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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정보] 이주: 21세기가 당면한 국제적 문제이자 신학적 주제(김혜란)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7. 12. 6.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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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21세기가 당면한 국제적 문제이자 신학적 주제

 



김혜란
(
캐나다 세인트앤드류스 대학, 실천신학 교수)


 


    카나다연합교회 총회가 주관하는 선교와 봉사 (Mission and Service, 약칭 M & S)라는 기금이 있다. M&S 기금으로 후원을 요청하는 세계 에큐메니칼 교회들과 단체들은 도움을 받는다. 한국은 NCCK (교회협의회)포함해서, 파트너교단인 기독교장로회 소속 다양한 그룹, 그리고 한국여신학자협의회와 같은 기독교여성단체들이 이 M&S 후원을 받는다.

    많은 연합교회교인들이 지교회 1년 예산의 10%를 총회기금으로 설정하고 헌금한다. 사회정의와 약자보호를 더 열심히 하는 교회의 경우 20%를 총회 M&S 기금을 헌금한다. 지교회 재정 상황이 어려워져도, 총회 M&S 기금 액수를 줄이지 않고자 노력한다. 왜냐하면, 이 기금은 나 자신, 내 교회, 내 나라를 위해 쓰이지 않고 필요한 이웃에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교회를 불리기 위해, 또는 교회 성장을 위한 전도가 아니라, 파트너 교회와 단체가 요청하는 도움에 대한 후원이다.

    매 주일 각 연합교회 지교회 주일예배를 드릴 때, 헌금 순서 전, M&S Minutes (노트)를 읽는다. 주당 1페이지 분량으로 작성된 이 노트는 각 장마다 이 기금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귀한 소식들이 담겨져 있다.

    얼마전 한국소식이 이 M&S Minutes에 실렸다. 한국의 이주 상황을 다루었다. 이주민의 숫자가 지난 30년전과 비교해서 5배가 늘었다는 소식과 함께, 비한국 이주민들이 겪는 어려움과 차별, 이를 위해 애쓰는 교회 단체 (이주민 센터)를 소개했다. 그리고 어떻게 M&S 기금이 이 단체에게 쓰여지고 있는지 보고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2017년 한국에서 이주의 문제가 어떤지 궁금해졌다.

    난, 한국인으로서 한국을 떠나 사는 이주민이다. 통계에 의하면, 상대적 비율로는 (절대수는 중국인들이지만) 한국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이주를 많이 하고 산다고 한다.

   지난 30년간 비한국인들이 한국으로 오는 이주의 비율도 높아졌지만, 분단된 남과 북, 더 비좁아진 한국을 떠나 세계 곳곳으로 이주한 한국인들도 지난 50년동안 엄청나게 늘었다. 물론, 일본제국주의시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이주를 당한 한국인들, 중국에서 사는 조선족과 스탈린 소련연방억압시대 러시아에서 추방당한 고려인들, 이들까지 포함하면 지난 100년이상 한국인들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사는 이주민들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주의 문제를 한국인으로서 다룰 필요가 있다. 아니 이주의 문제는 한국이라는 지역적, 일개 국가적 문제가 아니라 전지구적 세계적 문제이다. 그래서 21세기는 글로벌 이주의 시대라고 불려지고 있다.[각주:1]

    여기서 난 기독교인으로서 실천신학자로서 예배학자로 교회를 본다. 기독교인의 사명과 책임이 교회에 국한된 것을 말하고자 교회를 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의 이유로 교회를 보고자 한다. 즉, 이주라는 세계의 상황, 전 세계를 흔들고 있는 이 운동이자 현상(people on the move)에 의해 교회가 영향을 받고 있고, 교회도 흔들리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직시하기위해 교회를 보고자 한다.

    많은 출판사에서 이주에 관한 책을 펴내고 있다. 그 한 출판사는 영국 소속 Palgrave Macmillan이다. 최근 출판한 책 중 Church in an age of Global Migration: A Moving Body [각주:2] 이 2016년에 발간되었다. 이 책은 WCC (세계기독교협의회)가 1995년부터 이주의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고, 관련 글들과 운동을 벌여왔는지 소개한다. 더불어, 다양한 교단 출신, 성공회, 세례교, 정교회, 오순절, 장로교, 그리고 카톨릭 교회들에 소속한 저자들의 글을 통해, 전세계 교회들이 당면한 이주의 문제를 살핀다. 총 19명의 저자들이 속한 나라, 일하는 나라들도 다양하다. 필리핀, 호주, 과테말라, 미국, 카나다, 브라질, 이탤리, 레바논, 스위스, 영국, 벨기에, 인도, 그리고 동아프리카에 속한 에디오피아, 콩고, 수단, 소말리아, 우간다 등이다.

