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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정보] 누가 선택받은 사람인가? II (김윤동)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8. 3. 14.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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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선택받은 사람인가? II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뽑고, 무너뜨리고, 멸하고, 헐고, 세우고, 심는 야훼


우리가 ‘예언자’ 또는 ‘선지자’ 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의 모든 애끓는 외침 또한 이런 타자를 생산해내는 구조를 타파하고 돌이켜 야훼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처음 이루었던 그 약조를 기억하고 그 약속으로 돌아가 공동체를 경영해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벌이는 야훼의 불타는 사랑 고백이었다고 볼 수 있다.


보아라! 나는 오늘 세계 만방을 너의 손에 맡긴다. 뽑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고 헐어버리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고 심기도 하여라(렘 1:10)


예언자들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스라엘 국가가 왕조의 시대를 열고 난 다음의 이야기를 간단히 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왕조가 생기고 얼마 되지 않아 문제가 생겼다. 이스라엘이 강력한 국가의 꿈을 꾼 것이 사울과 다윗의 때였는데, 그의 아들 솔로몬 왕의 찬란한 문화유산을 꽃피운 후에 둘로 분열되고 말았다. 잠시 잠깐 팔레스타인 지방의 맹주 이스라엘이라는 ‘꿈’은 다시 힘을 잃고 몰락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한 때 오므리 왕조에서 큰 번영을 한 번 이루긴 했지만, 그 시기를 제외하고 많은 침략과 강대국 사이의 전쟁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남왕국 유다 또한 그나마 전쟁의 화마에서 비껴나갔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태평성대를 누리는 평화로운 시기를 보낸 것이 아니라, ‘별로 탐나지 않는 영토’를 가진 탓에 산골 구석에서 떨며 세월을 보냈다. 두 나라 모두 이런 강대국의 전쟁 틈바구니에서 약소국의 설움을 견디며 자생하려 애썼지만, 결국 비교적 강대국이었던 북왕국은 앗시리아에 의해 기원전 723년에, 남왕국은 바빌로니아에 의해 기원전 586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이런 과정 속에서 왕조의 탄생 이래, 다윗 시대 나단처럼 국가에 속한 선지자이든지 엘리야, 엘리사 등 자기들만의 독자적인 세력을 갖춘 선지자 집단이든지 국가의 권력에 대항한 선지자 그룹이 남/북왕국 모두 계속해서 계승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한결 같았다. 야훼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 맺어진 약조, 곧 ‘법’은 유효하며 지금도 그 법으로 다 형용될 수 없고 표현될 수 없는 야훼 하나님의 신실한 ‘개입’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선택받지 못한 백성들로서 고통 받을 때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간음 행위를 저지르고(호세아), 동족들을 신발 한 켤레 값을 갚지 않았다는 죄 아래 종으로 팔아 넘기고(아모스), 입술로만 하나님을 공경하지 마음은 멀리 떠난(이사야) 행위를 서슴치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버림 받은 자'들의 공동체였던 이스라엘이라는 기원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숨기려고 했다. 이들은 지나간 출애굽 사건을 운운하거나 기억할 때가 아니라 오로지 미래의 더 많은 풍요로운 ‘생산’을 국가의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구호 아래 야훼를 과거의 뒷방 늙은이 취급하였다. 그리곤 다른 나라들의 훌륭하고 멋지고 폼나는 기원을 가진 자들처럼 거짓 신화를 만들어내거나 야훼가 아닌 다른 신과의 동거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던 것이다. 뽑고 무너뜨리고 멸하고 헐어버리고 세우고 심는 삶의 역동성이라는 본질을 주제를 가차없이 내팽개쳤다. 이런 야훼의 속성은 불안하고 예측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등한시하고 바알의 ‘오직 성장, 오직 번영, 오직 풍요’의 길로만 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야훼의 예언자 전통, 곧 나단이나 엘리야의 그것처럼 열정 넘치고 정념 어린 시도들이 가끔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저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외침’으로 여겨지며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스라엘은 뿔뿔이 흩어졌고, 잠시 고레스에 의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느헤미야와 에스라를 통해 새로운 성전을 짓고, 다시 독자적인 공동체를 시작해보려 했지만, 이내 그런 시도들 또한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국 중의 하나인 로마를 만나 좌절당했다. 이제 더 이상 일어날 힘조차 없어져 버린 것이다.


