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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마당] 안식년과 네팔 이야기 2 (조헌정)

목회마당

by 제3시대 2009. 6. 23.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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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년과 네팔 이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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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정
(향린교회 담임목사)


히말라야 트레킹
(히말라야라는 말은 ‘높은 산들’이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네팔의 트레킹 코스는 크게 4군데이다. 사실 정해진 코스는 없다. 어디든지 가면 그게 코스이다. 한국인이 쓴 네팔 트레킹 책에는 12곳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텐트와 산악장비 없이 롯지(lodge)에서 숙식을 하면서 이동할 경우 크게 4코스가 있다. 에베레스트(15일), 안나푸르나(12일), 안나푸르나 일주(15일) 그리고 랑탕(12일)이다. 물론 이곳도 짧게는 3일에서 한 달 이상 그 코스를 다양하게 정할 수 있다. 이름으로 가장 잘 알려진 곳은 에베레스트이지만, 트레킹으로 가장 잘 알려진 코스는 안나푸르나이다. 나는 에베레스트, 안나푸르나 그리고 랑탕 세 곳을 다 다녔다. 그리고 이 지역도 짧게 다닌 것이 아니라, 긴 코스로 다녔다. 일일이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안나푸르나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이유는 가장 높은 곳이 4천미터 고지이지만, 설산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고, 거의 정상에 이르도록 풀과 나무가 있어 고산병에 걸리는 율이 가장 적기 때문이다. 나무가 우거진 열대림을 통과할뿐더러 짧은 빙하도 두 곳이나 통과해야 하고, 눈도 있을뿐더러 온천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비해 에베레스트는 3천 미터부터 나무가 거의 없고, 4천 미터가 되면 완전 삭막한 광야지대로 변하고 만다. 최고 5천 5백 미터까지 올라가기에 고산병에 시달리는 비율이 상당히 높다. 나도 3천미터부터는 잠을 자기가 힘들고 걷는데 숨을 몰아쉬어야 하고 설사에 식욕부진으로 전반 일주일은 내내 고생을 했다. 5천 미터의 가장 높은 숙소에서는 2,3분마다 숨이 턱턱 막혀 잠을 도저히 잘 수가 없어 오줌이 자주 나오게 하는 약을 한 알 먹고 견뎌야 했다. 그리고 5천미터 이상이 되는 세 곳의 정상을 올라가야 했는데,(물론 두 곳은 원치 않으면 안 올라 갈수 있다. 그러나 한 곳은 코스를 바꾸어 돌아가지 않는 한 피할 수가 없다.) 이때는 한발자국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몰아쉬는 숨을 세 번씩 하기도 하였다. 내가 만난 트레커들 중 고산병으로 고생을 하거나 5천미터 롯지에서 최종 목적지 칼라파타(5천 5백미터)를 포기한 사람이 열에 7,8명은 되었다. 체력이 건장한 20대의 서양 젊은이들도 포기를 한다. 그리고 바람이 너무 세고 새벽에 올라서면 영하 20도에 가깝다.

랑탕 코스는 에베레스트와 안나푸르나의 중간 만큼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나무와 물도 많고 5천미터까지 접근하기에 눈도 많았다. 내가 갈 때는 하루 밤에 눈이 너무 많이 와 무릎 때로는 허벅지까지 눈에 빠지면서 걸어야 했다. (사실 위험하기도 하여 대부분이 포기하지만, 난 이미 경험을 하였고, 포터가 이곳 출신으로 길을 잘 알기에 강행을 했다.) 그리고 가장 힘든 에베레스트 코스를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맨 처음에 하였기에 다른 두 곳은 약간은 쉽게 할 수 있었다.

이 세 곳을 음악에 비유한다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겠다. 에베레스트 지역은 베토벤의 교향곡 5번(운명)과 9번(합창)을 합쳐 놓은 것만큼 감동적이었다. 한 산둥어리를 돌아설 때마다 펼쳐지는 7,8천미터의 설산과 암반과 광야는 그야말로 한 폭의 웅장한 그림이었다. 안나푸르나는 마치 교향곡 6번(전원)을 듣는 것과 같은 편안함으로 시작되었다. 물론 정상에 가까운 곳에 이르러 빙하를 건너거나 눈길을 걸을 때의 힘듦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힘들었다. 때로는 두 시간 내내 만 개의 계단에 가까운 돌계단을 오르거나 내려가야 한다. 랑탕은 처음 며칠 동안 빙하에서 만들어지는 힘찬 물줄기를 거슬러서 올라간다. 교향곡 3번(영웅)의 힘찬 음악을 듣는 듯 했고, 5천미터 정상에서의 반쯤 얼어붙은 여러 작은 호수들을 바라볼 때에는 교향곡 7번과 8번의 활기참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 곳 모두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다. 