   역사가 다르고, 식민주의의 잔재가 다르고, 인종과 문화가 다르지만, 이들 나라들, 즉, 모든 대륙 (아시아, 아프리카, 북미, 남미, 중동,그리고 유럽)을 포함하고 있는 이들 나라들 모두 이주의 문제를 겪고 있고, 그 이주를 통해 신학이 깊어지고 있고, 신앙적 실천이 다양해지고 있다. 이주라는 세계적 현상으로 인해, 그 영향을 받아서 새롭게 정립되는 교회론의 주제를 네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교회로 번역되는 헬라어 에클라시아, 보내진 자들의 모임, (those who were sent), 어원의 의미를 살린다면 교회의 역할은 무엇인가? 보내졌다면, 어디로 가고 있는가? 둘째, 교회를 순례라는 신학적 여정으로 본다면, 신앙인이 가야할 길과 이주는 어떤 연관이 있는가? 세째, 출애굽기의 핵심 주제이자, 히브리 노예를 해방시킨 하나님의 가르침, “너희는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나그네를 학대하거나 억압해서는 안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몸붙여 살던 나그네였다” (출 22:21)라는 성서전통을 전승하고 실천하는 교회의 역할과 현실 이주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네째, 신약 에베소서에서는 우리는 (교회는) 외국인도 나그네도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하느님의 가족 (2:19)이라고 역설한다. 더 나아가, “사실 우리에게는 이 땅위에 영원한 도시가 없고, 우리는 장차 올 도시를 찾고 있습니다” (히 13:14) 라고 히브리서신은 이주의 신학, 즉, 정착하지 않는 믿음, 안주하지 않는 신앙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이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초대교회와 이주의 문제는어떤 연관이 있으며 어떤 실천신학적 과제가 도출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신학적 응답은 궁극적으로 기존의 교회론이라는 교리적 이론적 신학적 틀에 도전을 준다. 내면적이고 (inward), 정적인 (static) 신앙, 우리 교회교인만 생각하고 (exclusive), 또는 기독교중심의 제국주의 (Christian centric/imperialistic)를 자성하고, 자본주의적 번영, 성장, 물질중심주의적 복음 (prosperity Gospel)에 대한 반박으로써 대안적 교회론 정립이 시급하다.

   이주라는 현상과 이주의 성서적 전통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는 교회론은 교리적, 이성적, 추상적 신학적 사유를 넘어서서 경험적, 현상적, 그리고 실천신학적 사유를 요구한다. 이주라는 현실은, 이주가 벌어지고 있는 현상은 하나의 운동, 움직이는, 변동하는 현실이다. 소위 이주는 고체가 아니라 액체이다. 그러므로, 동적 사고, 움직임을 직시하고 대처하는 교회론과 신학을 요구한다. 이미 정해진 이념이나 정돈된 사상이 있고, 이를 적용하는 식의 연역적 방식의 신학은 현 이주를 담아내기 부적합하다. 귀납적 방식의 신학, 유연하고 개방적인 신학과 실천을 요구한다. 이주라는 현실은 나와 같은 우리 (예. 동일한 언어공동체, 인종, 종교)가 다른 이들을 만나야 하는 상황을 불러온다. 그들과의 공존을 추구해야 하기에, 공존하지 않으면 분쟁과 폭력을 가져오기에, 다름을 포괄하는 신앙, 자기를 비우면서 타자에 관심하는 믿음이 절실히 요구된다. 그 공존의 삶은, 한번하는 구제가 아니라, 일상의 삶으로 이어지는 여정으로 교회가 자리매김할 것을 요청한다. 공존을 추구하지 않아서 최악의 경우 인종, 종족 말살 분쟁이 일어났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그런 인류 최악의 사태를 직면할 수 있다. 우려되는 바는 죽이지는 않아도 이주민들을 철저하게 배척하는 정책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변화하는 세상을 향한 신앙을 위한 예언자적 소리를 내야한다. 그 신앙이 교회안팍에서 녹아나는 구체적인 실천들로 그 모습을 드러내야한다. 보내진 자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 순레자로서의 교회, 출애굽 해방의 후손자로서의 교회, 나그네로서 하나님의 가족으로서의 교회, 이 모습을 현 21세기에 실현하는 교회로 담아내야 한다. 물론, 이런 이주의 문제를 씨름하는 과정에서 두려움, 무지 등 다양한 시행착오를 겪을 것임이 분명하다. 동시에 기존에 예상하지 못했던 모습과 행위를 통해 교회의 본 모습이 드러날 수도 있다. 그런 긍정적인 측면에서 최근 카나다에서 벌어진 교회소식 하나를 나눈다.

