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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눈]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2 (심범섭)

비평의 눈

by 제3시대 2017. 10. 11.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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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2



심범섭*



들어가는 말


   지난 번 글에서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 나오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라는 구절을 나름대로 해석하면서, 이때 다하지 못한 이야기를 이번 글에서 마저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 “노래”라는 표현에 담을 수 있는 의미 전달 및 통합의 뜻과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라는 표현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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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의미 전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의미’라는 말에는 적어도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모든 단어에는 의미가 있다”라는 말에서처럼 그 내용이 무엇이든 어떤 ‘뜻’이라는 뜻이며, 다른 하나는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라고 말할 때처럼 ‘가치’, ‘목적’과 상통하는 뜻이다. 노래에는 언어로 이루어진 노랫말이 있으므로 노래가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전달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리고 노래는 특정한 리듬과 가락이 현저하게 감지되는 음악적인 성격 때문에 노랫말의 의미를 더 효율적으로 더 호소력있게 전달할 수 있다.


   그런데 “별을 노래하는”라는 표현에서 “별”이 숭고하고 보편적인 이상이라고 이해한다면 이 별을 노래하는 노래는 당연히 중요하고 진지한 의미를 담는다고 할 수 있다. 시에서 ‘노래’라는 말에 이렇게 무거운 의미가 담기는 예를 우리는 가끔 만나게 된다. 예를 들어 한용운 시인이 쓴“님의 침묵”의 마지막 행을 떠올려 보자.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여기에서 “사랑의 노래”는 님과 만나 사랑하고 헤어진 절실한 경험에서 얻어진 어떤 깊은 의미를 전달한다고 이해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또 다른 예는 이육사 시인의“광야”에 나오는 표현이다. 이 시의 4연은 다음과 같다.“지금 눈 나리고 /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여기에서“노래”에 미래에 대한 간절한 염원과 소망에 해당하는 어떤 의미를 담는 것은 자연스러운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무거운 의미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우리의 생명력을 증진시키면서 우리의 존재를 더 고결한 경지로 이끌어가는 것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에게 이러한 자극을 주는가?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인 참과 좋음과 아름다움, 곧 진선미가 그 답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국민윤리 과목을 맡으셨던 조영수 선생님은 등단한 시인이셨는데 첫 시간에 자기 소개를 하시면서 “내 생명과도 바꿀 수 있는 시 한 편을 쓰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분에게는 시라는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의미였다고 이해하게 된다. 참과 좋음과 아름다움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에 속하는 구체적인 의미들은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의 삶의 일부 또는 전체를 통일성 있게 규정할 수 있으며, 의미에 이끌림은 개인의 유한한 존재를 넘어서는 영속에 이끌림의 한 중요한 예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어떤 의미에 헌신하는 것은 인간에게 내재한, 나보다 큰 것에 소속되고 싶어하는 근본적인 욕망의 발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의미의 특성을 규정하는 방식은 여럿이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의미가 생물학적인 필요라는 생각을 한번 제시해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 우선 신약성경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예수가 광야에서 시험 받는 이야기 가운데 일부를 언급하고 싶다.


시험하는 자가 …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 (3-4절)



