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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눈]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심범섭)

비평의 눈

by 제3시대 2017. 8. 16.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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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심범섭*



   지난 번 글에서 윤동주 시인의 “서시”의 한 행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이번 글에서는 이 행 앞에 나오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라는 수식어구와 (해당 문장과 함께 시에서 화자의 미래에 대한 다짐을 나타내는) 바로 다음 문장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라는 문장을 이야기하겠다고 말씀드렸었다. 그런데 글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 두 구절에 대한 글을 두 번에 나누어 싣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의 해석 일부를 말씀드리고 싶다.

   먼저 “별을 노래하는 마음”에서 “별”에 어떤 뜻을 부여할 수 있을까? 김응교는 그의 책 <처럼(시로 만나는 윤동주)>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때 ‘별을 노래하는 마음’이란 어떤 마음일까요. 우리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겠습니다. 어머니라 하든 갈망이라 하든 조국이라 하든 그 어느 별이라도 삶의 근원일 겁니다.”[각주:1] 문학평론가 권영민은 “윤동주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 . . 별이라는 소재는 . . . 순수한 이상에의 동경을 표현”[각주:2]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한국현대시인론>에서 박철석은 “서시”를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작품에 보이는 ‘하늘’, ‘바람’, ‘별’은 윤동주 시를 대표하는 사적(私的) 상징으로서 죽음이 사랑으로 변용된 릴케적 원숙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하늘’과 ‘바람’은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이데아 세계라 할 수 있다.[각주:3]


   이 인용문의 둘째 문장은 좀 이해하기가 힘들다. 지상의 가변적인 존재이며 작품 안에서도 어떤 시련 같은 것으로 더 쉽게 이해되는 바람을 이데아의 상징이라고 하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별’에 이런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박철석이 글을 쓰다가 실수로 ‘별’ 대신 ‘바람’을 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가 과연 실수를 했던 아니든 나 자신은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의 “별”에 권영민의 말을 빌리면 “순수한 이상”, 박철석의 표현을 빌리면 “이데아 세계”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이는 김응교가 언급하는 “삶의 근원”이라는 의미와는 상통하는 면이 있으면서도 서로 다르다고 생각한다.[각주:4]

   그렇다면 별로 표상되는 이상을 노래한다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여러 가지 접근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먼저 별과 노래 사이의 대조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한 가지 의미를 얻어보고 싶다. 밤하늘에 높이 멀리 떠 빛나는 별은 여러 특수한 장소에 있는 여러 사람들이 동시에 바라볼 수 있으므로 쉽게 보편적이고 숭고한 이상의 상징이 될 수 있다. 반면에 노래는 특정한 문화에서 태어난 특정한 리듬과 가락, 그리고 특정한 언어가 어우러진 것이다. 1990년대 초 크게 인기를 누린 신승훈의 노래 “미소 속에 비친 그대”에 이런 구절이 있다. “너는 별빛보다 환하진 않지만 그보다도 따사로와.” 내가 사랑하는 구체적인 한 사람은 별에게는 없는 따듯함이 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노래는 구체적이고 따듯한 영역에 속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별을 노래하는 마음”은 드높고 영원한 보편적 이상을 내가 오늘 살고 있는 구체적인 삶에 담아 따듯하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윤동주의 다른 시 “별 헤는 밤”에는 “나는 별 하나에 /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 문장의 앞과 뒤에서 시인은 별 하나하나에 “추억, 사랑, 동경, 어머니,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 강아지, 토끼, 노루, 라이너 마리아 릴케” 등을 연결한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별을 노래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노래라는 현상 자체에 대해 생각해 봄으로써 주어진 시구에 대한 이해를 넓혀 보고자 한다.[각주:5] 노래의 특성으로서 부르고 듣는 사람의 생명력을 증진시키고, 영속 또는 영원을 암시하고, 서로 다른 사람들을 통합하고, 어떤 의미(“의미 있는 인생” 같은 말에서처럼 진지하고 좁게 정의되는 ‘의미’)를 담는 수단이 되기도 하는 특성을 이야기하고자 하는데, 이 가운데 통합과 의미 전달 기능은 다음 글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생명력을 증가시키고 영속을 암시하는 특성은 노래에 쉽게 감지할 수 있는 리듬이 있는 것과 상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노래의 리듬은 “음의 장단이나 강약 따위가 반복될 때의 그 규칙적인 음의 흐름”(네이버 국어사전) 같은 말로 정의되는 리듬이다. 그런데 이런 정의는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반복되는 움직임” (같은 사전), 좀 더 자세하게 말해 ‘어떤 행동이나 상황이 정기적으로 반복되거나 교체됨을 동반하는 조화롭고 질서있는 움직임’[각주:6]처럼 더 포괄적인 정의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포괄적인 정의는 우리가 일상에서 ‘리듬’이라는 말로 가리키는 현상 일반을 아우른다.