    최근 하인즈 토마토 케첩 공장이 있는 도시로 유명한 리밍턴이라는 카나다 남부 지역에 속한 한 성공회 교회가 이슬람교도들이 예배드리도록 교회 문을 열고, 예배 공간을 나누어 쓰기로 한 사실이 알려졌다.[각주:3] 시리아 피난민들의 이주가 30가정 이상으로 증가되면서 그들이 따로 예배드릴 공간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고, 성공회 교회가 예배당을 오픈 한 것이다. 예배의 핵심은 기도이다.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기도가 없는 곳에서 그 어떤 다른 신앙적 실천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예배당을 열고, 이슬람교인들로 하여금 기도하도록 배려한 점은 일종의 기도이자, 실천신학적 교회론을 보여준 좋은 예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예가 다른 실천, 이른바 이슬람에 대한 편견제거하기, 서로의 신앙과 믿음 배우기, 함께 연대하고 공공선을 이루기 등으로 이어지리라 본다. 이렇게 교회가 이슬람교도들을 위해 예배당을 여는 일은 단순한 구제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기독교인)도 나그네라는 고백과 이슬람인들도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고백이 담겨져 있다. 이슬람교도에 대한 혐오와 이슬람 종교에 대한 배타적 사고가 너무도 팽배한 기독교 교회에 경종을 울리는 사례이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본받아, 우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를 하지 말라고 로마에 있는 교회에게 권고했다 (롬 12:14). 소수였던 초대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당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여기서 교회는 에클라시아이다. 교회라는 곳으로 모인 자들 한 사람 한 사람, 원래부터 있던 기득권자가 아니라, 보내진 자들이요 초청받은 자들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 교회의 주인이 아니라 손님이다. 영원히 좋은 자리에 앉아서 그 자리를 틀어쥐고 있는 특권받은 자들이 아니다. 여기가 좋사오니라는 집짓고 살자는 유혹에 빠질 때, 과감히 내려가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따라 길을 떠나야 하는 순례자이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다른 이주자들도 만날 것이고, 그 이주자의 삶의 조건이 어려우면, 그들을 돕고 환대하는 것이 보내진 자, 박해경험을 가진 자가 할 일이다 (히 13:2). 우리는 본향, 장차 올 도시를 향해 가지만, 그래서 현실에 집착해선 안되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저버리거나 현실의 삶을 수동적으로 살라는 뜻은 아니다. 가는 그 여정 순간에 충실하면서,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해내야한다.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주어야 하고, 도움이 필요하면 요청하며, 그 어려운 상황을 만드는 차별, 억압, 폭력을 제거하기 위해 온전히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출애굽해방의 전승을 계승하는 교회의 모습이다.

    리밍턴 성공회 교회는 그런 보내진 자의 역할을 한 것이다. 그 예배당 건물을 영원히 자신들이 소유할 것으로 쥐고 앉아 있지 않고, 기도를 요하는 이슬람 교인들을 위해 소유가 아니라, 성전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이주로 인해, 이슬람 이주자들을 만났다. 이 성공회 교회를 세운 신앙의 선배도 어딘가에서 온 이주자였을 것이다. 박해건, 전쟁이건, 또는 경제적, 문화적,종교적, 교육적 이유, 그 이유가 무엇이든, 이 교인들의 조상도 이주를 했다. 익숙하고 편안한 고향, 고국, 자기 집을 떠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주라는 과정은 대부분의 경우 자발적 선택보다 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더 많다. 특히 피난민으로서의 이주는 훨씬 더 그 힘든 여정을 동반한다. 그래서 피난민을 받고, 이주민을 만나는 우리 기독교인들, 이미 정착한 이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단순히 자선베품의 단계를 넘어서 이 만남, 사귐을 통해 그 이슬람 교도들을 포함해서, 피난민들, 새로운 이주민들로부터 받을 배움에 관심을 두자. 그들과의 만남으로 본 교회의 모습을 되찾으면서 기독교인으로서의 귀한 정체성을 확인하자. 상생과 공존의 경험, 공존을 위한 실천을 위해, 신학적 성찰과 성서적 지혜를 구해야한다.

    디어드리 코넬은 예수님이 이주민이었다는 책을 썼다. 그 책에서 예수님은 하늘에서 이 땅으로 이주한 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주민으로서 공생애의 삶을 사셨다고 주장한다.[각주:4] 예수님의 탄생 자체가 이주라는 것이다. 이주민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인 대림절을 보내면서, 이주의 문제에 관심을 두길 바란다.


ⓒ 웹진 <제3시대>



  1. Stephen Castles and Mark J. Miller, Age of Migration, 4th ed.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09). [본문으로]
  2. Susanna Snyder, Joshua Ralston, and Agnes M Brazal, eds. Church in an Age of Global Migration: A Moving Body (Palgrave, 2016). [본문으로]
  3. http://www.cbc.ca/news/canada/windsor/leamington-ont-anglican-church-opens-doors-to-muslim-worshippers-1.422166 [본문으로]
  4. Deirdre Cornell, Jesus was a Migrant (Maryknoll: Orbis, 201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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