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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눈 : 포스트모더니즘과 주체 9] 지젝(2) : 헤겔 같은 라캉, 라캉 같은 헤겔(허석헌)

비평의 눈

by 제3시대 2018. 3. 14.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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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과 주체 9]


지젝 (2) : 헤겔 같은 라캉, 라캉 같은 헤겔



허석헌

(미국 샌프란시스코 GTU 박사과정, 조직신학)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라클라우가 지젝의 저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9)'의 서문에서 지적하듯이, 지젝은 라캉을 데카르트, 칸트, 헤겔로 내려오는 관념론적 전통속에서 재해석한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갖는다. 앞선 글에서 말했던 것처럼(참고: 지젝(1) : 까다로운 주체), 지젝은 헤겔을 동일성 원리의 형이상학적 관념론을 고착시킨 철학자로 비판하는 탈근대주의 철학자들의 입장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헤겔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석은 헤겔의 부정성에 대한 개념이 항상 개념의 자기 동일성으로 회귀함으로서 타자를 대상화하고, 차이를 말소한다는 점에서 지배논리를 정당화하는 형이상학 체계로 받아들여왔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 담론 안에서 다름과 차이의 정치를 위해 헤겔은 항상 넘어서야 할 고지였다. 그러나, 지젝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교과서적인 해석처럼 헤겔의 절대지식은 초월적인 주체가 이성과 일치되는 상태가 아니라, 절대지식의 불가능성에 대한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젝은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라는 헤겔의 변증법을 '부정의 부정은 절대적인 부정'이라는 해석으로 뒤집어서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 다시 말해, '정'과 '반'의 모순, 주체와 객체의 모순은 '합'에서 일치되는 것이 아니라, 합이라는 단계에서 은폐되었던 모순의 실체가 확실하게 입증되고 드러나게 된다. 정신이 자기와의 관계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현실화되지 않은 가능태로 남아 있지만, 타자라는 대립과의 만남을 통해 정신은 비로소 현실화된다. 타자와의 모순적인 공존이야말로 헤겔이 말하는 정신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지젝은 헤겔이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부정적인 것에 머무르기'라는 말을 사용한 의도는 여기에 있다고 보았다. 정신 안에 내재하는 모순은 궁극적으로 통일을 지향하지만, 그 통일은 모순이 지양되고 해소된 상태의 통일이 아니라 모순 없는 화해의 순간은 불가능하며, 분열은 지속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통일이다. 다시 말해, 모순이 제거된 절대지식은 환상일 뿐이며 그 환상을 인정하고 포기하는 것에서 진정한 주체가 출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지젝이 해석한 헤겔의 절대지식이란 '모순'의 지속되는 상태를 말하고, 나아가 부정적인 것, 모순, 분열이 없는 절대지식은 '존재하지 않음', 또는 '불가능성'을 가리킬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지젝은 헤겔주의는 칸트의 부정이 아니라, 오히려 근본화의 작업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칸트가 주체를 초월적 통각과 물자체의 두 영역 사이에 있는 존재로 본 것 처럼, 헤겔이 말하는 주체는 현실의 감각세계 너머에 있는 물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성에 대한 경험에서 나온다. 헤겔은 칸트적 주체의 비판자가 아니라, 오히려 칸트가 애매한 것으로 남겨놓은 물자체를 근원적으로 폐기함으로서 칸트가 미완성으로 남겨놓은 인식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해결한 것이라고본다. 그러나 헤겔에 대한 이러한 과감하고 도전적인 해석이 지젝 자신의 창안물은 아니다. 라캉의 정신분석학적인 도움이 없었다면 헤겔에 대한 지젝의 급진적인 해석은 주목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지젝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전통적 헤겔 해석을 뒤집고 헤겔의 숨겨진 본연의 모습을 복구하려 한다.


이데올로기와 판타지


라캉에 의해서 상징계는 기표들로 채워져 있으며 이 기표들에 의해 의미의 그물망을 형성한다. 이 상징적인 질서가 우리가 말하는 현실세계이다. 그러나 현실의 상징질서 안에서 항상 실재계로부터 미끄러지고 부유하며 떠다니는 기표들은 하나의 주인기표 (혹은 대타자)를 만남으로 비로소 의미의 관계를 구성한다. 여기서 실재계는 기표의 관계망이 형성한 의미화의 영역에 포섭되지 않고 저항하는 상징질서의 잔여물이다. 실재계는 상징으로서 언어와 기표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고, 상징적 현실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위협하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실재계가 없다면 상징계의 존재 또한 불가능하다. 상징계는 실재계에 대한 불가능성이 상징계 자신의 존재 가능의 조건이 되는 모순을 내포한다. 상징계 안에는 실재계의 파편들이 어지럽게 떠다니고 있지만, 그 자체가 실재와 동일시 되지 못한다. 여기서 주체는 소외를 경험한다. 상징계 안에서 편입될 때에 주체는 존재의 안정을 보상으로 얻을 수 있지만, 대신에 자기의 본래적 존재를 상실해야 하는 대가를 치뤄야 한다. 결국 의미의 사슬망에서 벗어나 기표와 동일시되지 못하는 자신의 존재로부터 소외와 결핍을 느낀다. 상징질서 안에서 경험한 결핍과 소외로부터 주체를 지탱해주는 장치가 바로 판타지이다. 판타지는 실재계에 이르지 못하는 주체가 느끼는 결핍을 상상으로 대리할 수 있는 대상을 욕망하는 데서 발생한다.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다고 믿는 오인된 욕망의 대상(Object a)과의 관계가 판타지이다.


