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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옳은 일, 해야만 하는 일에 관한 우리의 입장 < 택시운전사 (장훈, 2017)>(이희승)

영화 읽기

by 제3시대 2017. 9. 14.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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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은 일, 해야만 하는 일에 관한 우리의 입장 

< 택시운전사 (장훈, 2017)>




이희승*



  영화라는 매체 혹은 예술형식의 탄생부터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영화 스크린에 옮기는 작업은 숙명처럼 영화의 역사 그 자체와 궤를 함께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란 ‘과거’ – 그것이 역사적 과거를 복기하는 드라마적 구조이든, 카메라 앞에서 벌어졌던 과거의 액션이 스크린 위에서 현재화된 환시라는 매체적 구조이든 – 를 현재의 시점으로 담아내는 그릇이기 때문이겠지요. 물론, 역사에 대한 주관적 기록 혹은 과거를 기억하고 소통하는 통로를 제공하는 것이 예술의 가장 근본적인 역할 중 하나라는 점도 영화가 역사를 재현하고 현재화하는 것이 얼마나 당연한 과정인지를 잘 설명해 줍니다.


  우리나라 영화사도 이런 영화의 근원적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지요. 이준익 감독의 <황산벌>과 <평양성> 처럼 삼국시대를 배경으로한 슬랩스틱 코메디, 유하 감독의 <쌍화점>이 보여 주는 성리학이 도달하기 전 고려시대 상류층의 섹슈얼리티,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무수한 역사 드라마들, 일제 강점기를 살아 낸 한국인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다양한 영화적 시도들,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처럼 군사독재와 개발지상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발묶인 한국의 현대사가 빚어낸 비극적 인간상을 직시하는 영화 등, 수많은 한국 영화들이 역사와 영화라는 두 축이 만들어 내는 공간에 나름의 좌표를 찍어 왔습니다. 올해 화제몰이를 하며 개봉한 두 영화, <군함도>와 <택시운전사>는 이런 맥락에서 서로 비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 같네요. 결코 밝지 않은, 회한과 수치심 그리고 분노가 마구 뒤엉킨 시대를 돌아 보는 우리의 입장에 관한 서로 다른 의견들이 거의 동시에 개봉한 두 영화에 대한 평가를 분분하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제 강점기가 최근 한국 영화에 어떻게 비춰지고 있는가에 대한 소논문을 준비하고 있던 저에게, 일본 문화사를 가르치고 있는 일본인 동료가 자신이 논문지도를 하고 있는 대학원생인 한국 학생과 함께 뉴질랜드에서도 개봉한 류승완 감독의 <군함도>를 함께 보자는 제안을 해 온 일이 있습니다. 영화 관람 후, 셋이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참으로 오묘한 조합이었습니다. 그후 며칠 간격으로, 정확히 같은 세대로 같은 시대를 통과한 동갑내기 남편, 그리고 뉴질랜드에서 태어난 사춘기 딸아이와 함께 <택시운전사>를 보러 갔지요. 두 눈이 벌겋게 되어 영화관을 나오는 엄마 아빠를 올려다 보던 딸아이의 표정 또한 형언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물론 이 자리에서 두 개의 서로 다른 경험에 관한 정리된 생각을 전달할 수는 없지만, 영화와 역사가 만나서 만들내는 공간이 결코 어떤 시제, 시점, 시선에 갇힐 수 없는 다면체적 경험을 유발한다는 점은 확실한 것 같네요.


