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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개혁이 여전히 먼 이유 하나(김진호)

시평

by 제3시대 2018. 2. 2.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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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이 여전히 먼 이유 하나[각주:1]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1700만 촛불시민이 제기한 “이것이 국가인가”라는 문제제기에 대해 “사람이 먼저다”라고 답한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었고, 그 첫해 동안 매우 빠른 속도로 ‘사람을 한갓 도구’로 취급해왔던 것들에 대한 청산이 진행되었다. 물론, 정권을 잃었음에도, 사회 구석구석 굉장히 많은 곳에서 적폐세력들이 제도권력을 쥐고 있기에 빠른 개혁의 속도에도 여전히 전체 사회는 사람을 위해 작동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런데 갈 길이 먼 것은 적폐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제도들 때문만이 아니다.

   ‘사람이 먼저다’라는 개혁 슬로건, 그것을 전유하고자 하는 우리 자신이 변화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이 슬로건에 열렬히 환호했던 우리의 심상(心想)에 가장 먼저 자리 잡고 있는 것은 ‘갑질하는 특권층’ 대 ‘을로 전락해버린 시민/우리’라는 권력의 작동 방식일 것이다. 그것을 청산하는 일, 바로 그것이 이 슬로건이 지향하는 개혁의 중심적 함의겠다. 하여 갑-을의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권리의 주체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 하나가 모호하게 취급되어 있다. ‘을’ 안에서 다시 ‘갑과 을’이 나뉘어 있다는 사실 말이다. 자기 자신이 ‘을’이 되어버렸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나머지 자기가 또 다른 누구에게 ‘갑’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민의 권리를 말하는 데 급급하다 비시민으로 추락한 이들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것, 그리고 때로 무의식중에 자기 자신이 ‘갑질’하는 주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인권이라는 문제 설정은 바로 여기에서 요청된다. ‘인권’의 문제는 누군가가 ‘우리’와 동등한 권리의 주체임이 망각되는 순간 일어난다. 가령, 1980~1990년대 대표적인 민중가요이고 내가 속한 교회의 찬송가이기도 한 <그날이 오면>의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를 목청 높여 부를 때, 그 자리에 함께 노래했던 여성들을 ‘그날 (형제들의) 공동체’에서 누락시키고 있음을 남자인 내가 떠올리지 않는 그 순간, 인권유린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타자란 이렇게 종종 우리의 심상에서 누락되곤 한다. ‘사람이 먼저다’라고 개혁의 기치를 높이 올릴 때 은연중에 사람에서 배제된 존재를 우리가 자각하지 않는 순간 개혁의 길은 그만큼 멀어져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의 종교성의 장소이자 글쟁이인 내가 만들어내는 담론의 주된 서식처인 개신교를 비판적으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우리 사회에서 이 종교만큼 누군가를 타자로 만드는 일이 잦은 곳은 별로 없다. 그 안에는 적폐의 원흉이라고 할 만한, 증오의 전문가들도 숱하다. 그러나 절대다수의 개신교 신자들은 특별한 증오나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 개신교 담론의 장치들에 세뇌되어 무심코 혐오주의적 언행들을 반복한다. 문제는, 증오의 전문가들은 개신교 대중을 그렇게 편견과 배제의 수행자로 만들어내는 주역이지만, 동시에 개신교 대중의 무성찰적 태도가 그런 증오의 사도들이 탄생하는 알리바이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한동대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도 이 점에서 다르지 않다. 이 학교는 교수 한 사람에게 해임을 통보했고 학생 몇을 징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주된 징계 사유는 ‘학교의 정체성에 위배된 행위’ 때문이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동성애 반대’라는 기조에 저촉되는 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이를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 학교는 동성애 혐오주의를 추구하니, 학교에 속한 이는 누구든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동성애에 대해 관용적 태도를 취해도 안 되고 그것에 대해 알려 해도 안 된다. 그것이 헌법 11조, ‘누구든 성별이나 종교, 신분 등이 이유가 되는 어떠한 차별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에 위배되더라도, 이 학교의 구성원은 모두가 혐오를 정체성으로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교수나 학생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리야 없겠지만, 이 경우 그런 혐의로 혐오주의적 기제가 작동하고 있다.

   그런데 다수의 학생들은 학교의 이런 반헌법적인 문제적 ‘정체성’, 그런 원리주의적 권력의 폭력을 지지한다. 물론, 말했듯이,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누군가를 차별하고 배제하는 혐오주의적 집단폭력을 초래할 것이라고 의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혐오주의적 권력은 제도를 만들어내고 그 제도에 사람을 끼워 맞추려 한다. 하여 제도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제도의 부속품이 되게 하려 한다. 그사이 ‘사람이 먼저인’ 개혁은, 그 길은 그만큼 더 멀어져버리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1192040015&code=990100#csidx0d097d5f31be59da5bbe287ddf67a0a 이 글은 경향신문 칼럼 '사유와 성찰' 란에 동일한 제목으로 1. 19에 게재된 글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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