트레킹에서 힘들었던 것들

체력적인 요소 외에 먹는 것(난 먹는 준비는 전혀 없었다. 처음에는 고추장은 커녕 사탕 한 알도 준비하지 못했다. 보통 한국 사람들의 짐은 내 짐의 3배가 넘는다. 서양 사람들의 짐은 한배 반에서 두 배 정도이다. 한국 사람들이 짐이 큰 것은 유난히 먹는 것을 밝히기 때문이다. 돼지고기 삽겹살에 개스 곤로까지 가져와 구워먹기도 하고 닭백숙을 먹겠다고 모든 양념에 커다란 통까지 들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하다. 난 외국까지 와서 그리고 그것도 트레킹을 와서까지 그렇게 바리바리 싸와서 먹어야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새로운 것을 경험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약간의 어려움을 경험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이곳까지 멀리와서 산을 걸어 다녀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룹으로 다니면서 너무 떠든다는 것이다. 본래 산행은 자연과의 대화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는 성찰과 침묵을 하기 위함인데, 요즘은 모두가 떠들고 먹기 위해 산행을 하고 있다. 올해는 경제 사정으로 한국인이 적은데, 작년에는 세계 나라 중 최고로 많이 왔다고 한다. 주의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먹는 것은 약간의 고추장과 김치정도만 있으면 밥(질지가 않다)이 있으니까 비벼먹으면 된다고 본다. 그런데 문제는 추위이다. 내가 갔던 때가 시즌이 시작하기 전인 3월초였는데, 너무 춥다는 것이다. 낮에 햇빛이 비치는 동안은 마치 봄날 같고 추워도 움직이니까 문제가 없는데, 해만 지고나면 상당히 춥다. 그래 롯지에서 저녁 먹는 동안에는 난로 불을 피워주어 그런대로 견딜만 한데, 난로가 꺼지고 방에 들어가면 완전 영하의 냉장고이다.(높은 곳에는 나무가 없어 난로도 없다.) 방한복을 입고 잠자리에 들지만, 처음에는 추위로 잠을 들기가 힘들다. 그리고 힘든 것은 화장실이다. 화장실이 냄새가 나고 옛날 변기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는데,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야 하고 엉성하기 짝이 없어 영하의 찬바람이 들어온다는 것이다.(물론 방도 칸막이가 되어 있기는 하지만, 옆방의 코 고는 소리는 물론이요 이불 들척이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이다.) 그래 자다가 일어나 화장실을 가는 것이 너무 고역이어, 새벽 한 두시면 할 수 없이 다녀왔지만, 새벽 3시가 넘으면 6시 기상할 때까지 참고 견디곤 했다.

네팔에서 만난 사람들

1. 여러 사람을 만났지만, 3사람만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마모루라고 하는 일본인 젊은 부부이다. 20대 후반인데, 이곳에 산지가 반년이 넘는다. 남자는 나무 조각으로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이고 부인은 간호원이다. 2년 전 트레킹을 왔다가 부인이 몹시 아팠는데, 이때 네팔인 목사와 결혼한 한국인 부인에게 신앙의 감화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리고는 인생의 방향을 바꿔 지금은 일본기독의사협회의 파송을 받아 부모가 감옥에 감으로 고아가 된 네팔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 트레킹을 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남편이다. 그는 안나푸르나 일주 트레킹을 하는 중에 우리가 머물던 고방의 그 호텔에 하루 밤을 머물기 위해 왔다.(사실 그는 가난한 사람인데, 일주일을 샤워 한번 하지 못하고 너무 허술한 곳에서만 잠을 잤기에 하루 밤 호사를 위해 찾아왔다고 한다.) 그리고는 우리 일본인 일행이랑 이틀을 어울렸다. 이 부부는 영어를 곧잘 한다. 그가 7년 전 그러니까 그가 20세 때에 에베레스트 트레킹을 혼자서 하였다고 하면서 내게 그 코스를 알려주었다. 그래 여기서 내심 자극을 받았다. 그런데 그가 알려준 코스는 chola pass라는 매우 험하고 위험한 지역을(5천미터 이상) 넘어야 하기에 책에는 소개가 되지 않는 코스이고 지도에도 굵은 선이 아닌 점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리면 불가능한 코스이다. 실상 나를 인도한 친구도 이곳을 열 번이나 다녔다는데, 처음에는 이곳을 가지 않으려고 여러 가지 핑계를 됐다. 그래 나도 포기를 하고 돌아가려고 하고 있었는데, 전날 저녁에 그쪽에서 넘어온 서양인 부부를 만나 이 길로 가게 되었다. 한마디로 너무너무너무 힘들었다. (후에 그곳에 15년을 살고 있는 한국인 트레킹 회사 사장 얘기에 의하면, 자기가 아는 한 그룹으로 건넌 한국팀은 한팀밖에 없다고 한다.)
네팔의 고아들을 돌보는 일이 너무 즐겁다고 말하는 부인의 천진한 미소가 그립다.