  5월의 광주를 영화화할 수 있게 된 것은 사실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전두환 - 노태우 정권의 삼엄한 통제, 민주화이후에도 터부시되어온 소재에 대해 상업영화 제작사들이 느끼는 부담감, 왜곡된 보도를 통해 오해와 편견을 가지고 광주민주화 운동을 기억하는 관객들의 혼재 등의 이유로, 아직도 5.18은 다루기 어려운 영화적 소재로 남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상처 깊은 과거사가 늘 그렇듯, ‘80년 5월 광주’를 스크린에 담는다는 것은 창작과 기록이라는 두개의 서로 다른, 심지어 배척되는 지점 사이에서 끊임없이 번민해야 하는 과정을 전제로 하기때문에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뜨거운 감자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예상되는 불이익, 상업적 비평적 불확실성, 그리고 불투명한 역사기록 등등에도 불구하고 – 80년 5월 광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고, 광주 사람들은 어떤 비극을 견뎌내야 했는가, 이 비극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영화적 답변을 시도하는 일은, 주관적 사고를 통한 수단적 접근이나 어떤 선행적 목표에도 의존하지 않는 칸트의 정언명령처럼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절대명령(absolute maxim)은 광주의 기억을 영화로 만들어내는 스토리의 외적 공간에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특히, <택시운전사>는 이런 절대명령에 반응하는 자각한 시민으로써의 인간의 모습에 관심을 맞추고 있는 듯합니다. 안전하고 편안한 일본에서 근무하고 있던 독일의 외신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토마스 크레취만)은 신군부의 등장과 광주에서 들리는 심상치 않은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서울로 달려옵니다. 영화의 초반은 환상적인 근무지인 일본에서 안온한 일상을 보내는 서양의 외신 기자들과 쾌적한 환경이 결국 언론인에게 독이 될 수도 있음을 경계하는 위르겐 힌츠페터를 대조적으로 보여 줍니다. 일본을 떠날 때도, 그리고 다시 한국을 가까스로 빠져 나가 일본으로 돌아 가는 후반부 장면에서도, 그는 언론인이라는 정체성을 벗어나 거대하고 초월적인 시대정신의 환상에 젖기보다는, 지금 당장 자신에게 임박한 ‘광주에서 벌어지는 일을 사람들에게 정확히 알려야 한다’는 정언명령을 직업적 윤리 안에서 충실하게 이행하고자 애를 씁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영화의 제목 <택시운전사>는 이 영화가 가진 옳은 일, 그리고 해야 하는 일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것 같습니다. 의인 ‘김사복 혹은 김만섭’이 아닌 <택시운전사> 김만섭이라는 주인공은 옳은 일, 해야만 하는 일에 맞닥뜨린 순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 중 최선의 선택은 어디에서 나오는가에 관한,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시선을 담지하고 있지요. 영화의 중반부에 김만섭이 순천에서 딸아이에게 다시 광주로 돌아가야 하는 사정을 전화로 설명하는 대사도 이런 해석을 확인해줍니다. “아빠가 손님을 두고 왔어.”


