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회피로서 책 읽기




 김정원*

   

    존재물음이 그칠 때가 있다. ‘나는 누구인가?’ 혹은 ‘나는 왜 사는가?’ 와 같은 다소 궁극적인 물음을 그만두고 싶어 질 때 말이다. 그만두기를 작정한 적이 따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존재물음은 그쳐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거의 다 잃어버리는 때, 그러니까 삶의 의미를 상실한 때, 모두에게 그런 때가 있으리라.

에곤 실레, 죽음과 소녀, 1915


    누구는 신을 찾으라 하고, 누구는 연애를 하라 하고 또 다른 누구는 심리치료를 하라고 권한다. 그러나 ‘의미’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믿음도 사랑도 또 자기 자신마저도 잃어버린다는 이야기와 다름 없기에, 그러한 조언들은 힘이 없다. 오히려 친밀하고 내밀했던 사람들을 찾아가는 것은 가장 피하고 싶어지는 일이며, 바로 그 관계야 말로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압박한다. 왜냐하면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은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이 아니라, 친밀했던 대상들을 향한 죄책감과 미안함이라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의미를 잃었다는 것을 누구보다 크게 실감한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그녀가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많이 노력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비움은 채움이 사라졌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것이기에. 그녀는 누구보다 진지하게 삶의 가치를 성취하고자 했다. 정의를 공부하고 공동체를 꿈꾸며, 그에 따른 구체적 실천을 삶에서 실험해보기도 했다. 스스로를 향한 질문도 놓치지 않았다. 사회적 요구와 자신의 요구를 분리시켜 보기도 하고, 자신의 욕망을 조용히 들여다 보는 시간도 성실히 가졌다. 그랬던 그녀는 어느 틈엔가 그 모든 성취와 물음을 그만 두기로 한다. 아니, 그만두기를 의식적으로 바랐던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모든 물음에서 빠져 나와 있었다. 즉, 그 물음들의 ‘바깥에’, 다시 말해 그녀가 걷던 그 길의 ‘바깥에’, 그녀가 머물던 사회적 관계의 ‘바깥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다만 그녀는 원인을 묻지만 – 부모의 죽음, 미래에 대한 가능성의 상실, 사회적 열등감 등- 그저 희미하다.

    의미를 잃었다 말은 웃음을 잃었다는 말과 다른 말이 아니다. 어느 날, 웃음을 그친 그녀에게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다가와 장미를 건넨다. 그녀는 고맙게 장미를 받아들이지만, 장미의 아름다움이 퍽 당황스럽다. 또 다른 날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여자가 다가와 그녀를 위해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녀는 조용히 그 눈물을 닦아주지만, 그 눈물은 버겁다. 장미의 아름다움과 눈물의 따뜻함을 모르지 않지만 그들에게 마땅한 답례를 하지 못하는 그 사태 전반이 괴롭다. 고마운 그들과 함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고, 같이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것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낙담하여 돌아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은 자책감으로 살아온다. 그녀는 ‘삶은 여전히 의미가 있고, 우리는 함께 그 길을 갈 수 있다’라고 말하는 그들의 의도를 잘 알지만, 그들을 향한 미안함과 죄책감이 늘 먼저 덮쳐온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고마운 사람들 속에서 따뜻함을 선물로 받는 것이 아프다.

    그녀가 잃어버렸다는 그 의미는 죽음과 함께 엮어져 있다. 간단하게 말하면 사람들은 의미를 잃어버렸기에 자살을 택한다는 것에 그 근거가 있고, 조금 복잡하게 말하면 그녀가 추구했던 정언적 욕구들을 포함한 그녀의 가치, 요구, 욕망 등 그녀의 지향점이 사라져버려 살아갈 의욕을 잃어버렸다고 할 수 있다. 단, 영원히 산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만약 우리가 시간이라는 한계를 지니지 않았다면, 우리는 고민할 이유가 거의 없다. 내일은 무한히 돌아오고, 욕구 특히 정언적 욕구는 실패가 아닌 유예로서 우리 안에 머물 수 있다. 역시 시간이라는 한계가 없다고 할 때, 우리에게 무한히 열려 있는 미래 속에서, 우리는 그 미성취된 욕구를 간혹 선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믿음을 가진 이들이 장차 올 하나님나라를 미리 맛 보았다고 고백하는 것과 비슷하게 말이다. 그런데 만일 의미를 잃어버린 채로 그 무한한 시간을 살아(내)야 한다면 어떠할까? 건조하여 우울하기 짝이 없는 그 삶을 지속하는 것은 옳은 것일까, 그른 것일까? ‘무의미’의 늪에 빠져 무한을 살아야 하는 것은 축복일 수 없다. 되려 그 생을 마감하는 것이 그 무의미한 삶을 끊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도, 즉 가장 의미 있는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의미를 묻는 한, 이제는 죽음이 우리로부터 멀어진다. 욕구하고 욕망하는 것이 있는 한, 우리는 살기를 결단한다. 무기력할 틈이 없다. 의미를 향한 역동성은 우리를 생으로 내달리게 한다. 살아있어야 할 이유가 많을수록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멀리 달아나고자 하는 것이다. 이 때, 선과 악, 무소유와 소유, 이기심과 이타심, 좌와 우 등의 구별은 중요하지 않다. 각 자의 지향에만 적합하다면 죽을 이유는 없다. 지향하는 대상 혹은 지향하는 세계로의 초월을 꿈꾸며, 아니 이미 그곳으로 초월 돼 있기에 그들은 생으로 나아간다.