2. 두 번째 소개하고 싶은 사람은 Scott Burnham이라고 하는 미국에서 온 친구이다. 나이가 나와 같고 수염을 기르고 있다. 에베레스트 코스를 올라가고 있는데, 누군가가 기타를 들고 내려온다. 아니 먹을 것 입을 것 챙겨다니기도 힘든 판에 기타를 들고 오다니, 너무 놀라 얘기를 걸었더니, 아침에 칼라파타(5천5백미터) 정상에서 노래를 부르고 내려오는 중이라고 한다. 그래 내가 노래를 청했더니 매우 흥겹게 두곡을 부른다. 생각해 보라. 별로 사람도 없는데, 그 설산이 바라보이는 그 산골짜기에서 흥겨운 노래를 듣는 것을. 그가 첫 번째 부른 곡은 Rock & Roll Never Die 라는 곡이었다. 같은 록엔록 세대였으니 모르는 노래였지만, 나도 흥이 겨워 따라 불렀다. 후에 그는 에베레스트를 떠나기 전날 루카라라는 도시에서 다시 만났다. 짐을 푸는데, 옆방에서 하도 시끄럽게 떠들어 어떤 사람인가 하였더니 그 친구였다. 저녁 때 식당에서 만나 맥주 한잔을 나눈 다음 다시 한 번 그의 노래를 들었고, 나도 보답으로 ‘송학사’를 불렀다.

그가 전해준 짧은 인생담. 21세 때에 사랑하던 여인으로부터 배반을 당하고 나서 상처를 달랠 겸 여행길을 떠났는데, 돈이 떨어져 터어키에서 인도까지 순전히 hitch & hike에 의존해서 갔다고 한다. 그리고 더 놀라운 얘기는 자신도 결혼을 했고 지금은 이혼 상태(18세 되는 아들과 함께 왔다.)인데, 이미 결혼한 그 첫 번째 여인이 내년에 자기한테 다시 돌아오기로 했다고 한다.

3. 세 번째 소개하고 싶은 사람은 한 여성 트레커이다. 안나푸르나를 올라가고 있는데, 가이더와 포커를 데리고 앞서가는 사람의 걸음이 상당히 느리다. 저렇게 느린 사람이 어떻게 트레킹을 왔을까 의아해 하면서 바라보니 의외로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다. 그래 물었다. “상당히 나이 들어 보이는군요.‘ ’아 그래요.‘ ’80세가 넘었나요?‘ ’물론이죠?‘ ’85세?‘ ’세살을 더하세요.‘  우리나이로 89세인 독일인 할머니였다. 모자를 거꾸로 쓰고 배낭까지 메고 있었다. 당연히 예전에 경험이 있었다고 믿고, 네팔은 몇 번째냐고 물었더니,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한다. 너무 놀래 한국에서 온 목사라고 소개하고 그녀를 힘껏 껴안았다. 그리고 다음날 정상 바로 아래(MBC)에서 머물었는데, 저녁부터 내린 눈이 아침에야 비로소 그쳤다. 정상(ABC)에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많은 사람들이 그냥 내려갔지만, 나를 포함한 몇 명은 올라갔다. 생각만큼 위험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내려오는데 오후에 이 할머니를 다시금 만났다. 난 이 할머니가 이 길을 포기했을 것이라고 상상했던 것이다. 너무 놀라 다시 한번 포옹을 하고 나서 내년에 다시 보자고 작별의 인사말을 했다. 그러자 ’아니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다시 한 번 소리친다.‘ 사실 60세에 가까운 서양 사람들은 많이 만난다. 그러나 동양인들은 거의 없다. 사실 나는 한국인들 또한 거의 만나지 못했다. 가장 잘 알려진 코스의 낮은 곳에서 한국인 그룹을 보았고, 중간에 20대의 오누이를 만났을 따름이다. 서양인들의 저 도전정신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는 돈하고는 별 상관이 없는 문제이다.

