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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존재의 잔향 < 고스트 스토리 (데이빗 로워리, 2017)>(이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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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3시대 2018. 1. 15.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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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잔향 

< 고스트 스토리 (데이빗 로워리, 2017)> 




이희승*



  망자가 살아있는 자들의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방황할 때, 우리는 쉽게 ‘유령’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게 됩니다. 새로 다가오는 것에 자리를 내어주지 못하는 지나간, 혹은 지나가야만 할 것들을 통칭할때도 흔히 ‘유령’ 혹은 ‘망령’이라는 표현을 쓰게 되지요. 선왕의 유령이 준비하지 못하고 맞은 억울한 죽음을 기억해달라며 젊은 왕자 햄릿의 눈 앞에 나타났을 때, 햄릿은 “그대는 성령인가, 악마인가? 천상의 영기인가, 지옥의 독기인가? 그대 마음속의 선악의 의도는 모르겠다만, 그런 수상한 모습으로 나타났으니 말을 건네 보지 않을 수 없다”라며 용기를 내어, 밤이슬을 맞고 선 유령에게 말을 겁니다. 일말의 주저없이 선왕의 유령은 너무나 분명하게 살인의 순간을 묘사하고, 복수의 범위까지 세세히 지시하는 것도 모자라, 새벽닭이 울어 지하세계로 퇴장해야 하는 그 순간까지 머리가 터질 지경인 아들에게 자신을 잊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하죠. “아듀, 아듀, 아듀, 리멤버 미!” 이렇듯 지옥의 고통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과 나름의 정의를 실현하려는 의지, 그리고 살아 남은 자들에 대한 사랑과 증오의 자의식이 그대로 남아 있는 아버지의 유령은 결국 덴마크 궁정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죽음을 맞이하고 한 시대가 갑작스레 막을 내리는 비극을 재촉하게 됩니다. 세익스피어의 무대 뿐만 아니라, 영화의 여러 장르에서도 유령의 존재를 산 자의 시공간에서 조우하는 경험의 영화적 재현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얀 소복을 차려입고 무덤가에 출몰하는 처녀귀신이든, 피칠갑을 하고 교정을 배회하는 여고생이든, 사랑하는 여인 곁을 떠나지 못하는 애절한 약혼남이든, 남겨 둔 어린 자식의 육아에 시시콜콜 간섭하는 고스트 맘이든 말이죠.


  하지만 데리다의 유령론 (hauntology)이 제시하듯, 유령은 존재와 부재의 명확한 구분에 도전하는 ‘위험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부재를 전제로 하는 유령의 존재는 근대물리학에 기반한 ‘자연의 법칙’에 도전하는 한편, 직선적인 역사관의 한계를 벗어나는 변화와 확장의 가능성을 내포한 채, 실재와 가상의 경계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얼마전 조용히 개봉했다가 사라진 저예산 영화 <고스트 스토리>는, 상상하는 대로 뭐든 만들어 내는 최첨단 디지털 시네마의 시대에, 구멍이 두개 뚫린 침대시트를 뒤집어 쓴 우스꽝스러운 유령의 이야기를 통해서 삶과 죽음, 시간과 공간, 개인과 역사의 혼재에 관한 위험천만한 상상을 가능하게 합니다.



  젊은 작곡가인 C (케이시 애플릭)은 아내인 M (루니 마라)와 함께, 한적한 교외의 작은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늘 혼자하는 음악 작업에 익숙한 조용한 성품의 C는 편리하고 깨끗한 도심의 아파트로 이사하기를 원하는 아내의 요구에 매우 소극적으로 대응하죠. M은 밤마다 으스스한 소리가 들리는 낡은 집이 무섭기 짝이 없지만 남편인 C는 부부의 짧지만 소중한 ‘역사’가 담겨 있는 이 집은 물론, 보이진 않지만 같은 시공간에 공존하고 있는 듯한 존재에 설명할 수 없는 애착을 가지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남편이 죽고, 가족없이 홀로 남겨진 아내는 물끄러미 영안실에 누워 있는 남편의 얼굴을 내려다 봅니다. 크게 울어 보지도 못하는 아내는 C의 얼굴을 하얀 시트로 덮고는 영안실을 빠져 나갑니다. 잠시후, 죽은 남편의 시신은 하얀 시트를 뒤집어 쓴 채로 영안실을 나와 병원 복도를 배회하며, 사람들이 자신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죠. 대사 한마디 없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갔다가 다시 돌아온 ‘침대시트 유령’은 석양으로 물든 드넓은 푸른 초원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 갑니다. 이때 영화는 그 흔한 특수 효과나 CG 없이 침대시트를 질질 끌며, 당연하다는 듯 표표히 집으로 걸어 돌아오는 유령을 익스트림 롱 쇼트로 보여 주죠.


