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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퀴어]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 속 “말하는 서발턴”의 “복화술”(조은채)

페미&퀴어

by 제3시대 2017. 12. 20.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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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 속 “말하는 서발턴”의 “복화술”[각주:1]



조은채*

 

※ 영화 <히든 피겨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2016)는 NASA(미항공우주국)의 랭글리 센터에서 ‘인간 컴퓨터(computer 혹은 계산원)’, 즉 백인 남성 과학자를 보조해서 계산하는 역할로 고용되었던 세 명의 흑인 여성의 이야기이다. 아직 인종 분리 정책을 실시하고 있던 버지니아 햄프턴에서 캐서린, 메리, 그리고 도로시는 ‘흑인’이자 ‘여성’이기 때문에 온갖 차별과 수모를 당하지만, 굴하지 않고 무려 NASA에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한다. 동쪽 전산실의 백인 여성은 ‘동쪽 컴퓨터(East Computers)’로, 서쪽 전산실의 흑인 여성은 ‘서쪽 컴퓨터(West Computers)’로 불리던 1961년, 계산 같은 단순 업무만 맡을 수 있었던 이 세 명의 ‘서쪽 컴퓨터(West Computers)’는 결국 관리자와 엔지니어, 그리고 수학자로서 러시와의 우주 개발 경쟁에서 자신의 새로운 몫을 톡톡히 해낸다. NASA가, 혹은 폭넓게 보자면 사회가 그들에게 부과한 한계와 고정된 역할을 능력과 열정으로 뛰어넘은 것이다. 영화 포스터에 적혀있는 그대로 “천재성에는 인종이 없고, 강인함에는 남녀가 없으며, 용기에는 한계가 없다.”


  영화 <히든 피겨스>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동명의 논픽션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엄연한 실화는 영화화의 ‘각색’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더 감동적이고 유쾌한, 즉 ‘영화적’인 구성을 갖추게 된다. <히든 피겨스>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모든 영화의 목표인, 현실과 가상을 적절히 섞은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 기분 좋은 영화는 이 영화가 유쾌한 바로 그 만큼 어떤 위화감을 유발하기도 한다. 특히나 <히든 피겨스>의 가장 통쾌하면서도 감동적이어야 했을 한두 장면에서 그 위화감은 극에 달한다. 이 영화를 각색한 사람은 백인 여성이고 감독은 백인 남성이라는 점, 그리고 영화에 등장하는 몇몇 백인 캐릭터가 가상의 인물이었다는 점은 영화에 대한 모종의 의심을 더욱 부추긴다. 흑인 여성의 이야기는 흑인 여성에 의해서만 제대로 포착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려는 것은 아니지만, 스피박이 오래전 자신의 글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에서 했던 주장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히든 피겨스>가 사실 중심부의 입장에서 타자로서 캐서린과 도로시, 그리고 메리라는 식민 주체를 구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뒤를 잇는다. 사실 이 세 명의 서쪽 컴퓨터는 ‘서발턴(subaltern)’이고 <히든 피겨스>는 말할 수 없는 서발턴이라는 반복된 실패를 답습하지만 이를 매끄러운 완성도로 숨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도 출신의 문학평론가이자 비교문학 교수, 그리고 탈식민주의 페미니스트인 가야트리 차크라보티 스피박(Gayatri Chakravorty Spivak)은 1988년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라는 글을 발표한다. 스피박은 ‘계급으로 환원되지 않는 위계에 종속적인 하층’을 의미하는 그람시(Antonio Gramsci)의 서발턴에 관한 정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녀는 서발턴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규정하지 않고 재현체계의 바깥에 위치하는, 계층, 인종, 젠더를 포함하는 포괄적이고 자유로운 의미로 사용한다. 스피박은 1988년에 발표한 자신의 글을 1999년에 다소 수정해서 다시 발표하지만, 서발턴, 특히 여성으로서의 서발턴은 말할 수 없다는 논지의 중추는 변하지 않았다. 글의 서두에서 스피박은 비서구지역의 서발턴이 자기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푸코와 들뢰즈 같은 유럽 지식인이 말하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는 서발턴이 실제로 말을 할 수 없다는 즉자적인 의미라기보다는, 과거 서구의 제국주의 혹은 현대의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그 재현체계로 편입되지 않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피박에 따르면, 푸코와 들뢰즈가 말하는 “기만당하지 않는” 피억압자는 사실 존재하지 않으며, 그들이 주장했던 “말하는 서발턴”은 “투명한” 지식인 주체에 의해 “복화술”이라는 방식으로 재현[대표]되고 있을 뿐이다. 스피박의 주장은 영화로 각색된 <히든 피겨스>에도 적용된다. <히든 피겨스>는 결국 중심부의 재현체계로 편입될 수 있는 목소리를 담고 있으며, 이 목소리는 결국 서발턴을 재현하면서 자신을 투명한 주체로 재현하고자 하는 백인 남성 감독의 것이 아닌가? 영화의 클라이막스라고도 할 수 있을, ‘유색인종 화장실’이 그냥 ‘화장실’이 되는 순간이 철저하게 백인 남성 캐릭터의 손에 달려 있었다는 점은 이 의심을 부추긴다. 스피박은 힌두의 과부 희생 관습인 ‘사티(sati)’의 폐지가 영국의 식민지 제국주의적 해석에 의해 “황인종 남자에게서 황인종 여자를 구해 준 백인종 남자”의 사례가 되었으며, 이 담론 속에서 서발턴 여성은 재현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어쩌면 <히든 피겨스>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실화가 영화로 각색되면서 추가된 몇 가지 에피소드는 “흑인종 여자에게 관용을 베푼 백인종 남자”라는 레퍼토리를 반복한다. 엄격한 인종 분리 정책이 시행되던 버지니아주에서 백인 남성만을 주인공으로 하는 직장인 NASA의 ‘서발턴’이었던 캐서린과 메리, 그리고 도로시는 2016년에 이르러서도 대변될 뿐 제대로 재현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제국주의적 관점에서 사티의 폐지가 영국의 미담이 되었던 것처럼, <히든 피겨스> 속의 유색인종 화장실 폐지는 백인 남성 상사의 선행이 되어버린다. 사티 폐지에 관한 중심부 주체의 메커니즘이 비록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히든 피겨스>에도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던 것이다.


