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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내가 먹어치운 진보(김정원)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7. 11. 2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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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먹어치운 진보





 김정원*

   

    진리라고 굳게 믿었던 것들이 있다. 평화, 정의, 교육, 생명 등등 흔히 한신에서 신학을 했던 이들이라면 빈번하게 접했던 그리 그리한 내용의 것들 말이다. 그 중 ‘진보’에 대한 이야기는 내게는 거의 언제나 옳았다. 그렇다면 내가 있는 판에서 끊임 없이 말해져 왔던 진보란 무엇이었을까? 대중없이 나열해 보자면, 양성 평등, 나아가 성 평등, 요즘 말로는 성정의. 다시 말해 여성과 성소수자 문제에 열려 있는 자세가 진보의 한 요소가 된다. 또 하나는 타 교단과의 일치, 일명 에큐메니칼, 이 역시 지평을 넓혀 보자면 종교간 대화, 다른 신앙에 대한 존중까지. 그리고 성서 해석에 관한 다양한 관점과 시도. 뿐만이랴, 역사적 예수, 민중 예수, 안병무, 문익환, 김재준, 문동환, 민중, 민주, 통일, 역사적, 사회적……. 여기에 학생 운동과 사회참여, 더 구체적으로는 세월호의 노란 리본, 박근혜 반대, 성명서, 촛불, 반미, 시청 앞 광장 등등을 더하면 얼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그 ‘진보’는 완성되는 듯 하다.


    만약 이것이 ‘진보’라면 나는 비교적 꽤 진보적인 여자임이 분명하다. 나는 최근까지도 퀴어 페스티벌에 참석하였고, 학창시절 반민주적 상황에 분노하여 광화문에 자주 나가있었고, 4.20도 가고, 4.30도 가며, 만나는 후배들에게 내가 아는 만큼의 진보를 떠들어댔었다. 예를 들면 노동문제, 통일문제, 생태계 문제 등등. 어느 날엔가는 총장에 반대하고, 여느 교수의 행보에 저항하며 성명서를 내기도 했으며 바로 얼마 전까지도 무슬림들과 기꺼이 만나며, 그들의 예배에 참여하기도 하고, 종교간 이해를 돕기 위한 책도 읽고, 글도 쓰며 관련 설교도 하며 그렇게 살았다. 가난을 ‘노래’하고 가난한 삶을 결심하기도 했었다. ‘민중 교육’을 지향했기에 따라서 민중지향적 삶 역시 지향했었다. 나는 적어도 진보적이기 위해, 진보적인 사람이 되기 위한 의미 물음에 있어서 만큼은 게으르지 않았음을 자부할 수 있겠다.


    자, 여기까지가 진보적인 나의 삶에 대한 이야기라면, 또 한 부분의 나는 어떠할까? 나는 용돈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에 그 흔한 아르바이트 한 번 한적이 없었고, 등록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기에 학점 관리에 무참히 소홀했다. 다른 동기들이 그것들에 몰두할 때, 그들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며 속으로 비웃었고, 그들은 정의와 평화에 관심이 없는 무지랭이들이라고까지 폄하했었다. 지금 이라크에 파병을 보낸다는데, FTA가 성사된다는데, 농민들이 죽겠다는데, 왜 저들은 저리 A+에 안달이 난 걸까. 저들은 왜 반대하지 않을까. 저들은 왜 저항하지 않는 걸까. 저들은 왜, 저들은 왜. 집회에 한 번 참석하고 우월감 한 번을 선취하고 나면, 명품 가방과 하이힐을 하고서 백화점에 가서 쇼핑을 하고 학생들에게는 버거울 가격의 밥을 먹었다. 남들보다 더한 열정으로 조직을 하고 교육을 하고 글을 쓰고 나면, 여지없이 (남들)보다 의미가 있는 삶을 살았다고 스스로를 상찬하였다. 신발장과 옷장은 터져나갈 상태였고, 칼로리를 계산하며 몸매 관리를 했다. 이미 목사가 되기로 작정한 상태라 취업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은 깨닫지 못한 채, 남들이 취업 걱정에 안달이 나는 것을 보며 속물이라고 얕보았다. 게다가 목사가 되지 않으려는 동기들을 보며 의식이 부족한, 혹은 기독교교육에 대한 열의가 부족한 이들로 치부했고, 보다 풍족한 삶에 관심이 있어서라고 오해해버렸다. 


나는 정말 모두를 위해 그렇게 뜨거웠을까? 

정말 그 열정은 공동체를 향한 열정이었을까?