   중요한 것은 이 포괄적인 정의가 말하는 리듬이 이 세계의 거의 모든 현상을 구성하는 한 본질적인 요소 또는 원리라는 사실이다. 자연의 영역에서는 태양과 지구의 움직임, 계절의 변화, 밤낮의 교체 등에 어떤 리듬이 있다. 우리 몸을 보아도 정상적인 생명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 조건 중 하나인 심장의 활동은 단순한 리듬으로 뛰는 것을 한 요소로 한다. ‘뇌파’의 존재는 우리의 인지 및 정서 경험의 한 측면이 리듬임을 알게 한다. 날마다 같은 시간에 배가 고프고 잠이 오는 평범한 경험도 우리 몸이 어떤 리듬을 따르고 있음을 알려준다. 물리학에서는 겉으로 보기에는 정지해 있는 사물도 깊이 들여다보면 아원자 입자(subatomic particles)들이 리듬있게 움직이고 있다고 말한다. 문화 차원에서도 우리는 리듬에 따라 살아간다. 해마다 명절을 쇠고 기념일을 지키고 생일을 축하할 때 우리는 리듬 속에서 존재한다. 한 마디로 우리는 리듬의 존재이다.

   노래는 리듬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우리로 하여금 어떤 리듬을 명확하게 느끼게 한다. 어떤 리듬은 너무 미세하여, 어떤 리듬은 너무 거대하여 제대로 감지할 수 없지만 노래가 구현하는 리듬은 쉽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미 그 자체로서 정서적 영향력이 큰 소리라는 현상을 매개로 하므로 이 리듬은 더욱 우리에게 호소력이 있는 것 같다. 노래를 통해 이러한 리듬을 만나는 것이 노래를 부르거나 들을 때 우리가 더 살아있음을 느끼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아닐까? (물론 모든 노래가 한 사람에게 이런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2017년 4월 20일(목) KBS에서 방영한 <문화의 향기>에서 예술감독 송승환은 그가 기획한 뮤지컬 <난타>의 호소력과 관련하여 이런 말을 한다. “우리가 심장의 박동으로 살기 때문에 리듬에 원초적인 감흥이 있습니다.” 이 말은 리듬의 존재인 사람이 음악의 리듬을 만났을 때 생명력이 더해짐을 느끼는 현상을 잘 요약해서 표현한다.

   노래를 부르고 듣는 것에 생명력을 북돋아 주는 힘이 있다는 생각을 할 때 기억나는 영화 장면이 하나 있다. 2003년 미국 영화 <엘프 (Elf)>는 환상적이고 유머러스한 내용으로 크리스마스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작품이다. 이 영화의 절정 부분에서 산타의 썰매가 뉴욕 센트럴 파크에 추락하는데, 썰매가 다시 날아오르려면 크리스마스 정신이 더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이때 주인공 가운데 한 사람인 조비(Jovie)가 사람들 앞에 나서 이렇게 말한다. “크리스마스 신명을 퍼뜨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모두가 듣도록 크게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산타 클로스가 마을에 오네 (Santa Clause is Coming to Town)”을 부르고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따라불러 썰매는 다시 날아오를 수 있게 된다. 크리스마스 정신이 사랑과 나눔과 감사의 정신이며 그러므로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고 할 때, 노래를 부름으로써 이 정신이 증가한다는 것은 노래 부르기가 우리의 행복을, 곧 우리의 생명력을 더 증가시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철학자 강영계는 그의 책 <죽음학 강의>에서 장례식의 의미를 논의하는 가운데 노래의 생명력이 이미 사망한 사람에게도 적용되는 예를 소개한다.


각종 음식과 장송곡은 일종의 상징이야. 죽음은 말 그대로 무이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은 죽은 자가 완전히 무화되지 않고 아직 삶의 세계에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은 자를 위해서 음식을 장만하는 거야. 또 죽은 자에게는 악마(마귀)가 들러붙기 쉽기 때문에 . . . 고인이 강한 생명력을 갖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고인을 해칠 악마를 쫓아내기 위해서 산 사람들은 노래 부르는 거야.”[각주:7]


   생기를 더해주는 힘과 더불어 노래에 영속과 영원을 암시하는 특성이 있는 것은 노래의 리듬과 관련하여 몇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노래의 리듬이 일깨우는 생명력 자체에 영원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생명력은 생명의 지속을 뜻하며 우리 마음 깊은 곳에는 영원히 살고 싶은 갈망이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리듬은 어떤 요소가 반복되면서 나타난다는 사실도 영속과 관련이 있다. 어떤 것이 되풀이될 때 우리는 은연중에 이 반복이 계속되리라고 기대하는 듯 하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관여하겠지만 반복은 그 자체로서 반복되는 것을 긍정하기도 한다는 사실도 무관하진 않으리라 본다. 리듬에 실린 우리의 의식에는 작지 않은 관성이 있다 할 수 있다.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유명한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는 조르바와 소설의 화자 ‘나’가 조르바의 산투리 연주에 맞춰 함께 노래부르는 장면이 있다. ‘나’는 이때 경험하는 내적인 변화를 이렇게 기술한다.


우리의 근심은 흩어졌고, 사소한 문제는 사라졌고, 영혼은 절정에 이르렀다. . . . 크고 작은 걱정들, 모든 것이 푸른 연기가 되어 공중으로 사라졌고, 이제 남은 것은 강철로 된 새, 노래하는 인간 영혼밖에 없었다.