    역사의 변곡점에 존재하는 비극들의 원인과 극복도 바로 이 정언명령에 대한 서로 다른 반응으로 결정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박정희 암살 이후, 신군부는 정언명령에 배치되는 가언 명령에 충실한 태도를 가지게 됩니다. 즉, ‘당연히’ 국민을 위한 최선을 추구해야 하는 국가 권력을, 야심에 눈먼 정치군인들이 정권을 유지하고 기득권을 독점하고 국가의 방향을 자신들의 사적, 정치적 이익에 유리한 쪽으로 결정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해 버리고 만 것이지요. 앞선 18년간의 군부독재의 결과로 엄청난 강도의 국가 권력이 일부 세력의 손에 좌지우지될 수 있을 만큼 비정상적으로 집중되어 있던 상황에서, 잘못된 국가 권력의 사용은 무고한 시민을 향한 어마어마한 폭력이 되고, 언론 장악으로 인해 초법적인 국가 권력의 폭력행사는 정당화되고 일상화되어 버립니다. 아직도 광주를 온전히 해결하지 못한 한국의 현대사, 그리고 이런 현대사의 비극적 단면을 영화를 통해 반복적으로 조우하는 우리 모두의 ‘지금’은, 이런 중첩된 역사적 과오들이 만들어낸 가상의 시나리오인 ‘북에서 내려운 간첩과 용공세력이 힘을 모은 광주 사태’라는 왜곡된 역사가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얼마나 오랫동안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현재진행형으로 생생하게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택시운전사>는 이런 역사적 현상이 현재 시점으로 진행되고 있을때, 개인은 자신들의 삶의 영역을 벗어난 초월적인 시선으로 역사의 흐름을 바라볼 능력이 없음을 강력하게 시사합니다. 위르겐도, 김만섭도, 그리고 위르겐과 김만섭을 사력을 다해 쫓는 사복경찰들도 ‘이게 도대체 다 무슨 난리인지’ 알지 못한채 80년 5월 광주로 흘러 들어 오게 됩니다. 이때, 영화의 주된 관점이 외부인의 시선과 동일시된다는 설정은 아직도 한국현대사가 광주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 비극을 겪은 내부자들의 시선과 합일되지 못한 채, 신군부의 ‘빨갱이들이 주도한 광주사태’라는 날조된 시나리오와 계속적이고 지속적인 충돌을 통해 아주 천천히 진실에 가까워지고 있는 과정 속에 있음을, 그 뿌리깊은 현대사 인식의 한계를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화 <택시운전사>가 광주 택시가 아닌 ‘서울 택시’의 시선으로 5월의 광주를 통과하는 구조를 선택한 점은, 개인의 시점과 이해는 언제나 역사의 흐름에 대해 외부자로 존재한다는 근본적인 한계와 함께, 권력에 의한 의도적인 역사 왜곡으로 인해 발생한 한국 현대사의 문제점을 묶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여러 비평가들이 지적한 대로 <택시운전사>는 다소 안일한 감상적인 접근이나 상업영화로써의 역할에 과도하게 몰입한 듯한 작위적인 설정들이 가지는 한계들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송강호라는 걸출한 배우가 가능하게 한 <택시운전사>의 정점은 간과하기 어려운 영화적 힘을 발휘합니다. 순천의 한 식당에서, 바로 옆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국가 권력의 폭력에 대해 너무나 일상적이지만 치명적인 ‘오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허겁지겁 국수 한 그릇을 먹고 있던 김만섭은 선택의 순간에 놓이게 됩니다. <택시운전사>는 송강호의 연기를 통해, 일상화된 폭력의 진짜 얼굴을 목격하고도 그대로 눈을 감는 ‘보통사람’이 될 것인지, 아니면 예상 가능한 모든 위험과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두고온 손님을 데리고 와야 한다’는 무조건적 명령에 반응하는 자각한 시민이 될 것인지를 선택하는 순간의 고뇌를 정직하게 전달합니다. 온몸이 벌벌 떨리는 고뇌 끝에 택시를 돌려 다시 광주로 향하는 김만섭(송강호)의 얼굴을 정면에서 잡은 클로즈업은, 어떤 도덕적 기준이나 합리적 분석도 정언명령 앞에 선 개인을 도울 수 없음을 절절하게 표현합니다. 오로지 정언명령에 반응하는 윤리적 체험, 그리고 그 체험을 행동으로 발현하는 용기와 결단은 평범한 개인이 역사의 흐름에 참여하는 유일한 통로라는 사실도 말이죠. 저에게도 <택시운전사>의 클라이맥스는, 역사의 외부자에서 역사의 주체로 전위하는 그 순간의 고뇌와 희열을 경험한 개인들이 모여서 만들어 낸 시민사회가 시대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꽃잎>, <박하사탕>, <화려한 휴가>, <26년>, 그리고 <택시운전사>를 통해 80년 5월의 광주를 생각해 보려는 시도는 이제 시작입니다.


* 필자소개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 강사 및 정신분석가. 동 대학의 미디어 영화학과에서 각색영화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아시안학과에서 한국 영화와 텔레비젼 드라마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호주 정신분석학회의 정신분석가 과정을 수료하고, 국제 라캉 포럼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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