예수가 '폐허 속에서' 꿈꾼 이스라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찬란했던 다윗 왕조의 역사와 선택받은 사람들이라는 마음의 자부심이 사라져 갔다. 선택받아 ‘약속의 가나안 땅’을 (무려) ‘차지’하게 된 우월하다고 여겨진 이스라엘 공동체는 여러번에 걸친 제국의 침략으로 인해 부서지고 짓이겨져 형체도 없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수많은 야훼의 예언자들이 히브리의 전통을 기억하고 왜 우리가 선택되었는지, 그리고 선택받은 사람들로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일러주었지만, 그 모두 처음으로 돌이키기에는 늦어버렸다. 하지만, 예언자들을 통해 근근이 명맥을 이은 야훼 신앙과 이집트 노예 히브리와의 계약이라는 기원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세례 요한이 요단 강에서 죄 사함의 세례를 베풀고 나사렛이라는 작은 동네에서 예수가 등장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크로산은 추측한다.


사회적인 차별을 계속 당하고 불의한 일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외세의 지배, 식민지 착취의 물결이 유대 영토를 휩쓸자 사람들은 오랜 동경으로 신성해지고 유토피아적인 이상주의로 충만한, 지나간 시대의 평화와 영광을 회복시켜 줄 수 있는 미래의 다윗과 같은 지도자를 마음에 그리게 되었다. 예언자 미가는 기원전 8세기 후반에 활동한 예언자 이사야와 같은 시대 사람으로서 그보다 젊고 또 그와는 달리 하층계급 출신이었다. 이 미가의 책에 모아진 예언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열렬한 희망이 들어 있다.(5:2)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의 여러 족속 가운데서 작은 족속이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다. 그의 기원은 아득한 옛날, 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각주:1]


그들에 대한 통제가 점점 더 총체적인 것이 되어 가고, 아울러 그 희망이 점점 더 절박하게 되자 당시의 개인들이나 집단들은 흔히 묵시종말적인(Apocalyptic)입장으로 돌아서 하나님의 개입(divine intervention), 즉 하늘을 땅으로 가져오고 땅을 하늘로 높이는 대규모적인, 세계를 뒤흔드는 하나님의 개입을 상상하기에 이른다.[각주:2]


로마가 유대 땅을 지배한 이래로 유대인들은 오랜 기다림 끝에 사람들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정말로 야훼 하나님이 전쟁에서 진 것은 아닌지, 전쟁에서 졌다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된 것인지, 혹 계속해서 메시야를 기다려야 한다면 그 메시야의 모습이 우리가 이제까지 상상하던 모습과 다른 건 아닐지 의견들이 분분해진 것이다. 이스라엘은 급기야 묵시종말적인 메시야를 기대하는 움직임들이 성행을 이루었다. 다윗 왕조란 ‘지금, 여기’에서 재현되는 일이 아니라 야훼의 불과 칼로 모든 현재의 권력을 뒤엎고, 지금의 시공간을 중단시키며 새로운 시간과 공간으로 열릴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이라는 사건일 것이라 기대하기 시작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예수가 그린 하나님의 통치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예수가 꿈꾼 ‘자유와 해방’이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건 갑작스레 일어나는 일이긴 하지만, 지금, 여기와 관계없이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다. 너무나 현재적이고 너무나 현실적인 일이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는 말자. ‘현실적’이란 말은 현재의 체제들을 다 인정하고 그대로 현재의 법들이 유효한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이란 말이 아니었다. 현재의 정치 사회체제를 모두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에 있기에, 우리가 잘 모르는 ‘원형(archetype)’을 본떠 지금의 덕이나 윤리, 또는 ‘지혜’를 통해 슬쩍슬쩍 알려지는 것이고 우리는 그런 것들을 배우고 마음 속으로 품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또한 아니었다. 조금은 도식적이지만 존 도미닉 크로산이 제시한 아래의 도표[각주:3]를 살펴보도록 하자.

예수가 주장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라는 것은 묵시론자들의 그것처럼 너무나 타의적이어서 그것에 대한 ‘홍보나 설득’ 정도로만 국한되는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었다. 또한 현자들처럼 윤리나 지혜의 어떤 박식하고 복잡한 것들을 습득함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매우 현실적이고 정치적이며 우리 일상과 맞닿아 있는 것들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이었고 새로운 이름을 얻어 자기가 사는 곳에서 모두 축제를 벌이는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엄연한 족보와 가문이 있어 별 노력을 하지 않아도 손 안 대고 코를 풀 수 있었던 권력자들이 통치하는 곳이 하나님 나라가 아니요, 그렇다고 아무 것도 할 수 없기에 지금을 끝장낼 하나님의 통치가 ‘언젠가는’ 이루어 질 것이라고 무력하게 앉아서 골방에서 하늘만 쳐다보는 무능력하고 모래알 같은 노예들의 나라도 아니다.