   이 구절에는 노래를 부름으로써 생명력이 넘쳐나는 경험과 영원을 감지하는 경험이 동시에 담겨 있다고 이해한다. “노래하는 인간 영혼”을 “강철로 된 새”라고 비유할 때 “새”는 자유로움, 곧 비등하는 생명력을, “강철”은 영속성을 의미한다고 본다.

   노래와 리듬과 반복과 영원을 서로 연결시켜 생각할 때 지나쳐버릴 수 없는 현상은 우리가 많은 경우 마음에 드는 노래를 되풀이해서 부르거나 듣는다는 사실이다. 우선 우리가 어떤 노래를 다시 경험하고 싶은 것은 이 경험에 (비록 늘 밝은 정서나 행복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반복할 만한 가치가 있어서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반복해서 경험하고 싶은 가치는 영속할 자격이 있는 가치일 수 있다. 바꾸어 말해 영원한 가치를 되풀이해서 경험하고 싶어 우리는 그 통로가 되는 노래를 반복해서 부르거나 듣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각주:8] 이때 노래의 리듬, 곧 이미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어 노래가 되풀이될 때 반복의 반복 현상을 보이는 리듬도 영속할 자격이 있는 가치를 경험하는데 기여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판단은 구체적인 노래 하나하나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노래의 리듬이 어떤 방식으로든 어느 정도로든 다시 경험하고 싶은 노래의 감흥에 기여한다고 추정된다. 그리고 이럴 때 노래의 리듬은 영원이라는 개념과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노래에 별과 대조적으로 구체적인 삶의 상황과 맥락을 반영하는 특성이 있다고 했고, 이어서 노래 자체에 생명력 증진과 영속성 암시라는 특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제 이런 생각을 모두 아울러서“별을 노래하는 마음”을 이해한다면 ‘보편적이고 숭고한 이상을 내 구체적인 삶에 적용하여 생명력을 증진하고 영속적인 의미를 창조하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런 해석은 그 다음 구절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와도 잘 어울릴 수 있다고 보인다.

   다음 글에서는 “노래하는”에 담긴 통합 및 의미 전달의 함의와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에 대한 해석을 이야기하면서 이를 또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와 연결시켜 생각해 보고자 한다.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 웹진 <제3시대>



  1. 문학동네, 2016년, p.347. [본문으로]
  2.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년. [본문으로]
  3. 민지사, 1998년, p.358. [본문으로]
  4. 마이클 퍼버(Michael Ferber)가 쓴 <문학상징사전 (A Dictionary of Literary symbols)>(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에서는 별이 서양문학에서 상징했던 의미로서 ‘달, 해, 영광, 영웅, 황제, 명성, 구원, 천사, 방향, 운명, 기후, 점술,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 사랑하는 사람, 셀 수 없이 많음, 1년 중 시점(절기, 계절), 인간 의지에 대한 영향력, 탄생과 죽음 등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 등을 제시한다. 한국 시인 윤동주의 시에 나오는 “별”의 의미를 얻기 위해 서양 문학사에 등장하는 “별”의 의미를 참조하는 것은 쓸모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윤동주의 독서에 서양 문학 작품이 포함되었고 특히 그가 릿교 대학에서 전공한 분야가 영문학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열거한 서양 문학사에 나오는 별의 뜻을 보면 대개 진중하거나 거창하거나 고상한 뜻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보통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별의 연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연상과는 상당히 다른 인식을 우리는 기형도의 시 “위험한 가계, 1969”의 다음 구절에서 만난다. “하늘에는 벌써 튀밥 같은 별들이 떴다.” [본문으로]
  5. 물론 이 시에 나오는 “노래”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의 ‘노래’보다는 어떤 다른 활동이나 태도를 뜻하는 은유로 쓰였다고 보는 것이 더 나은 듯 하다. 하지만 어떤 은유를 이해할 때 그 문자적 의미의 함의를 통해 의도하는 의미에 도달하는 것은 당연하고 적절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주어진 구절을 해석하기 위해 ‘노래’의 문자적 의미에 연결된 의미들을 탐색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본문으로]
  6. 이 정의는 다음 두 사전에 나오는 ‘rhythm’이라는 표제어의 정의에 바탕하여 형성했다. The American Heritage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4th ed. (Boston: Houghton Mifflin Company, 2006); Webster’s Thir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Unabridged (Springfield, MA: Merriam-Webster, 1993). [본문으로]
  7. 새문사, 2012년, p.153. [본문으로]
  8. 영원과 반복을 이렇게 연결시키는 생각을 배운 것은 마크(Marc)라는 사람이 자신의 블로그 <못된가톨릭(BadCatholic)>에 올린 “의례, 영원의 증거(Ritual, Evidence of Eternity)”(2013년 4월 1일)라는 글에서이다. 이 글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장은 “영원은 반복을 요구한다 (Eternity demands repetition)”이다. http://www.patheos.com/blogs/badcatholic/2013/04/ritual-evidence-of-eternity.html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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