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기 민주정부'가 성공한다면




황용연

(Graduate Theological Union 박사과정,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객원연구원)


    1. 

   2004년 국회의원 총선거 때 딴지일보와 한겨레의 합작으로 김어준이 정당별로 비례대표 후보 1인씩을 골라 인터뷰를 진행했던 적이 있다. 당시 민주노동당의 인터뷰 주자는 단병호 전노협 초대 위원장. 그 인터뷰 에서 김어준이 물었던 질문 중 하나는 발모제를 바를 생각이 없냐는 것이었고, 단 위원장의 대답은 발모제를 바른다면 자신은 아마도 더 이상 단병호가 아니게 될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 인터뷰를 마감하면서 김어준이 남긴 코멘트 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그는 '전봉준'이다. '동학'은 그의 '계급'이고, '백성'은 그의 '노동자'며, '구세제민'은 그의 '노동해방'이다. 그를 깨운 건 인간에 대한 연민. 무인정권의 탄압과 자본의 착취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위해 분연히 일어서 그 세력을 전국으로 규합하고 관에 맞선 '적두장군 단봉준'. 누군들 거저 사는 사람 있겠냐만 제 살을 깎아 남의 몫까지 대납하는 그 정도 삶 앞에선 주댕이 살짝 닥쳐 주는 게 예다.”

   이렇게 써 놓고, 그는 코멘트의 마지막을 이렇게 맺고 있다. 

   “지난 17년간 한 번도 풀린 적 없는 노동계 야전사령관의 강철 화이바, 빨간 머리띠가 풀리는 날, 축배 대신 발모제를 도포해 주리라. 내 몫의 부채는 그렇게 변제하련다. 꾸벅.”

   이 인터뷰가 나간 후, 감동먹었다는 댓글이 대부분인 가운데, 이런 댓글이 있었다. 

  “그런 사람이 존경한다니까 권영길(필자주-2002년 대통령선거에서 3.9%를 얻었고 이 당시는 창당 당시부터 민주노동당 대표로 재임 중이었음)이 다시 보이는군요.”


   2. 

   엄기호의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두고 이렇게 논평한 구절이 나온다.

   “왜 우리는 노무현을 미워할 수 없었던가. 그는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 분열적이 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 주었다. 분열적인 삶이란 무엇인가. 전교조 교사가 자기 아이에게 사교육을 시키고, 공교육이 싫어서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낸 학부모가 방학이면 아이를 불러 선행학습과 과외를 시킨다. 직장을 때려치우고 나와 카페를 차리고 공동체 운동을 하는 후배는 주식 투자로 생계를 이어간다. 양심적으로 살아가며 많은 시민단체를 후원하는 친구는 들어가 살 만 하면서 투자 가치가 있는 아파트를 보러 다닌다. 살기 위해서는 삶이 분열되어야 한다. 이 분열의 빈틈에 적당한 합리화와 죄의식이 뒤죽박죽 엉킨 채 우리는 살아간다.

   노무현은 권력의 정점에서 이러한 분열적인 삶을 보여 주었다. 이라크 파병을 결정하던 날 노무현은 멍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며 "지금 국민들이 저를 보고 계십니까?"하고 읆조렸다고 한다. 그는 집권 기간 내내 그의 영혼과 그의 통치가 분열되어 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그로 인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는 집권 내내 항상 자신의 영혼은 통치자의 자리가 아니라 '당신들이 있는 곳에 있다'는 메시지를 보여 주었다. 이것이 집권 중에는 그를 변명으로 일관하는 비겁한 대통령으로 만들었지만, 막상 그가 가고 나자 우리는 분열적일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우리 모두의 초라하고 팍팍한 삶을 그를 통해서 만났다.”

   앞의 두 텍스트가 보여주는 견해에 동의하지도 않을 수도 있다. 이 텍스트들이 대상이 되는 두 사람과 각각에 얽힌 일들에 대해서 제대로 판단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이 텍스트들의 밑에 깔린 정치적 견해에 대해서도 등등.

