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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고통을 대할 때 : 헤로인보다 미메시스 (강선구)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7. 9. 27.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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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대할 때 : 헤로인보다 미메시스




강선구*

 


    멕시코 국경지대인 티후아나에 사는 리카르도(가명)의 삶은 평범했다. 몇 년 전까지 그에게는 두 아이와 아내가 있었으며, 직장을 다녔다. 하지만 현재 그는 2불짜리 헤로인에 중독되어 온 몸이 고름으로 덮여 있으며, 그로 인한 육체적 고통은 그를 매일 밤 잠들지 못하게 한다. 고름을 치료할 돈도 없고 직접 자신의 몸을 치료할 엄두를 못 낼 만큼 심각한 상황 앞에서, 그는 고통을 이겨낼 최선의 방법으로 또 다시 헤로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헤로인을 구입하기 위해 돈을 구하는 방법은 구걸이었다. 리카르도가 거주하는 멕시코 국경지대인 티후아나는 미국으로 진입하기 위해 남미 각국에서 모여든 이주민들이 거리에서 노숙 생활을 하고 있었고, 더욱이 트럼프 대통령 집권이후 미국에 진입하지 못하고 대기중인 이주민들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것은 마피아 조직들의 악랄한 움직임이다. 마피아 조직들은 거리로 내몰린 고통에 처한 사람들에게 마약과 헤로인으로 달콤한 유혹을 건넨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처음 몇 달 동안 마약과 헤로인을 무료로 나눠주는데, 생의 고통에 처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유혹은 피할 수 없는 덫이다. 중독은 그렇게 시작된다. 마피아 조직은 그렇게 헤로인에 중독된 사람들에게 마약 값의 지불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거리의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돈을 모으기 위해 구걸을 시작하게 되지만 결국 겉잡을 수 없는 빚더미에 앉게 된다. 상황이 여기까지 오면 마피아 조직들은 더 이상 가망 없는 채무자들을 장기매매나 성매매 등의 방법으로 처리한다. 이는 티후아나까지 가지 않더라도, 미국 캘리포니아 도시의 노숙인 밀집지역인 스키드로우(Skid Row)에서 흔하게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물론 멕시코의 경우는 도시경찰이 마피아들과 결탁했기에 더 심각한 상황이지만, 미국의 노숙인들 역시 소위 ‘거리환경미화’를 목적으로 자주 도시로부터 추방되곤 한다. 이러한 풍경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비슷한 것 같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내가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곳 가까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리카르도를 만난건 3주전 8월 뜨거운 여름 어느 날이었다. 그는 더 이상 걸을 수조차 없는, 고름으로 가득한 몸을 휠체어에 의지한 채로 우리를 찾아왔다. 우리 팀은 매달 한 번씩 티후아나의 같은 지역에 지난 몇 년간 의료와 배식, 미용 서비스를 제공하는 교회의 선교사역을 하는 중이었다. 그의 행색은 무척 메말랐었다. 뜨거운 여름날씨라 더 그런지 피부도 메마르고 몸짓도 메말라있었다. 자기의 몸이 치료가 가능하겠냐고 물으면서 그는 조심스럽게 앉아 있었다. 우리 팀의 의료를 담당하시는 한 집사님은 고름이 덮인 끔찍한 몰골의 몸을 주저함 없이 만지시면서 일단 고름을 다 짜내보자고 제안하셨다. 그리고 둘의 사투는 시작되었다. 그 광경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리카르도는 고통을 못 이겨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고, 그 소리는 곧 통곡으로 바뀌었다. 1시간가량 그의 다리를 가득 채운 고름들을 짜내는 동안,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어떤 말도 건넬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가브리엘라(가명)라고 본인을 소개한 한 여성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배식팀에서 밥을 받아서 지나가던 중 그의 통곡을 듣고 왔다고 했다. 가브리엘라는 조용히 리카르도에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몇 년 전 그녀는 사랑스러운 두 아들과 함께 넉넉하지는 않더라도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살인청부업자 일행이 옆집에 사는 남자들을 죽이기 위해 찾아왔는데, 자기 아들들을 옆집 남자들로 착각해 한꺼번에 두 아들 모두를 살해했다. 그녀는 감당할 수 없는 억울한 일을 당했지만, 경찰도 그 어떤 기관들도 가난한 그녀의 일을 돕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매일 아침에 눈을 뜨면 그녀의 눈 앞에는 사랑스러웠던 두 아들들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그 아련함이 너무나도 고통스럽기에 그녀는 매일같이 죽음을 경험하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누군가 맞춰 준 헤로인에 취했었을 때, 그녀는 유일하게 그 고통을 잠시 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망각상태를 지속하기 위해 헤로인에 스스로 중독되는 삶을 이어갔다. 그녀는 헤로인 없이는 잠도 잘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따금씩 기부받은 옷가지들을 팔거나 몸을 팔면서 헤로인을 구하고 있는 그녀는 헤로인에 중독되기를 선택한 자신의 결정이 원망스럽다고 담담히 말한다. 그녀의 몸 역시 썩어가는 중이었고, 자식을 잃은 고통은 헤로인이 주는 찰나의 망각을 지나면서 더욱 깊숙이 그녀의 영혼에 새겨지는 중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통곡하며 고름을 짜내고있는 리카르도에게 말을 건넨다. 왜 우냐고. 그리고 그녀도 운다. 리카르도는 몸이 아파서도 울지만, 삶의 고통이 너무 버거워서 운다고 말한다. 홀로 감당하기에 너무 버거운 고통 앞에 그와 그녀는 그저 운다.