지젝이 라캉의 눈으로 헤겔을 뒤집어 보려는 정치적 의도는 분명하다. 탈이데올로기시대를 선언하며 이데올로기를 시대에 뒤떨어진 개념으로 다루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조류에 도전하려는 것에 있다. 지젝은 탈이데올로기의 시대에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비가시적인 메커니즘에 대해 파헤쳐야할 당위성에 대해 주장한다. 이데올로기 개념 자체를 부정하거나 폐기하는 것은 순진하거나 섣부르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담론은 오히려 부활되어야 한다. 이데올로기는 주체를 호명하는 방식으로 지배하고 통제한다는 현실을 전면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현실 사회주의를 이데올로기적 억압으로 간주하고, 민주주의적 자본주의 질서(자유로운 의사표현과 자유방임적 시장활동)로 가는 변화를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주장 자체가 이데올로기의 효과라고 보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건재하다는 점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여기까지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분석과 일치한다. 그러나, 지젝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의 논의가 오늘날의 이데올로기의 현상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지는 못하다고 보았다. 지젝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의 분석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점이 있다고 보았는데, 자발적인 주체는 대타자의 호명에 의해 구성된다는 주장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신분석학의 분석을 통과함으로서 가능하다고 보았다. 물론,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분석 역시 '호명'과 같은 개념에서 보는 바와 같이 프로이드와 라캉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지젝이 보기에 알튀세르는 대타자의 호명이라는 국가의 억압적 장치의 메커니즘에 의해 주체가 구성된다는 주장에 멈춰서고 말았다. 지젝은 알튀세르의 주장대로, 대타자의 호명을 통해 주체는 형성된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한발 더 나아가 대타자의 호명으로 인해 호명된 존재란 무엇인지를 묻는다. 호명은 표면적으로는 대타자의 목소리로 들리지만, 사실 이 호명은 타자의 욕망을 통해 자신의 욕망이 내는 주체의 목소리이다. 그러므로 호명된 주체란 대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주체의 환영, 착각으로 형성된 것에 불과하다. 주체의 호명이라는 과정은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오인'된 호출에서 이뤄진다. 대타자의 호명으로 형성된 주체는 자신의 욕망이 타자의 욕망이었음을 발견하고 욕망하는 타자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결핍된 존재임을 알게 된다. 마침내, 주체는 대타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출현하지 않으며, 대타자의 결핍은 주체를 이데올로기로부터 '분리'시킨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분석이 놓치고 있는 점은 이것이다. 여기서 이데올로기의 억압적인 작동방식은 균열될 수밖에 없다. 진정한 주체의 출현은 이데올로기라는 대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실재가 아니라, 실재를 대신하는 대타자이다. 대타자는 언제나 상징화되어 있다. 그러나 상징으로 실재를 대체할 수 없다. 상징과 기표는 언제나 실재와의 메울 수 없는 차이로 인해, 실재로부터 분리된다. 성공할 수 없는 상징계의 완전성을 성공으로 위장하기 위해 이데올로기는 환상으로서 출몰하며 상징계와 실재계의 간격을 채우기를 시도한다. 여기서, 지젝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분석은 상징과 기표의 체계로 질서화된 사회를 이상적 유토피아로 위장하는 시도들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것으로 한 발 다가선다. 이데올로기는 제거된 것 처럼 보이지만, 판타지와 유령과 같이 현실 사회의 상징질서를 완전한 시스템인 것 처럼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이데올로기는 존재하지 않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실재로부터 추방된 이데올로기는 상징계가 의심받을 때마다 상징질서의 균열을 막아주는 구원자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는 실재의 세계에 속한 본질이 아니므로 상징화의 전략은 성공할 수 없다.


라캉과 헤겔의 접점은 이 지점에서 발견된다. 지젝이 해석한 헤겔은, 절대지식의 부재이다. 절대지식의 자리는 공백으로 남아 있을 뿐이며, 불가능성을 암시할 뿐이다.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대타자는 없다'이다. 대타자를 존재하는 것처럼 판타지에 빠져들게 하는 것이 이데올로기이다. 그러나 헤겔이 진정한 주체는 모순과 부정성을 끝까지 긍정하는 것에 있다고 보았듯이, 지젝의 라캉적 주체는 이데올로기는 실재가 아닌 유령과 같이 비어있는 가상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자면, 판타지와 유령이라는 말이 실체없는 허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판타지와 유령은 실체없는 대상이 아니라, 현실사회의 상징질서를 지탱하는 힘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부정과 배제의 대상이 아니라, 진지하게 대면해야하고 정면으로 맞서야 하는 실체이다.


