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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우리가 돌아갈 “처음”은 어디인가?(양권석)

시평

by 제3시대 2018. 1. 15.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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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돌아갈 “처음”은 어디인가?

 



양권석

(본 연구소 소장 /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


1. 다시 시작하는 꿈


    내가 속한 성공회의 교회 달력의 구성은 매우 예스럽다. 12월 25일 성탄절, 1월 1일 예수가 예수할례 받고 이름을 얻은 날, 1월 6일은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임이 드러난 공현절이다. 세상 달력으로도 1월이 되면 누구나 한번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꿈을 꾸게 되지만, 교회의 전례 달력도 세상이 예수와 만났던 처음 순간의 기억 속으로 우리를 되돌려 놓고 싶어 한다. 하늘과 땅이, 하느님과 인간이 다시 첫만남을 회복했던 순간, 말 그대로 비긴 어게인(begin again) 했던 순간을 계속 보여주면서, 우리를 그 첫사랑의 기억 속으로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로부터 취업을 결심하는 청년들까지 이 때는 모두가 처음으로 되돌아가 다시 시작하겠다는 비긴 어게인의 결심을 해 보는 것 같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신영복 선생의 서화 "처음처럼"을 새삼 떠 올리며 새해 인사를 전하고 있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추운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 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하지만 다시 처음 순간에 선다는 것, 비긴 어게인 한다는 것, 그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처음을 기억조차 하기 힘든, 너무 먼 곳에 와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미 처음을 잊어버린 사람들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시 그 처음으로 되돌아 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가? 매년 성탄절이 오고 새해가 되면 습관처럼 다시 시작할 각오를 하지만, 비긴 어게인하기 위해 되돌아갈 출발점은 어디를 말하는 것인가? 이미 처음을 버리고 멀리 떠나온 사람들이 만들어낸 욕심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다짐을 매년 새롭게 하면서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다시 시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돌아갈 첫 순간은 어디인가?


2. "처음"은 어디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우연한 순간에 신비롭고도 뜨거운 만남을 경험하는 그 첫 남은 어떤 것일까? 처음으로 하늘을 향해 서툰 날갯짓을 시작하는 어린 새의 하늘과의 첫 만남, 언 땅을 뚫고 솟아오른 새싹의 첫 만남은 또 어떤 것일까? 하늘과 땅이 처음 만나는 그 창조의 순간, 그리고 다시 만나는 그리스도 탄생의 거룩한 순간은 어떤 처음인가? 갈릴리 나자렛 사람 예수가, 요한의 세례를 받고, 하느님을 처음 만나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그 순간은 어떤 순간일까? 우리는 어떻게 그 뜨거운 처음으로 되돌아가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인가? 물신이 지배하는 세계, 편견과 적대가 지배하는 이 세계를 살면서 오래전에 잃어버린 첫 순간의 기억을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


유대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태초 곧 창조의 순간은, 하느님이 자신의 피조물들과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에 건너뛸 수 없는 거리와 간격을 만든 순간이라 하였다. 레비나스와 함께 알랭 바디우 역시 사랑은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나와는 다른 특질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의 차이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경험하는 것이라 하였고, 그래서 사랑은 환원 불가능한 타자의 경험 혹은 타자성의 경험이라 하였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처음부터 사랑의 바탕에 있는 것은 차이에 기초한 탈중심적인 세계와 삶을 구축하는 경험이라고 보았다 (조재룡 역, 『사랑예찬』, 길, 2010). 어쩌면 우리가 시작했던 그 처음도 이런 것이 아닐까?


사랑의 첫 만남은 내가 예상할 수 있는 너나 너가 예상할 수 있는 나의 발견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이미 만들어 온 세계에 대한 확신을 발견하는 순간도 아니고, 내가 앞으로 만들어 갈 세계의 가장 탁월한 조력자를 발견하는 순간도 아니다. 사랑의 첫 만남은 내게는 없는 당신의 것을 발견하는 순간도 아니고, 나의 모자란 반쪽을 정확히 알게 되는 그런 순간도 아니다. 그래서 너와 내가 서로 모자란 반쪽을 채워 완전한 하나가 되어 살 수 있는 희망을 발견하는 순간도 아니다. 또한 사랑의 첫 만남은, 나와 너 밖에서, 나와 너를 완전히 잊어 버린 채 몰입할 수 있는 어떤 신념이나 신앙을 발견하는 일도 아니다. 둘의 영원한 차이가 만들어 내는 새로운 세계와 삶의 경험 그것이 바로 태초 혹은 처음의 진실이다.


마틴 부버의 이야기도 다르지 않다. 창조는 하느님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피조물들을 처음으로 만들어 낸 순간이 아니다. 하느님이 피조 세계와 거리두기를 한 순간이고, 스스로 피조 세계와 피조물들인 우리를 모른다고 한 순간이다. 서로 모르는 상태로 만나기를 의도적으로 하신 사건이 바로 처음 순간이고, 창조의 순간이다.