  우주 임무 그룹(Space Task Group)의 본부장이자, 캐서린을 처음으로 인정해준 상사인 알 해리슨은 놀랍게도 가상의 인물이다. 영화에서 세 명의 주인공 다음으로 거의 가장 많이 등장하는 데다가, 꽤나 입체적인 면모를 보여주지만 실존했던 모델조차 없다고 한다. 알 해리슨은 가상의 인물인 동시에 ‘백인’에다 ‘남성’이지만, 세 명의 흑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히든 피겨스>에서 과다한 역할을 부여받으며, “흑인종 여자에게 관용을 베푼 백인종 남자” 혹은 “흑인종 여자를 구해준 백인종 남자”의 견본이 된다. 해리슨은 캐서린이 영화에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장애물을 뛰어넘게 하는 유일한 열쇠이자, 때로는 그 장애물을 직접 허물어주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유색인종 화장실’이 철폐되는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에서는 돌연 주인공이 되어버리기까지 한다. 그야말로 “황인종 남자에게서 황인종 여자를 구해준 백인종 남자”의 <히든 피겨스> 판이다.


  NASA에서 일하는 여성은 ‘무릎을 덮는 치마, 블라우스보다는 스웨터, 진주 목걸이를 제외한 장식구 착용 금지’라는 복장 규정을 따라야 한다. NASA의 모든 남자 직원이 마치 교복 같은 차림으로 편안하게 업무를 볼 때, 여자 직원은 흑인이든 백인이든 관계없이 반드시 나름대로 ‘모양을 내야만’ 했던 것이다. 복장 규정에 따라 구두를 신은 캐서린이 휘청이며 화장실에 뛰어가거나, 구두가 바닥에 끼어 고생하는 메리, 늘 완벽하게 세팅된 모습으로 우주 임무 그룹을 지키는 백인 여성 콜먼 부인은 NASA가 여성에게만 강요하는 ‘꾸밈 노동’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반면, 여성인 동시에 흑인인 캐서린이 처한 이중적인 억압의 구조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예시는 바로 ‘유색인종 여자 화장실’이다. 캐서린이 ‘서쪽 컴퓨터’였을 때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던 화장실은, 그녀가 자신에게 허용되었던 자리를 벗어나는 순간 몹시 어려운 문제로 돌변하게 된다. 우주 임무 그룹이 속한 건물에는 그녀가 갈 수 있는 화장실, 즉 유색인종 화장실이 없다. 이는 우주 임무 그룹에 ‘인간 컴퓨터(계산원)’이라는 임시직으로 잠깐 동안만 출입이 허용된 캐서린의 처지를 잘 보여준다. 캐서린은 매일 800m나 떨어진 유색인종 여자 화장실에 갈 수밖에 없고, 하루에 족히 40분은 화장실에 가는 데 써야만 한다. 캐서린이 무심코 사용한 이후로 갑자기 ‘유색인종용’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새 커피포트가 생겨난 것처럼, 캐서린은 같은 부서에 속해 있으면서도, 다른 백인 남성 혹은 여성과 같은 동일한 공간을 할당받지는 못한다. 하지만 실존 인물 ‘캐서린 존슨’은 딱히 NASA에서 흑인이기 때문에 차별을 당했던 적은 없다고 회상했다고 한다. 영화 속의 캐서린처럼 화장실 문제를 겪었던 적도 없고, 유색인종 화장실이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했다. 실제로 그녀는 백인으로 종종 오해받곤 하던 외모였기 때문에 백인종 화장실을 사용해도 별 탈이 없었던 것이다. 도리어 유색인종 화장실 때문에 문제를 겪었던 쪽은 메리 잭슨이었다. 