   그렇지만 어떤 판단을 내리든지 간에, 이 텍스트들에서 이러한 느낌은 충분히 추출해 낼 수 있을 듯 하다. 단병호는 ‘존경’의 대상은 되어도 ‘동일시’의 대상은 될 수 없지만, 노무현은 ‘동일시’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실제로 그 현상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그리고 그 이유는 현재 대한민국의 ‘보통 사람들’을 자임하는 이들의 삶과 관련이 크다고 말이다. 여기에, 설령 ‘존경’은 하더라도, 아니 어쩌면 ‘존경’을 하기에, ‘발모제’같은 ‘세련’을 덧붙이고자 한다는 것까지도 짚을 만 하겠다.



   3. 

   대선 기간 막바지에 문재인 후보의 인권변호사 활동에 대한 여러 가지 ‘미담’들이 지지자들 사이에서 돌았다. 그리고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이런 트윗이 나왔다.

   “경고한다. 정의당&노동당은 문재인 대통령님 앞에서 노동자의 인권을 논하지 말라. 니네들 입으로 싸울 때 우리 문재인 대통령님은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해 온몸으로 싸워오신 분이시다.” 물론 이건 ‘극단적’인 케이스이다. 그러나, ‘극단적’이긴 해도, 분명한 것이 이 케이스가 ‘극소수’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아니, 설령 ‘극소수’였다고 하더라도, ‘극단’이 이렇게 나온다면, ‘주류’도 저런 식으로 문재인 대통령 앞에서 속칭 ‘깜’도 안 되는 것들이 까불지 마라 이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문재인’과 같은 (유능한) ‘인권변호사’, 즉 지원자의 자리가, 당사자를 대변하려 하는(그렇지만 힘이 약한) ‘정의당/노동당’보다도 ‘노동문제’에 대해서도 더 낫지 않을까란 생각을 공유할 것이라 보는 것이 큰 무리는 아닐 성 싶다. 물론 저런 언설과 이런 생각에서 노동자들의 자리는 ‘노동 문제’라는, ‘객체’의 자리에 머물고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테고.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바라는 목소리를 내는 것은 비단 41%에 달하는 그의 대선 때 지지자들만은 아닌 듯한 요즘인데, 그렇다면 그 때 ‘성공’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

   아마도 문재인 정부의 입장에서는, 위와 같은 ‘지원자’의 자리에서, 노동자들과 ‘국민’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권익을 향상시키고 제도를 개선하고 싶을 것이다. 그 권익 향상과 제도 개선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경제 상황이나 외교 관계의 호전 등도 물론이고. 그런 결과를 통해서 지지를 유지하고 재집권을 이루어낼 때 그것을 ‘성공’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을까. 조금 덧붙인다면, 이런 일들은 아마도 ‘그의 친구’가 15년 전에 집권했을 때도 하고 싶었을 터일 테고. 그래서 문재인 정부의 ‘성공’은 ‘그의 친구’의 완벽한 복권일 것이란 기대도 있을 것이다. 그의 추모식에서 그를 ‘앞서서 간 임’으로 모시며 ‘산 자여 따르라’고 노래 불러도 정당할 그런 완벽한 복권. 그렇다면, 그런 ‘성공’이 이루어진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사회에 살게 되는 것일까.


4. 

   한국 사회 비정규노동 영역의 대표적 이슈 중 하나인 KTX 해고승무원 문제에 대해서 의외로 이런 반응들이 꽤 있다. 정규직 자리를 공정한 경쟁으로 따내려는 것이 아니라, 일단 비정규직으로 들어간 후 정규직으로 만들어 달라고 우기는 ‘샛길’을 뚫어서 차지하려는 욕심이라는 것.

   문재인 대통령의 첫 번째 행보로 주목받았던 것이 인천공항 비정규직 정규직화였다. 그리고 일부 대기업들이 이에 호응해서 정규직화 방침을 발표했다. 그런데 이 ‘정규직화’는 자세한 내용을 들여다 보면, ‘무기계약직’이나 ‘자회사의 정규직’인 경우가 대다수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경향은 아마도 문재인 정부 재임 내내 이어질 것 같고.

