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이다’는 헌법 제 1조 1항의 말은 언설(言說) 그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영토 대한민국은 백성이 주인인 국가이다. 민주 공화국이란 뜻은 사전 뜻풀이를 가져 오자면,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고 국민이 선출한 국가 원수 및 대표에 의해서 국정이 운영되는 나라”를 의미한다. 오해해서는 안 된다. 정확히 말하여 ‘민’이 주인이라는 것은 개별 개체로서 ‘내’가 주인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집합체로서의 민의’이다. 즉, 공동의 의사 결정이 반영되는 정치를 말한다.

    그럼 위에서 말한 예수가 꿈꾸었던 세상과 정치, 그리고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민주주의 체제는 예수가 꿈꾸었던 정치, 즉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통치’와 일치하는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현실적인 정치체제와 모습을 갖추게 될지는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자기가 어떻게 통치하는지 그 체제의 정답을 어디에도 계시한 적이 없다. 왕정 시대로 접어들면서 성서 기자는 하나님이 못마땅해 하셨다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그렇다고 사사 시대가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시대였을까? 아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 하나님과 소위 ‘독대’하여 하나님과의 채널이 단일했던 모세-여호수아로 이어지는 광야와 초기 가나안 시절의 ‘임시정부’형 체제가 하나님의 통치에 더 가까웠을까? 아브라함-이삭-야곱의 족장 시대? 에덴동산…? 대체 우리는 그럼 얼마의 시간을 되돌아가야 한다는 말일까? 이런 이야기는 무의미하다. 아니면 소위 보통의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듯 교회가 많아져서 ‘복음화율’이 높아진다면, 즉 교회에 등록한 기독교 신자들이 늘어나 그 수치가 100에 가까워지면 그 때서야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이야기는 매우 위험하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란 것을 가장 ‘직접’ 반영하는 정치체제야말로 환상에 가까우며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십계명의 엄명을 어기는 일이다.

    그렇기에 민주주의 체제는 현재 잠정적으로 가장 우리에게 적합한 체제라는 것을 인정함과 동시에 민주주의가 최종적인 하나님의 통치와 일치하는 체제가 아니라는, 이것보다 더 나은 정치체제를 고민할 수 있다는 상상력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 미국의 라인홀드 니버는 ‘인간에겐 정의를 추구하는 능력이 있기에 민주주의가 가능하며, 다른 한편 불의를 행하려는 경향성도 지니고 있기에 민주주의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모든 국민의 자유와 평등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사회정의 실현에 있다.[각주:2] 오늘날 구약 시대의 신정 정치 즉 하나님께서 특정 매개자를 통해 통치하시는 정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은 여러 세속 정치 형태 중에서 민주주의가 희년 정신 즉 모든 인간의 평등과 자유를 가장 잘 보장해 주는 정치 체제라고 판단하는 것이 온당하다. 그것은 곧 예수가 말한 하나님 나라 도래의 선포, 곧 누가복음 4장 16, 17절의 말씀의 내용과 가장 가까운 정신을 구현한 체제일 것이라 고백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170509 대선의 의미


    여기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문제가 있다. 비단 정치체제의 조형(造形)만이 예수가 말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는 방법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번 선거를 치르게 된 근본적인 이유 즉, 금번 국정농단 사태, 소위 박근혜-최순실의 비(반)민주적 통치의 상태가 드러낸 대한민국 사회의 민낯은 우리 사회의 곳곳이 어디 하나 빠짐없이 병들어 썩어 문드러진 사회였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각주:3] 특히 박근혜-최순실은 삼성의 이재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이 드러났다.[각주:4]



    즉, 민주주의 체제를 세우기 위해서, 특히 이번 선거와 이어지는 정치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우리가 세우고자 하는 사회는 무엇인가? 그것을 고민해야 한다. 정치(제도)의 개혁, 경제의 민주화, 동북아시대를 맞이하면서 통일과 외교에서의 주도권 장악, 점증하는 생태위기와 에너지 위기에 대한 시급하고도 안전한 대책 등이 이번 선거를 시작으로 앞으로 계속 우리는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번 선거는 결코 “박근혜-최순실-이재용 체제”의 심판과 그 사태의 종결로서 인지 되어선 안 된다. 이제 대한민국, 아니 우리가 사는 사회가 어떤 모습으로 디자인되어야 그 기초를 쌓는 선거가 되어야 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예레미야 31:31)”


그렇다면 나의 목소리를 내는 투표란?