    다시 그 의미를 잃어버린 여자에게로 돌아가보자. 그녀가 겪는 ‘바깥’의 경험은 무얼 뜻할까? 바깥을 경험한다는 것은 세계로부터 추방되어 존재하는 경험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추방되었을까? 여기서 세계는 열려 있는 공간, 우리가 향해 나아가고 있는 공간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 세계는 가능성을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만 열려있다. 궁극적 가치, 가령 역사의 의미라던가, 실존의 의미 혹은 선善의 의미를 성취할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열려있는 것이다. 또한, 세계와 나와의 관계는 내가 얼마나 대상들을 지배하거나 관리하거나 혹은 이해할 수 있는지에 따라 정립된다(박준상). 다시 말해 사물을 지배할 권력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과 관리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 혹은 어떠한 이치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세계는 닫혀있다. 그러기에 세계의 바깥에 머무는 사람들은 “기댈 곳이 없다는, 사물들에 대해 적극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인상을 갖는다”(블랑쇼). 이는 그들이 겪어 낸 불행과 고통을 바탕으로 한다. 사회로부터의 배제와 추방, 타인의 죽음 등 몸에 누적된 고통은 세계와의 관계를 결렬시킨다. 이는 다시 나와 나 사이의 결렬로 이어지고, 종국엔 자아의 파기를 야기한다(박준상).         

    이처럼 자아의 파기에 이른 바깥의 사람들에게 장자처럼 죽음에 초연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는 마치 아주 비싼 샴페인을 처음 마셔보는 사람의 기분과 같을 것이다. 그는 샴페인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어 달갑진 않지만 비싸고 좋은 것이라는 주변의 말에 엉겁결에 들이켜 본다. 그러나 그 맛이 좋은지 아니 좋은지를 분별할 능력이 그에게는 없다. 다들 비싼 샴페인을 품평하지만, 그는 맛없음과 맛있음의 차이를 발견할 수 없기에 그 가치(의미) 또한 알 길이 없다. 그는 이내 샴페인을 둘러 싼 사람들을 떠나 바깥에서 서성인다. 즉, 眞人이 되면 생사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는 장자의 주장 보다는, 차라리 인간의 현존 자체를 ‘죽음을 향한 존재’로, 혹은 죽음을 ‘실존의 본래성에 도달하는 기반’으로 보는 것이야말로 의미를 잃고 불안해 하는 자들에게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으로부터 초연하다는 말처럼 비인간적(반자연적)인 말이 어디 있는가! 되려 ‘세계의 집에 존재하지 않음의 체험’(하이데거)이라는 묘사야 말로 위로이자 복음일 수 있다.