물론 히말라야의 8천미터 이상 되는 14좌를 다 올라선 한국인 산악인들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지금 여성들 가운데 누가 제일 먼저 이를 이룩할 것인가?가 세계 산악인들의 초관심사인데, 3명의 산악인들이 대결 중이고, 우리나라의 오은선이라는 여성이 그중 한명이다. 네팔에서 우연히 함께 만나 식사도 나누었는데, 이미 9좌를 올랐고, 지금 10좌인 캉첸쿵가라는 산을 오르고 있을 것이다. 앞서 말한 3명의 여인이 우연히도 모두 같은 시기에 이 산을 오르기로 되어 있다고 한다. KBS 방영팀이 함께 하고 있으니 얼마 있지 않아 방영이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한명의 한인 할아버지를 만났다. 이름은 모르지만, 산악협회 회장도 지내고 지금은 현대자동차의 고문변호사로 계시는 71세가 되신 분이다. 그런데 포터 5명을 데리고 이번 4월 말쯤에 에베레스트 정상 8천 8백 5십미터를 밟기 위해 오셨다고 한다. 대단한 도전이다. 그런데 이분이 말씀하시기를 에베레스트를 올라서기 보다 더 힘든 것이 가족들의 설득이라고 한다. 죽을지도 모르니 가족들이 어찌 반대하지 않을 것인가. 에베레스트 트렉 중에 여러 돌무덤들이 있다. 산을 오르다 죽은 사람들을 기념하는 비석들이다. 거기에는 열 한 번째 에베레스트 정상을 올라갔다 내려오면서 죽은 무덤도 있다.

이런 얘기들을 쓰면서 나도 한번 최소한 꿈이라도 꿔보련다. 65세에 에베레스트 정상을 한번 밟아보리라고. 체력과 경험도 문제이지만, 돈도 문제란다. 이 글을 읽는 사람 가운데 후원자 혹은 동반자가 있기를 기도해 본다.

네팔과 한국

2월 21일자 카트만드 포스트에 실린 “Seoul Mates"(서울의 친구들)이란 네팔 이주노동자들에 관한 사설을 통해 외국인들이 보는 한국과 저들의 삶의 모습을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내가 며칠 동안 살펴본 카드만드 포스트 신문은 한 면을 외국 기사에 할애하고 있는데, 항상 한국 얘기가 주요한 사진과 함께 등장했다. 물론 당시 클린톤 국무장관이 남한을 방문하고 있던 민감한 시기라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한번은 김정일위원장의 생일을 축하하는 북한 주민들의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사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현재 남한에는 4천명의 네팔 노동자들이 살고 있지만, 그들은 남한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갖지 못한 채 성공의 꿈만을 안고 왔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 그들은 열악한 환경에 빠져 있다. 2. (이 사설이 본 남한의 모습은 이렇다.) 남한은 강도 높은 일, 집단적 사고, 군사적 문화, 인간의 감성 보다 특권계층의 이익을 중시하는 나라이다. 대부분의 네팔인들은 흔히 말하는 3D 직업에 종사한다.(dirty dangerous difficult 더럽고 위험하고 힘든) 3. '빨리빨리' 라는 재촉 단어는 꿈속에서도 등장하는 강박 언어가 되었다. 그들은 결코 3년의 제한된 비자 기간 안에 자신들의 꿈을 이룰 수 없다. 그리하여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 전락한다. 4. 그리고 이민단속반원들의 체포의 위험에 항상 직면하여 불안 속에서 살아가고 보통은 여러 친구들과 함께 한방을 빌려 함께 쓰면서 하나의 가방을 갖고 있는데, 그 안에는 몇 개의 옷가지와 체포되었을 때 비행기 표를 살 수 있는 패스포트를 갖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기독교를 믿지는 않지만, 교회가 제공하는 여러 서비스에 의존하고 있다.(최근 제가 부이사장으로 있는 서울이주노동자센터의 최의팔목사 소장은 지난 주에 네팔을 방문하였는데, 이곳에서 일하다가 불구자가 된 장애인 네팔인들을 돌보기 위해 네팔 차와 커피를 수입하는 방안을 강구하기 위해 왔다갔다.)
5. 남한은 이혼율이 높다. 그래서 많은 이혼녀들은 네팔인과 결혼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는 쉽지 않다. 라즈 비스타의 경우를 보면 한국인 아내와의 결혼식을 위해 이미 만불(천오백만원)을 썼다. 그는 지금 한달 60만원의 월세를 내고 살고 있고, 전 남편의 아이들을 위해 돈을 지불하고 있다. 그리고 외식을 하게 되면 한국사람들은 혼자서 밥을 먹지 않아 아내는 친구나 가족들을 식사에 초대하고 있는데, 한 번에 보통 200불(30만원)이나 든다. 그래 그런 얘기를 하면 아내는 그을 떠나겠다고 위협한다. 이제 그간 모아 놓은 돈이 바닥이 났다. 그리고 다른 네팔인들의 경우도 비슷하며 심지어는 자신의 어머니와 비슷한 연령 때로는 할머니의 연령 때의 여성과 결혼을 하기도 하여 네팔인들이 모이는 자리에 나타나기를 꺼려한다. 

