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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퀴어]안녕하세요. 저는 페미니스트입니다.(유하림)

페미&퀴어

by 제3시대 2018. 1. 15.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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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페미니스트입니다.



유하림*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 나를 소개 할 낱말을 찾는 것은 항상 고민이다. 짧은 시간 내에 나를 정확하고 간결하게 전달해야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현재 나의 상태와 고민, 가치관을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낱말은 ‘페미니스트’다. 그치만 자주 망설인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페미니스트란 누군가에게는 반가울테지만 누군가에게는 선전포고일테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분노를 돋구는 불쏘시개이기도 하다. 그러니 처음 만나는 사람 앞에서 꺼내기에 망설일 수 밖에 없는 소갯말이다.

   페미니스트는 성차별에 반대하며 모든 성이 평등하다고 믿는, 나아가 성해방을 도모하는 사람들이다. 굳이 페미니스트라고 정의해야 할 필요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당연 그렇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나는 성평등을 지지해” 라는 문장 안에는 단순히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는 행간이 숨어있다. 과연 성평등을 지지한다는 건 뭘까? 그건 ‘성평등’ 이라는게 내 입 안에만 머무는게 아니라 실제로 이뤄질 수 있으려면 어떤 일들을 거쳐야 하냐는 질문이다. 그러니 페미니스트란 성차별에 반대하며 모든 성이 평등하다고 믿는, 나아가 성해방을 도모한다는 문장의 비교적 구체적인 방향성이다.

   이를테면 ‘나는 동물을 사랑해’라는 문장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동물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동물원에 자주가는 걸 떠올릴테지만, 어떤 사람은 동물원에 대한 폭력성을 인지하고 그런 구조를 바꿔나가는 걸 궁리한다. ‘나는 자연을 사랑해’라는 문장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자연을 사랑하기 때문에 꽃을 꺾어 간직하지만, 어떤 사람은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를 주워담는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 우리는 한 문장 안에서 발견 할 수 있는 여러가지 방식들에 대해서 무엇이 정말로 그 문장에 가까운 일인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세세하고 구체적인 방식은 더 많은 고민과 이야기가 필요하다. 당연하게 옳은 일은 없다. 그러나 적어도 여태껏 합의된 방식이란 건 있기 마련이다. 페미니즘이라고 다를쏘냐.

   ‘성평등을 지지한다’는 문장은 이런거다. 적어도 임신중절에 찬성하며, 여성에 대한 임금차별에 반대한다는 것. 여성에게 밤길이 더 이상 위험하지 않길 바라는 것.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규정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당신이 당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지 아니하길 바라는 것. 그 때문에 페미니스트 선언은 성평등에 찬성하는 동시에 그것을 삶의 실천 방식으로 가져가겠다고 말하는 적극적 행위가 된다.  

   여태껏 합의된 방식에 대한 존중과 더불어 페미니스트로서 중요한 덕목이랄게 있다면 ‘나는 언제나 가해자가 될 수 있음’에 대한 인지 라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다. 나는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든 가해자가 될 수있다. 이해하기 쉽게 일화로 예를 들겠다.

   필자는 여성이고, 22살이고, 휴학생이고, 페미니스트다. 길을 가다가 성희롱을 당하고, 앳된 얼굴 덕에 택시기사는 늘 반말이다. 그러나 서울에 살고 있으며, 비장애인이다. 서울 어디서 약속이 잡히든 삼십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이다. 어디에서는 한없이 약자의 정체성을 지니지만, 또 다른 곳에서는 누구보다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내가 항상 같은 말과 행동으로 사람들을 대할 수는 없는거다.

   알바할 때의 일화이다. 휠체어를 탄 중년 남성분이 카페에 왔다. 카운터에는 나와 신입 알바생이 있었는데, 신입 알바생의 용모는 긴 생머리에 덥수룩한 수염을 지니고 있던 39세 알통남이었다. 손님은 “사장님 이 과자 얼마에요?” 물었고, 나는 3000원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손님은 “나는 사장님한테 물었는데~ 정확한 가격 맞아요?” 하고 되물었다. 그 순간 엄청나게 화가 났다. 정확한 가격이 맞다며 퉁명스럽게 대꾸하고는 손님을 쏘아봤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 고민했다. 나는 장애를 가진 중년 남성 손님에게 화를냈다. 화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비장애인으로서의 권력관계가 있었기 때문일까? 그 사람이 비장애인 중년 남성 손님이었다고 해도 화를 낼 수 있었을까? … …

   이 일화는 여기서 마무리하고.. 위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 나라는 사람은 어디에서나 똑같은 위치일 수 없다. 그건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다. 내가 어떤 의도였건, 내가 어디서 어떻게 약자의 위치성을 가지고 있던지간에 나는 충분히 가해자가 될 수 있는 위치성 또한 가지고 있다. 위치에 대한 유동성을 인지하는 것은 나의 가해자성을 인정하는 일이다. 나도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살자는 얘기다.

   이렇게 긴 이야기를 함축적이지만 가장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낱말이 아직까지는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한다. ‘생각한다’라고 밖에 쓸 수 없는 것은 사람들은 다 각자의 페미니즘을 한다. 다양한 방식의 고민과 실천으로 페미니즘의 다양성을 넓혀간다. 그렇다고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부르는 모든 사람이 페미니스트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또 보류다.

   얼마 전에 새롭게 만나게 된 분에게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하니 어디까지를 성해방이라고 봐야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대체 무엇이 성해방이냐는 질문이다. 무엇이 성해방인지는 잘 모르겠다. 여남이 평등한 대우를 받는 것이 성해방일 수도 있고, 여성과 남성의 이분법이 사라지고 모두가 탈젠더화 된다면 그것이 성해방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여기서부터가 성해방(혹은 성평등)의 시작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출발선은 존재한다는 점이다.

   내가 페미니스트 감별사가 되어서 페미 완장을 채워주겠다는 뜻이 아니다. 페미니스트들은 이래야 한다는 또 다른 페미 코르셋이 존재한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해방을 위해 시작한 일들이 누군가를 억압하는 도구가 되어선 안된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페미니스트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사람에게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건 이 때문이다.

   방법은 하나 뿐이다. 꾸준히 고민하고 공부하는 것. 나의 빈약한 상상력에 아무도 다치지 않으려면 나를 확장시키는 수 밖에는 없다. 새해에도 나는 여전히 페미니스트이며, 나에게 페미니스트라는 소갯말은 성평등을 지지하는 사람, 가해자성을 인지하는 사람, 꾸준히 고민하고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 필자소개 


페미니스트. 모든 차별에 반대하지만 차별을 찬성하는 사람은 기꺼이 차별합니다. 간간히 글을 쓰고 덜 구려지기 위해 노력합니다. 꿈은 나태하고 건강한 백수이고 소원은 세계평화.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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