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신학 정보]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2) (이상철)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09. 7. 22. 14:19

본문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2)
: 죽음의 고고학 考古學

이상철
(시카고 신학교 / 윤리학 박사과정)

죽음의 극복과 근대의 탄생

중세 말 ‘죽음의 무도’는 죽음의 일상성, 죽음의 편재라는 절망적 상황을 춤판이라는 상반된 이미지와 결합시켜 그 비극미를 극대화시킴과 동시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녀)가 비록 대단한 권력과 인기를 가진 왕이나 교황, 혹은 유명한 슈퍼스타라 할지라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를 가리켜 사람들은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메멘토 모리’라는 짧은 경구로 대변되는 삶에 대한 허무와 죽음의 공포는 시대에 따라 그 모양새와 강도가 다르긴 했지만 인류역사의 발생과 더불어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왔다.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니체는 근대 이후 전통적 서구기독교 가치의 몰락이 사람들에게 삶에 대한 허무를 선물했다고 증언하지만, 서구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기독교의 가치가 팽배했던 시절에도 그러한 감정이 여전히 인간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중세 말이 그런 대표적인 경우가 아닐까 싶다.

죽음의 테마가 중세 말을 휩쓴 이유들 중 하나는 페스트의 창궐에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1437년에 발생한 페스트는 3년 만에 대륙전체를 휩쓸면서 유럽전체 인구의 1/3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이후에도 페스트는 10년 혹은 12년을 주기로 비록 소규모였지만 지속적, 국지적으로 발생하였다. 그 당시 유럽인들에게 있어 삶은 어쩌면 눈앞에 있는 죽음을 준비하는 기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푸닥거리를 필요로 했고, 그 푸닥거리에 쓰일 제물로 유대인들이 낙점되었다. 이는 유럽의 대다수 기독교인들에게 쌓여왔던 유대인들에 대한 앙심이 폭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중세가 진행되면서 도시가 발생하고 수공업과 시장경제의 초기 형태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유대인들은 고리대금등 지금으로 따지면 악덕 기업주로서의 면모를 드러내며 막대한 이익을 챙긴다. 이러한 유대인들을 바라보는 유럽인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러던 차에 일반 유럽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집에서 고양이를 많이 기르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페스트로 인한 사망률이 적었다. 그 무렵 유대인들이 기독교 신자들의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괴소문이 돌기 시작하면서 유대인들을 향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결국, 죽음에 대한 공포는 그 공포의 함량에 걸맞는 희생제의를 필요로 했고, 그 희생은 다시 누군가의 죽음을 부르는 광기의 연속이 중세 말 유럽을 휩쓸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교회는 급속히 그 영향력을 상실하고 만다. 전능한 하나님이 다스리는 합리적이고 질서있는 우주적 질서와 은총이 넘치는 신의 섭리는 죽음의 공포, 지옥의 공포로 전환되었고, 많은 사람들은 이제 곧 자신에게 닥칠 심판과 죽음에 대해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럴수록 로마교황청은 교회로부터 이탈되는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기 위해 더욱 죽음의 공포를 강조하면서 기독교 특유의 회개(고백, 고해성사)의 교리를 강요한다. 이는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었던 면죄부 판매로 이어지면서 중세는 서서히 몰락의 수순을 밟아가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중세 말 유럽에 휘몰아친 죽음의 테마는 정반대에 놓여있는 이성주의를 앞당기는 계기가 된다. 존재론적으로 느끼는 삶에 대한 허무와 죽음의 공포를 인간들이 인식론적으로 회의하기 시작하면서 근대(성)가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중세 철학을 마감했다는 평가를 받는 ‘모든 것을 회의한다’고 외친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와, 후에 근대철학을 열었다는 칸트의 ‘주체 철학’은 결국 중세 말 죽음의 테마로부터 시작된, 존재에 대한 알 수 없는 허무와 보이지 않는 공포를 극복하려는 회의와 반성적 사유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죽음이라는 알 수 없는 세력을 뚫고 피어 오르는 인간정신의 합리성! 근대는 이렇게 우리의 무지와 그 무지로 인한 공포에 한 줄기 빛을 비추며 시작된다. 그렇다면 근대(성)는 죽음을 정복했는가?
아니, 더 근원적으로 인간 정신은 어떻게 죽음을 사유하여 왔는가?

죽음에 대한 생각들 I: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으로

기독교의 부활사상과 맞물려 다루어지는 죽음 이외에 서양의 철학과 종교에서 죽음이 독자적인 관심과 논의의 대상이 되었던 적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현대 철학으로 넘어와서 주로 프로이트와 라깡으로 이어지는 정신분석학을 덕목으로 가져오는 학자들과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에서 번져나갔던 실존주의 철학자들에 의해 죽음이 다루어지고 있을 뿐, 서양철학사에서 죽음에 대한 해석이 이루어졌던 기억은 실로 미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직면했을 때 그 논의의 시작은 플라톤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플라톤에게 있어 죽음은 없다. 그는 영혼 불멸설을 주장하며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라 말한다. 플라톤에게 있어 현실의 삶이란 영혼이 육신의 감옥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고, 죽음은 다시 영혼이 육신과 분리되어 원래의 자리, 즉 이데아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플라톤적 도식은 서구 형이상학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첫 번째 단계에서 ‘이데아의 세계’와 ‘물(物)의 세계’가 날카롭게 대립한다. 그 다음 단계에서 이데아의 세계는 자신의 속성을 물의 세계로 내어준다. 그것이 플라톤에게 있어 영혼개념이다. 마지막 단계에서 영혼을 물질에 구현한다. 그것이 현실의 삶이고, 현실의 삶 속에 구현되었던(갇혀있었던) 영혼이 다시 이데아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죽음이다.