    저 복음은 책 속에서 발견되었다. 오늘의 죽음에 관한 단상들은 대부분 현상학자들에게 빚지고 있는 것인데, 이 모든 것이 몹시 난해하고도 지루하기가 이를 데 없는 철학자들의 책에 들어차 있다. 신도, 가족도, 친구도, 정의도, 평화도, 그리고 사랑도…… 이들이 지니고 있는 전반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권할 수 있는 것이 겨우 ‘책 읽기’라는 것에 부끄러움과 무력감을 느끼는 바다. 어쩌면 ‘책 읽기’는 바깥의 경험을 다시 겪게 할지도 모른다.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자책감, 책이 주는 교훈대로 살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절망감, 사회적 요구의 재청으로 인한 불안감, 깨달은 대로 살지 못한 데서 오는 우울감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실패로 인한 박탈감 까지를 몰고 와 우리를 세계의 바깥으로 한 번 더 밀어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를 잃은 이들에게 책 읽기를 권하는 이유는 그들의 특성에 기인한다. 거의 모든 대상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어하는 그네들의 마음을 ‘내가’ 지금, 잘 안다는 것이 근거라면 근거이겠다. 은폐 속으로 첨벙, 하고 뛰어들고 싶은 그 마음 말이다. 그런데 책을 읽는 순간에는, 특히나 미간에 주름이 잡힐 정도의 심각한 책을 읽는 그 순간에는 은폐 속에 머무를 수 있게 된다. 정확하게는 은폐 속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책과 나만이 있다. 수동적인 상태의 책과 내가 함께 있음으로써, 나 역시 수동적일 수 있다. 능동적이지 않아도 괜찮은 순간이다. 책은 영화와 드라마 보다 한결 수동적인 상태로 나에게 말 걸어오기에 나 역시 역동적이게 관계할 필요가 없다. 무엇보다 책을 이해하는 과정, 즉 몰입의 순간에는 간혹 나를 잃어버리기도 한다. 블랑쇼의 말처럼 몰입함으로써 나를 잃어버리는 무아의 시간을 갖게 될 수도 있고, 최소한 나를 괴롭히는 여러 현실을 잠깐 잊을 수도 있다. 책 읽기로의 몰입은 이로써 동요, 불안, 우울, 죽음의 공포를 잠깐 비워낼 시간을 준다. 그런데 이 때, 역설적이게도 그 몰입의 순간에, 결국 다시 찾게 되는 것은 의미이자 궁극적으로는 결렬되었던 ‘나’이다. 의미를 잃어버린 그 여자가 (무)의식적으로 찾게 될 내용은 다시 의미 지평에 관한 책일 것이다. 죽음에 관한 것이거나 존재에 관한 것들… 그러한 것을 미간을 찌푸리며 읽어나감으로써 자신의 의미 상실의 순간을 잃어버리게 되지만, 동시에 의미 물음을 다시금 하게 된다는 말이다. 죽음에 관한 내용으로 빨려 들어갈 때, 더 극단적으로는 죽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철학자들에게 묻는 그 순간에 삶의 의미는 갱신된다. 의미 상실로부터 도피하여 책 속으로 숨어들어갔지만, 결국 거기에서도 삶의 의미를 묻게 되는 것이다. 수동적이기만 했던 책은 이제 살아 움직이고 그녀의 부서져 버린 의미들의 파편을 무섭게 끌어온다. 그 파편들의 조합이 삶이 될지 죽음이 될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언급했듯 자살이 의미 없음과 결부되지 않을 뿐더러, 일단은 의미를 다시 묻게 된 데에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그녀는 운 좋게 사르트르를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르트르는 그녀의 공허함과 결핍을 크게 문제삼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지향하는 한, 결국 우리는 나 아닌 다른 것을 계속해서 의식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무언가를 끊임 없이 의식하는 한, 우리는 온전히 우리 자신일 수 없다. 내가 내 전부를 나만으로 가득 채울 수 없다는 말이다. 나는 나와 언제나 불일치의 상태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늘 결핍이고 불안이며 때로는 고통이며 피곤함이다. 그녀가 이를 숙명이듯 받아들이게 되면 좀 편해질 수 있지 않을까. 일종의 내려놓음 아니겠는가. 물론, 남는 문제는 언제나 있다. 고마운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함 등은 여전히 해결하지 못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다시 찾게 된 의미는 이전에 소유했던 것과는 전혀 다를 수 있기에, 이번엔 그 고마움마저도 잃게 될 수도 있다. 그녀 안에 새롭게 정립된 의미들이 고마운 사람과 어떻게 엮일지는 진정 모를 일이다. 또한 여전히 그녀는 세계 바깥에서 머물게 될 것이다.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과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 닫혀진 세계가 책 읽기로 격파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의미 물음이 바깥에서 서성이는 그녀를 구원해 오지는 못한다. 아마도 그녀는 바깥에 머물며, 그 바깥과 그 바깥의 의미를 다시 물어야 할 것이다.


* 필자소개

   "한신에서 기독교교육을 공부하고,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조직신학으로 석사 과정을 마쳤다. 현재 박사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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