하지만 메리 잭슨에게는 자신을 위해 대신 싸워주는 영화 속의 해리슨 같은 “흑인 여성을 구해주는 백인 남성”은 없었고, 그저 부서를 옮기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러나 영화 <히든 피겨스>는 백인 남성인 해리슨이 커피포트에 붙은 ‘유색인종’이라는 꼬리표를 떼거나 화장실에 붙어 있는 ‘유색인종 화장실’이라는 팻말을 망치로 때려 부수게 만든다. 유색인종 화장실과 백인 화장실의 구분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 구분을 애초에 만들었던 백인, 그것도 백인 남성의 손으로 철폐되는 것이다. 해리슨은 백인 남성과 여성 그리고 많은 흑인 여성이 보는 앞에서 “나사에서 모든 사람의 오줌 색깔은 같다(Here at NASA we all pee the same color)”라는 명대사를 읊기까지 한다. 그는 유색인종 여자 화장실이라는 팻말을 부수며 그동안의 암묵적 동조를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흑인 여성의 구원자가 되어버린다. 여성인 동시에 흑인이었기 때문에 캐서린에게 부당하게 부과되었던 800m라는 장애물은 해리슨이 선사하는 클라이맥스를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동시에 화장실 인종 구분의 폐지는 당연히 철폐되어야 했을 악습이 아니라, 캐서린의 능력을 높이 산 해리슨에 의해 하사된 포상이 되어버린다.


  <히든 피겨스>의 마지막 부분에서 캐서린과 도로시, 그리고 메리는 불가능하다고만 여겨졌던 각자의 꿈을 NASA 안에서 현실로 만드는 것에 성공한다. 그러나 이 매끈하고 완벽한 성공담에 어떤 위화감을 느꼈던 것은 ‘알 해리슨’이라는 캐릭터에 중심부 주체의 “투명한 주체로 자신을 재현하고자 하는 욕망”이 투영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주인공인 캐서린은 1초에 24,000개의 숫자를 처리하는 ‘괴물’ IBM보다 소수점에서 더 정확한 계산을 하는, 즉 중심부의 재현체계가 가진 기준을 완벽하게 능가하는 것으로 자기 자신을 대변했기 때문이다. 스피박은 부바네스와리 바두리라는 열일곱살 가량의 소녀의 죽음이 오해되는 방식 때문에 서발턴은 말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실 바두리가 부유한 계층에 속했던 것과는 관 없이 스피박에게 서발턴이었던 것처럼, 캐서린에게도 주류의 담론으로는 포착될 수 없었던 ‘말’이 존재했을 것이다. 하지만 <히든 피겨스>에서 캐서린의 ‘서발터니티’는 해리슨으로 대변되는 중심부의 재현체계 속에서 말끔하게 소거된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억압의 구조를 파헤치기보다는 차라리 복무해서 자신을 증명하는 것을 택하기 때문이다. <히든 피겨스>는 여전히 장점이 더 많은 소위 ‘잘 만든’ 영화이지만, 백인 남성에 의한 한 편의 거대하고 성공적인 복화술이라는 의심이 쉽게 해소되지는 않는다.


* 필자소개

      학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하면서, 조형예술을 기반으로 다양한 문화예술 현상을 감상하고 분석하는 법을 배웠다. 동일 전공으로 석사에 진학하여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 관심 분야는 페미니즘, 그리고 미디어아트를 비롯한 현대미술이다.




ⓒ 웹진 <제3시대>

  1. 차크라보르티 스피박(외), 태혜숙(역),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그린비, 2013, pp.42-139.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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