    예수, 나, 민주주의, 그리고 2017 대통령선거라는 다양한 주제를 통해 이번 대선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 보았다. 일단은 선거를 해야 한다. 아무나 되겠지 하면 정말 ‘아무나’ 된다. 정치에 무관심하면 최악의 지도자로부터 통치를 받을 것이다. 그 때부터 당신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 옛날 마키아벨리의 이야기를 하며 마무리하자. 마키아벨리를 통치기밀의 폭로를 통한 반-폭정주의 및 공화주의의 실천자로 인식했던 바로크시대 보깔리니는 법정에 선 마키아벨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 검사는 마키아벨리가 한밤중 양떼 속에 숨어들어가 ‘개의 이빨로 만든 의치’를 끼우려다 발각되었으며, 그런 행위는 양의 젖을 짜고 털을 깎는 ‘목자들’을 위험에 빠지게 만들며, 이후 양떼는 목자들의 ‘휘파람과 지팡이’를 따르지 않게 될 것이고, ‘밧줄로 둘러친 울타리’로는 더 이상 양떼를 관리할 수 없게 될 것인바, 바로 그때 ‘양털과 치즈의 가격이 폭등’할 것이라고 말한다. 개의 이빨로 만들어진 의치는 양을 개처럼 물어뜯을 수 있게 하는 힘, 목자들의 호명과 지시를 거절하는 힘, 목자들이 매번 재설정하는 목양의 울타리와 영양배분의 경계를, 목자들이 정립한 법의 경계를 무화하는 힘이다. 개의 그 이빨, 그 힘은 검사에 의해 ‘극히 위해한 성격의 안경’으로 기소되는데, 그 안경은 그들 목자들의 법 연관이 양털과 치즈 가격의 관리를 통한 축적의 보호상태임을 문제시하는 시력을, 그런 축적의 보호가 ‘신성의 가장’과 ‘국가이성이라는 폭정의 비밀’에 의해 관철되고 있음을 폭로하는 시력/시점을 제공하는 것이었다.[각주:5]



    투표는 가장 작지만 확실하게 당신의 목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다. 가장 쉽고 가장 빠르고 가장 적확하다. 15명의 정치인이 대선에 출마했다. 누구를 찍든 찍는 게 당신의 목소리를 내는 시작이다. 다시 말하건대, 이번 선거는’시작’에 불과하다. 근본부터 시작하는 선거다. 세월호 참사가 던진 질문, ‘과연 우리가 바라는 ‘좋은 삶, 좋은 사회’란 무엇인가?’에 답하는 것이다. 내가 사는 이 곳이, 내가 운명처럼 태어나게 된 이 곳이,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뜻’이 있다고 믿는 이 곳에서 당신이 그리스도인으로 ‘현실’에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았다면 이제는 응답해야 한다. 모든 것을 이 단번의 투표에 이룰 수 없다. 투표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면 당신은 당신이 찍은 사람을 움직여야 한다. 그 사람과 그 주변의 세계가 당신이 점찍어둔 사람을 찍을 수 있도록 움직여야 한다. 그 후 어떤 후보가 당선이 된다면 — 비록 당신이 찍지 않은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 하더라도 — 그 때부터 그를 사정없이 움직여야 한다. 정당 가입과 활동으로, 시위와 집회에 참가함으로, 전화로, SNS로 말해야 한다. 그게 민주주의의 시작이자 ‘당신’의 시작이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2016 신학 탈/향 강좌 <예수, 트랜스-크리스천 히스토리를 위하여>(강사 : 김진호)의 1강 ‘역사의 출발, 십자가에 달린 그 이’ 중 한 단락을 발췌한 것입니다. [본문으로]
  2. 2017 정의평화기독교대선행동 지음,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나라’ (2017, 동연) 11쪽 인용 [본문으로]
  3. 이번 사태의 중심에는 박근혜와 최순실이라는 두 인물이 있지만, 사실 그들과 그들이 가지고 논 권력을 둘러싸고 있는 층위는 매우 복잡하고 세밀하다. 일차적으로 그들을 비호하고 키운 정치 기관들 - 청와대 비서실, 국정원, 검찰, 헌법재판소 등 - 과 그들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 그리고 군대가 있고, 또한 그들의 충성스러운 ‘입(Speaker)’ 역할을 한 그들의 입장을 매일 매순간 퍼나르고 재생산해낸 언론권력(조중동 등의 일간지, 공영방송과 종편방송 및 포털사이트)이 있을 것이다. 비단 그것 뿐인가. 그들의 권위를 뒷받침하면서 자신의 안위를 보장받는 소위 각계각층의 지식팔이 ‘전문가 집단’과 대중의 영적인 상태를 주관하는 종교권력들까지. 어느 하나 빠짐없이 자신의 역할들을 충실히 집행함으로써 직접 책임지지는 않지만 모두가 조금씩의 힘을 보태어 만든 사태가 결국 여기-지금 오늘의 생명-삶을 갉아 먹는 체제로 현신(現身)한 것이다. 사회학자 윤인로는 박근혜 정부와 그 주변을 둘러싼 권력들을 정치철학자 칼 슈미트가 이야기한 ‘간접권력’이란 개념을 인용하며 설명한다. : 보호능력 없는 채로 복종을 요구하고, 정치의 위험을 몸소 받지 않고서 명령권을 가지며, 책임을 다른 기관에 강요하면서 그 기관을 통하여 권력을 행사하려고 하는 ‘간접권력’ (칼 슈미트, 홉스 국가론에서의 리바이어던, 교육과학사). 여기의 간접권력이란 무엇인가. 체계적인 무책임의 통치상태, 곧 기술적(객관적, 기계적, 외적)으로 된 통치체의 중성화(다원화, 분권화, 합리화) 상태, 공모한 사적 당파성들의 ‘영원한 수다’ 상태. (윤인로, ‘신정-정치’(갈무리, 2017), 90쪽) [본문으로]
  4. 가장 왼쪽은 실제 타임지(아시아판, 2012. 12. 17) 표지, 그리고 이후 2장의 사진은 패러디물이다. 각각 왼쪽부터 ‘독재자의 딸(박근혜)’, ‘독재자의 딸의 무당(최순실)’, ‘독재자의 딸의 무당의 후원자(이재용)’로 표현할 수 있다. [본문으로]
  5. 윤인로, ‘신정-정치’(갈무리, 2017), 139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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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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