   여기에서 예수가 떡과 대비시키는 하나님의 말씀이 생물학적 생존과 안락과 대비되는 고결한 ‘의미’라고 이해해도 될 것이다. 예수는 사람이 이런 의미를 추구하지 않으면 보람 있게 살지 못하는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는 의미를 떡, 곧 먹는 음식과 대비시킴으로써 의미라는 것도 먹는 것이라는 행위와 관련시켜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이런 생각은 제일 먼저 같은 신약성경 안에 등장하는, 예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성찬의례를 떠올리게 한다. 예수의 뜻을 따르는 것을 예수의 살과 피를 먹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말 ‘의미(意味)’에서 ‘미’가 ‘맛 미(味)’자라는 사실에도 주목하게 된다. ‘의미’라는 말을 만든 옛날 사람들이 왜 ‘味’ 자를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도 혹시 눈에 보이지 않는 의미를 먹는 것으로, 살기 위해서 먹어야만 하는 것으로 상상했던 것은 아닐까? 예수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 그리고 ‘의미(意味)’라는 말을 만들었던 옛 동양 사람들 모두 의미를 먹는 것으로 은유하여 인식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것 아닐까? 그리고 이렇게 생각한 이상 “의미(意味)는 의미(意米)다”라는 말장난을 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등 수용소 네 곳에서 생활하면서도 살아남은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랑클(Victor Frankl)은 자신의 극한적 경험에 바탕하여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썼다. 인간은 의미를 추구할 때에만 충일하게 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 책에서, 프랑클은 인간이 의미를 찾을 때 기준으로 삼는 가치 체계의 근거가 생물학적이라고 주장한다. 달리 말해, 인간은 진화하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가치들을 위계화했는데, 이런 가치들은 생물학적 차원에서 내재화되어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우리 자체가 되어) 어떤 상황을 평가하는데 무의식적으로 동원된다는 견해이다. 무엇이 의미 있다는 판단을 이루는 가치 판단의 기저에 진화 과정이 반영된 생물학적 요구가 있다면, 의미를 먹는 것으로 표상하는 것은 더욱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바꾸어 말해, 인간이 의미를 찾는 것은 음식을 찾는 것처럼 본능적인 충동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의미를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밥처럼 일상적인 것으로서 날마다 신경 쓰고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을 살펴볼 때 알게 되는 것은 우리가 의미 있음이나 없음 자체를 마주치기보다는 의미 있거나 없는 구체적 대상을 마주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의미 있다거나 없다는 판단은 의식의 표면에 잘 떠오르지 않고 과연 거의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우리가 의미 있다고 판단하는 대상을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그 자체로는 의미 있다고 하기 어렵지만 우리에게 가치 있는 목표를 성취하는데 기여하기 때문에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이다. 특히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거나 고통을 견딜 때 이런 의미가 부여된다. 예를 들어 위내시경 촬영은 고통스럽고 그 자체로서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건강 증진이라는 의미 있는 목표 때문에 이 과정에 의미를 부여하고 견디어 낸다. 하지만 어떤 경험은 그 자체로서 의미 있게 다가온다.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 좋은 자연 경관을 바라보는 것, 순진무구한 어린 아이의 모습을 보는 것, 긍정적인 신비감이 있는 인물을 만나는 것 등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 자체로서 반갑고 소중하다. 그 자체로서 내 안에 있는 생명력을 확장시키고 내 존재를 고양시키는 느낌을 준다. 물론 많은 경우 동일한 대상에 이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부여될 수 있다. 그 자체로서 소중한 일이 가치 있는 목표를 이루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삶에서 마주치는 대상 가운데에는 이 두 가지 의미 범주 밖에 머무는 예, 곧 아예 의미 있는 존재로 인식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오늘 하루를 살면서 내가 마주친 수 많은 낯선 사람들과 조금만 아는 사람들에게 나는 굳이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의미 없는 대상들을 의미 있는 대상, 특히 그 자체로서 의미 있는 대상이 되게 하는 것이 종교의 한 중요한 목표 아닌가? 때로 지금까지 나에게 의미 없었던 사람이 문득 소중한 사람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험, 더 정확히 말해, 아직 의미 없는 대상과 의미 있지만 그 자체로서는 의미 있지 않은 대상 가운데에서 (전부는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많은 것이 그 자체로서 의미 있는 대상이 되도록 인식을 바꾸는 것이 종교가 추구하는 한 중요한 목표가 아닌가? 그리고 이런 목표에 담긴 의식은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구절에 담긴 의미 의식과도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별을 노래”하는 것에 포함될 수 있는 의미에 대해서 이렇게 두서없이 생각을 늘어놓은 다음, 이제 노래가 지니는 통합의 힘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노래가 부르거나 듣는 사람을 하나되게 하는 데에는 적어도 리듬과 가락과 노랫말이 역할을 한다고 이해된다. 이 가운데 리듬 자체가 지닌 통일하고 통합하는 힘에 대해서 마이클 드레이크(Michael Drake)는 무속인(shaman)의 북 연주를 이야기하는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유려하게 말한다.


우리 각 사람의 심장 안에는 우리를 역동적이고 서로 이어진 우주 전체로 연결하는 완벽한 리듬이 조용히 박동한다. 북소리는 무속인과 모든 생명체를 하나의 존재, 하나의 심장박동으로 연합한다. 북소리는 자연의 모든 구별되고 불일치하는 면을 화해시킨다. 북소리는 개인과 행성의 울림을 촉진하며 조화와 균형을 회복시킨다.[각주:1]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이런저런 리듬을 구현하면서 그 존재를 영위한다고 할 때, 그리고 생명 있는 존재에게는 자신을 싣는 리듬을 바꾸는 것이 가능할 때, 노래의 리듬처럼 쉽게 인지되고 호소력 있는 리듬이 여러 사람으로 하여금 한 리듬을 따르게 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노랫말의 경우 여기에 담긴 언어적 내용이 통합하는 힘을 발휘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이 내용이 여러 사람에게 같은 감흥을 불러일으키고 같은 감동을 줄 때 이는 가능한데, 특히 노랫말이 위에서 이야기한 ‘무거운 의미’를 전할 때, 이런 근본적인 의미에는 강한 보편성이 있으므로, 노래 부르거나 듣는 사람을 하나되게 하는 힘이 그만큼 커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뮤지컬 <레 미제라블>에 나오는 노래 가운데 “그대는 저 사람들이 노래하는 것을 듣는가 (Do You Hear the People Sing)?”라는 곡이 있는데, 첫 부분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그대는 저 사람들이 노래하는 것을 듣는가? 

분노한 사람들의 노래를 부르는 것을. 

그것은 다시는 노예가 되지 않을 사람들의 음악. 

