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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정보 : 성소수자 이슈에 자극된 생각들 3] 요 8:11과 마 7:1(황용연)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7. 12. 6.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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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이슈에 자극된 생각들 3] 요 8:11과 마 7:1





황용연

(Graduate Theological Union Interdiscipilinary Studies박사과정(민중신학과 탈식민주의) 박사후보생,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객원연구원)


    1. 


   성소수자 혐오자들, 특히 기독교 계통의 성소수자 혐오자들이 기를 쓰고 ‘증명’하려는 것 중의 하나가 성소수자들의 성 정체성/성 지향성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때 굳이 ‘후천적’이라는 것을 기를 쓰며 주장하는 이유는, 성소수자들이 자신들의 성 정체성/성 지향성이 ‘선천적’이라고 주장한다고 이들이 믿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반박하려는 것일 터이며, 나아가서는 ‘후천적’인 것이므로 당연히 ‘교정’도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함일 것이다. 사실 ‘선천적’/’후천적’이라는 프레임은 성소수자 옹호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도 종종 채택하는 프레임이기도 하다. ‘선천적’으로 그렇다는 데 어쩔 거냐 그런데 왜 안 된다고 난리냐 이런 ‘옹호’ 의견이 종종 보이는 것도 현실이니까.

   어쨌든 저런 요설에 대해서는 바로 ‘후천적’이면 어쨌다는 건데란 반문이 나올 것이고 사실 이거면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이야기해 볼 거리가 있다면, 성소수자 당사자들이 자신들의 성 정체성/성 지향성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를 ‘선천적’/’후천적’ 프레임으로 읽는 것이 애당초 맞는가 하는 것일 터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자신들의 성 정체성/성 지향성이 자신들에게도 “어, 이상해, 나는 남들과 좀 다른 것 같아”라고 ‘발견되는’ 것이라는 것이며(그래서 어떤 성소수자 운동가는 이런 의미에서 성소수자는 비이성애자라고 볼 수 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따라서 자신들의 성 정체성/성 지향성이 어떻게 성립된 것인지 추적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니까. 이런 이야기가 ‘태어날 때부터 그랬냐 아니냐’라는 식으로 읽힐 수도 있다는 것까지는 부정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좀 더 성실히 읽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냥 선천적이니 후천적이니 이런 야그로 읽어 치워 버리지는 말아야 할 것은 확실할 것이다.

  특히나, ‘기독교인’이라면 문제가 또 달라진다. 왜냐고? 당장 자신들의 신앙고백을 되새겨 볼 일이다. 자신들의 기독교 신앙이 ‘선천적’인가 ‘후천적’인가? ‘모태신앙’이 아닌 이상 ‘선천적’이란 말은 못 할 테지만(사실 ‘모태신앙’이라고 해도 그걸 ‘선천적’이라 할 수 있는지는 또 의문이겠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자신들의 신앙이 ‘후천적’이라고, 지금 이 글의 맥락에서라면 ‘자기 선택’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면, 신앙을 가지게 된 것 자체가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고백은 당장 걷어치워야 할 테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을 테니까. 가장 중요한 정체성에 ‘선천적’/’후천적’이란 잣대를 들이댄다는 게 넌센스임을 이렇게 잘 알아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다른 이들의 성 정체성/성 지향성엔 그 잣대를 들이대겠다니, 이거야말로 코미디 아닌가.


2. 


  소위 ‘후천적’이란, ‘선택’이라고 굳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심보를 조금 더 뜯어 본다면, 그 심보를 대놓고 드러내는 사람들의 입에서 종종 오르내리는 또다른 이야기를 끌어들일 만할 것이다. 동성애가 그 당사자들간의 ‘선택’일 뿐이거나, 혹은 당사자 외에 다른 이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에 인정해 주어도 된다면, 소아성애도, 근친상간도, 다 인정해 주어도 되느냐는 그 이야기 말이다.