우리가 앞에서 계속해서 주장해왔던 이스라엘의 기원, 선택 받지 못한 사람들과 소속 없고 떠돌던 사람들로서의 이스라엘, 그럼에도 느슨하지만 아름다운 연합이 가능하다는 비전을 품고 살아갔던 그 출애굽 공동체의 원형을 기억하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간 이가 바로 예수다. 왜 그리 말할 수 있는가? 복음서에 나타난 수많은 이야기를 예로 들 수 있겠지만, 대표적으로 우리의 주제와 연관된 두 가지의 예를 들어보아야 할 것 같다.


첫째는 예수가 가정을 공격했다는 점과 둘째는 너무나 파격적인 공동식사를 벌였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이 곧 혈통으로 형성된다는 주장은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이방의 사람과 결혼한 자는 곧 쳐죽여야 할 중대 범죄임을 성서 내에서 말하고 있고, 그것이 처음에는 이방신과 우상의 유입을 막으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대단히 오랫동안 이스라엘과 유대인의 ‘배타성’을 지키는 강고한 논리로 이어졌다. 심지어 “이스라엘 = 혈통”, 즉 이스라엘이라는 정체성은 혈통으로만 계승된다는 논리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상에 있는 저 중동 팔레스타인 땅의 ‘이스라엘’ 국가에서도 발견된다.[각주:4] 그런데, 예수는 2천여년 전에 이미 이스라엘 곧 야훼 하나님의 울타리는 혈연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단호히 이야기했다.[각주:5] 두번째 파격적인 공동식사의 자리 이야기는 하나님이 애초에 만들었던 하비루들의 공동체가 어떠했는지 그 원형을 그대로 나타내준다.[각주:6] 이 공동식사에 관해서 크로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잔치 준비가 다되었는데 자리가 텅 빈 것이다. 주인은 오지 않은 손님들의 자리를 거리의 뒷골목에서 아무나(Anyone off the street) 불러다 채운다. 그런데 만일 실제로 뒷골목에서 아무나 데려왔다면, 그 자리는 모든 신분과 성과 계층이 온통 뒤섞여 있는 그런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각주:7]


이런 식으로 모두에게 열려 있고, 음식 속에서 다 뒤섞일 수 있는 식사란 무엇일까? ‘사회의 수직적인 차별과 수평적인 분열의 축소판 지도가 되는 식탁을 초월해서 함께 나누는 식사’[각주:8]인데, 곧 이런 식사를 통해 예수가 얻은 별명 곧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경멸적인 호칭은 ‘고대 지중해 지역의 문화와 사회에서 기본적인 가치가 되는 명예와 수치와 근본적으로 충돌’[각주:9]하는 것이다. 매우 섬세하게 구분해야 한다. 예수는 단순히 사회의 관습에 도전하는 멋드러진 히피(hippie)가 아니었다. 그는 명예를 모르고 수치도 모르는 성격 이상자에 가까웠다.[각주:10] 그 옛날 하비루처럼 어떤 집단에도 속하지 못하고 어떤 언어도 소유하지 못한 차가운 눈빛을 받는 그야말로 ‘마음이 가난한 자’였다.


단단한 혈통이 아닌 '느슨하고 서먹서먹한 사이'로서 이스라엘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21)


