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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정보 : 성소수자 이슈에 자극된 생각들 4] 잔인한 구원, 무서운 구원(황용연)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8. 2. 14.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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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이슈에 자극된 생각들 4] 잔인한 구원, 무서운 구원





황용연

(Graduate Theological Union Interdiscipilinary Studies박사과정(민중신학과 탈식민주의) 박사후보생,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객원연구원)


1. 

그리스도교에서 구원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할 때 좋든 싫든 많이 오르내리는 단어 중 하나가 이른바 '개인구원'이라는 단어다. 어떤 입장에서는 이 단어는 그리스도교가 추구해야 할 근본적인 목적이 될 것이고, 다른 입장에서는 이 단어는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거기에만 매몰될 경우 많은 폐해를 낳을 수도 있는 단어라고 할 터이다. 아마도 후자의 입장에 대해서 전자는 근본적인 목적을 소홀히 여길 우려가 있고 실제로 그런 경우 꽤 봤다 그러기도 할 터이고.

그런데 한 번 이렇게 물어 보자. 만약 정말로 흔히 말하는 '개인구원'만 생각하면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인 건가.

무슨 말인가 싶은 분들에게 일단 들려드릴 야그 하나. 구스타보 구티에레즈가 미국 어느 대학에 강연을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단다. 빵이라는 게 미국 같은 잘 사는 나라 사람들에겐 '육신의 문제'라고 칠 수 있더라도, 자신이 사는 남미의 가난한 사람들에겐 '영적 문제'라고 말이다. 이 때, 빵의 문제를, 즉 살림살이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그 '남미의 가난한 사람들'이 이른바 '개인구원'을, 특히 흔히 상상되는 대로 '사회적 구원'과 연관되지 않는 '개인구원'을 받는다는 게 가능이나 한 것일까. 빵이 영적 문제라는데.

이렇게 묻고 보니, 이 시리즈에서 계속 이야기해 왔던 성소수자의 경우도 어쩌면 크게 다를 것 없으리란 생각이 든다. 명색이 구원이라면, 특히나 '개인'구원이라면, 한 사람의 정체성 전체에 대한 구원이어야 하는 것이 당연할 터인데, 그 정체성 중의 중요한 한 부분인 성적 정체성 자체가 죄냐 아니냐라는 저울에 올려져 있다면 그걸 해결하지 않고서 구원이라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니 여기서도, '사회적 구원'과 연관되지 않는 '개인구원'이란 애당초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사회경제적 소수자에 해당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경우에서, '사회적 구원'과 연관되지 않는 개인구원이란 없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이럼에도 불구하고 개인구원'만' 받으면 된다고 생각을 할 수 있다면, 일단 본인이 소수자라고 깨달을 일이 없었다는 말이 될 터이다. 자신이 소수자인 적이 없었다는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들이 보기에는 참으로 '큰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아니면 뭔가 착각을 하고 있든지.

조금 고약한 경우를 생각한다면, 이런 경우도 가능할 것이다. 한 사람이 생각하는 구원과,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구원이 서로 대치가 되어서, 다른 사람의 구원을 방해하는 걸로 자신의 '개인구원'을 이룬다는 경우 말이다. 충남에서 인권조례를 기어이 폐지시키고 만 사람들이 아마도 딱 맞는 예가 될 것 같다. 그렇다면 이 '개인구원'이란 말이 참 잔인한 가능성을 갖고 있는 말이 되어 버린다.


2.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 본다면, 구원이란 말 자체가, 적어도 그리스도교에서는, 원래 잔인한 말이 아닌가 싶다. 무슨 말이냐고? 그리스도교의 구원의 출발점은 사실 따지면 이것 아닌가. 우리 모두가 지금 딴 사람 목숨값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라는. 그리스도교의 구원 담론의 중요 포인트인 이사야서 53장에 나오는 대로, 우리들의 죄 때문에 생목숨을 잃는 누군가가 있어서, 그 누군가의 목숨값으로 살고 있다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그렇게 남들의 목숨값으로 내가 살고 있는 것이라면, 그 목숨값을 지불하게 만든 내 죄를 직시하거나, 그 목숨값을 치를 사람이 죄인으로 몰리는 내가 될 수도 있었다는 현실을 직시할 일이겠다. 그러니 구원이란 곧 심판과 동의어가 될 것이다. 죄인이라는 족쇄와 죄인이 아니라는 착각이 동시에 풀려져 버리는 순간일 터이니.


3.

한국의 성소수자 혐오 영역에서 "이 구역의 미친 놈은 나"라고 대놓고 주장할 수 있을 국민일보에서 몇 년 전 한 트랜스젠더 노인의 삶을 보도하면서 동성애는 사랑이 아니고 혼자 늙고 결국엔 비참해 진다 운운하는 기사를 크게 실었던 적이 있다. 그리고 이 기사를 본 사람들에게서 나온 반응 중의 하나는 성소수자이면서 사랑도 하고, 혼자 늙지도 않고, 잘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언급하는 것이었다. 방금의 두 가지 중에 굳이 따지면 당연히 후자가 정상적인 사고이겠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할 여지도 있지 싶다. 혼자 늙고 비참해지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이렇게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 다른 방향으로 말한다면, 그가 혼자 늙고 비참해진 것이 그의 죄가 아니라 우리의 죄의 증거이지는 않을까. 그를 혼자 늙게, 비참하게 살도록 몰아붙인, 우리의 죄 말이다.

이런 방향으로 말을 꺼내고 보니 생각나는 이야기. 나이 드신 여성 지인 중에 이미 아들들을 성년으로 키운 나이인데 자신의 성소수자 정체성을 실현하고 살아가는 분이 있다. 이 분이 처음 자신의 정체성을 실현하기로 마음 먹고 그걸 주변에 고백을 하니,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말리는 사람들이 있더란다. 그러다가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혼자 늙어 길거리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될 것이라고.

앞에서 이야기한 트랜스젠더 노인과 같은 경우가 될 거라는 이야기인 셈인데, 그런 말리는 이야기를 들을 때 이 분은 그 이야기를 하나의 예언처럼 느끼셨단다. 입장의 동일함이 가장 치열한 연대라면, 그렇게 외면당하고 길거리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고 싶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니겠냐고. 그 길거리가 자본주의의 끝자리라면 말이다. 무섭고 두렵고 싫더라도, 그렇게 하고 싶다고 말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냐고. 그래서 이 분은 기도하기를, 그것이 예수님의 뜻이라고 해도 피하고 싶지만 그래도 이루어져야 한다면, 자신의 머리채를 휘어잡아서라도 그 자리에 끌고 가시라고 한다.

외면당하고 길거리에서 죽는 그 자리에 머리채를 끌고 가셔도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일단은 말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 구원이라면, 참 무서운 구원이다. 그러나 외면당하고 길거리에서 죽는 그 사람들이 우리의 죄의 증거라면, 그들이 우리의 죄를 지고 있다면, 그리스도교적 지평에서 그들의 자리와 나의 자리를 연관짓지 않고 존재하는 구원이란 존재할 수 없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때 구원이란, 그들이 지고 있는 우리의 죄, 곧 나의 죄를 자각하는,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거나, 그들의 자리가 나의 자리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일 테니, 어느 쪽이든 내가 지금의 나로 더 이상 살 수 없게 만드는 것일 터. 이것이 무서운 구원이 아닐 도리는 없다. 그러나 무서운 구원이라지만 그것 말고 다른 길이 없다면, 갈 수 밖에는.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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