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시선의 힘] 샌 가브리엘 미션에 가면 오래된 포도나무가 있다(박여라)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7. 8. 29. 17:00

본문



샌 가브리엘 미션에 가면 오래된 포도나무가 있다

 



박여라*




    칠레 와인 회사 ‘산 페드로’는 1865년에 설립되었다. 그래서 생산하는 와인 라인 중 하나를 ‘1865’라 이름 지었다. 한국에서 아주 인기다. 2004년 발효된 칠레 FTA, 뒤이은 일본 만화 ‘신의 물방울'이 가져온 와인 담론도 큰 역할을 했지만, 마케팅 언어가 잘 들어맞았다. 18세에서 65세 누구나 즐기는 와인이다, 골프 좋아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18홀 65타 치세요~ 선물하고, 세일할 때 마트에서 18천원인데 레스토랑에서는 65천원이라는 둥.


    레토릭으로 흥행(?)을 불러일으키기로는 최근 2천 년 동안 예수가 최고다. 복음서 수많은 이야기 속 예수의 언어는 시대, 나이, 지역, 인종, 문화, 성별 할 것 없이 수많은 차이를 끌어안는다. 여전히 내게는 예수 자신을 참포도나무로 비유하면서 하나님은 농부이시며 너희는 가지라 한 요한복음 15장이 화두다. 여기서 포도나무 이야기는, 그러니 너희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마무리된다. 


    이번 여름에 미국 캘리포니아 ‘천사장 성 가브리엘 미션’에서 1861년에 심었다는 포도나무를 만났다. 1860년대라면? 캘리포니아는 동부와 다른 양상이긴 했지만, 미국이 남북으로 갈라져 전쟁을 벌일 때부터 있던 나무라니!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그렸고, 칠레 와인 회사 산 페드로가 설립된 때도 이즈음이다.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은 때이며,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온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가 대동강에서 살해되고 병인박해, 병인양요가 일어난 1866년에도 이 나무에 와인 만들 포도가 열리고 있었다.


    엘에이 도심에서 차로 20분 정도 떨어진 샌 가브리엘에 있는 이 미션은 후니페로 세라 신부가 1771년 9월 8일 세웠다. 캘리포니아 21개 미션 중에서 4번째다. 남쪽으로 90km 거리에 있는 샌 후안 카피스트라노 미션과 함께 샌 가브리엘 미션은 대규모 포도경작을 했다. 한창때는 포도밭이 170 에이커(68만8천 제곱미터, 20만 평)에 이르렀다고 한다.


    150살 넘은 포도나무를 만나는 일이 소기 목적이긴 했는데, 가서 보니 샌 가브리엘 미션은 과거에 포도뿐 아니라 오렌지, 올리브 같은 과실과 곡식, 채소 재배와 돼지, 양, 소 같은 가축에 벽돌공장과 목공, 수공예, 비누와 초 공장까지 말하자면 꽤 커다란 산업단지 같았다. 실제로 여기서 생산된 것들이 생산이 어려운 인근 미션에 공급되었다고 한다. 교통요충지라 무역이 활발했다고 한다. (물론 일은 원주민들이 했고 고된 노동과 질병 등으로 죽은 원주민 6천 명이 이곳에 묻혔다고 한다 ㅠㅠ)


    하마터면 포도나무 고목을 못 만날 뻔했다. 왜냐하면 ‘나이 든 어머니 포도나무'라고 이름 붙은 이 나무는 미션 안에 있는 게 아니라, 미션에서 길을 건너 마을회관 마당에 있다. 미션 안에도 제법 큰 포도나무가 하나 있어서 성당 바깥에 길게 난 회랑 위를 이 포도나무의 긴 가지들이 지붕처럼 덮고 있었다. 이 나무가 그 나무인가, 하고 떠나려다가 미션으로 가는 길에 보았던 허름한 대문 앞으로 갔다.


    ‘포도나무 공원'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대문이 아까는 닫혀 있었는데 다시 가보니 활짝 열려 있었다. 어머니 포도나무는 거기 있었다. 문헌을 뒤져보니 이 포도나무 한 그루에서 뻗어 나온 나뭇가지가 280평(930 제곱미터)을 덮었는데 여러 해 전 깔끔하게 다듬었다고 한다. 그래도 서른 명은 충분히 둘러앉을 수 있을 만한 커다란 공간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 그 아래에서 캘리포니아 여름 땡볕을 피할 수 있었다.


    수령이 한 80년 정도로 굵고 키 작은 포도나무가 줄지어 있는 포도밭은 가보았어도 이렇게 땅에서 몸을 비틀며 솟아 나오는 커다란 짐승 형상을 하고 있는 포도나무 한 그루를 목격하니 기분이 묘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가느다란 가지가 여러겹으로 촘촘하게 뒤엉켜있었다. 더 놀라운 건 포도 열매가 많이 달려있다는 거였다. 젊은 포도나무의 탐스러운 열매와는 분명 다른 모습이었지만, 나이 든 어머니는 긴 세월 지나도록 꾸준히, 최선을 다해 열일하고 계셨다. 예수는 이런 사랑을 말한 걸까. 질문을 쥐고 있으면, 놓지 않고 계속 물으면 답을 만나는 날이 오겠지. 


    덧붙임. 와인보다는 포도나무 이야기지만, 꼭 1년만에 와인 글을 쓴다. 다시 시작한 여행이 기대된다.



* 필자소개_ 박여라

    분야를 막론하고 필요한 스타일과 목적에 따라 한글 텍스트를 영문으로 바꾸는 진기를 연마하고 있으며, 그 기술로 먹고 산다. 서로 다른 것들의 소통과 그 방식으로서 언어에 관심이 많다. 미디어 일다(ildaro.com)에 ‘여라의 와이너리’ 칼럼을 썼다. 미국 버클리 GTU 일반석사 (종교철학 전공) /영국 WSET 디플로마 과정 중


ⓒ 웹진 <제3시대>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