우리는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처음 형성되었던 시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된 예수까지 유일한 참 하나님, 야훼와 그의 ’선택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각주:11] 어찌 되었든 야훼 하나님이 애초부터 꿈꾸고 불러 모았던 이스라엘은 과연 지금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야훼 하나님이라면 지금 중동에 2차 세계대전 이후 승전국들의 폭력으로 억지로 국가를 수립해버리고 거대한 장벽을 치고 자리 잡은 이스라엘을 어떻게 받아들이실까? 나아가서 지금의 기독교인들, 그리고 지금 한국의 개신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 선민의식을 어떻게 보실까? 일요일이면 예배당에 가고, 밥을 먹을 때 기도를 드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비(非)신앙인들을 수렁에서 끌어올려주어야 할 사람으로 여기고, 또한 일부 근본주의자들[각주:12]이 주장하는 것처럼 동성애자와 동성애를 배격하고 이단 사설들을 모두 궤멸시키는 사명을 하나님의 목표인 것처럼 말하는 이 ‘경계들’ 말이다.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를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다.’ 이 말은 곧 내가 하나님을 굳건하게 믿고 있기 때문에 나는 결코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 우리는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까? 내가 내일이 되어서, 1년 후에도, 그리고 죽는 그 순간까지 이 믿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고 꿋꿋이 지켜낼 수 있을 것이라 어떻게 호언장담할 수 있는가? 믿음이 내 ‘의지’와 관련되어 너무나 흔들리기 쉬운 근거이기에 그것을 혈통이라는 아주 견고한 근거, 곧 내 몸 속에서 빼낼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는 그 피 속에 근거를 심었던 이들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가? 선택된 백성이란 곧 ‘순수 혈통’이란 믿음을 가졌던 유대인들, 아랍인들, 그리고 나치주의 에 물든 독일인들, 그리고 수많은 근본주의자들이 가진 폭력성을 우리는 이미 역사 속에서 많이 목도해 왔다.[각주:13]


또한 이렇게 확고하지 않은 이런 저런 근거(경계)가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에서 어떻게 작용할까? 우리는 이 ‘선택된 사람들’이라는 정체성, 선민의식을 하나의 특권의식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다른 정체성보다 우위에 있다는 자부심의 근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른 사람을 직접적으로 괴롭히지는 않더라도 매우 교묘한 방식으로, 어떤 때는 누군가를 ‘구원’해 주어야 할 사명을 받은 자로, 어떤 때는 근엄하게 ‘훈계’해야 할 특명을 받은 자로 이해하고 있는건 아닌가?

<영화 '네 멋대로 해라' 중 한 장면>[각주:14]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래 ‘선택받지 못한 사람’이었던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주 어딘가로부터 떨어져 나와 외롭게 별이 되어 이 세상에 홀로 던져졌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우리가 그 사실을 잊고 “나는 ‘원래’부터 태어나보니 금수저, 부자였네, ‘원래’부터 빼박상남자였네, ‘원래’ 어디 출신이었네”와 같은 말을 지껄인다면 그 수준의 저열함을 들키는 일이다. 그대의 ‘원래’라고 일컬을 수 있는 것은 지금 그대가 말하고 있는 말 ‘이전의 상태’이며, 말로부터 유유히 빠져나온 가능성으로서 말 ‘그 이후의 상태’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런 ‘정체성’의 환상과 마법에서 늘 어떻게 하면 빠져나올 수 있을지 그 긴장의 연속선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십계명 중 2계명의 ‘우상숭배 금지령’의 정신이기도 하다. 내가 안주할 수 있는 나의 스펙, 나의 출신, 나의 가족마저도 우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연극 언어 중에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고안해 낸 ‘소격효과(疏隔效果 : Verfremdungseffekt)’라는 말이 있다. 풀이하면 "낯설게 하기”라는 뜻으로도 쓸 수 있는 이 말은 ‘연극이나 영화 따위에서, 의도적으로 관객과 작품 사이에 거리를 두는 기법’을 의미한다.[각주:15] 이것을 우리의 이야기에 동일하게 적용해 볼 수 있다. 내가 행동하고 따르고 있는 것들, 내가 나도 알지 못하게 움직이고 있는 규칙들을 늘 낯설게 보고, 거기서 빠져나와 세계와 부조화에 신경증적으로 시달릴 수 있는 사람만이 역설적으로 타인을 끌어안을 수 있는 자이며, 늘 실패하는 사랑으로서’만’ 존재하여 가고자 하는 곳에 끝끝내 닿지 못해 부둥켜 안으려 애쓰다가 실패하지만 또 다가가는 야훼 하나님의 사랑을 닮은 사람이 바로 하나님에게 선택받은 자이다.


<덧붙여>


마지막으로, 내가 최근 읽은 책 중 자신의 정체성과 비정체성 사이의 간극을 고뇌하면서 쓴 한 작가의 글을 옮기고자 마치려고 한다. 그는 자칭 ‘세속적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이 무엇인지/무엇이어야 하는지, 세계대전에서 수백만 이상이 희생된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이 현대에 자기 자신과 인류 모두에게 어떤 의미여야 하는지 수없이 많이 고민한 흔적을 우리에게 드러내 주고 있다.