처음 하늘을 향해 비상하는 새에게 하늘은 이미 알고 있거나 예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직은 모든 것이 무한 가능성의 신비 속에 있다. 그래서 처음은 서로 다름과 서로의 모름이 만들어내는 놀라운 신비와 창조력을 경험하는 순간이다. 서로 다르고 모르는 것이 만들어 내는 전혀 새로운 발견들 앞에서 전율하는 경험이다.


3. '차이'와 '모름'의 회복을 향하여


첫 사랑의 순간이 까마득한 태고의 전설이 되어 버린 사람들, 이미 서로를 다 알아 버린 사람들, 그래서 더 이상 모를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사람들에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기는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처음처럼 삶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맺고 살아가는 관계들을 그 근본에서 의심하고 전복하는 일이다. 첫 사랑의 기억을 잊어 버린 우리는, 아니 첫 사랑의 뜨거움을 견디기 힘들게 된 우리는,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상대방을 바라본다. 수 많은 편견과 선입견으로 쌓아 올린 나의 눈으로 남편이나 아내를 그리고 친구와 이웃을 재단하고 정의한다. 그러다가 자식을 낳거나, 직업을 갖거나, 어떤 신념이나 종교를 신봉하게 되면, 사랑 따위는 잊어버리고, 그 일을 위한 동업자적 관계를 만들어 산다. 그리고는 그 동업자적 관계를 잘 만들어 가는 것이 곧 사랑이라 착각하며 서로를 위로한다.


처음을 잊어 버린 우리는 나와 당신이 둘이라는 사실, 나와 너가 서로 모른다는 사실, 나와 너가 어떤 인연으로도 하나가 될 수 없는 차이를 유지한다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한다. 하지만 처음으로 돌아가는 일은 나와 너가 둘이라는 사실, 서로를 다 알지 못한다는 사실, 들 사이의 결코 동일화할 수 없는 차이를 회복하는 일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가장 모르는 사람으로 재 발견하는 일 그것이 비긴 어게인의 출발점이다.


시몬 베유는 자신의 신앙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하느님은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나는 내 사랑이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 하기 때문에 하느님은 분명히 있다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내가 하느님에 관해서 어떤 말을 할 때, 내가 그 말을 하면서 그리고 있는 하느님에 관한 어떤 것도 하느님과 닮지 안았음을 확신하기 때문에, 나는 하느님이 없다고 확신합니다.”(Waiting for God , New York: Harper & Row, 1973, p. 32.)


시몬 베유의 하느님은 있는 하느님이면서 없는 하느님이요, 아는 하느님이면서도 모르는 하느님이다. 나의 편견과 선입견에 결코 갇힐 수 없는 분이며, 그렇다고 나와 하느님 사이의 관계를 만들어 주는 제삼의 원리나 존재를 허락하는 분도 아니다. 공통분모를 만들고, 동업자적 계약관계를 만드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 분이다. 아마도 이런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이 곧 언제나 처음처럼 살아가는 신앙의 삶일 것이다.


진정으로 다시 시작하려면, 시몬 베유가 하느님을 향해서 고백했던 그 표현을 우리는 바로 옆에 있는 가장 가까운 사람을 위해서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기에 서로 안다고 할 수 있지만, 내가 아는 그대에 관한 어떤 설명이나 정의도 그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그대를 모른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처음으로 되 돌아갈 수 있고, 영화 제목처럼 비긴 어게인 할 수 있고, 둘의 모름과 차이가 만들어내는 놀라운 세계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4. 다시 시작하는 평화의 길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 보려는 이 꿈이 우리들의 가까운 인간 관계를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전쟁의 위협이 고조되는 분단의 땅 한 반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치적 꿈이 되기를 또한 바란다. 사랑과 정치가 다르다 해도, 둘 다 새로운 관계와 가능성을 위한 모험이며, 사람들과 더불어 새로운 사회적 관계와 새로운 세계를 구축해 보는 경험이라는 측면에서는 다르지 않다고 본다.


분단체계는 엄밀히 말하면 이념에 기초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류 보편의 어떤 가치에 기초한 것도 아니고 서로의 편견관 증오심에 기초한 정체성의 정치다. 서로를 배척하는 것을 통해서만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질서다. 오직 흡수와 통일만 있을 뿐, 서로의 차이는 물론이요, 서로의 모름도 인정하지 않는 체계다. 분단체계 극복을 위한 근본과제는 바로 이 폭력적인 정체성의 정치와 그것이 만들어낸 관계들을 극복하는 일이다. 이미 처음의 기억은 거의 없다. 유전자처럼 우리의 체내에 뿌리 내린 분단체계는 편견과 독선만을 허락할 뿐, 차이와 모름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으로부터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길을 찾아야 하고 다시 시작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독선과 편견과 선입견을 넘어 서로의 차이와 모름을 회복할 수 있어야 한다. 제재를 통해서만 대화가 가능한 상태에서, 서로의 차이와 모름에 기초한 정말로 창조적인 남북 대화를 향해 먼 길을 가야한다. 참으로 위태로운 줄다리기 끝에 대화의 숨구멍이 열렸다. 이 대화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가, 새로운 세계와 삶을 시작하는 새 길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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