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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연말 시상식을 준비하며(김의환)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7. 12. 20.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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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시상식을 준비하며




김의환*

 


    서른 즈음의 쓸쓸한 감성을 채 만끽할 겨를도 없었는데 어느덧 서른 살의 막바지다. 평소에는 숫자와 그리 친하지 않다만, 뭐든 정리해서 기록하고픈 연말이면 날짜와 나이, 순위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받는다. 특히 요새는 나만의 시상식을 여는 소소한 기쁨으로 겨울밤을 채워간다. 별 게 아니라 ‘2017년 올해의 00’에 해당하는 수상 부문과 후보를 선정하고, 뚜렷한 기준 없이 떠오르는 대로 수상 여부를 결정하여 메모장에 목록을 작성하는 것이다. 특정 시기에 무엇이 내게 어떤 영향을 주었고 나는 어떻게 반응했는지, 내 삶의 1번은 무엇인지를 돌아보며 남겨두려는 마음에 이 일을 시작했다. 이 시상식은 계속 변해가는,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나의 모습을 확인하기에 꽤 유용하다.


   주요 수상 부문으로는 올해의 인물과 책, 음반과 영화, 문장, 작가, 팟캐스트, 고마운 사람, 불편한 사람, 최고의 순간, 최악의 순간 등이 있다. 기타 부문은 올해의 커피, 맥주, 안주, 치킨, 수업, 공연, 맛없는 음식, 산책, 술자리, 득템, 돈지랄, 병맛, 예능, 민폐, 정치인 등이다. 예전의 수상 목록을 찾아보니 2014년에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와 <랍스터>가 올해의 영화 부문에서 공동 수상했고, 외젠 이오네스코의 <외로운 남자>가 책 부문에서 단독 수상의 영광을 누렸다. 대다수 부문에서 매년 쟁쟁한 후보들이 등장해 각축전을 벌이지만 예외도 있다. 몇 년간 한 수상자가 독식한 부문이 있었으니, 바로 ‘올해의 고마운 사람’이다.


   3년 전인 2014년 12월 11일 목요일의 일이다. 여느 때처럼 어둡고 차디찬 자취방에 누워 MBC FM4U의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듣다가 뜬금없이 문자로 이런 사연을 보냈다. “철수 아저씨, 아저씨는 올해도 제가 꼽은 가장 고마운 사람 1위에 선정되셨습니다. 축하드려요!” 진심이었다. 변함없이 그 시간, 그 자리를 지켜주며 좋은 음악과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배철수 DJ가 늘 고마웠다. 특히 그해에는 1월부터 7월까지 홀로 미국과 중남미 배낭여행을 다니며 고독과 갈등에 허덕였던 터였다. 모국어와 음악이 더없이 간절했던 시절이라 ‘배캠 다시듣기’만 한 오아시스는 없었다.


    잠시 후 내 이름과 사연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당시 철수 아저씨의 수상 소감을 그대로 옮겨본다. “허허허. 이거 기쁘면서도 슬픕니다. 한편 제가 뽑혔다는 게 저한테는 참 영광스러운 일이기는 합니다만, 슬프네요. 김의환 씨 곁에 그렇게 고마워해야할 다른 사람들이 생기지 않았다는 거 아니에요. 2015년에는 고마워해야 할 사람 1위가 다른 사람이 꼭 되기를. 저는 탈락됐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한 10위권 밖으로 밀렸으면 좋겠어요. 제가 드릴 수 있는 고마움이란 건, 이게 고마움이라면, 정말 눈곱만 한, 식사하시는 분이 계실까 봐 죄송합니다만 코딱지만 한, 그런 거가 됐으면 합니다.”