    내 배움의 분열, 내 실천의 분열, 내 일상의 분열 곧 나의 분열. 분열 속에 여실히 놓여 있던 내 삶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느새 꽤나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여성이 되어 있었다. 내가 얻고자 하던 이미지, 그놈의 ‘진보’를 나는 성취했다. 비록 시간도 들이고 공도 들이고 열정도 들였지만, 때때로 욕도 먹고, 은따도 당하고, 오해와 미움도 샀지만, 결국 내가 손해 본 것은 없다. 나는 ‘진보적인 여성’이 되고 싶었고, (남들)보다 우월한 의미에서의 깨어있는 여성이 되고 싶었으니까.


많이 떠들면 많이 진보적인 인간이 되는 걸까? 

광화문에 많이 나가면 평화를 실천한 인간이 되는 걸까?


    니체는 질문한다. ‘한 영혼이 얼마나 많은 진리를 견딜 수 있으며, 얼마나 많은 진리를 무릅쓸 수 있는가?‘ (안티크라이스트 중). 우리가 무언가를 대의를 위해 감당하고 있다고, 혹은 타인들을 위해 애쓰고 있다고 말할 때, 다시 말해 진리를 위해 그에 따른 어려움을 감내하고 있다고 말할 때 니체의 질문은 속을 파고 들어온다. 그는 대답한다. ‘모든 단계의 지식의 진전은 용기, 즉 자신에 대한 엄격함으로부터 유래한다.’라고. 나에 대한 엄격함은 나의 분열을 고백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동시에 말해져 왔던 ‘진보’앞에서 물러나게 한다. 나는 그 ‘진보’로 소비되고 싶었다. 교회 현장에서, 교육의 현장에서, 사회적 관계 안에서 분열의 김정원이 아닌, 진보적이고 깨어있는 여성으로 소비되고 싶었다. 나는 나를 그렇게 팔아왔다. 누군가에게 그렇게 말해지기를 원했고, 또 그렇게, 꼭 그렇게 평가되고 싶었다.    

      

    스스로를 보수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은, 즉 진보를 높은 단계의 진리로 생각하는 이들의 강한 신념은 과거 금욕주의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금욕주의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도 자신을 더 높여서 금식, 철야, 수행, 묵언을 통해, 한마디로 하자면 적극적인 경건 (제사, 희생, 기도 등)의 행동보다는 궁핍 (privations)을 통해 특별한 신성성(sanctity)을 얻는 사람들이다 (뒤르켐). 즉, 금욕주의자들의 고행과 궁핍을 통해 신성성을 얻었듯이, 보다 적극적인 사회 참여, 보다 적극적인 진보 이념의 실천을 통해 그들은 진보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때의 신성성, 진보성을 권력이라 칭해도 큰 무리가 없다. 그 신성성과 특이성이 어떤 형태로 소비되는 지는 소위 진보 지식인들을 통해 실로 확인하고 있으니까. 니체는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는 그 시대의 가장 현명한 사람들이 아니라 가장 억압 받고 가장 결핍된 사람들 가운데서 유래한다고 보았다. 이때의 억압은 사회경제정치적 상황에서 현재 억압받는 이들을 칭함이 아니라, 스스로를 향한 엄격함이 결핍된 이들을 향한 비판으로 보아야 한다. 진보성을 획득한 자들은 되려 사회경제정치적 상황에서 억압받는 이들을 지배하기 쉽다. 왜냐하면 진보적인 이들은 고난 받는 자들과 함께 하니까, 억눌린 자들의 슬로건을 함께 외치니까. 이런 방식으로 고난 받는 자들을 지배하는 것, 아주 착하게 지배하는 것, 이는 구별하기가 쉽지 않아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지켜내고자 하는 그놈의 ‘진보’는 진보에 있어 가장 결핍되고 진보에 억눌린 이들에게로부터 온 것은 아닐까? 그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착한 위선’이 아닐까?


    나는 흔히 ‘촛불 혁명’이라 일컬어지는 지난 박근혜 탄핵 즈음부터 가방에 달린 노란 리본을 떼어버렸다. 이재명이 “언제부터 노란 리본 달고 다녔냐?”라고 호통치며 으스대는 꼬라지가 보기 싫어서이기도 했지만, 그 행위에 담긴 나의 신념이 보잘것없었기 때문이다. 선과 악, 진보와 보수, 의식 있음과 의식 없음은 구별하기가 쉽지가 않다. 누군가 묻더라. “학생 운동을 하는 학생과, 전혀 하지 않는 학생 중 누가 선하냐? 혹은 누가 더 의식 있는 학생이냐?”라고. 그러게나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위와 같은 반성을 통해 이러한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다시 또 진보적인 여성으로 소비되고 싶어하는 것인가? 거참, 그러게나 말이다. 다만 영어 과외 자리에 온 맘을 써가며 보내는 요즘, 가난, 그거 ‘노래’할 거 아니란 것 하나는 알게 되었다.


* 필자소개

   "한신에서 기독교교육을 공부하고,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조직신학으로 석사 과정을 마쳤다. 현재 박사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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