헬레니즘적인 사유와 기독교의 상관성에 주목하는 견해들은 플라톤적인 급격한 초월이 후에 서구 기독교의 발전과정에서 절묘한 대칭을 이루며 그리스도교 도그마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태초에 신이 있었다. 신이 인간세계 (피조세계)를 구원하려고 자신을 내어준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는 철저히 인간이라는 물질 안에 구현되었다. 그리고 그는 사망과 권세를 물리치고 부활하여 하늘로 귀환한다. 그 과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존재론적으로는 크리스챤을 하나님에게로 이어주는 탯줄과도 같은 역할을, 인식론적으로는 신의 세계를 가늠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플라톤의 영혼개념은 이와 너무나 닮았다. 영혼은 존재론적으로 인간이라는 물의 세계에 구현된 이데아의 역할을 하고, 인식론적으로 이데아를 밝히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죽음의 의미는 플라톤의 그것과는 달랐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현실적 삶 속에서 자기라는 것은 육신과 영혼이 현실적 시간과 공간안에 합치되어 하나가 되어있는 것이므로, 이것들이 분리된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 있어서는 파국이 되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문한다: “이데아의 세계로 돌아간 영혼이, 생물학적이고 물리적인 몸을 입고 있었던 자기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그것의 정당성을 무슨 근거로 보장받을 수 있는가?” “나를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는 나의 개별적 영혼이 나의 생물학적(물리적) 신체와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 아닌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분명한 사실은 지금 여기에서 내가 나의 육신을 입고 개별적 나의 영혼을 감지하고 있다는 것이 생명이라는 사실, 그리고 이러한 합일이 깨어지는 죽음은 비록 영혼의 죽음이 아니라 할지라도, 내가 나로서 인지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스승이었던 플라톤과는 달리 생물학적 죽음에 대해 자유로울 수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과 육체가 결합된 현실의 개체에 주목한다. 영혼은 자연과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연속선상에 위치한다. 즉, 그는 영혼과 육체를 독자적 실체로 보지 않고 분리될 수 없는 두 측면으로 본 셈이다. 이렇듯 분명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보다는 전향적인 영혼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신체와 결합한 영혼, 즉 개체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선까지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적인 영혼의 굴레로부터(예를 들어, 영혼의 선재성과 영혼의 독자적 가치를 인정하는 점)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이후 서구 정신사에서 영혼에 대한 논의는 플라톤적인 초월과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내재를 사유하는 경향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며 나타난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내재 역시 엄격히 말하면 초월적 요소를 상당부분 함축하고 있다. 다만 상대적으로 플라톤적인 과격한 초월보다 약하다는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내재를 완만한 초월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결국, 근대가 도래하기 전까지 수 천년 동안 서구 역사에서 영혼에 대한 논의는 전체적으로 초월적 사유로 이어져 갔다고 볼 수 있다.      

죽음에 대한 생각들 II: 근대철학에서 실존주의로, 그리고 임마누엘 레비나스를 향하여

이 글의 초반부에 중세의 붕괴와 근대 탄생의 시나리오에 대해 언급한 바와 같이, 근대 이후에 철학자들 (예를 들어 영국의 경험주의, 칸트, 분석철학, 논리 실증주의 등)에게 있어 죽음은 더 이상 논의의 대상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근대 이후 철학에서는 경험이나 관찰을 통해서 증명해낼 수 없는 것들을 철학적 화두에서 배제시켰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신이나 죽음, 천국 등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이슈들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고, 우리 감각에 포획되는 확실한 것, 드러난 것, 자명한 것, 눈에 보이는 현상세계들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다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경험하며 실존주의자들에 의해 철학 안에서 죽음의 테마는 다시 새롭게 사유된다.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리라 믿었던, 근대적 이성에 기반한 기술문명이 전체주의와 결합되면서 어떻게 인류를 재앙에 이르게 했는지?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한 민족을 향한 말살이 어뗳게 계몽의 시대를 거치며 진화를 거듭해온 인간 의식 안에서 허용될 수 있는지? 이러한 홀로코스트에 대한 트라우마는 단순히 유태인 혹은 게르만족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20세기 후반 서구 철학, 신학, 사회학, 문학 등 인문학 전반에 원죄의식처럼 새겨져있다. 그래서 인간들은 다음의 문제들에 대해 다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집단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죽음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전쟁터로 내몰리는가? 왜 우리는 우리의 의사와 관계없이 누구를 죽여야하고 누군가로부터 죽임을 당해야 하는가? 혹, 인간 삶의 형태와 내용이 다른 동물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창조한 고귀한(?) 존재로서의 인간의 삶은, 사실은 인류전체가 저질러 왔던 집단 사기극 아니었던가?

장 폴 샤르트르는 봇물터지듯 폭로되고 있는 인간 삶 전반에 대한 실존적 물음에 대해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라는 대답을 던지며 인간존재에 대한 새로운 해명을 시도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이어져오던 서구 전통의 존재론도 아니고, 칸트가 내세웠던 선험적 주체도 아닌, 신으로부터 어떤 선험성도 부여받지 않은 인간 ! 다시 말해 실존주의적 인간이란 신적 디자인에 의해 움직여 가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현실을 향해 내던지면서 그 궤적을 따라 미래를 만들어가는 그런 인간인 것이다. 이 부분은 레비나스와 겹치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후에 레비나스와 실존주의를 구분하는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 웹진 <제3시대>

<* 다음 호에는 ‘타자의 윤리학’으로 널리 알려진 레비나스의 죽음에 대한 논의들과 자살이 범람하는 사회에서의 자살(론)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글을 맺고자 합니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