   ‘무기계약직’이나 ‘자회사의 정규직’도, 적어도 고용불안이라는 중요한 문제 한 가지를 해결했다는 점에서 성과와 진전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질문은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회사에서 일을 하는데, ‘정규직’과 ‘무기계약직’과 ‘자회사의 정규직’을 구분하는 기준은 대체 어떤 것일까. 문재인 정부의 정규직화가 본격화되면 어쩌면 이 ‘구분 기준’을 ‘합리적’으로 만드는 일도 본격화될 터인데, 그렇다면 이것은 차별 철폐가 아니라 차별의 합리화라고 부르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 여기에서 바로 앞에 언급했던 KTX 해고승무원 관련 상황이 겹쳐 보이는 것이다. 사정은 딱하더라도, ‘공정한 경쟁에 따른 결과’라는, ‘합리적 차별’의 선을 넘어서면 안 된다는.

   사실 KTX 해고승무원 케이스에 드러난 저런 시선은 저 사건이 처음 벌어진 2000년대 중반 이후 이미 한국사회에 일반화된 시선이기도 하다. 당장 얼마 전의 ‘교육공무직법’ 관련 사태가 딱 이런 경우이기도 했다. 능력이 있어서 공무원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에 대한 불공정이라는 시선이 꽤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시선을 보여 준 사람들의 상당수가 아마 대통령 선거 때 문재인에게 투표했을 것이고.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 보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와 그의 지지자들. 특히나 그 정부에 강한 동일시를 보이는 그 지지자들이 꿈꾸는 것은, ‘공정한 경쟁’과 그에 상응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공정한 대접’을 받는 사회가 아닌가 하는 것.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대통령의 트레이드마크는, 바로 이런, ‘능력’을 갖춘 사람들 혹은 갖추기를 선망하는 사람들을 위한 레토릭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능력을 갖춘 사람들 혹은 갖추기를 선망하는 사람들’이, 이 시대의 ‘보통 사람들’이기도 하겠고 말이다.


5.

   필자가 생각하기에, ‘사회적 연대’라는 차원에서는 오히려 이명박근혜 정부 시절이 노무현 정부 시절보다는 더 나았던 것 같다. 같은 한진중공업 크레인에 올라갔는데, 노무현 정부 시절의 김주익은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무관심 속에 죽어서 내려오고, 이명박 정부 시절의 김진숙은 ‘희망버스’와 함께 살아서 내려왔음을 생각한다면. 문재인 정부가 만들려는 것이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합리적인 차별’이고, 그것에 ‘능력’을 갖거나 선망하는 ‘보통 사람들’이 동의한다면, ‘사회적 연대’에서는 이명박근혜 정부 시절보다는 같은 ‘민주정부’라는 노무현 정부 시절과 가깝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은 기우일 뿐일까. 대통령 선거 당시, 그 때는 후보였던 지금 대통령 본인의 문제발언도 있었고, 지금 당장 육군참모총장에 의해 군인들이 색출되어 처벌을 받으면서도, 일부 문재인 지지자들의 비난이 오히려 벌어지는 성소수자 관련 이슈의 상황은, 아마도 그것이 ‘기우’이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실마리일 듯 하다.

   확실한 것은,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 하에서 ‘사회적 연대’를 구축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문재인 정부가 ‘잘못할 때’의 ‘비판’이 아니라는 것일 터이다. 적어도 그 때 ‘비판’에 깔린 뉘앙스가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위해 ‘비판’한다는 것이라면 말이다. 오히려 필요한 마인드는, 문재인 정부가 ‘성공’할 때, 그 ‘성공’에 대한 대책을 세운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합리적인 차별’과 ‘능력에 따른 정당한 대접’이라는, ‘보통 사람들’의 바램이 실현되는 것이 문재인 정부의 ‘성공’이라면, 그 바램을 제대로 비판해 내지 못하면 사회적 연대를 요청하는 것 자체가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 ‘보통 사람들’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기도 할 터이니까.


ⓒ 웹진 <제3시대>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BLOG main image
by 제3시대

공지사항

카테고리

웹진 <제3시대> (835)
특집 (8)
시평 (96)
목회 마당 (61)
신학 정보 (139)
사진에세이 (41)
비평의 눈 (59)
페미&퀴어 (25)
시선의 힘 (139)
소식 (154)
영화 읽기 (34)
신앙과 과학 (14)
팟캐스트 제삼시대 (12)
연구소의 책 (15)
새책 소개 (38)
Total : 381,752
Today : 47 Yesterday : 2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