   이 말을 들으니 철수 아저씨가 더 좋아졌다. 동시에 조금은 슬퍼졌다. 언제부턴가 그 누구도 곁에 가까이 두지 않았기에 누구에게도 좀처럼 고마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부끄럽게도 당시 나는 외로움을 나약한 이들의 값싼 감정이라 치부했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타인에게 의존할 바에는 혼자 있기를 택했다. 그래서인지 철수 아저씨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애석하게도 2015, 2016년에도 고마운 사람 부문은 여전히 그분의 몫이었다. 외로움이란 존재의 숙명이자 평생 달고 갈 친구라는 생각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래도 지금 와 보니 그땐 어찌 그렇게 살았는지, 꼭 그래야만 했나 싶다. 누군가에게 기대어도 되고 신세 좀 져도 되는데,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에 인색하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관계란 라디오처럼 내가 듣고 싶을 때만 켰다가 일방적으로 다시 끄는 무언가가 아닐 것이다. 라디오에서 들리는 노랫소리 말고, 가까이 있는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더라면 어땠을까.


    올해는 이례적으로 ‘고마운 사람’ 부문의 경쟁이 치열하다. 여러 이름들을 넣고 빼다가 이내 순위를 매기는 일이 부질없어 그만두었다. 논란의 여지가 많겠지만 이번만은 여럿에게 공동 수상을 하기로 한다. ‘올해의 인물’에는 내게 사랑을 알려준 얼굴들을 적어보았다. 책과 문장 부문도 각축전이다. 먼저,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 <몰락의 에티카>,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비평의 아름다움과 정확한 문장의 힘을 느꼈다. 수시로 펼칠 때마다 더 나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쳤다. “책임지겠다고 팔 걷어붙이는 책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자유로워지려고 애써보았으나 끝내 실패한 자의 기록만 읽을 가치가 있을 것이다.”(<느낌의 공동체>)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정확한 사랑의 실험>)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과 <소설가의 일>은 소설론을 가장한 인생 예찬이다. “미문을 쓰겠다면 먼저 미문의 인생을 살자. 이 말은 평범한 일상에 늘 감사하는 사람이 되자는 말이기도 하다. 그게 바로 미문의 인생이다.”(<소설가의 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이다.”라는, 간결하고 강렬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승우의 <사랑의 생애>를 올해의 소설로 정했다. 올해의 뮤지션은 가수 이승열과 밴드 ‘9와 숫자들’로, 올해의 노래 부문 후보에도 나란히 올랐다. “계절은 다시 돌아온대도 / 떨어져 버린 건 돌아오지 않아”(이승열–돌아오지 않아) “우린 항상 어둠 속에 있어 / 계절을 알아볼 수 없어”(9와 숫자들–드라이플라워) 올해의 노래는 Daughter의 ‘Youth’다. 무모하고 불안한 청춘의 고백(“We are the reckless. We are the wild youth.”)에서 당신과 나를 보았다. 눈물겹도록 빛난다.


    다른 부문에서도 좀처럼 단 하나를 고르지 못하고 있다. 공동 수상이 많다는 건 어떤 식으로든 기억하고픈 것들이 많다는 의미다. 유독 2017년에만 전에 없던 좋은 사람, 좋은 책이나 노래를 많이 만났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좋은 것들은 늘 가까운 곳에 머물러 있다. 내 눈과 귀가 닫혀 있어서, 마음이 비좁고 분주해서, 게을러서, 공허해서, 가라앉아서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내년에는 만남과 관계가 더 풍성해지길, 여기서 발생하는 경험과 느낌, 기억을 더 소중히 여기길 희망한다. 여담이지만 ‘올해의 고마운 사람’ 부문에서 드디어 철수 아저씨가 10위권 바깥으로 밀려나셨다. 아저씨의 당부대로 고마운 사람이 늘었다고, 3년 전 그때보다 덜 슬프게, 조금 더 밝게 지낸다고 문자 사연을 보내야겠다.



*필자소개

청춘을 허비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 한량. 어두운 자취방의 혁명가. 문학과 영화, 음악과 라디오에 기대 하루하루 때우고 있다. 연세대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석사과정에 재학중이다. 21c3927@gmail.com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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