   어쩌다보니 나는 미국에 2년째 거주중이다. 이 곳의 풍경은 한국과 많이 다른 듯 하면서도 닮아 있다. 이주민이 된다는 경험은 불안에 익숙해져야만 하는 일이라는 걸 터득하고 있는 시간들이다. 나는 외부인으로서 미국에 살고 있으면서, 가장 익숙한 곳이었던 한국에서도 외부인이 되어가는 중이다.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외부인이 되어갈수록, 정착인이 되고픈 나의 욕구도 강렬해진다. 하지만 외부의 어느 곳에서도 나의 정착을 확신할 수 없다 보니 내면적 주체에 대한 확고한 무언가를 기대하지만, 그마저도 한없이 불안하다.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불안이라는 고통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에 따르면, 불안이라는 속성은 존재에게 필연적인데 그 이유는 존재가 세상 가운데에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불안과 마주할 때, 존재는 본질적인 존재물음을 선택할 수도 있고, 비본질적인 존재물음을 택할 수도 있다. 비본질적인 존재물음은 존재불안의 본질에 직면하지않고, 세상의 기준들을 통해 해결을 도모하는 회피하는 태도이다. 과연 하이데거가 말하는 본질적인 존재에 대한 물음이 내 안의 불안을 극복하게 만들수 있을까. 또는 테오도르 아도르노가 말하는 고통의 발생원인인 자기유지적 메커니즘을 비판하는 비동일시적 태도인 ‘미메시스’가 그 답이 될수 있을까. 아도르노는 자기유지적 태도는 동일성의 원리를 필연적으로 수반하며, 이는 지배와 폭력의 메커니즘으로 이어진다고 지적한다. 그렇기에 나와 다름을 개방하는 비동일시적 태도를 가지고, 외부의 고통을 내면화 해보는 태도를 미메시스적 태도라고 설명한다. 나의 불안과는 비교가 불가능한, 멕시코에서 만난 거대한 고통들의 실체 앞에서, 존재의 질문이나 미메시스적 태도가 과연 잠깐의 망각을 허락해주는 헤로인의 효능보다 삶에 유용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에 짓눌린 자들에게 있어 고통을 해석하는 행위 그 자체는 삶의 다른 방향성을 가질 중요한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해석의 출발은 실존적 개인에게 우선적으로 놓여 있다. 하지만 고통이 더욱 괴로운 이유는 바로 ‘홀로있음’ 때문이다. 물론 불안과 고통은 세상에 타자들과 함께 놓여 있는 상황이기에 발생한다는 하이데거의 지적에 동의하지만, 고통이라는 실존적 상황에 직면해서부터 오롯이 홀로 담당해야 한다는 사실은 괴로움을 증폭시킨다. 홀로 해석해야 하고, 홀로 나아가야 한다. 이 때부터 고통은 개인의 고유한 일이 되며, 그래서 더 고통스럽다. 예수가 말한 복음인 ‘좋은 소식’은 나홀로의 고통이 아닌 ‘신과 함께 함’이 건네주는 치유의 소식이다. 고통은 함께할 때 치유의 가능성을 얻는다. 물론 그 함께함이 간섭이나 정죄의 형태로 흘러가면 더 끔찍한 고통이 된다. 그러나 신이 인간의 고통에 함께 하는 방식을 통해 우리는 고통을 새롭게 해석할 가능성을 얻는다. 그 방식은 전능함을 내세우며 상대방을 자기의 틀 안으로 통제하거나 간섭하는 것이 아닌, 자기유지의 속성을 접어두고 자기와 다른 상대방의 고통에 함께 참여하는 방식이다. 이것이 아도르노가 말하는 동일시를 극복하는 미메시스적 태도일지도 모르겠다.


    리카르도에게 말을 건네는 가브리엘라에게서 나는 미메시스를 느꼈다. 그녀는 본인의 고통을 통해 상대방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함부로 조언하거나 간섭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고통을 자기 안에 가두지 않았고, 상대방에게 고백함으로써 상대방의 고통이 홀로 있지 않도록 문을 열어주었다. 그들은 그저 서로의 고통에 참여한 것이다. 서로를 동일시(identify)하지 않고, 그렇다고 서로를 대상화(reify)하지도 않는 관계가 고통에 대한 치유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와 그녀의 사건적 만남은 ‘나홀로 고통’과 사투하는 굴레에서 벗어나, 함께 고통을 해석할 수 있는 치유적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 가능성은 나로 하여금 불안과 고통에 적응하려는 수동적 태도가 아닌, 불안과 고통을 입체적으로 해석하고자하는 추동적 태도로 나아가게 만들며 ‘함께 해석할’ 동역자들과의 만남을 희망하게 만들어주었다.


* 필자소개

현재 '목회적 삶'과 '목회자의 삶'의 경계에서 고민중에 있으며, 친구들에게는 네살 선구라 불리우고 있다. 미국 Claremont Graduate University에서 종교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며, 목사수련생 과정을 밟고있는 중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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