남한에는 지금 많은 네팔인들이 운영하는 식당이 있지만, 대부분 인도식당이란 간판을 달고 있고 고국에서는 전혀 해보지 않았던 차를 만들고 있다. 80개의 네팔인 조직이 있고 때로는 서로 경쟁하기도 하고 있고, 명절에는 네팔의 배우나 가수를 초청하여 축제를 열기도 한다. 이때 어떤 사람들은 고향이 그리워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지금 네팔인들은 버는 돈을 고국으로 보내 이를 저축하여 장사의 밑천으로 삼으려고 하지만, 쉽지는 않다.

나가면서 - 감사의 말

처음 서두에서 밝힌대로 이번 안식 3개월의 기간은 신학교를 방문하여 강의와 독서를 통해  새로운 신학의 동향을 알아보고자 했다. 물론 이의 궁극적인 목적은 신(神)을 더 잘 알기 위함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신의 현존을 더 깊이 깨닫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이 방식은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쌓아놓은 곧 논리와 이성에 기초한 신 이해 방식이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가운데 세계의 지붕이라고 할 수 있는 히말라야의 깎아지른 빙하의 설산들의 침묵 속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이는 이전에 그리 깊이 경험하지 못한 감성에 의한 신의 현존 인식이었다. 논리와 언어와 이성에 의한 것만이 절대적이고 바른 신 이해는 아니지 않는가? 이성적인 방식이 대체로 옳은 길로 인도하지만, 절대적인 길은 아닌 것이다. 창조주는 우리에게 이성만이 아닌 감성을 주었다. 종교의 깊은 차원, 사랑 자비 같은 개념들이 이성으로 접근함이 옳을까? 아니면 감성으로 접근함이 옳을까? 둘 다 필요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감성이 아닐까?

트레킹을 하면서 읽은 책 가운데, 존 오도노우가 지은 아남 카라(‘영혼의 동반자’ 류시화 역)가 있다. 그 속에 이런 글이 있다. “이 시대의 비극 중 하나는 우리가 그런 자연의 원초적인 시각과 접촉하지 못한 채로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도시에서의 삶은 어머니 지구와의 풍요로운 관계로부터 우리를 추방시켰다. 흙으로 빚어진 우리는 흙의 모습을 한 영혼들이다. 따라서 우리 존재 안에 있는 흙은 목소리인 그 깊은 갈망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하지만 이 시대에 그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읽어버렸는지 조차 깨닫지 못하고 그 결과 방황하는 영혼의 고통은 더욱 커져간다. 대부분은 그 이유마저 알지 못하는 채로...(16쪽)

공교롭게도 내가 네팔에 있었던 기간은 사순절 기간이었다. 그래 산을 거닐면서 나는 예수께서 보낸 40일 광야라고 하는 것이 단지 한곳에 쭈그리고 앉아 드리는 정적인 기도가 아닌 몸으로 드리는 트레킹의 기도였음을 깨달았다. 더 나아가 전설에 의하면 예수께서 인도를 다녀갔다고 하는데, 나는 예수께서 히말라야를 다녀간 것은 아닐까? 그냥 추측을 넘어서서 나 혼자 확신을 가졌었다. 육신적으로는 5킬로 이상이 빠지는 힘든 과정이었지만, 영적으로는 훨씬 더 풍성해지는 시간이었다. 네팔에서 돌아오자마자 그 다음날로 나는 우리 산의 아름다움을 경험하기 위해 설악산과 동해바다와 무릉계곡과 동강을 한 주간 돌아봄으로 사순절의 마지막 고난주간을 보내고 교회의 부활절 예배에 참석했다. 내 일생에 두 번째 맞이한 안식 3개월의 기간이었지만, 참으로 뜻 깊은 시간이었다. 이런 기회를 허락한 향린 교우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여기서 얻어진 깨달음과 힘이 이어지는 목회 현장에서 더 크게 하느님께 영광 돌려지기를 기도한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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