   슬픔에 잠긴 아내의 곁을 안타깝게 지키는 유령의 모습은 <사랑과 영혼>에 등장하는 애절한 눈빛의 샘 (패트릭 스웨이지)과 닮은 듯 보입니다. 별반 의심없이 관객은 조금전까지 존재했던 C의 다정했던 모습을 새하얀 시트위에 투영합니다. 죽음을 뛰어넘은 관계의 연속성을 성급하게 단정한 채, 우두커니 집안 한 켠에 서있는, 표정도 없고 말도 없는 이 유령을 죽은 남편의 ‘영혼’으로 간주합니다. 마치, 이승에서의 욕망, 의식과 의지가 죽음이라는 단절을 초월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말입니다. 하지만, <고스트 스토리>의 유령은 서서히 자의식과 기억을 잃고 이승에서 하릴없이 부유하게 됩니다. 햄릿의 아버지와는 달리 이 영화가 그리는 ‘고스트’는 인간성을 한 겹씩 허물처럼 벗어내면서, 머물고 싶다고 하면서도 부단히 앞으로, 미래로 내닫기만 하는 살아 있는 인간들의 강박에서 한걸음 비켜 서게 되죠. 산 자의 삶이 한방향으로 전진하는 운동이라면, C의 실존 뒤에 남겨진 잔향과 같은 이 유령은 지상에 매인 존재들을 관장하는 물리법칙과는 다른 궤적과 속도를 가진 시간의 흐름을 경험하게 됩니다. 내 아내, 내 집, 내 음악 이라는 주체의식이 무효한 긴 호흡의 시간을 타고 흐르며, 과거-현재-미래-과거라는 순환적인 내러티브가 스크린 위에 몽환적으로 펼쳐 집니다. 영혼이나 유령의 형상에 인간성을 대입해 만들어낸 여타의 유령 이야기들과는 달리, 영화 <고스트 스토리>는 유령의 관점에서, 인간 세계와 공존하지만 ‘인간적’인 방식으로 이해하거나 관계할 수 없는 그들만의 세계, 그들만의 이야기를 구술하려고 애를 쓰는 것 같습니다. 


    젊은 부부가 살던 작은 집에 다른 세입자들이 머물다 떠나기를 반복하고, 마침내 그 집과 이웃집들이 허물어지고, 별빛이 성성하던 그 자리에 밤을 대낮처럼 밝히는 마천루들이 들어서는 동안, ‘고스트’는 사념없이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변질을 목격합니다. ‘고스트’의 경험을 묘사하는 영화의 방식은 참으로 인상적이죠. 실재와 부재의 경계에 선 존재와 죽은 C를 동일시했던 관객에게 지속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방식을 취합니다. 다소 더럽혀진 침대시트를 뒤집어 쓴 ‘고스트’는 요란하게 놀라지도, 슬퍼하지도, 관심을 가지지도 않고서, 분명 C에게는 상상도 못할 미래였을 수십년의 시간과 C에게는 너무나 낯선 이방인이였을 사람들 사이를 무심히 스쳐 지나갑니다. 마치 영안실에서 나와 넓은 초원을 걷던 영화 초반의 그 순간처럼 표표히. 전생에 마침표를 찍은 그 지점으로 되돌아온 ‘고스트’는 이제 막 삶을 마감하고 유령이 된 C와 같은 시공간에 서게 됩니다. 이 특별한 시간 여행으로 관객을 이끌었던 ‘고스트’가 영겁의 시간을 경험한 후 다시 집으로 돌아와, 새출발을 위해 집을 떠나는 부인 M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는 신참 ‘고스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은 마치 아귀가 맞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영화의 결말을 열어 놓게 됩니다.


    이분법적 사고의 한계 안에서 실재와 부재를 마치 아귀가 딱 맞는 댓구라고 상상했던 우리는 사뭇 ‘위험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고스트 스토리>의 유령은 시종일관 말없이 침대시트를 뒤집어 쓰고 느린 걸음으로 관객을 이끌면서, 세상을, 우주를, 시간을, 공간을, 존재의 속성을, 그리고 유령을 우리가 이해하기 편리하도록 하기 위해 설정했던 모든 경계를 의심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존재와 존재가 남긴 흔적들이 얼키고 설켜서 만들어진 <고스트 이야기>는 기억에 남는 대사, 빈틈없이 직조된 플롯, 세심하게 구성한 이미지 등에 의지하지 않고, 한때는 누군가 혹은 무엇이었던 존재가 남긴 은은한 잔향과 조심스런 공기의 울림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입니다. 



* 필자소개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 강사 및 정신분석가. 동 대학의 미디어 영화학과에서 각색영화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아시안학과에서 한국 영화와 텔레비젼 드라마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호주 정신분석학회의 정신분석가 과정을 수료하고, 국제 라캉 포럼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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