그대의 심장이 저 북소리에 맞추어 뛸 때에 

내일과 함께 곧 새로운 삶이 시작되리라.


   이 가사는 노래에 사람들을 하나되게 하는 힘이 있으며, 이 하나됨이 운동이 되어 크고 중요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음을 호소력 있게 예시한다.“분노한 사람들의 노래”라는 표현에는 노랫말의 내용에 대한 암시가 있다. 그리고 맥락상 이 내용은 사회정의실현이라는 무거운 의미를 담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대의 심장이 저 북소리에 맞추어 뛸 때에”라는 표현은 사람들이 같은 리듬 아래 하나됨을 말하고 있다.


   노래의 통합하는 힘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먼저 어떤 때 어떤 곳에서 같은 노래를 부르거나 듣는 사람들의 하나됨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통합은 이뿐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나라는 사람의 내적 통합, 과거의 나 또는 다른 사람들과의 통합, 미래의 나 또는 다른 사람들과의 통합도 생각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과거 또는 미래 사람들과의 통합을 생각하는 것은 어떤 역사 의식이라고 이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통합을 노래와 관련지어 생각할 때 앞에서도 언급한 이육사 시인의 작품 “광야”의 4, 5연이 떠오른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여기에서 시인은 현재에 뿌린 노래의 씨앗이 성장하여 미래에 우렁찬 노래가 되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이것을 노래를 통한 현재와 미래의 통합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과 통합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상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과거를 잘 공부하고 보편적 가치를 잘 탐구하면 훨씬 더 쉬워질지도 모른다. 미래를 향해 자라나 나중에 오늘과 미래를 하나되게 할 노래의 씨앗을 구하는 것이 오늘을 책임 있게 사는 한 중요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끝으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로 시작되는 문장과 밀접하게 이어지는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 문장에서 화자는 그가 자신을 넘어선 존재(작품 안에서 이름을 찾자면 “하늘”이라고 할 수 있을)로부터 삶의 소명을 부여 받았으며 이 소명을 따르겠다는 뜻을 표현한다. 이 내용에 대해 두 가지 생각을 말씀드리고 싶은데, 하나는 이러한 소명의 길은 그 주체에게 근본적으로 홀로 가는 길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내가 갈 길이 무엇임을,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임을 정확히 알았을 때 사람에게는 좋은 의미의 고독감이 찾아오는 듯 하다. 20세기 인도의 신비주의자 성인인 푼자(Poonja)는 자신이 가는 길을 “너무도 좁아 두 사람이 나란히 갈 수 없는 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진정한 소명은 원시불교 경전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말과 잘 어울린다.


   두 번째로 “그리고 나한테…”라는 이 문장을 내 나름대로 앞 문장과 연관 지어보고 싶다. 이 문장은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앞 문장과 표면적으로는 “그리고”라는 순접 접속사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두 문장의 내용이 순차적으로 또는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그런데 두 문장이 모두 화자의 삶의 내용을 다루므로 이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순차적’ 해석은 적절하지 않고, 두 문장의 내용이 동시에 일어난다고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이때 두 가지 동시 상황 사이에 더 구체적인 의미 관계를 설정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이 둘 사이에 둘째 문장이 첫째 문장을 수단으로써 수식하는 관계를 상정하고 싶다. 다시 말해,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감으로써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이해를 시도하고 싶다. 보편적인 사랑을 자신만의 고유한 소명의 길, 사실 철저히 혼자 가는 길을 가는 가운데 실천하고 싶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그만의 독특한 사명이 있으며, 이 사명은 본질적으로 고독한 것이라고 전제할 때 이런 해석은 자연스럽다. 보편적 이상을 가장 잘 실현하는 길은 각 사람이 고유한 개성을 최대한 발휘하면서 그 이상을 추구할 때가 아닐까 생각한다. 더불어 이런 해석은 시적 의미를 형성하는 차원에서도 보편성과 특수성이 만나 긴장을 이루게 하는 효과가 있다.


맺음말


   지금까지 세 차례에 걸쳐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라는 대목을 두고 앞뒤 없이 어설픈 생각을 늘어놓았다. 내가 한 이야기를 되돌아 볼 때 가장 두드러지는 생각의 틀은 역시 보편성과 특수성의 조화인 듯 하다. “별”과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것은 보편을 향하지만 “나한테 주어진 길”은 특수에 관련된다. “노래”라는 것은 구체적인 역사 사회 문화적 환경에서 태어나므로 특수한 것이지만 그 통합하는 기능으로써 보편으로 향한다. 보편과 특수의 상호보완과 대립의 역학은 한 사람의 삶과 사회 전체의 움직임을 생각할 때 반드시 탐구해야 할 주제가 아닐까 한다. 나도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면서 이 문제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얻었으면 좋겠다.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 웹진 <제3시대>



  1. Michael Drake,The Shamanic Drum: A Guide to Sacred Drumming, Talking Drum Publications, 2010, p.13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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