나는 항상 지나간 고난을 탄식하는 데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일을 피해 왔고 과거의 불행을 보상받겠다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다. 난 여기에, 그리고 지금 넘쳐나는 불의를 찾아서 뿌리를 뽑거나 최소한 줄이기라도 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에 속한다. 박해받고 희생당했던 과거는, 오늘날 박해받는 사람들과 내일 희생자가 될 사람들에게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난 역사 속에서 사냥꾼과 사냥감, 강한 자와 약한 자의 역할이 매우 자주 뒤섞이며, 그러한 하나의 장으로서 역사가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알고 있다.[각주:16]


ⓒ 웹진 <제3시대>



  1. 존 도미닉 크로산, ⌈예수⌋, 한국기독교연구소, 50쪽. [본문으로]
  2. 위의 책, 66쪽. [본문으로]
  3. 위의 책, 96~101쪽의 내용을 도표로 요약한 것이다. [본문으로]
  4. 내(저자인 슐로모 산드)가 국민으로 있는 나라는 인구 조사에서 나의 민족 정체성을 ‘유대인’으로 정의하며, 그 자신을 ‘유대 민족’의 국가로 부른다. 즉, 이 나라와 그 법을 만든 이들은 이 국가를 국민 전체가 가진 민주적 주권의 제도적 표현이 아니라, 유대교를 믿는지에 상관없는 ‘전 세계 유대인들’의 집합적 자산으로 간주한다. 이스라엘 국가는 나를 유대인으로 규정한다. 내가 유대 언어를 쓰고, 유대 노래를 흥얼거리고, 유대 음식을 먹고, 유대 책을 쓰거나 어떤 유대적인 활동을 통해 나 자신을 표현하기 때문이 아니다. 내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이며, 외할머니는 외증조할머니 덕분에(또는 때문에) 유대인이다. 그렇게 세대의 고리가 태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슐로모 산드, ⌈유대인, 불쾌한 진실⌋, 훗, 14~15쪽) [본문으로]
  5.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무리 가운데서 한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그에게 말하였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은 참으로 복이 있습니다!”그러나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다.”(눅 11:26~27)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나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이 자기 어머니와 맞서게 하고, 며느리가 자기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이다.(마 10:34~36) [본문으로]
  6. 21 그 종이 돌아와서, 이것을 그대로 자기 주인에게 일렀다. 그러자 집주인이 노하여 종더러 말하기를 '어서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을 이리로 데려 오너라' 하였다. 22 그렇게 한 뒤에 종이 말하였다. '주인님, 분부대로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자리가 남아 있습니다.’ 23 주인이 종에게 말하였다. '큰길과 산울타리로 나가서,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워라.(눅 14:21~23) [본문으로]
  7. 위의 책, 114~115쪽. [본문으로]
  8. 위의 책, 116쪽. [본문으로]
  9. 위의 책, 116쪽. [본문으로]
  10. 위의 책, 117쪽. [본문으로]
  11. 물론, 예수 이후 바울과 사도들로 이어지는 초대 교회 내의 이방인들과 유대인들간의 이야기는 우리가 말한 이스라엘과 선민의식에 대해 나눌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이긴 하지만, 그 이야기는 예수의 이야기와 많은 부분 유사성이 있기 때문에 생략하기로 한다. [본문으로]
  12.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은 자기에게 타락한 현대사회의 치료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들은 자기가 치료하는 척하는 그 질병의 증상이다.(John Gray, Straw dogs, London Granta, 2003, p. 18. 김영민, ⌈당신들의 기독교⌋, 110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13. https://www.youtube.com/watch?v=VbYqP5j1SVM ⌈The DNA Journey⌋,이 영상을 참고해 보라. [본문으로]
  14. (출처 :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ombom74&logNo=220014597824&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kr%2F) [본문으로]
  15. https://www.youtube.com/watch?v=LUocsdy-8TE 장 뤽 고다르가 보여준 여러 가지 파격적인 영화 편집 기법들은 당시 누벨 바그 영화들이 보여준 ‘소격효과’를 전형적으로 잘 나타내주고 있다. [본문으로]
  16. 슐로모 산드, ⌈유대인, 불쾌한 진실⌋, 훗, 60~61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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