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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전쟁과 가부장제의 역설, 그것을 치유하는 인생의 역설(권오윤)

영화 읽기

by 제3시대 2017. 9. 27.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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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가부장제의 역설, 그것을 치유하는 인생의 역설[각주:1]


 

권오윤[각주:2]



       전쟁은 모든 것을 망칩니다.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며, 인류가 성취한 경제적 번영은 잿더미로 변하고, 사회 문화적 자산은 한순간에 휴지 조각이 되고 맙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트라우마에 시달리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에 잠겨 시간을 허비하게 되지요.

       이 영화 <프란츠>는 바로 그런 처지에 있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독일의 어느 마을, 전쟁으로 약혼자 프란츠를 잃은 안나(폴라 비어)는 그의 부모와 함께 살며 날마다 무덤을 돌보고 있습니다. 아직 젊고 아름다운 그녀에게 구혼하는 사람도 있지만, 안나는 아직 다른 사람과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안나는 프란츠의 무덤가에 서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는 프랑스 청년 아드리앙(피에르 니네이)을 보고 누구인지 궁금해 합니다. 심지어 그는 저녁 무렵에 우수에 젖은 얼굴로 집까지 찾아와 프란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요. 안나는 아드리앙이 프란츠가 프랑스 유학 시절 사귀었던 친구일 거라고 확신합니다.

       안나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아드리앙은 이후로도 여러 번 집을 찾아 프란츠에 대한 추억을 들려 줍니다. 프란츠의 부모와 안나는 예의 바르고 섬세한 아드리앙에게 금세 매료됩니다. 안나는 프란츠 부모의 배려로 아드리앙과 단둘이 시간을 보낼 기회를 자주 가지면서 그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기도 하지요. 그러나 아드리앙으로부터 그동안 숨겨 왔던 진실에 대해 듣게 되고, 감정적으로 큰 혼란에 빠집니다.


할리우드 고전의 리메이크


       이 작품은 할리우드의 독일 출신 명감독 에른스트 루비치가 만든 <내가 죽인 남자>(Broken Lullaby)(1932)를 프랑수아 오종 감독이 리메이크힌 영화입니다.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한 남성의 죄책감에 초점을 맞춘 원작과는 달리, 안나의 감정에 집중해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배우, 로케이션, 촬영 이렇게 세 가지에 공을 들여 담백하게 표현한 점이 돋보입니다. 프랑수아 오종 하면 재기발랄한 내러티브 구성과 도발적인 문제 의식 같은 것이 떠오르기 마련인데, 이 영화는 형식상 매우 고전적입니다. 그림 같은 공간을 배경으로 배우의 자연스런 연기를 이끌어 내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화면에 담는, 영화 제작에서 기본이 되는 것들에 충실합니다.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신중히 계획된 인물 샷들은 이 영화의 백미입니다. 앵글과 샷의 크기, 초점 이동 등을 세심하게 조절하여 화면에서 인물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도록 하지요. 극의 구성상 중요한 장면들은 물론이고, 무덤가에 서 있거나 기차역에서 떠나는 이를 배웅하는 등 언뜻 평범해 보이는 순간들까지도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곤 하는 것은 모두 그 때문입니다.

      이 밖에도 영화 대부분을 차지하는 현실 장면의 흑백 화면에서 꿈 같은 시간을 의미하는 컬러 화면으로 바뀌는 순간들, 아드리앙이 프란츠의 가족 앞에서 연주하는 쇼팽의 녹턴 20번의 애수어린 멜로디 등이 낭만적인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킵니다. 이렇게 영화는 전사한 연인의 친구에게 끌리는 안나의 마음에 집중하며 서서히 절정에 다다릅니다.

       안나 역을 맡은 독일 여배우 폴라 비어는 20대 초반이라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선 굵은 연기를 보여 주며 존재감을 과시합니다. 섬세한 감정 표현보다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때와 드러낼 때의 극적인 차이를 통해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쪽입니다. 그녀는 이 작품으로 2016년 베니스 영화제 신인배우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전쟁의 비극 초래한 가부장제, 그것을 뒤엎는 역설


       이 영화는 전쟁이 초래한 비극에 가부장제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는 점을 적시합니다. 극 중 프란츠의 아버지가 후회하듯, 수많은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몬 것은 조국의 영광을 앞세운 아버지들이었습니다. 안나 역시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의 희생양입니다. 약혼자의 부모를 모시고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장래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자기 의사와는 상관 없이 원치 않는 결혼을 권유받기도 하니까요.

       따라서 극 중 안나가 겪게 되는 일들은 가부장제의 미몽과 억압에서 서서히 벗어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녀는 독일 마을에서 벗어나 파리와 프랑스 시골 저택까지 간 끝에,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는 것만이 행복을 가늠하는 잣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안나의 각성은 두 가지 역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는 안나를 중심으로 오가는 거짓말들입니다. 프란츠나 아드리앙은 안나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이야기를 지어 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잘못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그녀를 가부장적 질서 안에 머무르게 했습니다.

       안나는 이것을 프란츠의 부모에게 고스란히 돌려 줍니다. 그들의 낭만적 환상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자신이 가부장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틈을 만들어 내지요. 한 때는 그녀를 옭아맸던 허구의 이야기들이 이제는 그녀에게 날개를 달아 준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안나가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보게 되는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 <자살>입니다. 살롱 전시에 선정되지 못한 것을 비관하여 자살한 화가를 적나라하게 그린 이 그림은 생생한 죽음의 현장을 담고 있지만, 안나에게는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계기를 만들어 줍니다.

       스토리가 안나의 애초 바람대로 흘러갔더라도 충분히 재미있었을 것입니다. 현실감은 떨어지지만 낭만적인 연애담이 주는 만족감이 상당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감독의 선택은 달랐습니다. 안나는 좌절을 겪은 끝에야 진정한 희망의 존재를 깨닫게 됩니다. 모든 절망의 끝에는 반드시 극복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며 그것을 붙잡는 것은 인간의 의지와 노력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영화 <프란츠>의 미덕입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오마이뉴스의 7월 30일자 기사 <전쟁과 가부장제의 상처, 그것을 치유하는 인생의 역설>(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346530)로 게재된 원고입니다. [본문으로]
  2. <발레교습소> <삼거리극장> <화차> 등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현재 연출 데뷔작을 준비 중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물 [권오윤의 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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