  일단 바로 생각나는 말대꾸가 있다면 그거 다 ‘이성애’ 아닌가요일 것이다. ‘이성애자’들 사이에서 그런 문제가 발생한다는데 왜 동성애를 끌어들여 지지고 볶고냐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말대꾸가 틀린 거야 절대로 아니지만, 그렇게라도 말대꾸를 하기 전에, 저 소아성애도 근친상간도 어쩌고 하는 말을 조금만 더 뜯어 보면 이런 질문이 나오게 된다. 그럼, ‘선택’일 뿐이거나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걸 ‘인정’의 근거로 삼고 나면, 소아성애니 근친상간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 반대할 근거라고 들고 올 것이 더 이상 없어져 버린다는 것인가? 그렇게 근거가 없어져 버리니 소아성애니 근친상간이니 하는 것들을 인정해 줄 수밖에 없어져 버린다는 것인가? 그런데 그런 것들을 인정하면 안 되는 건 자명하니, 역으로 ‘선택’이니 ‘피해 없음’이니 하는 근거로 동성애를 인정해 주어서도 안 된다는 것인가?

  이렇게 질문을 묻고 나면, 아무리 봐도 소아성애니 근친상간이니를 들먹이는 이 이슈에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바로 그걸 들먹이면서 이게 ‘동성애를 반대’하는 강력한 근거가 된답시고 여기는 사람들일 것 같다. 그들이 그걸 들먹이면서 지키고자 하는 소위 ‘성윤리’라는 것이 속 빈 강정도 이런 속빈 강정이 없다는 말이 될 테니까 말이다. 그런 속 빈 강정 주제에 감히 남의 삶을 좌지우지하겠다고 지껄이고 있으니 더더욱이나.


3. 


  1과 2에서 언급했던 집단들이 목청을 높이는 이슈 중 하나가 ‘군형법 제92조 6항’이다. 남성 군인들 간의 합의에 의한 성관계마저도 처벌하는, ‘계간죄’ 어쩌고 하는 바로 그 조항. 어디서 이런 이야기까지 하는 걸 본 적도 있다. 남자들끼리만 모여 있는 군대에서 ‘동성애’를 허용해 주면, 그건 대놓고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당하라는’ 이야기 아니냐고.

  여기에 대해서도 바로 말대꾸를 할 수 있을 듯 하다. 그러면 하급자에게 강제력을 행사한 상급자만 처벌하면 그만 아니냐 왜 쌍방이 처벌되어야 하냐. 그리고 이런 경우도 아니고 ‘합의’에 의한 경우까지 처벌하겠다는 건 도대체 무슨 소리냐 이런 이야기부터. 이미 성소수자 군복무를 허용한 나라들이 있는데, 한국은 그런 나라와는 다른 ‘별종’들만 사는 나라라는 소리냐는 이야기도. 실제 군대에서 자신이 성소수자라고 밝히게 되면 오히려 피해를 보는 경우(물론 ‘성폭력’에 가까운 피해까지 포함해서)가 많다는 현실까지도 말이다.

  그런데 이 모든 말대꾸를 당연히 수긍하면서도 역시 여기서도 저 말 자체를 조금 더 뜯어보고 싶은 구석이 있다.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대놓고 ‘당하라는’ 운운하는 바로 저 이야기. 이걸 ‘당한다’ 어쩌고로 표현할 수 있다는 건, 상급자가 하급자를, 저항할 수 없는 하급자를 ‘여자’ 보듯이 할 수 있어서 ‘여자’에게 하듯이 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될 터인데, 그럼 대체 평소에 ‘여자’를 어떻게 보고 있길래, ‘저항할 수 없는 조건’이 된다면 저런 행동이 만연할 것이다(고 상상을 할 수 있다)는 것인지 말이다. 즉, 여기서도 정작 드러나는 건, 동성애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이성애자 남자들이 ‘여자’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고, 그 시선을 ‘저항할 수 없는’ 존재들에게 어떻게 옮기고 있는가 하는 문제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4.


  성소수자들, 아니 비단 성소수자들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배제를 겪는 존재들에 대해서 동맹의 자세를 취하려 하면, 흔히 기독교인이라는 작자들이 반론이랍시고 들먹이는 성서구절이 요한복음 8장 11절이다. 이제부터 다시는 죄 짓지 말라고 말은 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면서.

  그런데 지금까지 글을 쭉 써오다 보니,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기 전에 먼저 마태복음 7장 1절을 봐야 할 거란 생각이 든다.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가능하면 2절까지도 봐야 할 거다. 비판하는 그 잣대로 자신들도 비판을 받을 거다라는 그 이야기 말이다. 그리고 아마 같은 장의 22~23절도 보면 더 좋을 테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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