환상을 가로지르기


지젝은 이데올로기가 현실에서 배제된 것 처럼 보이지만, 상징질서의 틈새를 메우기 위해 언제든지 소환되어 유령과 같이 출몰한다는 점에서 사회의 현실을 분석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고 가로질러 통과해야 하는 문제로 받아들인다. 환상을 가로질러 틈새의 균열을 발견하는 가운데 주체는 진정한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그러면, 환상을 가로지르는 행위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 물음에서 지젝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분석은 윤리적, 정치적 차원으로 넘어간다. 라캉에게서 환상을 가로지르고, 틈새에 균열을 가하는 행위는 욕망에서 충동으로 넘어가는 과정이고, 상징계에서 실재의 차원을 추구하는 행위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젝은 환상을 가로지르는 행위는 상징적 질서의 메워질 수 없는 간극에 맞서 대타자의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정치적이고 윤리적 사건이다. 결코 주체는 실재의 불가능한 영역과 직접적으로 대면할 수 없지만, 상징질서에 대한 저항의 행위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실재에 다가선다. 그 실재란, 자신의 비존재의 공백을 수용하는 것이다. 주체의 결핍을 경험함으로서 주체는 자신의 상징적 정체성을 지탱해 왔던 환상의 구도에서 벗어나게 된다. 환상을 가로지르는 행위를 통해 이데올로기를 벗어나 주체의 결핍을 경험하고 상징적 질서를 폐기시킬 때 이데올로기로서의 대타자는 극복될 수 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욕망에서 충동으로 넘어가는 윤리적 행위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젝은 환상을 가로지르는 행위의 모델을 라캉이 '정신 분석의 윤리'에서 분석한 안티고네와 소포클레스의 주인공들에게서 발견한다(안티고네의 분석은 이미 잘 알려져 있으므로 상세한 내용은 생략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가 사회적 선이라면 라캉의 정신분석적 윤리는 충동에 있다. 이 충동은 법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것이고 최종적으로는 죽음을 욕망하는 것이다. 라캉은 명령을 거스르고 자신의 오빠인 폴리니케스의 시신을 매장함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끝까지 밀어붙여 마침내 죽음을 선택한 안티고네의 행동을 윤리적 행위로 묘사한다. 크레온은 상징계의 법적 질서망을 의미하고 안티고네는 이 법망을 넘어서는 욕망의 캐릭터로 설정되었다. 안티고네는 죽음의 행위를 통해 비극의 윤리를 실행한다. 이 죽음의 충동을 실현하는 것은 곧 상징계의 의미화의 사슬망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주체는 죽음에 대한 충동이 실현되는 시점에서 상징질서로부터의 해방을 얻게 된다. 죽음의 충동에 의한 비극적 자유야말로 바로 환상을 가로지르는 윤리적 행위이다. 주체는 바로 이처럼 상징질서가 제거된 비워진 공백 그 자체이며 이 공백을 지향하는 행위야말로 진정한 전복적이며 저항적인 주체의 실현이다. 따라서, 주체는 주체를 공백으로 비우는 부정적인 행위이며, 죽음을 감수하면서 까지 주체의 결핍을 실현하는 과정이다. 주체는 이데올로기안에서 자신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실하고 이데올로기 구조의 틈새를 파고들어 상징적 죽음을 감수하면서 까지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이와 같은 분석을 통해 지젝은 실재에 대한 주체의 결핍이라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이론을 통해 주체의 새 모델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죽음충동에 의한 주체화의 과정은 헤겔의 '부정성에 머물기'의 개념에서 보여주는 주체의 이해와 거의 일치한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정신의 생명은 죽음을 감내하며 그 안에서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한 죽음의 활동에 있다고 말한다. 현실의 안정된 세계안에 머물고 이를 고수하려고 할 때에 정신은 정신의 생명을 잃게 된다. 그러나 정신이 생명을 드러내고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안정되고 친숙한 세계와 결별하는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헤겔이 '부정적인 것에 머물기'를 말할 때에 이는 죽음을 감수하고 부정적인 상태를 수용하고 외면하지 않으며 끝까지 대면하는 것을 말한다. 라캉과 마찬가지로 헤겔에게도 죽음은 고립된 정신이 현실안에서 진정한 자아와 마주하게 되는 주체화의 과정인 셈이다.


이처럼 지젝은 독일의 관념론적 전통을 폐기하지 않고, 주체의 담론이 형성되는 이론적 토대로 사용한다. 특별히 헤겔에 대한 그의 독특한 해석이 라캉의 정신분석과 공명을 이룸으로서 오늘의 이데올로기의 현실안에서 저항의 주체에 말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기대를 자극한다. 다음에는 지젝의 라캉식 정신분석학적 주체이해가 맑스주의와 어떻게 만나는지, 그 안에서 발견되는 주체의 변혁적 의미는 무엇인지를 다룰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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